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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개의 북을 두드리며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 은행나무 / 2026년 4월
평점 :
현실은 대개 지나치게 매끄러운 얼굴로 인간 앞에 나타난다. 사람들은 그것을 질서나 상식이라 부르고, 오래 합의된 세계의 형태라고 믿는다. 그러나 올가 토카르추크의 소설들은 그 단단한 표면 위에 조용히 금을 낸다. 금은 거창한 파열음과 함께 벌어지지 않는다. 아주 사소한 장면 하나, 설명되지 않는 기시감 하나, 문득 어긋나는 타인의 표정 하나가 세계 전체의 구조를 흔들어 놓는다. 분명 현실 안에서 벌어진 일이지만, 어느 순간부터 현실은 더 이상 스스로를 증명하지 못한다. 삶의 좌표축이 아주 조금 어긋나는 순간, 독자는 비로소 자신이 얼마나 허약한 확신 위에서 살아왔는지를 깨닫게 된다. 인간은 세계를 직접 살아간다고 믿지만, 실은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번역된 현실 안에서만 움직이고 있었음을.
토카르추크는 세계를 하나의 완성된 체계처럼 다루지 않는다. 그녀의 문장 속에서 현실은 언제나 유동적이며, 인간의 인식은 끊임없이 표류한다. 그래서 이 작품집을 읽고 있으면 인간이 세계를 이해한다기보다, 세계를 해석 가능한 이야기의 형태로 끊임없이 편집하며 살아간다는 사실이 선명해진다. 기억은 수많은 왜곡을 거친 뒤에야 언어가 되고, 언어는 다시 누군가의 내면에서 또 다른 현실로 번역된다. 결국 인간은 세계 자체를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에 대한 서사를 경험하며 살아가는 셈이다. 현실은 설명되는 것이 아니라 읽히는 것이다. 이때 허구는 진실의 반대편으로 밀려나지 않는다. 오히려 허구야말로 인간이 현실을 견디기 위해 만들어낸 가장 오래된 생존 방식처럼 보인다. 세계가 완전히 이해될 수 없는 방식으로 존재한다면, 인간은 그 공백을 서사로 메우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삶은 지나치게 복잡하고 불가해하기에, 인간은 이야기라는 구조를 세워 그 안에 자신을 겨우 머물게 한다.
이 소설집이 흥미로운 이유는 소설이라는 형식 자체를 다시 사유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토카르추크의 단편들은 전통적인 의미의 기승전결에 쉽게 복종하지 않는다. 어떤 이야기는 꿈속에서 흘러나온 잔상처럼 끝나고, 어떤 이야기는 현실과 환상이 맞물린 채 독자를 방치한다. 그러나 바로 그 불완전성과 비정형성이야말로 이 작가의 핵심적인 미학처럼 느껴진다. 세계가 애초에 완결된 문장으로 존재하지 않는데, 어째서 소설만이 명확한 결론을 가져야 하는가. 토카르추크는 서사를 통해 인간 중심의 견고한 질서를 해체한다. 인간은 세계의 주인이 아니라 거대한 미지 속을 더듬으며 지나가는 작은 통로에 불과하다. 세계는 인간의 이해와 무관하게 스스로의 방향으로 팽창하고, 그녀의 작품 속 공간들은 살아 있는 생물처럼 꿈틀거린다. 인물들 또한 자기 자신조차 완전히 설명하지 못한 채 흔들린다. 읽는 내내 느껴지는 묘한 현기증은 바로 여기서 비롯된다. 세계가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바라보던 인간의 시선 자체가 흔들리고 있었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열아홉 개의 단편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흩어져 있는 듯 보인다. 누군가는 낯선 장소에서 자기 존재의 윤곽을 잃어버리고, 누군가는 타인의 시선 속에서 기괴한 대상으로 소비되며, 또 다른 누군가는 현실과 환상이 뒤섞인 공간 속에서 자신이 딛고 선 바닥을 의심한다. 하지만 그 서로 다른 이야기들 아래에서는 동일한 북소리가 반복해서 울린다. 인간은 끝내 세계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더욱 이야기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 인간은 의미가 사라진 세계보다, 아무 의미도 연결되지 않는 침묵을 더 두려워한다. 그래서 서사는 단순한 오락이나 정보의 전달로 머무르지 않는다. 이야기가 완전한 진실을 주지는 못해도, 인간을 완전히 붕괴되지 않게 붙들어 두는 최소한의 박동은 되어준다. 완전한 진실에 도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끝내 도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견디기 위해 인간은 계속 이야기를 만든다. 어쩌면 문학은 현실을 설명하는 장르가 아니라, 현실 앞에서 길을 잃지 않기 위해 인류가 오랫동안 두드려 온 오래된 북소리에 가까운 것인지도 모른다.
결국 『여러 개의 북을 두드리며』를 덮고 난 뒤 오래 남는 것은 특정한 사건이나 결말이 아니다. 이해했다고 믿는 순간 다시 미끄러져 나가는 세계의 얼굴, 그리고 그 불확실성 앞에서도 마지막까지 이야기를 멈추지 않는 인간의 모습이다. 현실이 흔들릴수록 이야기는 더 강하게 필요해지고, 이야기가 필요할수록 현실은 더 깊게 의심된다. 이 끝없는 순환 속에서 인간은 완전한 진실 대신 살아갈 수 있는 리듬을 선택한다. 세계를 명확히 이해할 수 있다는 믿음은 오래전에 무너졌지만, 그럼에도 인간은 계속 의미를 엮고 문장을 만들며 살아간다. 여러 개의 북이 서로 다른 박자로 울리듯, 세계와 서사 또한 하나로 정렬되지 않은 채 계속해서 이어진다. 토카르추크는 바로 그 불협과 흔들림 속에서 인간 존재의 가장 깊은 곳을 응시한다. 그리고 그 북소리는 세계 바깥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 끊임없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인간 내부에서 울리고 있다.
이 책은 단순히 기이한 단편들을 엮어놓은 소설집이 아니다. 현실이 얼마나 불완전한 해석 위에 세워져 있는지를 집요하게 드러내는 문학에 가깝다. 그래서 현실을 하나의 단단한 진실로 믿을 수 없어진 사람, 인간이 결국 서사라는 구조 안에서 세계를 견디며 살아간다고 느끼는 사람이라면 이 북소리를 오래 듣게 될 것이다. 특히 보르헤스나 브루노 슐츠, 카프카처럼 현실의 문법 자체를 뒤틀어버리는 미로형 문학을 사랑하는 독자라면, 토카르추크의 문장 안에서 낯설고도 황홀한 현기증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녀의 소설을 읽고 나면 인간이 붙들고 있던 현실의 문법이 조금씩 낯설어진다. 익숙했던 세계는 더 이상 하나의 안정된 문장으로 읽히지 않고, 문장과 문장 사이에 숨겨져 있던 공백들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낸다. 그럼에도 인간은 끝내 이야기르 포기하지 못한다. 완전한 진실에 도달할 수 있어서가 아니라, 끝내 도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견디기 위해 서사를 만들어왔기 때문이다. 토카르추크는 바로 그 오래된 인간의 운명을 누구보다 아름답고도 위태로운 방식으로 두드려낸다.
✏️도서출판 은행나무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