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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리시 페이션트 ㅣ 을유세계문학전집 149
마이클 온다치 지음, 김영주 옮김 / 을유문화사 / 2026년 4월
평점 :
전쟁이 남기는 것은 폐허만이 아니다. 무너진 건물과 검게 그을린 도시보다 오래 살아남는 것은, 인간이 인간을 바라보는 방식의 붕괴이다. 『잉글리시 페이션트』는 바로 그 잔해 위에 놓인 소설이다. 이름도 얼굴도 거의 사라진 한 남자, 죽어 가는 환자 곁에 남기로 한 젊은 간호사, 고문 끝에 손가락을 잃은 도둑, 폭탄을 해체하며 살아남은 인도인 병사. 이들은 모두 전쟁의 끝자락에 떠밀려 빌라 산 지롤라모에 도착하지만, 그곳은 안식처라기보다 세계로부터 잠시 유예된 공간에 가깝다. 국적과 군번, 승리와 패배 같은 거대한 구분들이 희미해진 폐허 속에서 사람들은 비로소 서로의 상처를 바라본다. 마치 인간이라는 존재가 원래부터 이름보다 상처로 먼저 연결되어 있었던 것처럼.
이 작품이 잔혹한 이유는, 전쟁이 인간을 죽이기 전에 먼저 인간을 ‘국가’로 바꾸어버린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인간이 경계를 지우고 싶어 할수록 세계는 더 집요하게 국경선을 그어 넣는다. 이름과 출신, 언어와 피부색은 어느 순간 한 사람의 삶 전체를 판결하는 기준이 된다. 누군가를 사랑했던 기억보다 어느 편에 속해 있는지가 먼저 질문되고, 인간의 고통조차 어느 편에 속해 있는가에 따라 다른 의미로 분류된다. 소설 속 인물들이 유난히 외롭고 부유하는 존재처럼 느껴지는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이들은 어느 한 공동체 안에 완전히 귀속되지 못한 채 전쟁이 만들어 놓은 경계 사이를 떠돌아다닌다. 특히 사막이라는 공간은 인상적이다. 형태 없이 끊임없이 움직이는 모래의 세계는 원래 누구의 것도 될 수 없는 장소처럼 보이지만, 인간은 결국 그 위에도 지도를 만들고 선을 긋고 이름을 붙인다. 자유를 꿈꾸던 공간마저 군사 전략과 침략의 경로로 바뀌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면, 인간 문명이은 결국 세계를 이해하기보다 먼저 소유하려 했던 역사처럼 느껴진다.
기억은 이들을 완전히 무너뜨리지 않기 위해 남아 있는 마지막 감각이지만, 동시에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만드는 상처이기도 하다. 그래서 인물들은 끊임없이 과거를 회상하면서도 어디에도 도착하지 못한다. 전쟁은 종전되었지만, 인간의 내면에는 아직 철수하지 못한 전장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폐허가 된 빌라에 스며드는 것은 단지 바람과 빗소리만이 아니다. 끝내 사라지지 못한 기억의 그림자들 또한 그 공간을 배회한다. 이 작품 속 기억들은 시간순으로 정리되지 않는다. 어떤 기억은 냄새로 되살아나고, 어떤 기억은 피부의 감각이나 낡은 풍경의 이미지 속에서 갑작스럽게 떠오른다. 오래된 상처가 계절마다 다시 욱신거리듯, 인간 역시 특정한 장소와 감각 앞에서 과거로 되돌아간다. 그래서 인물들은 현재에 머물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과거의 시간 속을 살아간다. 인간은 결국 기억으로 만들어진 존재이며, 그 기억은 삶을 지탱하는 힘인 동시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흉터가 된다.
그럼에도 온다치는 절망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무너진 세계 속에서 인간이 서로를 얼마나 조심스럽게 어루만질 수 있는지를 바라본다. 이들은 서로를 구원하지도, 상처를 완전히 회복시키지도 못한다. 다만 가장 깊은 절망 속에서 잠시 서로의 체온을 나눌 뿐이다. 인간이 타인에게 해줄 수 있는 사랑은 어쩌면 그 정도인지도 모른다. 누군가를 완전히 살려내는 일이 아니라, 무너져 내리지 않도록 곁에서 잠시 붙들어주는 일. 누군가의 몸을 씻기고, 떨리는 손을 붙잡고, 곁에 머물러주는 사소한 행위들은 전쟁이 무너뜨린 인간성을 다시 이어 붙이려는 몸짓처럼 느껴진다. 거대한 역사와 이념은 끊임없이 인간을 분류하고 밀어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을 다시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 아주 작고 연약한 다정함이다.
사막이 한때 바다였듯 인간 또한 끊임없이 변해온 존재라면, 우리가 끝까지 붙들고 살아가는 정체성이라는 것은 과연 얼마나 진실에 가까운 것일까. 이름과 국적은 쉽게 인간을 설명하지만, 인간 자체를 증명하지는 못한다. 오히려 이 소설 속에서 마지막까지 남는 것은 국적도 신념도 아닌, 누군가를 사랑했던 기억과 상처의 온기이다. 폐허 속에서조차 누군가는 서로를 돌보고 기억하며 곁에 머문다. 그리고 우리는 바로 그런 순간들 덕분에 완전히 무너지지 않고 살아남아왔다. 인간은 결국 자신이 속한 국가보다, 누군가의 기억 속에 남겨 둔 체온으로 오래 살아남는다.
이 이야기는 어떤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읽는 책이라기보다, 세계가 인간에게 남긴 감각의 잔흔을 따라가는 기록에 가깝다. 이름으로 설명되지 않는 사람들, 어디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한 채 경계 위에 머무는 존재들, 그리고 기억과 상처 사이에서 쉽게 어느 쪽으로도 기울지 못하는 마음을 오래 품어온 이들에게 이 소설은 이상하게도 낯설지 않게 다가온다. 인간이 자신을 증명하려 할수록 점점 더 많은 것들이 지워진다는 사실을 이미 어딘가에서 감각해본 사람이라면, 이 책은 하나의 설명이 아니라 오래 남는 기억으로 읽힐 것이다. 인간이라는 것은 어쩌면 하나의 이름이 아니라, 타인의 기억 속에 남아 식지 않는 온도의 흔적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어디에 속해 있는가, 그리고 무엇을 사랑했는가.
✏️도서출판 을유문화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