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것들
매트 존슨 지음, 조호근 옮김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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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트 존슨의 『보이지 않는 것들』은 우주를 배경으로 하지만, 정작 이 소설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낯선 행성이 아니라 인간 사회의 오래된 침묵이다. 돔 도시 ‘뉴로어노크’는 미래 문명처럼 보이지만, 그 내부에는 지구의 탐욕과 계급, 차별과 권력이 조금도 변형되지 않은 채 복제되어 있다. 사람들은 여전히 서로를 배제하고,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어떤 진실을 외면한다. 이 소설은 외계의 괴물을 보여주지 않는다. 우주 끝에 도착하고서도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서 단 한 걸음도 벗어나지 못했다는 사실이야말로 가장 음산한 공포로 남는다. 시대와 공간이 바뀌어도 사람들은 다시 권력을 만들고, 침묵 속에서 안정을 거래한다. 인간 사회는 낯선 세계를 개척해온 것이 아니라, 자기 안의 오래된 질서를 다른 장소에 이식해온 것인지도 모른다.

침묵은 단순한 체념이 아니라 하나의 사회적 규칙이 된다.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외면되었다는 고백에 가깝다. 인간은 진실을 몰라서 침묵하는 것이 아니라, 때때로 지금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침묵한다. 그리고 어떤 사회는 정의보다 그런 침묵 위에서 훨씬 안정적으로 굴러간다. 흥미로운 점은 그 침묵이 점차 자연스러운 생활 방식으로 굳어진다는 데 있다. 반복적으로 외면된 진실은 어느 순간부터 더 이상 질문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모두가 알고 있지만 아무도 입 밖에 꺼내지 않는 것, 바로 그 공백이 공동체의 질서를 떠받치는 기둥이 된다. 서로가 서로의 침묵을 확인해주는 것만으로도 사회는 충분히 유지된다. 어떤 침묵은 총칼보다 오래 살아남는다. 그런 침묵은 눈에 잘 띄지 않기에 더욱 견고하고, 오래 지속되기에 더욱 위험하다.

인간은 언제나 불편한 진실보다 견딜 수 있는 거짓을 사랑해왔다. 진실을 직면하는 순간 지금의 삶이 무너질 수도 있다는 것을 알기에, 차라리 입을 다문 채 익숙한 하루를 반복한다. 자유보다 안락을, 질문보다 질서를 선택한다. 인간은 폭력적인 억압에만 길들여지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적당한 안전과 익숙한 일상 속에서 스스로를 가두기도 한다. 그리고 가장 견고한 감옥은 종종 스스로 납득해버린 세계 안에서 완성된다. 그래서 이 소설을 읽다 보면 통제라는 것이 반드시 공포를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실감하게 된다. 사람들은 안정된 일상을 얻는 대신, 점차 자기 안의 의심을 포기한다. 그렇게 길들여진 삶은 언젠가 스스로를 보호하기보다 체제를 보호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 순간 인간은 억압받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질서를 유지하는 공범이 된다.

이 작품은 이러한 공포를 무겁고 비극적으로만 밀어붙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저자는 블랙코미디 특유의 냉소와 유머를 통해 인간 사회의 우스꽝스러움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낸다. 우스운데 웃을 수만은 없는 기분. 그 웃음에는 이상하리만큼 현실적인 질감이 묻어 있다. 사람들은 언제나 부조리를 비웃으면서도 동시에 그 안에 적응하며 살아간다. 불합리하다고 말하면서도 익숙해지고, 잘못되었다고 느끼면서도 결국 순응한다. 그런 모습은 너무 현실적이어서 오히려 서늘하다. 그래서 이 소설의 블랙코미디는 긴장을 완화시키는 장치가 아니라, 인간이라는 존재를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확대경처럼 기능한다. 웃음이 터지는 순간마다 문득 깨닫게 된다. 지금 웃음을 자아내는 대상이 결국 우리 자신의 초상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은 과연 무엇을 보지 않기로 결심하며 살아가는가. 어떤 사회는 진실을 외면하는 대가로 유지된다. 누군가는 침묵하고, 누군가는 모른 척하며, 누군가는 그것을 언급하는 사람을 불온한 존재로 취급한다. 그렇게 오래 지속된 침묵은 마침내 질서가 되고 문화가 되며, 결국 하나의 세계를 완성한다. 가장 두려운 것은 정체를 알 수 없는 그것들이 아니다. 진짜 공포는 이미 모두가 그것의 존재를 알고 있으면서도, 지금의 평온을 잃지 않기 위해 침묵하기로 합의해버린 인간들에게 있다. 지금 살아가는 세계에도 모두가 알고 있지만 아무도 말하지 않는 무언가가 있진 않을까. 지금 누리고 있는 평온 역시 누군가의 침묵 위에 세워진 것은 아닐까. 침묵은 언제나 비겁함의 형태로만 남지 않는다. 때로는 성숙함과 현실 감각이라는 이름을 달고 사회 속에 스며든다. 그래서 더 쉽게 의심받지 않고, 더 오래 지속된다.

진실보다 안락한 침묵이 더 오래 살아남는 사회를 낯설게 바라보고 싶은 사람, 조지 오웰식 디스토피아와 커트 보니것 특유의 블랙코미디를 사랑하는 SF 독자, 인간은 왜 스스로 체제에 순응하게 되는지 그 심리를 들여다보고 싶은 사람에게 권한다. 이 책은 단순히 기괴한 우주 도시를 보여주는 소설이 아니다. 모두가 알고 있으면서도 끝내 입 밖에 내지 않는 것들, 평온한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 조용히 묻어두었던 감각들을 서서히 끌어올리는 이야기이다. 익숙한 세계를 의심해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설명되지 않는 불안이 왜 오래 마음속에 남아 있었는지 이 책을 통해 조금은 이해하게 될지도 모른다. 어떤 침묵은 무지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유지되는 침묵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매트 존슨은 웃음과 불안을 뒤섞은 방식으로 독자에게 체험하게 만든다.

✏️도서출판 현대문학으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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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리시 페이션트 ㅣ 을유세계문학전집 149
마이클 온다치 지음, 김영주 옮김 / 을유문화사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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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남기는 것은 폐허만이 아니다. 무너진 건물과 검게 그을린 도시보다 오래 살아남는 것은, 인간이 인간을 바라보는 방식의 붕괴이다. 『잉글리시 페이션트』는 바로 그 잔해 위에 놓인 소설이다. 이름도 얼굴도 거의 사라진 한 남자, 죽어 가는 환자 곁에 남기로 한 젊은 간호사, 고문 끝에 손가락을 잃은 도둑, 폭탄을 해체하며 살아남은 인도인 병사. 이들은 모두 전쟁의 끝자락에 떠밀려 빌라 산 지롤라모에 도착하지만, 그곳은 안식처라기보다 세계로부터 잠시 유예된 공간에 가깝다. 국적과 군번, 승리와 패배 같은 거대한 구분들이 희미해진 폐허 속에서 사람들은 비로소 서로의 상처를 바라본다. 마치 인간이라는 존재가 원래부터 이름보다 상처로 먼저 연결되어 있었던 것처럼.

이 작품이 잔혹한 이유는, 전쟁이 인간을 죽이기 전에 먼저 인간을 ‘국가’로 바꾸어버린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인간이 경계를 지우고 싶어 할수록 세계는 더 집요하게 국경선을 그어 넣는다. 이름과 출신, 언어와 피부색은 어느 순간 한 사람의 삶 전체를 판결하는 기준이 된다. 누군가를 사랑했던 기억보다 어느 편에 속해 있는지가 먼저 질문되고, 인간의 고통조차 어느 편에 속해 있는가에 따라 다른 의미로 분류된다. 소설 속 인물들이 유난히 외롭고 부유하는 존재처럼 느껴지는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이들은 어느 한 공동체 안에 완전히 귀속되지 못한 채 전쟁이 만들어 놓은 경계 사이를 떠돌아다닌다. 특히 사막이라는 공간은 인상적이다. 형태 없이 끊임없이 움직이는 모래의 세계는 원래 누구의 것도 될 수 없는 장소처럼 보이지만, 인간은 결국 그 위에도 지도를 만들고 선을 긋고 이름을 붙인다. 자유를 꿈꾸던 공간마저 군사 전략과 침략의 경로로 바뀌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면, 인간 문명이은 결국 세계를 이해하기보다 먼저 소유하려 했던 역사처럼 느껴진다.

기억은 이들을 완전히 무너뜨리지 않기 위해 남아 있는 마지막 감각이지만, 동시에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만드는 상처이기도 하다. 그래서 인물들은 끊임없이 과거를 회상하면서도 어디에도 도착하지 못한다. 전쟁은 종전되었지만, 인간의 내면에는 아직 철수하지 못한 전장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폐허가 된 빌라에 스며드는 것은 단지 바람과 빗소리만이 아니다. 끝내 사라지지 못한 기억의 그림자들 또한 그 공간을 배회한다. 이 작품 속 기억들은 시간순으로 정리되지 않는다. 어떤 기억은 냄새로 되살아나고, 어떤 기억은 피부의 감각이나 낡은 풍경의 이미지 속에서 갑작스럽게 떠오른다. 오래된 상처가 계절마다 다시 욱신거리듯, 인간 역시 특정한 장소와 감각 앞에서 과거로 되돌아간다. 그래서 인물들은 현재에 머물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과거의 시간 속을 살아간다. 인간은 결국 기억으로 만들어진 존재이며, 그 기억은 삶을 지탱하는 힘인 동시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흉터가 된다.

그럼에도 온다치는 절망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무너진 세계 속에서 인간이 서로를 얼마나 조심스럽게 어루만질 수 있는지를 바라본다. 이들은 서로를 구원하지도, 상처를 완전히 회복시키지도 못한다. 다만 가장 깊은 절망 속에서 잠시 서로의 체온을 나눌 뿐이다. 인간이 타인에게 해줄 수 있는 사랑은 어쩌면 그 정도인지도 모른다. 누군가를 완전히 살려내는 일이 아니라, 무너져 내리지 않도록 곁에서 잠시 붙들어주는 일. 누군가의 몸을 씻기고, 떨리는 손을 붙잡고, 곁에 머물러주는 사소한 행위들은 전쟁이 무너뜨린 인간성을 다시 이어 붙이려는 몸짓처럼 느껴진다. 거대한 역사와 이념은 끊임없이 인간을 분류하고 밀어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을 다시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 아주 작고 연약한 다정함이다.

사막이 한때 바다였듯 인간 또한 끊임없이 변해온 존재라면, 우리가 끝까지 붙들고 살아가는 정체성이라는 것은 과연 얼마나 진실에 가까운 것일까. 이름과 국적은 쉽게 인간을 설명하지만, 인간 자체를 증명하지는 못한다. 오히려 이 소설 속에서 마지막까지 남는 것은 국적도 신념도 아닌, 누군가를 사랑했던 기억과 상처의 온기이다. 폐허 속에서조차 누군가는 서로를 돌보고 기억하며 곁에 머문다. 그리고 우리는 바로 그런 순간들 덕분에 완전히 무너지지 않고 살아남아왔다. 인간은 결국 자신이 속한 국가보다, 누군가의 기억 속에 남겨 둔 체온으로 오래 살아남는다.

이 이야기는 어떤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읽는 책이라기보다, 세계가 인간에게 남긴 감각의 잔흔을 따라가는 기록에 가깝다. 이름으로 설명되지 않는 사람들, 어디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한 채 경계 위에 머무는 존재들, 그리고 기억과 상처 사이에서 쉽게 어느 쪽으로도 기울지 못하는 마음을 오래 품어온 이들에게 이 소설은 이상하게도 낯설지 않게 다가온다. 인간이 자신을 증명하려 할수록 점점 더 많은 것들이 지워진다는 사실을 이미 어딘가에서 감각해본 사람이라면, 이 책은 하나의 설명이 아니라 오래 남는 기억으로 읽힐 것이다. 인간이라는 것은 어쩌면 하나의 이름이 아니라, 타인의 기억 속에 남아 식지 않는 온도의 흔적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어디에 속해 있는가, 그리고 무엇을 사랑했는가.

✏️도서출판 을유문화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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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개의 북을 두드리며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 은행나무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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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은 대개 지나치게 매끄러운 얼굴로 인간 앞에 나타난다. 사람들은 그것을 질서나 상식이라 부르고, 오래 합의된 세계의 형태라고 믿는다. 그러나 올가 토카르추크의 소설들은 그 단단한 표면 위에 조용히 금을 낸다. 금은 거창한 파열음과 함께 벌어지지 않는다. 아주 사소한 장면 하나, 설명되지 않는 기시감 하나, 문득 어긋나는 타인의 표정 하나가 세계 전체의 구조를 흔들어 놓는다. 분명 현실 안에서 벌어진 일이지만, 어느 순간부터 현실은 더 이상 스스로를 증명하지 못한다. 삶의 좌표축이 아주 조금 어긋나는 순간, 독자는 비로소 자신이 얼마나 허약한 확신 위에서 살아왔는지를 깨닫게 된다. 인간은 세계를 직접 살아간다고 믿지만, 실은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번역된 현실 안에서만 움직이고 있었음을.

토카르추크는 세계를 하나의 완성된 체계처럼 다루지 않는다. 그녀의 문장 속에서 현실은 언제나 유동적이며, 인간의 인식은 끊임없이 표류한다. 그래서 이 작품집을 읽고 있으면 인간이 세계를 이해한다기보다, 세계를 해석 가능한 이야기의 형태로 끊임없이 편집하며 살아간다는 사실이 선명해진다. 기억은 수많은 왜곡을 거친 뒤에야 언어가 되고, 언어는 다시 누군가의 내면에서 또 다른 현실로 번역된다. 결국 인간은 세계 자체를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에 대한 서사를 경험하며 살아가는 셈이다. 현실은 설명되는 것이 아니라 읽히는 것이다. 이때 허구는 진실의 반대편으로 밀려나지 않는다. 오히려 허구야말로 인간이 현실을 견디기 위해 만들어낸 가장 오래된 생존 방식처럼 보인다. 세계가 완전히 이해될 수 없는 방식으로 존재한다면, 인간은 그 공백을 서사로 메우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삶은 지나치게 복잡하고 불가해하기에, 인간은 이야기라는 구조를 세워 그 안에 자신을 겨우 머물게 한다.

이 소설집이 흥미로운 이유는 소설이라는 형식 자체를 다시 사유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토카르추크의 단편들은 전통적인 의미의 기승전결에 쉽게 복종하지 않는다. 어떤 이야기는 꿈속에서 흘러나온 잔상처럼 끝나고, 어떤 이야기는 현실과 환상이 맞물린 채 독자를 방치한다. 그러나 바로 그 불완전성과 비정형성이야말로 이 작가의 핵심적인 미학처럼 느껴진다. 세계가 애초에 완결된 문장으로 존재하지 않는데, 어째서 소설만이 명확한 결론을 가져야 하는가. 토카르추크는 서사를 통해 인간 중심의 견고한 질서를 해체한다. 인간은 세계의 주인이 아니라 거대한 미지 속을 더듬으며 지나가는 작은 통로에 불과하다. 세계는 인간의 이해와 무관하게 스스로의 방향으로 팽창하고, 그녀의 작품 속 공간들은 살아 있는 생물처럼 꿈틀거린다. 인물들 또한 자기 자신조차 완전히 설명하지 못한 채 흔들린다. 읽는 내내 느껴지는 묘한 현기증은 바로 여기서 비롯된다. 세계가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바라보던 인간의 시선 자체가 흔들리고 있었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열아홉 개의 단편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흩어져 있는 듯 보인다. 누군가는 낯선 장소에서 자기 존재의 윤곽을 잃어버리고, 누군가는 타인의 시선 속에서 기괴한 대상으로 소비되며, 또 다른 누군가는 현실과 환상이 뒤섞인 공간 속에서 자신이 딛고 선 바닥을 의심한다. 하지만 그 서로 다른 이야기들 아래에서는 동일한 북소리가 반복해서 울린다. 인간은 끝내 세계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더욱 이야기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 인간은 의미가 사라진 세계보다, 아무 의미도 연결되지 않는 침묵을 더 두려워한다. 그래서 서사는 단순한 오락이나 정보의 전달로 머무르지 않는다. 이야기가 완전한 진실을 주지는 못해도, 인간을 완전히 붕괴되지 않게 붙들어 두는 최소한의 박동은 되어준다. 완전한 진실에 도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끝내 도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견디기 위해 인간은 계속 이야기를 만든다. 어쩌면 문학은 현실을 설명하는 장르가 아니라, 현실 앞에서 길을 잃지 않기 위해 인류가 오랫동안 두드려 온 오래된 북소리에 가까운 것인지도 모른다.

결국 『여러 개의 북을 두드리며』를 덮고 난 뒤 오래 남는 것은 특정한 사건이나 결말이 아니다. 이해했다고 믿는 순간 다시 미끄러져 나가는 세계의 얼굴, 그리고 그 불확실성 앞에서도 마지막까지 이야기를 멈추지 않는 인간의 모습이다. 현실이 흔들릴수록 이야기는 더 강하게 필요해지고, 이야기가 필요할수록 현실은 더 깊게 의심된다. 이 끝없는 순환 속에서 인간은 완전한 진실 대신 살아갈 수 있는 리듬을 선택한다. 세계를 명확히 이해할 수 있다는 믿음은 오래전에 무너졌지만, 그럼에도 인간은 계속 의미를 엮고 문장을 만들며 살아간다. 여러 개의 북이 서로 다른 박자로 울리듯, 세계와 서사 또한 하나로 정렬되지 않은 채 계속해서 이어진다. 토카르추크는 바로 그 불협과 흔들림 속에서 인간 존재의 가장 깊은 곳을 응시한다. 그리고 그 북소리는 세계 바깥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 끊임없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인간 내부에서 울리고 있다.

이 책은 단순히 기이한 단편들을 엮어놓은 소설집이 아니다. 현실이 얼마나 불완전한 해석 위에 세워져 있는지를 집요하게 드러내는 문학에 가깝다. 그래서 현실을 하나의 단단한 진실로 믿을 수 없어진 사람, 인간이 결국 서사라는 구조 안에서 세계를 견디며 살아간다고 느끼는 사람이라면 이 북소리를 오래 듣게 될 것이다. 특히 보르헤스나 브루노 슐츠, 카프카처럼 현실의 문법 자체를 뒤틀어버리는 미로형 문학을 사랑하는 독자라면, 토카르추크의 문장 안에서 낯설고도 황홀한 현기증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녀의 소설을 읽고 나면 인간이 붙들고 있던 현실의 문법이 조금씩 낯설어진다. 익숙했던 세계는 더 이상 하나의 안정된 문장으로 읽히지 않고, 문장과 문장 사이에 숨겨져 있던 공백들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낸다. 그럼에도 인간은 끝내 이야기르 포기하지 못한다. 완전한 진실에 도달할 수 있어서가 아니라, 끝내 도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견디기 위해 서사를 만들어왔기 때문이다. 토카르추크는 바로 그 오래된 인간의 운명을 누구보다 아름답고도 위태로운 방식으로 두드려낸다.

✏️도서출판 은행나무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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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심인
정윈만 지음, 김소희 옮김 / 빈페이지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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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은 오래도록 빛의 도시로 기억되어 왔다. 네온사인과 쇼윈도, 밤바다를 가르는 페리와 빽빽한 고층 빌딩들. 그러나 정윈만의 『유심인』은 그 익숙한 홍콩의 표면을 한 겹 걷어낸다. 도시란 결국 가장 밝은 곳이 아니라, 가장 오래 견뎌낸 사람들의 기억 위에서 완성되는 풍경인지도 모른다. 이 소설집 안에서 홍콩은 더 이상 관광 엽서 속 도시가 아니다. 재개발 지역의 먼지와 공사장의 열기, 차찬텡의 눅눅한 아침 냄새, 병든 고양이를 돌보는 사람의 손끝, 만두를 빚으며 하루를 견디는 생활의 감각들이 이 도시의 진짜 얼굴처럼 떠오른다. 화려함은 늘 도시의 전면을 차지하지만, 인간의 삶은 언제나 그 이면에서 지속된다. 그리고 이 책은 바로 그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오래 바라본다.

홍콩에게 장국영은 어떤 존재인가. 모든 단편의 제목은 장국영의 노래와 영화에서 비롯되었다. 그것은 단순한 오마주에 머물지 않는다. 장국영은 이 책 안에서 직접 등장하지 않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더욱 선명하게 존재한다. 누군가의 이름이 시대 전체의 감정으로 남는 경우가 있다. 장국영은 홍콩에게 그런 존재일 것이다. 가장 찬란했던 시절의 빛과, 끝내 잡지 못한 상실감을 동시에 품고 있는 이름. 그래서 정윈만은 그의 작품명을 빌려와 평범한 사람들의 삶 위에 살며시 덧씌운다. 공사장에서 하루를 버티는 사람, 돌봄에 잠식된 사람, 사랑받지 못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장국영의 제목 아래 놓이는 순간 묘한 울림을 얻는다. 누구도 전설적인 존재가 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평범한 삶의 존엄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듯이.

이 소설집에서 인간의 비참함은 결코 자극적으로 소비되지 않는다. 정윈만의 인물들은 대부분 무언가를 잃은 사람들이다. 사랑도, 미래도, 건강도, 혹은 자기 자신조차 온전히 지켜내지 못한 채 살아간다. 그럼에도 소설은 그들을 함부로 절망 속에 밀어 넣지 않는다. 오히려 끝끝내 살아남는 몸의 움직임을 응시한다. 물 위를 맴도는 잠자리처럼, 추락하지 않기 위해 가까스로 날개를 움직이는 존재들. 그 모습은 어쩌면 오늘의 홍콩과도 닮아 있다. 시대는 변했고, 많은 것들이 사라졌으며, 더 이상 예전의 홍콩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들이 반복된다. 하지만 정말 사라진 것은 무엇일까. 소리가 멎은 뒤에도 잔향은 오래 남는다. 이 책은 바로 그 잔향의 형태로 존재하는 사람들과 도시를 기록하고 있었다.

그래서 『유심인』을 읽는 경험은 단순히 홍콩 문학 한 권을 읽는 일이 아니라, 이미 지나가버린 시간의 그림자를 천천히 더듬는 일에 가깝다. 꿈결에 홍콩을 다녀온 것만 같다. 차찬텡에서 허겁지겁 아침을 먹고, 비파나무 아래에 떨어진 열매를 주워 들고, 기숙사에서 함께 만두를 빚고, 고양이를 쓰다듬으며 통조림 하나를 나눠 먹는 장면들. 거창한 사건은 아니지만 이상하리만큼 선명하다. 아마 인간의 기억이란 결국 이런 사소한 감각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문학은 종종 낯선 타인의 삶을 통해 인간은 결국 서로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만든다. ㅎ오콩의 외로움은 한국의 외로움과 크게 다르지 않고, 그들이 견디는 상실 또한 우리의 상실과 이어져 있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결국 그렇게 타인의 체온을 잠시 빌려오는 일인지도 모른다.

장국영의 노래 제목들은 이 소설집 안에서 하나의 주문처럼 기능한다. 사라져가는 도시의 기억을 다시 불러오고, 아직 떠나지 못한 사람들의 마음을 붙든다. 그래서 『유심인』은 홍콩의 정치적 격변을 직접적으로 외치는 소설이라기보다, 그 시간을 지나온 사람들이 끝내 잃지 않으려 했던 존엄에 관한 기록처럼 느껴진다. 살아남는다는 것은 때로 너무 초라하고 고단한 일이지만, 그럼에도 인간은 누군가를 돌보고 밥을 먹고 사랑을 기억하며 다시 하루를 건넌다. 그리고 정윈만은 그 조용한 생존의 순간들 위에 장국영이라는 이름을 남겨둔다. 마치 한 시대의 빛이 완전히 꺼진 것은 아니라고, 아직 어딘가에서 희미하게 흔들리고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한 시대의 빛이 사라진 자리에서 인간은 무엇으로 자신을 증명하는지 궁금한 사람, 영원할 것 같았던 도시와 청춘도 결국은 잔향의 형태로만 남는다는 사실을 견디는 사람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거대한 성공이나 찬란한 서사보다 누군가 하루를 살아내는 모습에서 더 깊은 존엄을 발견하는 사람, 그리고 문학이란 결국 타인의 삶을 빌려 인간이라는 존재의 외로움을 이해해가는 일이라 믿는 사람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정윈만은 화려했던 홍콩의 그림자 아래에서 살아가는 평범한 인간들을 통해, 사라짐 이후에도 끝내 지워지지 않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장국영의 이름이 오래된 노래처럼 흐르는 이 소설집 속에서, 독자는 어느 순간 낯선 도시를 읽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 안에 남아 있던 어떤 잔향을 다시 만나게 된다. 그 잔향을 따라가는 순간, 독자는 어느새 차찬텡의 눅눅한 아침 공기 속에, 비파나무 아래로 떨어진 열매 곁에, 고요히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한 번도 살아본 적 없는 도시인데도 이상하리만큼 그리운 마음으로.

✏️도서출판 빈페이지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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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모든 두려움
알렉스 핀레이 지음, 배지은 옮김 / 현대문학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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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얼마나 쉽게 하나의 이야기를 믿어버리는가. 사람들은 언제나 복잡한 진실보다 이해하기 쉬운 악인을 원한다. 누군가는 범인이어야 하고, 분노는 향할 곳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세상은 너무도 빠르게 한 사람의 인생 위에 ‘살인자’라는 단어를 덧씌운다. 그 순간부터 진실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이미 믿고 싶어 하는 이야기이다. 이 소설은 바로 그 지점에서 섬뜩해진다. 진실은 조작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사회 전체가 스스로 조작된 진실을 원하기도 하니까. 인간은 진실보다 자신의 불안을 가장 손쉽게 설명해주는 서사를 선택한다. 이해할 수 없는 혼란 앞에서 끝내 하나의 얼굴을 골라 죄를 덧씌우고, 그렇게 탄생한 희생양 위에서 공동체는 안도한다. 마치 악이 특정한 개인 안에만 존재한다는 착각 속에서 스스로의 불안을 봉합하듯이.

작품을 읽는 내내 떠올랐던 것은 현실 속 수많은 누명 사건들이었다. 민주화 운동 시절의 조작 사건들, 그리고 한국 사회를 뒤흔들었던 여러 오판 사건들까지. 누명은 단순히 죄를 뒤집어쓰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한 인간의 이름과 시간, 존재 전체가 타인의 서사 속으로 강제로 편입되는 일에 가깝다. 인간은 극한의 공포 속에서 자신의 기억마저 의심하게 된다. 끝없이 몰아붙여지는 질문과 압박 앞에서, 사람은 진실보다 이 고통이 끝나기를 먼저 바라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한 인간의 삶은 너무 쉽게 사건의 일부로 축소된다. 더 끔찍한 사실은 그렇게 만들어진 낙인이 시간이 흘러도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설령 진실이 밝혀진다 해도 잃어버린 젊음과 명예, 가족과 시간은 결코 되돌아오지 않는다. 어떤 보상도 한 인간이 감옥 속에서 흘려보낸 세월을 완전히 돌려주지는 못한다.

이 작품이 더욱 음산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비극이 거대한 악마 한 사람에게서 비롯되지 않기 때문이다. 우발적인 충동, 순간의 공포, 그리고 자신의 삶을 지키고 싶다는 비겁한 욕망이 차례로 얽히며 비극은 점점 거대한 거짓으로 자라난다. 누구도 처음부터 완벽한 괴물은 아니었지만, 모두가 조금씩 침묵했고 외면했다. 그리고 바로 그 침묵들은 한 사람, 한 가족의 인생 전체를 집어삼킨다. 폭력은 언제나 피를 흘리는 형태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폭력은 침묵의 얼굴을 하고 있고, 어떤 폭력은 방관의 형태로 살아남는다. 많은 비극은 적극적인 악의보다 모른 척하고 싶은 마음에서 시작된다. 진실을 외면하는 일은 생각보다 쉽고, 반복된 외면은 하나의 질서가 된다. 그래서 이 소설의 공포는 살인 그 자체보다도, 인간이 자기 안위를 위해 얼마나 자연스럽게 진실을 외면할 수 있는 존재인가에 있다.

우리는 흔히 기억을 진실의 저장소처럼 여기지만, 사실 기억은 감정에 의해 끊임없이 변형되는 감각이다. 인간은 사실을 있는 그대로 기억하지 않는다. 두려웠던 방식으로 기억한다. 공포 속에서 바라본 장면은 시간이 흐를수록 하나의 확신이 되고, 불완전한 인상은 어느새 절대적인 믿음처럼 굳어진다. 인간은 자신이 본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믿고 싶은 방향으로 본 것을 재구성한다. 그래서 기억은 기록이 아니라 해석에 가깝고, 확신은 그저 감정이 오래 응고된 결과물일 수도 있다. 결국 인간은 진실을 목격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장 두려워했던 방향으로 세계를 해석하며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우리는 자기 내부의 불안을 세계 위에 투사하며 살아가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마지막 모든 두려움』은 빠르게 읽히는 스릴러이면서도, 동시에 인간 사회가 어떻게 한 사람을 ‘범인’으로 만들어내는지를 응시하는 작품이다. 사람들은 왜 진실보다 이해하기 쉬운 이야기를 더 사랑하는가. 그리고 그 이야기가 한 인간의 삶 전체를 파괴했을 때, 우리는 과연 얼마나 오랫동안 침묵의 공범으로 남게 되는가. 진실은 때때로 너무 늦게 도착한다. 무너진 삶과 사라진 시간, 이미 돌이킬 수 없어진 관계들은 결백만으로 복원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인간은 진실을 향해 걸어간다. 거짓 위에서는 결국 자기 자신조차 온전히 바라볼 수 없기 때문이다. 알렉스 핀레이가 우리에게 남기는 공포는 살인도 거짓도 아니다. 인간은 언제나 진실보다 믿고 싶은 이야기를 먼저 선택해왔다는 사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가장 늦게 발견하게 되는 마지막 두려움이다.

진실보다 그럴듯한 이야기가 더 빨리 소비되는 세계에 지쳐 있는 사람이라면, 이 소설은 꽤 깊은 곳까지 파고들 것이다. 누군가를 단죄하는 일이 얼마나 손쉽게 공동체의 안도가 되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한 인간의 삶이 얼마나 간단히 ‘사건’으로 축소될 수 있는지를 지켜보고 싶은 사람에게도 추천한다. 또한 인간의 기억과 확신이 얼마나 불완전한 감각 위에 세워져 있는지 탐닉해보고 싶은 독자라면 더욱 흥미롭게 읽힐 것이다. 무엇보다 『마지막 모든 두려움』은 단순히 범인을 추적하는 스릴러가 아니다. 이 작품은 인간이 왜 끝내 진실보다 믿고 싶은 이야기를 먼저 선택하는 존재인지, 그 불편한 질문을 가장 속도감 있는 방식으로 해부해낸다. 빠르게 읽히는데 이상하게 마음은 점점 서늘해진다. 마치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난 뒤에야, 자신이 얼마나 쉽게 하나의 이야기를 믿어왔는지를 뒤늦게 깨닫게 되는 것처럼. 이것이 데뷔작이라는 사실은 놀라운 전율로 남는다. 알렉스 핀레이라는 이름은 마지막 페이지를 덮는 순간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음 작품을 기다리는 시간 속에서 오히려 더 선명해진다. 이 책의 독자라면 기꺼이 다음 세계 앞에서 기다리게 될 것이다.

✏️도서출판 현대문학으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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