지옥에서의 짧은 체류
스티븐 L. 펙 지음, 김항나 옮김 / 자음과모음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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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에도 출구가 있다면 희망을 품어도 좋을까. 자신이 살아온 모든 순간이 정확하게 기록된 단 한 권의 책을 찾으면 이곳을 떠날 수 있다. 그 책은 분명 존재한다. 어딘가에 있다는 사실도 확실하다. 다만 서가의 규모가 인간의 상상력을 아득하게 넘어선다는 것이 문제다. 스티븐 L. 펙의 『지옥에서의 짧은 체류』가 만든 지옥에는 불길도 형벌을 집행하는 고문관도 필요하지 않다. 원하는 음식과 잠자리를 누릴 수 있고 죽음조차 영속적인 끝이 되지 못한다. 그곳에서 인간을 괴롭히는 것은 오히려 희망이다.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졌다면 체념이라도 할 수 있겠지만, 언젠가는 발견할 수 있다는 약속은 끊임없이 다음 책을 펼치게 한다. 출구가 존재한다는 사실과 그곳에 도달할 수 있다는 가능성 사이에서 희망은 서서히 형벌의 모습을 얻는다.

이 기묘한 지옥에서 소런이 찾아야 하는 책은 그의 삶을 완벽하게 기록하고 있다. 살아온 모든 순간과 행동이 한 글자의 오류도 없이 적혀 있다면 그것을 ‘나’라고 부를 수 있을까. 우리는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일을 기억하지는 못한다. 같은 기억조차 시간이 흐르면 다른 의미를 얻고, 과거의 선택을 바라보는 시선 역시 지금의 자신에 따라 달라진다. 폴 리쾨르가 정체성을 하나의 완결된 실체보다 삶을 이야기하고 다시 해석하는 과정과 연결했던 것처럼, 한 사람의 생은 사건의 총합만으로는 완전히 설명되기 어렵다. 그렇다면 소런이 찾는 한 권은 그를 가장 정확하게 증명하는 기록인 동시에, 더는 고쳐 쓸 수 없는 과거의 총체이기도 하다. 자신을 완벽하게 설명하는 문장을 갖고 싶다는 욕망에는 기묘한 모순이 따른다. 완벽하게 기록되는 순간 삶은 더 이상 해석될 여지를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구원을 위해 자신의 삶을 찾아야 한다는 설정은 어느새 자신을 안다는 것이 무엇인지 묻는 문제로 옮겨간다.

도서관의 서가에는 인간이 평생 읽어도 소진할 수 없는 언어의 가능성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 이곳에는 정해진 문자와 기호로 만들어질 수 있는 모든 조합의 책이 놓여 있다. 위대한 문학도, 누군가의 진실한 생애도, 그것과 거의 똑같지만 한 글자만 다른 거짓도 함께 존재한다. 대부분의 페이지를 채우는 것은 읽을 수조차 없는 문자의 나열이다. 모든 정보가 존재하는 세계에서 진실은 오히려 희귀해지고, 의미는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보르헤스의 「바벨의 도서관」을 떠올리게 하는 이 공간에서 저자는 앎의 풍요를 극단까지 밀어붙여 그 반대편을 보여준다. 책을 사랑하던 소런에게 형벌은 가장 좋아했던 것의 모습을 빌려 찾아온다. 그가 평생 가까이했던 책으로 서가를 가득 채우는 것으로 충분하다. 읽고 싶은 책을 마음껏 고를 수 있다는 기쁨은 사라지고, 무수한 책을 펼쳐야만 하는 의무가 독서의 자리를 차지한다. 인간은 그럼에도 문장을 읽고, 우연한 배열에서 자신과 닮은 무언가를 발견하며, 의미 없는 것들 사이에 질서를 만든다. 모든 것이 기록된 도서관조차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진실인지 대신 결정해주지는 못한다. 결국 의미는 세계에 얼마나 많은 정보가 존재하는가보다 그 가운데 무엇을 자신의 것으로 읽어내는가와 깊이 연결된다.

책을 찾는 이야기는 점차 사람을 찾고 관계를 지속하는 일의 의미까지 헤아리게 한다. 소런은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긴 시간을 지나며 여러 사람을 만나고 관계를 맺는다. 우리가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감각에는 언제나 시간이 포함되어 있다. 함께 늙어가는 일, 기억을 쌓는 일, 다음 계절을 약속하는 일처럼 사랑은 유한한 생의 방향 위에서 형태를 얻는다. 그러나 소런이 살아가는 세계에는 함께 늙어갈 육체도, 마지막을 예감하며 서로의 손을 잡을 시간도 주어지지 않는다. 영원에 가까운 시간이 허락되었는데도 사랑하는 사람과 나눌 수 있는 순간은 한없이 불확실하다. 오래도록 함께했다는 사실이 앞으로도 함께할 수 있다는 보증이 되어주지 않는 곳에서, 사랑은 지속된 시간만큼이나 닿을 수 없는 거리의 무게를 갖는다. 타인의 존재를 온전히 이해하고 자신의 세계 안에 담아두려는 욕망은 언제나 그 사람의 고유한 삶과 마주한다. 이 거대한 서가는 타인에게 도달한다는 일이 본래 품고 있던 불가능성을 공간과 시간의 크기로 펼쳐 보인다.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탐색과 타인에게 향하는 움직임은 그렇게 서로의 모습을 조금씩 닮아간다.

무한처럼 펼쳐지는 서가 앞에서는 인간이 사용해온 시간과 크기의 단위도 차츰 힘을 잃는다. 저자는 이 공간을 막연히 ‘아주 크다’고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않고 문자 수와 페이지, 가능한 조합을 계산하며 수학의 영역으로 끌어들인다. 숫자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는 뜻과 다르다. 어떤 수는 분명 유한하면서도 인간의 생애와 감각 안에서는 무한과 구별되지 않는다. 칸트는 인간의 상상력이 감당하기 어려운 압도적인 크기를 마주할 때 발생하는 경험을 ‘수학적 숭고’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다. 우리는 거대한 대상을 부분적으로 헤아릴 수 있지만, 그것을 하나의 완전한 모습으로 떠올리는 데에는 한계를 느낀다. 이때 감각과 상상력의 한계를 자각하는 동시에, 그 크기를 사유할 수 있는 이성의 능력까지 의식하게 된다. 『지옥에서의 짧은 체류』는 그 압도적인 크기 속에 인간을 실제로 집어넣는다. 그 순간 백 년과 천 년은 더 이상 장구한 세월을 뜻하지 못하고, 우리가 영원처럼 사용하던 표현들은 하나씩 인간적인 척도를 잃는다. 무한 자체보다 두려운 것은 어쩌면 끝을 상정할 수 있으면서도 그 끝까지의 거리를 살아 있는 존재의 감각으로는 헤아릴 수 없다는 사실인지도 모른다.

소런은 자신이 평생 믿었던 세계의 질서가 죽음과 동시에 뒤집히는 경험을 한다. 새로운 진리가 제시된 뒤에도 그것이 정말 마지막 진실이라고 확신할 근거는 없다. 신앙이 무너진 자리에 또 다른 확신을 세우기보다, 알 수 없는 상태를 견디며 계속 한 권의 책을 향해 움직여야 한다. 세계가 자신의 의미를 친절하게 설명해주지 않을 때에도 인간은 관계를 맺고, 이야기를 만들고, 무의미한 문자에서 읽을 수 있는 한 줄을 찾아낸다. 지옥의 거대한 도서관은 인간이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그 작은 존재가 의미를 만드는 일을 좀처럼 멈추지 않는다는 사실도 함께 보여준다.

그 모든 시간을 지나고도 제목은 여전히 『지옥에서의 짧은 체류』다. ‘짧다’는 말이 이토록 섬뜩하게 들리는 경우도 드물다. 인간의 생애를 몇 번이고 포개고도 남을 시간을 짧다고 부를 수 있는 것은 그 너머에 영원이 놓여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영원을 살아본 적이 없고, 영원을 기준으로 현재의 고통을 측정할 수도 없다. 언젠가 도달할 구원이 약속되어 있다는 사실이 지금 견디고 있는 시간을 얼마나 가볍게 만들 수 있는지도 확신하기 어렵다. 그래서 이 제목은 거대한 시간의 농담처럼 읽히면서도 인간이 살아가는 방식에 아주 가까이 닿아 있다. 한 권의 책을 찾기 위해 펼쳐야 하는 수많은 페이지에는 소런이 살아온 시간보다 훨씬 긴 세월이 쌓여간다. 자신의 삶을 증명할 기록을 찾아 헤매는 동안에도 그는 새로운 기억을 만들고, 타인의 이야기를 듣고, 자신이 알던 세계의 바깥을 경험한다. 삶을 온전히 담아낼 한 권의 책을 찾아야 하는 운명 속에서 그의 생은 이미 그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지나 계속 쓰이고 있다. 그리하여 가장 완벽한 기록을 향한 탐색은 역설적으로 기록될 수 없는 삶의 현재를 드러낸다. 한 사람의 생애를 설명하는 모든 문장이 마련되어 있다 해도, 그 문장을 읽는 순간의 인간은 이미 또 다른 시간을 살아가고 있다.

✏️도서출판 자음과모음으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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