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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심인
정윈만 지음, 김소희 옮김 / 빈페이지 / 2026년 5월
평점 :
홍콩은 오래도록 빛의 도시로 기억되어 왔다. 네온사인과 쇼윈도, 밤바다를 가르는 페리와 빽빽한 고층 빌딩들. 그러나 정윈만의 『유심인』은 그 익숙한 홍콩의 표면을 한 겹 걷어낸다. 도시란 결국 가장 밝은 곳이 아니라, 가장 오래 견뎌낸 사람들의 기억 위에서 완성되는 풍경인지도 모른다. 이 소설집 안에서 홍콩은 더 이상 관광 엽서 속 도시가 아니다. 재개발 지역의 먼지와 공사장의 열기, 차찬텡의 눅눅한 아침 냄새, 병든 고양이를 돌보는 사람의 손끝, 만두를 빚으며 하루를 견디는 생활의 감각들이 이 도시의 진짜 얼굴처럼 떠오른다. 화려함은 늘 도시의 전면을 차지하지만, 인간의 삶은 언제나 그 이면에서 지속된다. 그리고 이 책은 바로 그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오래 바라본다.
홍콩에게 장국영은 어떤 존재인가. 모든 단편의 제목은 장국영의 노래와 영화에서 비롯되었다. 그것은 단순한 오마주에 머물지 않는다. 장국영은 이 책 안에서 직접 등장하지 않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더욱 선명하게 존재한다. 누군가의 이름이 시대 전체의 감정으로 남는 경우가 있다. 장국영은 홍콩에게 그런 존재일 것이다. 가장 찬란했던 시절의 빛과, 끝내 잡지 못한 상실감을 동시에 품고 있는 이름. 그래서 정윈만은 그의 작품명을 빌려와 평범한 사람들의 삶 위에 살며시 덧씌운다. 공사장에서 하루를 버티는 사람, 돌봄에 잠식된 사람, 사랑받지 못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장국영의 제목 아래 놓이는 순간 묘한 울림을 얻는다. 누구도 전설적인 존재가 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평범한 삶의 존엄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듯이.
이 소설집에서 인간의 비참함은 결코 자극적으로 소비되지 않는다. 정윈만의 인물들은 대부분 무언가를 잃은 사람들이다. 사랑도, 미래도, 건강도, 혹은 자기 자신조차 온전히 지켜내지 못한 채 살아간다. 그럼에도 소설은 그들을 함부로 절망 속에 밀어 넣지 않는다. 오히려 끝끝내 살아남는 몸의 움직임을 응시한다. 물 위를 맴도는 잠자리처럼, 추락하지 않기 위해 가까스로 날개를 움직이는 존재들. 그 모습은 어쩌면 오늘의 홍콩과도 닮아 있다. 시대는 변했고, 많은 것들이 사라졌으며, 더 이상 예전의 홍콩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들이 반복된다. 하지만 정말 사라진 것은 무엇일까. 소리가 멎은 뒤에도 잔향은 오래 남는다. 이 책은 바로 그 잔향의 형태로 존재하는 사람들과 도시를 기록하고 있었다.
그래서 『유심인』을 읽는 경험은 단순히 홍콩 문학 한 권을 읽는 일이 아니라, 이미 지나가버린 시간의 그림자를 천천히 더듬는 일에 가깝다. 꿈결에 홍콩을 다녀온 것만 같다. 차찬텡에서 허겁지겁 아침을 먹고, 비파나무 아래에 떨어진 열매를 주워 들고, 기숙사에서 함께 만두를 빚고, 고양이를 쓰다듬으며 통조림 하나를 나눠 먹는 장면들. 거창한 사건은 아니지만 이상하리만큼 선명하다. 아마 인간의 기억이란 결국 이런 사소한 감각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문학은 종종 낯선 타인의 삶을 통해 인간은 결국 서로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만든다. ㅎ오콩의 외로움은 한국의 외로움과 크게 다르지 않고, 그들이 견디는 상실 또한 우리의 상실과 이어져 있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결국 그렇게 타인의 체온을 잠시 빌려오는 일인지도 모른다.
장국영의 노래 제목들은 이 소설집 안에서 하나의 주문처럼 기능한다. 사라져가는 도시의 기억을 다시 불러오고, 아직 떠나지 못한 사람들의 마음을 붙든다. 그래서 『유심인』은 홍콩의 정치적 격변을 직접적으로 외치는 소설이라기보다, 그 시간을 지나온 사람들이 끝내 잃지 않으려 했던 존엄에 관한 기록처럼 느껴진다. 살아남는다는 것은 때로 너무 초라하고 고단한 일이지만, 그럼에도 인간은 누군가를 돌보고 밥을 먹고 사랑을 기억하며 다시 하루를 건넌다. 그리고 정윈만은 그 조용한 생존의 순간들 위에 장국영이라는 이름을 남겨둔다. 마치 한 시대의 빛이 완전히 꺼진 것은 아니라고, 아직 어딘가에서 희미하게 흔들리고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한 시대의 빛이 사라진 자리에서 인간은 무엇으로 자신을 증명하는지 궁금한 사람, 영원할 것 같았던 도시와 청춘도 결국은 잔향의 형태로만 남는다는 사실을 견디는 사람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거대한 성공이나 찬란한 서사보다 누군가 하루를 살아내는 모습에서 더 깊은 존엄을 발견하는 사람, 그리고 문학이란 결국 타인의 삶을 빌려 인간이라는 존재의 외로움을 이해해가는 일이라 믿는 사람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정윈만은 화려했던 홍콩의 그림자 아래에서 살아가는 평범한 인간들을 통해, 사라짐 이후에도 끝내 지워지지 않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장국영의 이름이 오래된 노래처럼 흐르는 이 소설집 속에서, 독자는 어느 순간 낯선 도시를 읽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 안에 남아 있던 어떤 잔향을 다시 만나게 된다. 그 잔향을 따라가는 순간, 독자는 어느새 차찬텡의 눅눅한 아침 공기 속에, 비파나무 아래로 떨어진 열매 곁에, 고요히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한 번도 살아본 적 없는 도시인데도 이상하리만큼 그리운 마음으로.
✏️도서출판 빈페이지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