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국주의

 

공동발의

 

군국주의의 본질과 의미에 대하여

 

군국주의는 우리 시대의 가장 빈번한 전쟁이며 번잡하고 혼란스럽고 다면적인 현상을 의미하며 동시에 그것의 기원과 성격의 방법과 여파를 아는 건 흥미롭고 중요하다. 군국주의는 계급조직 사회의 생활에도 뿌리박힌 현상이다. 아직은 개별국가와 지역의 특수한 자연적,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상황을 다각도의 형태로 드러나는 사회적 제도와 비슷하다고 추정할 수 있다. 군국주의는 대부분에 사회적 제도의 생활에서 가장 중요하고 필수적인 증후이다. 왜냐하면 군국주의는 가장 강하고 대부분 자기보호 본능을 가진 계급에게 민족적, 문화적, 독점적으로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군국주의의 역사는 인간의 진화와 강력한 권력의 역사를 중심으로 온전한 의미를 드러내며

쓰여진다. 자본주의적인 군국주의의 정밀한 분석은 자본주의에서 가장 은폐된 경찰의 근원을

해부하는 걸 의미한다. 군국주의의 역사는 동시대에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인 역사에 전반적인 국가와 민족 사이의 문화적인 갈등관계와 개별국가와 국가단위 내에서 계급투쟁의 역사이기도 하다. 그런 역사를 시도하는 건 의문의 여지도 없지만 분명하다.

 

사회적 관계에 대한 힘의 기원과 기반

 

모든 힘의 사회적 관계에서 결정적인 지점은 마지막 수단이고 사회적 힘으로 보기에 물질적 힘은 우선적이며 한 사람만의 힘1)으로 드러나진 않는다. 게다가 한 사람은 다른 사람과 동등하며 순전히 수칙적인 비율로 누가 다수인지로 결정한다. 수칙적인 비율은 단순하게 이익관계가 모순되는 사람들이 속한 모임들의 수칙과 일치하진 않는다. 모든 사람들이 특수한 한 사람의 근원적인 관계까지 정확하게 아는 건 아니기 때문에 계급의식에서 지적이고 도덕적인 발전과 광범위하고 집중적인 단계를 중심으로 결정한다. 그리고 지적이고 도덕적인 단계는 개별적인 이익집단인 계급으로 결정하지만 반면에 정치적, 사회적 지위는 강력한 반응을 보이더라도 다양한 결과와 권력관계의 표출을 대변한다.

 

경제적 우위는 직접적으로 복잡한 수칙적인 비율을 대신할 수 있도록 돕는다. 왜냐하면 경제적 압력은 지적이고 도덕적인 단계의 수준에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계급적 이익관계의 인식에서도 암묵적으로 완전하게 계급적 원칙에 거의 순응하고 행동하도록 생산하는 경향이 있다. 지배계급의 정치적 조직이 지배적인 이익집단에게 유리한 수칙적 원칙을 수정하고자 증가하는 힘을 빌려준다는 건 알려진 모든 기관에 대해서도 우리에게 교훈을 준다. 경찰, 사법기관, 학교와 교회도 여기에 포함되며 기관들은 정치적 기구로 세워지고 행정적 능력으로 고용한다. 처음에 두 가지는 주로 협박과 폭력으로 위협해서 작동한다. 학교는 주로 핵심에 도달할 수 있는 계급의식에 대한 모든 과정을 저지하고자 한다. 교회는 악을 드러내는데 눈이 먼 사람들에게 가장 효과적이고 미래의 삶에 대한 그들의 즐거운 욕망과 지옥이 있는 고문실로 협박하면서 경각심을 준다. 그러나 습득한 수치적인 비율도 절대적으로 힘의 관계로 결정하진 않는다. 무장한 사람의 손에 있는 무기는 빈번하게 신체능력을 증가하게 한다. 무장기술은 결과적으로 외부적인 무장과 전략을 포함하여 공을 들여서 이 힘을 증가시킬 수 있는지에 따라 개발에 의존하고자 한다. 지적이고 경제적인 우위는 한 집단의 이익관계에선 순전히 무기를 소지한 신체적인 우월성이나 더 나은 무기를 가진 우월한 계급으로 둔갑한다. 그러므로 계급의식이 강한 다수파가 계급의식이 강한 소수파를 완전히 지배할 수도 있다. 계급적인 분열이 일어나서 경제적 지위를 결정하더라도 계급에 따른 권력의 정치적 관계는 한 사람이 차지하는 경제적 지위에 의해서만 결정된다. 둘째로는 무수한 지적이고, 도덕적이고, 물리적인 수단을 처리하는 경제적으로 지배적인 계급에게 규제된다. 그렇다고 이 모든 행사하는 힘의 집중이 계급의 구조에 영향을 미치는 건 아니다. 이 구조는 의존하지 않는 위치에 의해 세워지기 때문에 위치는 다수를 구성할 수 있는 한 계급에게 강제한다. 자연의 명령이 조화를 이룬다면 경제적으로 의존하는 계급은 소수의 집단을 구성할 수도 있다. 계급투쟁이나 변화에 대한 정치적 힘의 수단도 없이 전자는 국가에 의존하며 남는다.2) 그래서 계급투쟁은 오직 한 계급의 관계에서 희생과 혁명적 실천을 준비하고 수용하며 계급의식을 발전하기 위한 투쟁일 수 있다. 이 투쟁의 중요성은 계급의식을 세우거나 억압하는데 있어 자연적이고 지적인 힘의 수단을 차지하는 물리적 힘의 증대를 포착한다는 걸 의미한다.

 

이 모든 것에서부터 사람들은 무기의 기술이 사회적 투쟁에서 중요한 기능으로 무엇을 하고있는지도 파악해볼 수 있다. 경제적 요구를 할 수 없는 소수파가 적어도 이 기간 동안에는 가장 집중된 정치적 행위인 군사작전으로부터 다수파와 전투하고 유지할 수 있다. 지배할 수 있는 위치를 유지할 수 있는지도 이 기술에 달려있다. 계급의 분열을 떠나서 힘의 관계에서 발전은 현실적으로 모든 무기기술의 발전과 연관되어 있다. 모든 사람들, 심지어 최하층에 있는 사람들도 다수의 원칙과 민주주의가 지켜지기 어려운 조건 아래에선 기본적으로 동등하게 좋은 무기를 생산하며 그 사회는 일정한 정치적 형태를 보일 것이다.

 

앞서말한 위의 주장이 옳다면 계급에서 경제적 분열이 일어난 경우에만 해당한다. 발전의 자연발생적인 과정은 경제와 기술개발의 결과로 나타난 계급으로 나누는게 방어술과 전략을 포함해서 무장기술의 개선과 평행하게 진행할 수 있다. 따라서 무기생산은 더욱 전문화된 직업이 된다. 게다가 한 계급이 다른 계급와 경제적 우위를 좌우하는 건 계급지배이기 때문에 무장기술의 개선은 지속적으로 무기상품3)을 생산하면서 더욱 구체적이고 비싸지게 된다. 무기생산은 점차 경제적으로 지배적인 계급이 독점하면서 민주주의의 물리적 기반은 제거된다. 그렇다면 핵심은 누가 소유하고 있는지가 중요해진다. 한때 정치적인 권력의 수단으로 소유해본 계급이 발생할 수 있으며 경제적 우위를 상실한 후에도 적어도 한동안은 정치적 지배를 유지할 수 있다.

 

위에서 언급한 지적에 연연해할 필요는 없다. 권력의 정치적 관계에서 형태와 성격만이 무기기술을 결정하는 건 아니며 계급투쟁의 형태와 성격도 마찬가지다.

 

모든 민간인들이 동등하게 무장하고 그들의 무기를 책임지는 것으로는 민주주의의 지배를 영구적으로 보존하기에 충분하진 않다. 한 스위스의 사건이 보여주듯이 무기를 균등하게 분배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 분배에는 다수파로부터 떨어져 소수파가 되려고 하거나 소수파가 타격을 위해 잘 조직될 위험성을 제거하지 않는다. 전체 인구는 무기생산이 민중들의 손에 있을 때만이 영구적이고 동등할 수 있다.

 

무장기술이 할 수 있는 민주화의 역할에서 불워리턴은 주목할 공상적 정치체제를 다가온 경쟁에서 분명하게 묘사했다. 그의 저작 중에선 알려진 작품은 아니다. 이 책에서 불워리턴은 모든 민간인들이 쉽게 전기와 유사하고 신비한 힘을 이용하거나 옮기면서 작은 막대기를 수단으로 어느 시점에서 성취할 수 있는 가장 처참한 결과를 가져올 기술의 높은 발전을 전제한다. 그리고 자연의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인간의 지배가 실제로 쉬운 일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예상해볼 수도 있지만 비록 먼 미래에는 학살의 기술을 응용하는 걸 할 수 없는 단계에 이를 것이다. 왜냐하면 인류의 전멸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기술적 진보는 어느 정도에선 금권정치에 의해 착취되는 대신에 무기를 제작하는 방법을 가져오며 다시 어느 정도 민주주의의 광범위한 기반에서 소유가 될 것이다.

 

군국주의의 역사에서 드러난 몇 가지 항목.

 

계급으로 분열하지 않았다고 알려진 하위 문화권에선 무기는 지배를 돕는 방어수단만이 아니라 작업도구이기도 하다. 돌과 막대기, 창과 화살촉, 활 이외에도 무기와 도구는 원시적 성격으론 언제든 쉽게 구할 수 있다. 남편과 아내 사이의 가장 원시적인 분업을 제외하고는 기록적으로 훌륭한 노동의 분업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들이 적어도 남성과 여성 중에 한 성의 구성원들이 동등한 사회적 기능을 수행하고 경제적이거나 정치적인 힘의 관계가 아직은 없었기 때문에 그러한 힘의 관계를 지원하고자 무기를 사용할 순 없었다. 설령 힘의 관계가 존재했다고 하더라도 무기를 사용하기 위한 수단으러 사용하진 않았다. 힘의 관계는 원시적인 기술과 함께 오직 민주적인 힘의 관계에서만 할 수 있었다.

 

하위 문화권에서 무기가 공동체에도 사용한다면 기껏해야 개인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서지만

계급이 분열하거나 힘의 기술이 더 크게 개선될 때 그들이 의도하는대로 상황은 달라진다. 하층 농업의 원시적 공산주의와 함께 여성이 지배하는 구조에 있는 사람들은 사회적 지위가 없었으므로 평균적인 환경에서는 계급지배의 정치적 관계를 알 순 없었다. 일반적으로 군국주의는 의도를 감춘다. 군국주의의 외부적인 요인에는 전쟁을 준비하도록 강요하고 임시적인 군사적 전제주의를 생산했으며 유목민들 사이에서는 이전부터 지배하던 계급으로 분열했기 때문에 빈번하게 일어난다. 개인적이고 계급의 위치에 따라서만 분할된 순전히 무력적인 조직으로만 상응하는 그리스와 로마의 군대조직을 상기해본다면 계급적 지위에 따라 무장의 질이 좌우되었다. 게다가 기사들의 봉건적 군대도 상기해볼 때 대지주의 병사들은 질 나쁘게 무장하고 도보로 다녔으며 패트리스 라로크에 따르면 전투에 직접 충돌하는 전투원보다 대부분 전투부대의 지원을 담당했다. 당시에는 하층민들의 무장을 허용하진 않았고 일정한 도움을 주긴 했지만 실제론 국가가 최소한의 안전도 개인에게 보장해주지 못했기 때문에 외부의 적을 보호하거나 가능한 공격에 대비해서 사람들은 무장할 필요성을 있었고 국가와 민족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사회의 개별적인 계급의 무장에서 차별화는 힘의 기술을 가능하게하며 힘의 관계를 유지하고 단련하는데 고용된다. 이 물음의 측면에서 로마의 노예전쟁은 기억해둘만하다.

 

이 물음에 독일의 농민 전쟁과 독일의 도시전쟁도 중요하고 불을 지핀다. 14세기에 독일의 도시전쟁의 결과로 인해 직접적으로 불리했던 근거가 첫째로는 교회의 봉건군들의 군사적 기술이 우월했기 때문이다. 14세기에 도시전쟁에서 전투했던 부대는 성공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1525년의 농민전쟁의 기간과 대조적으로 화기의 기술이 유난히 낙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도시의 거대한 경제적 결과로 인해 사회적 중심지가 지역적으로 제한되어서 좁은 범위 내에서만 밀집할 수 있었으며 상충적인 관계에선 상당한 혼란이 없었던 대표적인 사례였다. 게다가 처음부터 마을을 건설하는 기술로부터 소도시와 요새는 봉건귀족, 교회, 황제와 같은 중요한 전략적 위치를 점령했으며 부대의 군사적 요소(방어시설)였다. 마지막으로 무기의 생산은 마을들이 담당했으며 시민들은 기술적 준비에 있어 모두 우월했기 때문에 기사들의 군대를 물리칠 수 있었다.4)

중요한 시각을 잃어선 안 된다. 같은 지역에서 함께 살거나 다른 계급 사이에서 소수적으로 산한 사회의 다양한 계급이 수행하는 중요한 부분을 간과해선 안 된다. 농민전쟁과 도시전쟁의 조사는 자세한 사실을 보여준다. 계급분산이 분산과 일치할 때 지역적으로 계급투쟁은 더 쉽다. 이 상황은 계급의식이 발전하는데 도움을 줄 뿐만 아니라 기술적인 관점에서 계급의식을 군사조직으로 연관하는데 도움을 주며 무기의 생산과 공급을 돕는다. 이러한 지역적으로 유리한 계급조직은 부르주아 혁명5)의 좋은 본보기였다. 프롤레타리아의 혁명6)은 대부분 거의 부재했다.

 

또한 현재에도 여전히 존재하는 고용된 군대에서 군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경제적 힘은 물리적 힘으로 둔갑하며 메피스토의 사악한 격언에 따르면 만일 내가 여섯 마리의 종마를 지불할 능력이 있다면 과연 그들의 기운을 받을 자격이 없겠는가?” “24개의 다리를 가진 것처럼 멀리 갈 수 있으며 바른 구실을 하는 사람이리라.” 그리고 또 다른 격언에 따르면, “나누고 지배하라!” 이 두 가지의 격언은 소위 말하는 엘리트 부대에도 적용할 수 있다. 반면에, 이탈리아인이던 콘도티에리는 프레토리안이 그랬듯이 무기, 군사작전과 전략적 기술을 소유한 자에 의한 정치적 권력에 무엇이 달렸는지 두드러진 방식으로 설명한다. 고용된 군인은 왕의 왕관에 뻔뻔하게 매수된 후에 그들과 공놀이를 했고 국가에서 최고 권력자의 타고난 후계자7)가 되었다. 우리는 열광과 전쟁이 나폴레옹과 그의 장군들, 불랑제들에서 군사적 권력으로 개인의 손에서 침략에 대한 명분을 준비하면서 반복되는 이 현상을 현재에서도 본다.

 

해방운동에서 독일전쟁의 역사는 군사조직과 전반적인 군국주의의 형성에서 외부에 대한 정치적 상황의 영향력에 대한 중요한 교훈을 가르친다. 프랑스혁명에 대항했던 1806년의 연합전쟁에서 프리드리히 대왕의 봉건적인 상비군들은 프랑스의 시민군들에게 격파되었다. 전쟁이 너무나 비참하게 끝났기에 무력한 독일의 정부는 다음과 같은 차선에 직면했다. 코르시카 정부에게 끊임없이 시달리거나, 전반적인 지원제도에 시민군과 자신의 무기들로 정복자를 물리치거나 존속하려는 욕망과 대중의 충동적인 자극은 대중을 후자에 합류하도록 강제했다. 독일에선 민주화의 위대한 시기가 시작했고 프로이센의 특수한 압력에는 국내의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긴장을 완화시키고 돈과 자유를 갈망할 수 있는 투사를 원했다. 남성의 가치가 증가했다. 가치생산자로서 사회적 자질을 가진 장래의 세금납부자들과 물리적 힘과 지능을 타고난 신체적 자질이 있는 남성에겐 일반적인 곤경에 처했을 때마다 결단력을 습득할 수 있었고 열광적인 능력을 겸비하면서 환율이 증가할 수 있었다. 반면에 계급 차별화의 영향력은 낮아졌다. 군사주간지의 전문용어로 프로이센 국민들은 타국의 오랜 통치기간 동안에 그들의 모든 불만을 잊어버리는 법을 학습할 수 있었다. 흔한 사례로 재정과 군사적 문제는 대변혁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난관은 제거되었다. 전성기에 재정적으로 중요한 산업과 무역은 프로이센-독일의 하찮은 관료주의적 정신이 수용하는 한에서 위탁될 수 있었다. 적어도 정치적 자유를 도입하거나 약속했다. 사람들은 일어섰고, 폭풍은 분노하기 시작했다. 보편적인 제도 아래에서 해방전쟁 기간에 라인강 너머에 샤른호르스트의 그나이제나우 군대가 세습의 적을 몰아냈다. 그들은 대혁명의 프랑스를 약화시키고 그의 긴장된 세계를 경멸하게 할만한 제도를 구비할 수 있었다. 그러나 민주적 조직은 아니었지만 샤른호르스트의 그나이제나우는 그 뜻을 세웠다. 독일 국민이던 흑인들은 의무를 다한 후에 합스부르크 가문으로부터

적절한 호의를 얻을 수 있었다. 칼스루에 결의안에는 레이프직의 민족전투를 이끌었으며 신뢰할 수 없고 저주받은 메트르니히 정권의 부질없고 가장 중요한 업적 중 하나인 제거되지 않고 반동적인 모든 악마들이 풀려난 후에 억압으로부터 해방운동의 전쟁에서 민주적 군대는 폐지되었다. 높은 수준의 문화를 이룩한 독일의 영토에선 군대가 무르익었을진 모르지만 동쪽의 엘빈의 보루시아인들의 몹시 현저한 문화적 무게는 갑작스럽게 민주적 군대와 충돌했고 가까이에서 민중들의 위대한 봉기들의 영광에 가까울 수 있었다. 군사조직에 대한 추상적인 검토는 사회적 분단 뿐만 아니라 무기의 기술이 발전한 정도가 마침내 군대의 구성과 규모에도 좌우될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이를테면 대혁명적 운동에서 사용된 소형화기의 발전은 전쟁의 역사에서 가장 두드러진 사실 중에 하나였다.

 

참조

 

1. 그리고 물론 체력과 불가분한 관계인 지적인 능력도 남성에게 최대한의 체력 사용과 신체적 발전에도 영향을 미친다. 사실, 어느 정도는 체력의 한계를 요구한다. 이러한 신체적 힘으로 정복한 크기가 사회적 현상으로 얼마나 존재했는가는 경제적인 지위에 속하는 집단들과 관계한다. 이를테면 광범위한 규모와 균형적인 거래관계 사이에서 개인적인 집단의 관계가 발생할 때 권력의 사회적 관계를 결정할 수 있다. 더 중요한 측면은 후반부에 논의해볼 것이다.

 

2. 사회적 생산에서 인간의 생활은 인간의 의지에 의존하지 않는 분명하고 필연적인 관계인

생산적인 물질적 힘의 진화와 생산관계에서 분명한 단계로 부합할 수 있다. - 마르크스

 

3. 모든 종류의 군수품과 무기들 외에도 전기장치, 요새, 무장하기 위한 장비들, 군사통신체계(, 무기, 이동수단, 도로와 교량의 건설, 내해상의 선박, 철도, 자동차, 전보, 무선 전신술)등과 망원경, 비행선, 사진, 그리고 군견도 상기해보자.

 

4. 또한 15세기 이탈리아의 발전이 여기서 중요한 관계를 보여주며 더욱 구체적으로 조사해볼 수 있도록 유도하며 핵심적인 구상을 확인해볼 수 있다.

 

5. 러시아의 초기 단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특수한 성격으론 190512월에 광범위하게 일어난 무장봉기이다. 주목할만한 드러난 강인함에는 대부분의 마을주민들이 도화선으로 소수의 혁명가들과 협력해서 도시 게릴라전의 전술은 모스크바에서 아주 훌륭하게 발전했으며 획기적일 것이다.

 

6. 그래도 공장에서 함께 일하고, 노동자 계급의 숙소에서 함께 생활하는 건 고려해야한다.

7. 버크하르트(Burckhardt), p. 22. 외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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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날. 한 출판사로부터 거절 당했던 칼 리프크네히트 - <군국주의와 반군국주의>를 올려본다. 블랙 로즈 출판사 본이다. 저작권은 없고 무료 배포하겠다. 


서문

 

드미트리오스 루소폴로스

 

리프크네히트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군대와 연관이 깊다. 지식인들이 내다 본 20세기 일련의 사건들 이후에도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그의 주장들은 사실로 인정하고 있다. 이제는 고전인 군국주의와 반군국주의의 재출간과 문헌을 보관하는 건 블랙 로즈 출판사의 의무이다. 이 자료는 방대한 비판적인 문헌 중의 하나로 여러 전쟁을 거치면서 인문주의자들과 반전주의자들에게도 영향력을 미쳤다.

 

물론 군국주의는 자본주의보다 앞서있다. 둘 사이의 관계를 구분하자면 리프크네히트는 군국주의는 자본가를 위한 계급으로 복무하고 있다고 언급한다.

 

군국주의는 외부로부터 적을 보호하는 수단만이 아니라 계급으로 가시화되는 두 번째 조건을 가지고 있다. 군국주의의 계급적 모순은 자본주의와 노동계급의 해방에 반대하는 반동세력에게 지배적인 사회질서를 지지하고자 더욱 애쓴다.”

 

이 리프크네히트의 문헌은 1907년에 작성했다. 한 관찰자가 무단정치(stratocracia)로 이름붙인 첫 소비에트 공화국의 출범 이후에도 방대한 규모로 국가자본주의나 국가사회주의가 적색군국주의의 희생양이 될 거라는 사실은 1917년 이후에 그마저도 내다볼 순 없었다. 2차 세계대전이 종식하고 민족해방운동을 가속화하면서 식민지 국가들은 군수산업으로부터 대량무기를 구매하면서 국가권력을 강화했다.

 

특수한 비판으로도 반군국주의는 모든 군사기관과 경찰의 통제에 대한 합법적 폭력의 국가적 독점을 반대한다. 반대로 이는 반국가주의의 논리적 귀결이기도 하다. 반군국주의는 무정부주의와도 관련이 깊다. 군국주의는 18세기와 19세기의 민족국가에서 발생한 역사적인 성취가 선두적이라고 위장한다. 나폴레옹 치하의 프랑스가 징병제를 처음으로 도입했다. 군국주의가 국가의식을 창안한다는 사실은 루소를 포함한 대다수의 이론가들도 간과했다. 반면에 미셸 푸코는 군국주의가 감옥과 학교를 강화하는 규율로 보았고 병원은 절대적으로 규율 사회에 기여했다.

 

반군국주의는 언제나 국가와 국가적 통치권에 집중한다. 로자 룩셈부르크와 레닌이 제국주의를 비판했던 경고와 1961년에 미국의 대통령이자 전 장군이던 아이젠하워(Eisenhower)는 군·산업 복합체에서 경제와 산업적인 권력과 연관했다.

 

그러나 리프크네히트가 쓴 글에 대한 시각은 부족하며 완전하진 않다. 그는 무정부주의에 대한 잘 알진 못했다. 무정부주의라면 군국주의가 외부의 적으로부터 보호하고자 한다는 주장에 글을 읽고 다시 적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군국주의가 외부로부터 적을 방어하는 수단만이 아니라 계급으로 가시화되는 두 번째 조건을 가지고 있으며 군국주의의 계급모순은 더욱 은폐해서 자본주의로부터 모든 형태에 자유롭고 온전한 민주사회에 대한 투쟁을 방해하는 반동세력과 국가자본주의와 시장경제에 지배적인 질서를 유지하고자 더욱 두둔한다고 쓸 것이다.’

 

공식적으로 그의 책이 출판한 이후로 리프크네히트는 체포되어 18개월 동안 글래츠(Glatz)에 수감했다. 하지만 다음 해에 감옥에 있었음에도 의회의원으로 선출된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에 독일의 참전을 반대했고 191412월에 2일에 전시공납에 반대표를 던진 의원들 중에선 유일한 사람이었으며 지지자들 중에선 그의 사회주의 정당에서 선출된 110명의 당원이었다.

 

그러나 의회의원으로 그를 더 수감할 순 없었고 그를 묵살하기 위한 일환으로 군대에 징집하게 했다. 그래도 그는 전쟁에 투쟁하고 끝까지 싸웠다. 1916년에 51일 그는 베를린에서 대규모의 반전 시위가 일어나기 전에 전쟁이 멈추기를 바라는 독일 사람들의 요구로 완전한 군복을 입고 카이저 광장 앞에서 연설도 했다. 그는 외부의 적은 영국, 프랑스 또는 러시아 노동자들이 아니라 부유한 독일의 토지 소유자들, 독일 자본가들과 그들의 집행 위원회, 그들 정부라고 말했다.

 

칼 리프크네히트는 1871813일 라이프치히에서 태어났다. 독일에서 1919115일 베를린에서 살해됐다. 그는 마르크스주의자이자 사회주의자였고 로자 룩셈부르크와 함께 스파르타쿠스 연맹을 설립하고 독일 사회당과 그는 모든 힘을 다해 1차 세계대전에 반대했다. 독일의회의 의원이었으며 1919년 민중봉기를 주도했고 이 봉기로 사회민주주의 정부와 독일의 불법무장조직과 참전용사들로 구성한 자유군단과도 충돌했다. 그는 로자 룩셈부르크와 함께 암살됐다.

 

이후로 이 책은 여러 나라에서 번역해서 출판했다.

 

서문

 

몇 주 전에 그렌츠보테(Grenzbote)에선 189210월에 비스마르크와 오토 케멜 박사와의 대화를 보도했다. 비스마르크 특유의 냉소와 함께 입헌주의라는 가면을 벗긴 세기적인 영웅에 대한 대화였다. 그 사이에 비스마르크는 말했다.

 

중세시대 로마에선 법 밖에 있는 사람들은 범법자로 간주해서 추방했어.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정치적 권리를 무시하고 이를 비슷하게 취급했지. 내가 보기엔 이보다 심했어. 사회민주주의의 문제에는 군사적인 문제가 있지. 현재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부사관들을 성공적으로 설득하기 위해 분투해. 함부르크에 있는 대다수의 군대는 이미 사회민주당원들로 구성되었어. 왜냐하면 주민들은 오직 지역부대에서만 가입할 권리가 있기 때문이야. 어느날 이러한 군인들이 발포를 거부한다고 가정해볼까. 그들의 아버지와 형제가 황제의 복무자라면 어떨까? 함부르크와 싸우려고 우리는 하노버와 메클레부르크에서 부대를 소집할까? 그렇다면 우리는 파리코뮌과 다를게 없어. 황제는 두려웠어. 그는 언젠가 살육왕자라는 별명으로 자신의 할아버지와 똑같이 피가 발목 위로 넘치듯이지배하기를 바라진 않았어. 그때 내가 말했지. 폐하께선 힘겨운 길을 걸으셔야 합니다. 뒷걸음질 칠수록 심연은 더 깊어질 뿐입니다.”

 

전반적인 물음을 요약하자면 사회민주주의자들의 문제에는 군사적인 문제가 있다.” 귀족이던 폰 마소(Von Massow)가 흘린 고통의 외침, “우리의 유일한 희망은 오직 병사들의 총검과 대포에 달려있다.”1)보다 깊이 드러냈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의 물음에는 군사적인 문제가 있다.” 이는 현재에도 선동가들이 부를 수 있고 선율로 삼을 곡조다. 만일 알렉산드리아인2)들에게 전했던 비스마르크와 푸트카메르(Puttkamer)가 벌인 경솔한 행동이 아무 눈에도 띄지 않는다면 함부르크의 보도 소식과 순종적인 젊은 융커였던 폰 올덴부르크 야누샤우(Von Oldenburg Januschau)는 연말에 호헨로헤델브뤼크(HohenloheDelbrück)에서 상류층 법원 판사인 쿨레르만(Kulemann)에게 비스마르크의 비정한 말에 한술 더 뜬다.

 

사회민주주의 문제는 정치적인 문제일 정도로 군사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국내의 적은 해외의 적보다 위험하며 민족의 영혼을 독살하고 우리가 일어나기도 전에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우리의 행동을 저지하고자 한다. 1907년 교차로(Kreuz zeitung)에 따르면 민족주의의 깃발이 휘날리며진행한 선거싸움에선 계급적인 이익관계가 국익보다 우선하다고 보도했다. 그리고 이 선거싸움은 선거권과 노동조합 조직의 권리에 대한 위협을 고조하고 보나파르트적인 검으로 위협했으며 새해 전날 부친 편지에서 부엘로 왕자(Prince Buelow)는 독일 사회민주당의 지도자들을 위협하고자 이들의 주위를 서성였다. 계급투쟁의 기치 아래로3) 전개해서 싸운 가장 치열한 선거였다. 눈을 감고 귀도 들을 수 없는 사람만이 폭풍을 모는 호통을 치며 서약에 거부할 수 있었다.

 

따라서 자국의 적과 투쟁하는 사안은 매우 중요해졌다.

 

1907년의 혼란스러운 선거는 민족주의 문제와 식민지 문제, 강경한 애국주의와 제국주의에 대항하며 치러졌다. 이 모든 걸 보여줬음에도 이 선거는 비열한 애국사업자들의 거짓되고 애국적인 위선에 맞서 독일 사람의 저항력이 작았는지도 보여준다. 지배계급의 정부들도 이용할 수 있는 허황적인 민중선전 조직이 무엇인지도 우리에게 가르쳤다. 1907년 선거는 노동자 계급에게 이들이 힘에 있어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관계에 대해 스스로 생각해보도록 눈을 뜨게 했다. 노동자 계급은 추악한 승리의 비결에서 해방할 수 있도록 가르쳤다. 1907년 선거는 노동자 계급의 운동을 올바른 요구로 나아갈 수 있도록 더욱 깊어졌으며 민족적 행동에 대한 대중의 심리도 알 수 있게 해주었다. 확실히 우리가 소위 말하는 패배의 원인은 다수들이었고 실제로 패배는 아니었으며 오히려 승자들이 패배한 사람들보다 더 당황했다.

 

군국주의는 사회민주주의의 진입을 방해하는 특수한 함정들을 설치했으며 노동자계급에게 오염된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사실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이를테면 그들은 정부의 테러주의에 휘둘리는 국가노동자들과 하위직 공무원들이다. 이는 반군국주의에 대해 청년들에게 최전선에서 질문해볼 수 있도록 지도할 것이며 독일의 노동자 운동은 이후로도 확실하게 이들의 지적에도 주목할 것이다.

 

다음의 책자는 19061128, 독일에 청년사회주의자 조합의 저자로부터 읽은 신문사의 논설을 확대했다. 이 논설은 기본적으로 새로운 걸 주장하진 않는다. 단지 이미 알려진 자료들의 모음집일 뿐이다. 그렇다고 주제를 소모적으로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저자는 전 세계의 흩어지고 단절한 자료를 최대한 수집하고자 노력했다. 그리고 반군국주의와 젊은 사회주의 운동에서 중요한 국가들에 대해 적지만 언급해볼 수 있도록 한 벨기에의 드만 동지에 대해 감사를 표한다. 만일 실수를 발견해서 정보의 출처가 신뢰성이 낮다는 이유로 자료의 숙달에 난관을 겪는다면 감안해주기를 바란다. 군국주의의 범위에서 현재의 많은 것들도 빠르게 변화한다. 이를테면 프랑스와 영국의 군사개혁을 더욱 언급하는 건 구시대적인 발상이다. 이 책은 반군국주의자들과 젊은 사회주의 노동계급의 운동에 더욱 진실하다. 이 책은 해방을 위한 노동자계급에 대한 근래의 지침이다. 때때로 차질을 빚기도 하지만 어디에서나 빠르게 발전할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을 보게 되어 기쁘다. 이 책자가 출판한 이후로 나는 핀란드 젊은 사회주의조합이 타마스포에서 1906129일과 10일에 첫 회의를 열었다는 사실을 알게됐다. 이 조합의 특수한 목적은 젊은 노동자들이 계급의식을 훈련하는 곳 외에도 모든 방면에서 군국주의와도 싸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우리의 작업에 이론적인 원리를 충분하게 조사하지 않고 역사적 깊이가 부족하다고 불평할 수도 있다. 이에 대한 대답으로 나는 이 책자의 정치적 목적이 반군국주의 사상을 전파하고자 한다는 걸 지적하고자 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쌓여만 가는 무수한 사항들에 청년 사회주의 운동과 반군국주의의 역사에 관해선 하찮게 보일 수도 있고 불만할 수도 있다. 이 불만이 정당할 순 있다. 저자는 상부적으로 구체적이고 분명하게 볼 수 있도록 가정했고 하위적인 운동의 조합에 발전을 전술적 원칙과 방법으로 응용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했다. 반군국주의적 시위와 반대운동에서 주된 곤경을 제시하는 건 세부적일 뿐이라는 걸 고려했으면 한다.

 

박사. 칼 리프크네히트

 

1907, 111, 베를린

 

1. 독일 아렌츠 주간지 189611월 중순 사회민주당 연대서신 참조


2. 황제는 알렉산더 대대 신병들에게 그들의 아버지와 어머니들에게 총을 쏘라고 호소하는 연설을 했다.

 

3. 190725일 저녁에 두 번째 투표가 실시했을 때 베를린 수비대는 실탄과 함께 행군준비를 마쳤다. 1903625, 스판다우에서 개척자들이 슈왈더 거리에서 선거결과에 열광한 노동자들을 정신차리게하고자 출현했다.

 

원전 출판사 편지

 

군국주의와 반군국주의를 영어권 노동자들에게도 소개하고 전 세계의 반군국주의 사회주의자들을 선전하고 격려했고 군국주의와 용감하게 싸운 칼 리프크네히트를 소개할 필요성에 사회주의 노동 언론은 어떤 언급과 사과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책자의 출간이 독일 군국주의와 마찬가지로 영국 군국주의에 대한 동등한 도전이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칼 리프크네히트는 독일인이기 때문에 독일 군국주의를 공격하진 않는다. 왜냐하면 독일의 강경론자들을 공격하는 건 국제적인 반군국주의자의 의무이기 때문이다. 리프크네히트는 191658일에 왕립 군사법정에서 이 지점을 분명하게 지적했다. 그는 자국에 가까운 적을 비판하는 건 국제주의자들의 의무라고 말했다. 이 주장의 근거로 그는 말했다

 

이를테면 독일의 사회주의자가 영국 정부와 싸우고, 영국 사회주의자가 독일 정부와 싸운다면 우습고 심각할 것입니다. 그 사람은 제국주의와 적들과 직면해서 맞서 싸우지 않으며 그와 무관한 주위의 사람들만 비난합니다. 그 사람은 제국주의에 맞서는 사람에게도 도움을 받고 심지어 정부의 도움과 승인을 받으면서 지배계급의 비참한 글쟁이로 남지만 사회주의자는 아닙니다. 그런 정책들도 계급전쟁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전쟁을 조장합니다.”

 

리프크네히트의 태도는 그가 수용하기에도 옳았으며 자국의 S.L.P가 전쟁 동안에 유지했던 권리이기도 했다. 우리는 단호하게 영국의 귀족계급과 싸워왔고 그리고 현재에도 이전과 같이 노동자 계급이 우리의 깃발 아래 흔들리며 함께하기를 촉구하고 군국주의와 자본주의를 타도하며 전 세계적인 국제 사회주의 공화국은 군국주의와 자본주의가 죽음이 있는 곳에서 일어날 것이다.

 

전 세계에 노동자의 대의는 하나이며 노동자 계급의 적은 자본주의 계급이다. 동지들이여 어서 모이자. 전쟁에 맞서 전투를 실행하고 자본주의에 맞서자.

 

S.L 프레스

19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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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는 공공시설을 이용하면서 든 청결 문화를 제기한다. 청결이란 꼭 강박적이고, 강압적인 도덕에 기반해서 법과 규칙을 철저하게 엄수하자는 뜻은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청결이란 매우 비상식적이고, 납득할 수 없는 사람에 대한 수준에서 또는 같은 범위로 적용해서 이해하는 게 더 알맞다. 이를테면 공공 문화에 있어서도 담뱃재와 꽁초를 아무대나 버린다고 해서 흡연은 나쁘다고 규정하는 초보적인 수준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인지물이 그릇됐다고 해서 자위를 나쁘다고 말할 수도 없다고 본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은 충족할 욕구를 사전에 미리 차단하고, 또 다른 권위로 압박할 수 있기 때문에 오히려 자연스러운 문화를 조성하는데도 가로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다고 해서 꼭 그러한 행위를 불법이라고 쉽게 간주할 수는 없다. 또 다른 예시로는 한 음악이 외설적이라고 해서 그러한 음악을 듣지 말라고 하는 건 다른 문제라는 뜻이다.

 

남한에서는 언론에서도 시위나 집회에 대한 선진 문화를 문명에 대한 진보라고 여기곤 한다.

그러나 시위 문화로 보자면 과연 인민들에 대한 수준에서도 같은 이해를 전제하는가. 꼭 그렇지 않는다고 봐야만 옳다. 왜냐하면 외신 보도에 따른 선진 문화가 아무리 자리잡았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부르주아지들로부터 집단적으로 린치를 가하고, 정치적인 행위를 정당화하는 형태란 오히려 자본주의로부터 발전해왔기 때문이다. 때로 재벌과 자본가들은 철학을 건드린다. 왜냐하면 일상적으로는 선진적인 문화가 모든 사람들에도 이로울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과격한 진압 그리고 모든 시위와 집회를 불법이라고 규정하는 또 다른 무도덕하고, 파렴치한 일로 보더라도, 오히려 선진 문화라면 모두 진보적이라고 착각한다. 파시스트적인 강경 진압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제국주의와 같은 학살 국가이자, 전범 국가들에서도, 과연 남한도 문제가 없다고 볼 수 있는가.

 

그렇다면 우리 상식으로 말하는 선진 문화란 바로 청결 문화에서도 자주 볼 수 있다. 이를테면 공공 도서관에서 빌린 책에는 왜 밑줄이 그어지는가. 그리고 수정하고, 찢고, 낙서를 하는가. 우리는 물건마저 의식 없는 상태에서도 자주 소유물로 간주하곤 한다. 그러나 모두가 빌려보는 책임에도, 그러한 청결에 대한 문제라면 지적할 수 있어야만 하고, 또 문제를 제기하는 게 혁명에 대한 사소한 임무일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물론 서로 무관하다고 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또한 되묻고는 싶다. 자본주의에서 과연 문화는 청결한가. 그리고 주변 환경은 깨끗하다고 볼 수 있는가그리고 남한도 선진 국가라고 보지도 않는다. 떼를 지어 움직이거나, 무리 짓는 행위 자체가 문제라는 게 아니다. 오히려 왜 그러한 집단들은 더 비효율적이고 불필요한 일을 감수하도록 일거리를 던지는가라고 묻는다. 따라서 우리는 남한에 대한 선진 문화라고 불리는 정치적인 의식이 과연 계급 의식과도 무관한지를 더욱 따져 묻는다. 우리는 이번 집회와 시위에서 차기 정권을 둘러싼 탄압 고조와 탄핵에 대한 찬반 여부 따위가 아니라 우월한 인종 대청소와 같은 정작 무관하고 무고한 사람을 죽이고 싹 다 정리하는 계엄을 찬성하는가로 본다. 그리고 그러한 모든 지지에 대해서는 모두 매우 반대한다. 부르주아지들이란 오히려 위선이라는 가면을 쓴 채로 지저분하고, 너저분하고, 쓰레기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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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공산당원들에게. 


지금도 자본주의 속에서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하고 있다. 

바로 제국주의와 전쟁이라는 구도 속에서. 

어쩌면 전쟁이라는 에피소드가 하나 끝나고 있다. 사람들도 끝나기를 바란다. 

그러나 투쟁이란 쟁취하는 것이다. 

과거의 일은 아주 오래 전으로 미뤄버렸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날마다 큰 일만 치르고는 작은 여유를 가질 시간이 부족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반대로도 마찬가지다. 

꼭두새벽부터 기상해서 일어나지도 못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작년이란 

너무나 잊기 힘든, 그리고 괴로운 시기였다. 그저 한숨을 돌리고, 주어진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도 작년은 너무 많은 일들이 쏟아진 해였다. 


단지 그동안 누적됐던 썩은 냄새가 진동하는 부패한 정부를 보노라면,

뒷감당을 국민들에게 떠넘기고는, 새해를 맞이하고는 말았다. 

그저 사고와 참사, 그리고 목숨이 날라가는 해였음에도,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거나, 묻지 않았고, 일부 사람들은 행복 회로만 돌리고 살았다고 한다. 

소수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논리 회로가 우선이었기 때문이었을까. 


오히려 논리적이지도, 경제적이지도 못한 정부와 국가 구성원들을 지켜본다. 

언론 취재를 한다는 사람들이 아무도 의문을 제기할 줄도 몰랐고. 

방관을 객관이라고 여기곤 한다. 


바로 뼈 아픈 후회가 아니라 뼈 저린 침묵이 남긴 결과란 바로 

우리 삶에서도 목격하는 현실을 피하고만 살았다는 증거는 아닐지 반성해본다. 

새삼 그들은 모두 어리석다. 

새가 해롭다고 해서 새를 모두 쏴죽여야만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과 똑같기 때문이다.

정작 논리에서도 늘 오류를 범한다. 

정치에서 좌우파란 모두 단지 많이 가진 사람들이라는 의미에서 기득권이 아니라,

바로 시공간까지 좌우하려고 했던 정치 집단이자, 이익 집단들은 아니었을지 

또 다시 묻고 싶기 때문이다. 


너무나 많은 요구들 가운데 그러한 똑같은 반복만 보여준 결과와 장담할 수 없는 

불안이라는 미래를 안고. 삶이라는 새로운 배움이라는 과정에서도

보람을 찾기를 바라는 한 해를 바래본다. 


청년들이여. 마르크스를 읽자. 

시름하는 젊음이란 씨름하는 마음과도 같으니.  


2025. 1. 1. 한국중앙공산당(KCC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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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소는 탄핵을 심의한다. 그러나 심의하는 동안에도 자국에서는 무산 계급들도 날마다 국가에 대한 존립을 두고 고민한다. 바로 오래된 생계 노동에 대한 임금과 급여를 두고 노동계급들은 아직까지도 투쟁하고 있기 때문이다. 생계 노동에 대한 근로준수법을 준수하자던 과거 노동 운동가들은 필사적인 희생 뒤로는 필수 법안 발휘에 대한 지연되거나 뒤늦은 처리를 보고만다. 장담하지도 못할 결과를 두고는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생계에 대한 불안으로 스며든 자본주의는 체제로부터 국가 권력이란 곧 국가 폭력이었고, 또한 단지 억압적인 국가 기구가 아니라, 부르주아 일당 독재를 위한 기구였음을 만천하에도 알린 계기였다.

 

이제는 대놓고 노골적인 쿠데타를 모의하고, 노동 운동에 대한 주기를 끝내버리고자 하는 부르주아 독재를 보노라면, 근로준수법, 차별금지법마저 자본가들을 위한 법안이자, 정작 시급한 일자리를 잃은 노동 계급들에게는 취업이라는 더욱 오래된 관문 앞에서 좌절되고는 말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자본 경제 성장은 정부에 따라 크게 바뀌지도 않는다. 판에 박힌 정당 정치는 또 누군가에 대한 정당한 희생을 은밀하게 강요했고, 내분을 도왔고, 프롤레타리아트 간 전쟁으로 심화하도록 부추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부르주아 양 진영 간 중립으로만 머무리지 않는다. 부르주아 시민 사회 운동에서도 좌익 수정주의, 우파 기회주의에서도 보이는 좌우익 진영에서 무마된 자유 투쟁이란 때로는 매우 반동적이지는 않았는지 자문해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프롤레타리아트에게는 마르크스로부터 철학 비판도 매우 중요하다는 점을 실감한다. 생계보장법으로부터 내용을 채울 수 있는 사람들은 오직 무산 계급들 뿐이다. 더욱이나 무엇도 소유해서 가진 적 없는 사람들이라면 열악한 생계에 대해 보장할 이유는 충분하게 있다고 본다. 그렇다고 누가 보장하는가.

 

그래서 우리는 반드시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만 하는 프롤레타리아트 정부를 내세운다. 단순 체제 전환 따위가 아니라, 앞서 요구한대로 대표 발언으로 그치고 마는 정치 행위 따위도 아니고, 무산 혁명으로 사고하고, 직접 참가할 수 있는 집중된 민주주의를 요구한다. 그리고 지독하게 악독하고, 자신들만의 권리를 내세웠던 자유로운 자본가들에 대한 수익 분배와 사사로운 재산에 대한 몰수, 그리고 무산 계급들도 생계 노동이 아니라 보다 안전한 곳에서 여가를 가지고 깨끗하게 일할 수 있도록 우리는 앞으로도 더욱 요구한다. 그들 눈에는 매우 다른 요구로 보일 수밖에는 없다. 생계보장이라는 노동을 해본 사람들이라면,  

모든 무산 계급들에게는 매우 골 깊은 문제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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