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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로 읽는 최치원 풍류길 - 고운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생태 인문 기행
김재웅 지음 / 책과나무 / 2026년 9월
평점 :
나무에게는 인간의 연대기가 없다. 왕조의 몰락도, 한 문장가의 영광도 나이테에 이름을 새기지는 못한다. 그럼에도 오래된 숲 앞에서 우리는 지나간 사람들의 시간을 떠올린다. 누군가 나무를 심었고, 누군가는 그늘을 빌렸으며, 또 다른 누군가는 가지를 잘라내거나 쓰러진 나무의 자리에 새로운 묘목을 심었다. 숲의 역사는 서로의 이름조차 알지 못했던 사람들의 손을 거쳐 자라난다. 김재웅의 『나무로 읽는 최치원 풍류길』은 신라 말의 문인 최치원이 남긴 문장과 행적을 나무의 생태적 시간 속에 펼쳐 놓는다. 당나라에서 명성을 얻은 문장가, 신라의 개혁을 꿈꾼 지식인, 가야산으로 향한 은둔자. 역사에 기록된 몇 개의 이름 사이로 향나무와 박달나무, 느티나무와 전나무가 자라난다.
봉암사의 박달나무 앞에서 저자는 최치원과 일연, 단군신화의 시간을 한데 불러 모은다. 서로 다른 시대에 속한 인물과 이야기가 한 그루의 나무를 중심으로 겹쳐지는 순간이다. 이 장면을 역사적 사실의 복원으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박달나무는 그 모든 시간을 실제로 목격한 증인이 아니며, 나무의 수명만으로 과거의 진위를 판별할 수도 없다. 그러나 한 장소에 쌓인 기억은 반드시 물질적 연속성을 통해서만 이어지는 것도 아니다. 어떤 이름은 비석에 새겨지고, 어떤 이야기는 사람의 입을 거쳐 전해지며, 때로는 나무 한 그루가 그 기억들을 다시 호출하는 계기가 된다. 저자의 답사에는 이처럼 기록의 빈틈을 현장의 감각으로 더듬으려는 시도가 있다. 나무의 종류와 생태를 살피는 시선 곁에 오래된 문헌과 지역의 전승이 나란히 놓인다. 역사적 장소는 그곳에서 발생한 사건만큼이나, 후대의 사람들이 무엇을 기억하기로 선택했는가에 의해서도 형성된다.
함양 상림에는 인간의 의지가 숲의 형태로 이어진 시간이 있다. 최치원이 천령군 태수로 재직하며 홍수로부터 백성을 보호하고자 조성했다고 전해지는 숲이다. 물길을 다스리고 나무를 심는 일은 당장의 재난에 대응하는 행정적 실천이었겠지만, 그 결과는 한 관리의 임기를 훌쩍 넘어섰다. 상림의 나무들은 자라고 죽고 다시 뿌리를 내리며 오랜 세월 숲의 형태를 이어 왔다. 여기에는 인간의 의도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생명의 역사가 함께 축적되어 있다. 일찍이 한스 요나스가 미래 세대에 대한 책임을 논할 때 강조했던 것은 현재의 행위가 아직 존재하지 않는 삶의 조건까지 바꾸어 놓는다는 사실이었다. 상림의 조성을 오늘날의 생태윤리와 동일시할 수는 없겠지만, 나무를 심는 행위가 품은 시간의 방향은 주목할 만하다. 자신이 떠난 뒤에도 계속될 세계를 위해 지금 무엇을 마련할 것인가. 숲은 한 시대의 필요에서 태어나 다른 시대의 생명을 받아들이며 자란다. 그 과정에서 인간의 돌봄은 자신이 미처 예상하지 못한 미래에까지 도달한다.
최치원의 정치적 생애를 떠올리면 이 숲의 존재는 더욱 복잡하게 읽힌다. 당나라에서 학문적 성취를 이루고 귀국한 그는 신라의 쇠락을 목격했고, 시무 십조를 올려 개혁을 모색했다. 그러나 골품제의 질서와 정치적 혼란 속에서 그가 꿈꾼 변화는 충분히 실현되지 못했다. 문장으로 세상을 설득할 수 있다고 믿었던 지식인이 마주한 것은 문장의 능력만으로 움직일 수 없는 현실이었다. 유교적 출처관에서 벼슬에 나아감과 물러남은 개인의 처세를 넘어 도를 실천할 수 있는 조건에 관한 판단이었다. 최치원의 행적에도 그러한 고민이 배어 있는 듯하다. 정치의 중심에서 멀어진 뒤에도 그는 산천을 유람하고 학문과 문학을 이어 갔다. 세상을 향했던 정신이 자연 속에서 다른 리듬을 얻는 과정이었다. 다만 그의 은둔을 정치적 좌절의 필연적 귀결로 단정할 수는 없다. 한 인간의 선택에는 역사적 상황과 개인의 기질, 당대의 사상적 풍토가 함께 작용하기 때문이다.
청량산에서 독서와 바둑을 즐겼다는 전승, 임경대에서 마주하는 낙동강의 물길, 동백섬의 해안 풍경은 정치와 학문의 언어로만 설명할 수 없는 최치원의 삶을 펼쳐 보인다. 산천을 유람하며 시를 짓는 문인의 풍류에는 자연을 감각하는 일과 자신을 수양하는 일이 함께 놓여 있었다. 유교의 학문과 불교의 수행, 도가적 자연관이 서로 접촉했던 신라 말의 사상적 환경도 이러한 풍류를 이해하는 배경이 된다. 산을 오르고 물을 바라보는 동안 인간의 사유는 책상 위에서와 다른 방식으로 움직인다. 바람의 방향과 물의 흐름은 인간의 계획을 따르지 않으며, 나무는 자신의 생장에 필요한 시간만큼 계절을 통과한다. 그 질서를 바라보는 일에는 인간의 의지가 미치지 못하는 세계를 인정하는 태도가 수반된다. 풍류의 정신을 오늘날 다시 읽는다면, 자연을 자신의 감정에 맞추어 해석하기에 앞서 그 고유한 리듬을 감각하는 능력에도 주목해야 할 것이다.
해인사 학사대의 전나무 앞에서는 한 인간의 마지막 행적을 둘러싼 침묵이 짙어진다. 최치원의 말년은 정확한 기록으로 온전히 복원되지 않는다. 가야산에 은둔했다는 이야기와 신선이 되었다는 전승은 역사적 공백 위에 여러 세대의 상상력이 쌓인 결과다. 저자는 학사대의 전나무를 찾을 때마다 그 웅장한 모습에서 최치원의 기상을 떠올린다. 여기에는 살아 있는 나무를 통해 사라진 인간의 정신을 가늠하려는 마음이 있다. 그러나 인간의 기억은 나무의 수명처럼 일정한 생물학적 연속성을 갖지 않는다. 기억은 전해지는 동안 변형되고, 시대마다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는다. 최치원이라는 이름 역시 당대의 문장가에서 후대의 은둔자와 신선으로 거듭 해석되었다. 전나무가 환기하는 것은 한 인물의 변하지 않는 본모습보다, 그를 기억해 온 사람들의 오랜 시간이 아닐까. 나무 앞에 선 현재의 시선에는 수많은 과거의 시선이 겹쳐 있다.
이 책에서 나무는 자주 인간의 삶을 설명하는 언어가 된다. 양주의 녹나무가 지닌 왕성한 생명력은 당나라에서 활약한 최치원의 모습과 연결되고, 해인사의 전나무는 그의 기상을 떠올리게 한다. 식물의 생태적 특성을 인간의 성품과 대응시키는 방식은 오래된 문학적 전통이기도 하다. 다만 그 과정에서 나무의 존재가 인간을 위한 상징으로만 좁혀지는 순간도 경계할 필요가 있다. 녹나무의 씨앗은 문장가의 명성을 위해 퍼져 나가지 않으며, 전나무는 누군가의 정신을 보존하려고 뿌리를 내리지 않는다. 나무에게는 인간의 해석이 미처 포괄하지 못하는 고유한 생의 질서가 있다. 저자가 청량산에서 줄기 일부가 고사한 느티나무를 살피고, 오랜 나무를 보호해 온 사람들의 수고를 떠올리는 장면은 그런 점에서 각별하다. 나무를 인간의 역사와 연결하는 상상력 곁에 실제 생명을 향한 관찰과 돌봄이 자리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의 생애가 얼마나 오래 기억될지 알 수 없다. 한때 세상의 질서를 바꾸려 했던 최치원의 문장은 비석과 문집에 전해지고, 그가 백성을 위해 조성했다고 전해지는 숲은 오늘날에도 새로운 생명을 길러 낸다. 그러나 문헌의 보존과 숲의 생장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시간을 이어 간다. 문헌은 과거의 언어를 후대에 전달하고, 숲은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생명의 관계를 계속 만들어 낸다. 김재웅은 그 두 시간 사이를 걸으며 역사적 인물의 생애를 다시 읽는다. 상림에서는 인간이 자연에 맡긴 미래를, 학사대에서는 자연을 통해 되살리는 과거를 마주한다. 우리가 지나온 자리에 무엇을 심고 어떤 것을 돌보았는가에 따라 후대가 물려받을 세계의 모습도 달라진다. 한 인간의 시대가 저문 뒤에도 숲은 자란다. 그 숲의 내일에는 우리가 오늘 선택한 삶의 방식까지 뿌리내리고 있다.
✏️도서출판 책과나무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