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군국주의를 둘러싼 위험들.

 

 

 

자본주의와 반동은 특히 군국주의에 관해선 민감해한다. 그들은 군국주의를 보호하고자 할 때면 사회적 평등과 노동계급에 대비해서 권력의 우월한 지위를 보호하고, 양쪽은 반군국주의에 반대하고자 견고하게 밀집해 있으며 즉 반군국주의가 자국만이 아니라 해외의 적들에 맞서 군국주의에도 직접적으로 맞선다는 걸 충분하게 알아챈다. 군국주의의 전성기가 대우도 무너질 때 전통적인 혁명적 문체의 도움을 받은 일시적으로 금지령을 내린 정의관들도 반군국주의자들에게는 자주 무해하면서 자비롭다. 반군국주의는 반프롤레타리아 세력들에게도 심각한 위협이 된 이래로 벨기에와 프랑스에서도 마찬가지로 군국주의를 끝낼 수 있다. 독일에 관해서는 18941, 189786일자 <독일국가 관보지>(Reichsanzeiger)에 실린 전쟁부의 각료이던 폰 고슬러(Von Gossler)가 발표했던 재갈을 물리고 어리둥절하게 한 포고령을 상기해볼 수 있다. 하급장교와 출생과 사회적 지위 때문에 어느 경우에서도 신뢰할만한 사고방식을 가진 장교들이 아닌 이등병들 모두 회피한다거나 무심결한 유혹을 방지하고자 사전에 공식적인 승인없이는 혁명적이거나 사회민주주의적 성격의 저작들과 활동을 숨기거나 가담할 수 있는 모든 모임, 집회, 연회, 모금에 대한 참가도 또한 법령에 의해서 공식적으로 금지한다. 그리고 군국주의가 괴롭히는 잔인한 전우의 명예와 품위를 무시하는 특수한 성격으로 현역군대의 병영이나 군사적으로 사용하는 구내에서 혁명적이거나 사회민주주의적인 저작들을 발견하면 즉시 상부에 공식적으로 보고하라는 명령이다. 그러므로 독일의 군국주의는 행위 자체로도 매우 합법적이거나 불복종한 동기들 외에도 저 멀리 내던지고 현역 군대에 대체로 침투할 수 있는 사회민주적이거나 혹은 반군국적인 해독제에 맞서 특수한 범죄적인 보호를 자신들이 꾸며낸다. 이 보호는 심지어 유명한 스웨덴의 법에도 재갈을 물린다. 여기서 밀고에 대한 비밀은 공식적인 명령으로 가장 비겁하다. 이 공식적인 명령을 밀고하지 않고 위반한다면 투옥한다! 컵에 넘쳐나게 채워진 금지들과 명령들을 훈련이나 검사를 위해 소집한 사람들에게도 은영중에 위에서 언급한 법령을 은연중에 이용한다. 이를테면 훈련 기간이나 검사를 받는 날 동안에는 노동조합과 소위 말한 혁명 단체들과의 접촉을 단절하거나 노동 신문들의 구독을 기술적으로도 할 수 없이 중단하거나 심지어 금지한 혁명적인 문헌들을 읽을 수 없거나 주거지에서 추방하도록 단순히 통제하거나 강제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1905년 포츠담(Potsdam)의 군사법원에서 작가로도 잘 알려진 한 노동자에게 장기간의 징역을 선고했던 사례도 있었는데, 검열이 있던 날 저녁에 노동조합 회의에 참석했기 때문이었다. 반면에 1904년 포츠담 형사법원의 소송에 맞선 한 노동자는 지인인 하급장교에게 열악한 물질적 조건들을 다룬 사회민주당 신문을 보내려다 적발했지만 이 사례에선 무죄 판결을 선고했다.

 

현역군인들은 고슬러(Gossler)의 법령은 어떻게 엄격하게 적용하는지를 무엇보다도 실제로 증명한다. 공식적인 조회에 대한 답변이나 선서 하에 증거를 제공하는 증인으로 출석한 군인들에 대한 사례들도 보고하자면 평범한 일상이라는 신중한 조항과 함께 사회민주주적인 견해를 진술했다면 군사법원은 이는 명백하고 중대한 불법이며 부도덕하다며 유죄를 선고한다.

 

여러 측면에서도 중요한 게드케 대령(Colonel Gaedke)의 사례도 언급해보겠다. 예비역 장교로 그는 세르비아 왕실 부부를 살해한 사건에 대한 논의에서 특정 조건들에서 장교의 국가에 대한 의무는 주권자에 대한 의무보다 우선해야 한다.”는 일반적인 발언을 해서 제복을 입을 권리를 박탈했다. 쾨니히스베르크(the Koenigsberg) 사회의 도제들과 젊은 노동자들은 경찰들에게 1906년 여름에 형사적인 소추가 발생했다. 그리고 마지막은 아니지만 190610월 초에 언론에 발표했던 프로이센 전쟁부 각료의 비밀스러운 법령이 있는데, 이 법령은 사회민주당의 반군국주의 선전의 규모와 절차를 알아내는데 관련하면서도 동시에 이 법령은 지배 계급들의 두려움과 썩은 양심을 반영한다. 폰 아이히혼 장군(General von Eichhorn)의 반사회민주주의 지침들도 이 범주에 속한다.

 

이는 자본주의와 군국주의도 국제적으로 반군국주의에 관해서는 민감하며 반군국주의 활동에 맞서는 반동도 서로다른 연관에서 어디에서나 폭력적이고 잔인하다는 걸 보여준다.

 

19065월에 어중간한 사회주의자인 스타프(Staaf)는 반군국주의 운동에 맞서 스웨덴식 재갈 물리기 법을 효과적으로 실행했다, 이를 더욱 자세하게 설명하고자 한다. 이 법은 첫째로 회관에서 논쟁 없이 통과했고 두 번째엔 회관에서 활발한 논쟁 끝에 통과했지만 대부분은 압도적으로 법이 반군국주의자들과 합법적으로장래에 싸울 원칙이라고 바라봤다. 이 법은 여러 공공 질서 위반에 대한 일반적인 벌칙들을 상당하게 강화했으며 입소문이나 인쇄물로 처벌해야할 행동들을 선동해서 최대 형량을 2년에서 4년 징역형으로 늘려놨다! 또한 불법적인 행동들에 대한 찬미와 법에 대한 불복종 선전도 처벌할 수 있도록 해놨으며 언론 매체에서 이뤄지는 한으로 군인들의 사명과 복종을 훼손하는 명백한 목적을 지닌 저작들을 압수해서 특수하게 지정한 당국에 전달하는 걸 군 당국의 의무로 규정한다. 마지막으로, 군대 지휘관들은 군기를 위태롭게 하는 발언들이 당연한 병사들의 집회 참석을 금지하는 권한을 부여했다. 이 결과들은 벌써부터 드러나고 있다.

 

메즐리에(Meslier)1)는 정확했다. 반동들은 어디에서나 병영들은 신성하고 거역할 수 없다고 단언했고 반군국주의를 어디에서든지 반역으로 다루었다. 그러나 그는 프랑스에 대해 자본가 계급들은 조국의 이익관계에서 위선적으로 목소리를 드높이고 금송아지 사원인 증권 거래소는 반군국주의를 가장 격렬하고 맹렬하게 비난한다.”고 언급했을 때 이 발언은 근래까지 독일에서도 적용해볼 수 있지만 군주적이고 관료적인 농업 자본주의의 결과들에 따른 고유한 유보적인 조항일 뿐이다.

 

반군국주의에 관해선 민감해하는 동시에 큰 규모로 자국의 적에 맞서는 군국주의와는 대조해서 해외의 적들에 맞서는 군국주의에 대한 구실을 그에 비해 부차적으로 치부하는 건 아주 흥미로운 증거다, 독일 황제는 1895126일과 1901322일에 발언한 연설에서 젊은 사람들을 교육하려는 사회주의 포부에 맞서 싸워야 한다는 취지의 호소가 담긴 증거들과 1906년 프랑스 언론인 가스통 메니에(Gaston Menier)에게 한 발언에서도 확인해볼 수 있다. 이 사례에서 황제는 세습적인 적수인 프랑스 군대의 행동을 위한 수용력과 타격을 위한 준비적인 태세를 약화했다고 주장했으며 프랑스의 반군국주의를 즉 국제적 재앙으로 특징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전진하면 국제적으로 반군국주의에 반대하는 연맹을 설립할 것이다.

 

참조

 

1. “사회적 물음에 대한 응답” (“Un côté de la question sociale”) 참조. 몰트케는 1869319일 독일의회에서 독일에는 오직 복종만을 따르는 군대가 있다는데 축하한다. 다른 나라들을 보더라도 군대는 혁명을 데려오는 대신에 혁명에 맞서 보호하는 수단들이다. 나는 독일이 지금이 아닌 달라지는데 있어 군대에게 절대 손을 들어주지 말라고 가장 단호하게 조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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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의 반군국주의와 특수한 젊은 사회주의 기관들에 대하여

 

자본주의적 문명을 가진 독일 이외의 나라들에서도 일반적으로 자주 활발하고 매우 강력한 반군국주의 운동이 있다.

 

이는 무엇보다도 벨기에, 프랑스, 이탈리아와 같은 라틴 국가들에서도 해당할 수 있지만 오스트리아, 스위스,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은 최근까지는 본질적으로 상반된 조건의 결과로 인해 서 해당할 순 없었다. 이는 네덜란드에도 해당할 수 있지만, 네덜란드도 군국주의의 기원들이 온건하다.

 


벨기에.

 

위에서 언급한대로 대규모 파업에 군대도 개입하면서 1866년에 벨기에는 특수한 반군국주의 선전을 개시했다. 이후에 군인들은 전단지의 수단들로 동료 노동자들에게 의무를 상기하게 하고1) 두 개의 반군국주의 신문인 징병(Conscrit)병영(Caserne)을 창간했다.2) <징집>2월에 있는 무작위 추첨제 전인 1월에 실리고 <병영>101일 소집하기 전에 신병을 모집하는 9월에 실린다. 프랑스어와 플라망어로도 <징병>(De Loteling)<병영>(De Kazerne)은 실렸다.3) 1896년에 당은 두 신문의 출판을 1894년에 설립한 전국 청년 수비대 연맹” (National Federation of the Young Guard)4)에게 넘겼지만, “전국 청년 수비대 연맹모임에 집행 위원회에서 관리 하에 남아있고 1896에서 1897년 이후에도 위임하여 회람했다. “젊은 수비대1893에서 1894년에 창설했지만, 1880년대 중반부터 먼저 브뤼셀(Brussel)에는 주로 선거운동을 지원하고 반군국주의 선전하는 개별적인 수비대들도 있었다. 1902년부터는 달라졌다. 2차 총파업의 좌절로 인한 실망에는 노동자들에게 더디지만 신중하게 노동하고 조직과 선전의 뿌리들이 더욱 끈기있게 자랄 수 있도록 작물을 갈아야만 했다. 젊은 사회주의 기관들의 목적은 자라났고 교육적 홍보를 우선적으로 정했다. 교육은 두 말할 것도 없이 반군국주의를 선전하는 가장 꾸준한 방법이며, 오히려 그 토대를 마련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솔깃할지도 모르지만 반군국주의와 매우 밀접한 벨기에에서 젊은 사회주의 기관들의 역사를 여기서 다루기엔 어렵다.5)

 

조금만 언급하도록 하겠다. 반군국주의자 전위대는 1896년부터 브뤼셀에서 학생들과 청년 수비대들의 월간 기관지로서 활동했다. 브뤼셀에선 전국적인 청년 수비대 연맹의 월간 기관지인 1900년부터 <반군국주의자>(the Antimilitariste)로도 출현해왔다.6) 1903년부터 전국 청년 수비대 연맹은 1907년 월간지 <사회주의 청년>(La jeunesse Socialisle)7), (청년의 미래)8)를 발행했고, 그 자리에는 현재 하이노(Hainaut)와 나뮈르(Namur)의 왈룬(Walloon) 연합이 관할하는 월간지인 <미래의 청년>(La jeunesse c'est L'Avenir)1906년부터 샤를루아(Charleroi)에서 발행한다. 두 월간지 모두 반군국주의자들로 충만했으며 지금도 마찬가지다. 선전은 중요하다. 마찬가지로 <플라망의 씨뿌리는 사람>(the Flemish Zaaier)도 언급할 수 있다. 1903년부터 앤트워프(Antwerp) 전국적인 연합인 <젊은 수비대>(the Jonge Wacht)를 대신해서 발행한 월간 삽화지였다.9) 1906년부터는 1902년부터 겐트(Ghent)에서 발행한 일반적인 당 기관지인 <진실>(De Waarheid)과 합병했다. 이 신문에서 특수한 부분을 구성하는 부제는 <씨뿌리는 사람>이다. <진실>(De Waarheid)3000부가 <청년은 미래다>(La jeunesse c'est l'Avenir)5000부를 발행했다.

 

특히 앤트워프(Antwerp)와 겐트(Ghent)의 존 와텐(Jonge Wachten)과 같은 일부 지역 청년 경비대 기관들은 활발한 문학과 반군국주의 활동도 드러냈다. 앤트워프의 기관은 이를테면 1900년 병역에 소집한 사람들을 선동하려는 목적으로 1900년 신문인 <유혈법>(De Bloedwet)을 발행했는데, 이는 <병영>(Caserne)의 목적과도 동일했으며 격월간지인 <무장해제>(Ont vapening)도 발행했다. 190551일 이후였으며, 마지막으로 1905<자유>(De Vrijheid) 이후였다. 이들은 모두 열의와 적성을 지니고 반군국주의적 계몽을 알렸다. 또한 젤라틴판으로 작은 회보도 제작했다. 물론, 젊은 수비대들은 대부분 삽화가 들어간 전단지와 벽보를 제작하는 고된 노동도 했다.9) 그들은 프롤레타리아 청년들과 특히 현재의 징집병과 군인들에게 건내줬다. 또한 소책자 판으로 방대한 문헌도 보유했다. 대부분 반군국주의 성격을 삽화한 저렴한 엽서를 대량으로 판매했다.

 

벨기에에선 무기를 소지할 수 있는 젊은 사람의 절반보다 더 무작위 추첨 제도로 병역을 기피한다. 매년 대략 13,000명의 남성을 소집한다. 대체로 플랑드르(Flemish)와 왈룬(Walloon)에서 한 번에 대략 6만 부의 <징병><병영>은 같이 발행한다.10) 원칙적으로, 이 신문들은 각 신병들에게 알릴 수 있도록 특수하게 게시하면서 신병들의 정보를 쉽게 얻고, 이렇게 선발한 신병은 선전가들이 대기하고 있다.

 

1월과 9월에는 정기적으로 신병들의 면회를 열면서, 여러 행사 및 행진과 시위들을 준비했다.

 

소집한 프롤레타리아들과의 연락도 잃지 않아왔다. “수비대들의 일부 지부들에서는 소집된 사람들에게 도움을 제공하는 체계를 확립해왔다. 소집한 수비대원들에게는 복무 기간 동안에 수당을 지급했다. 수당은 회원이 수비대에 소속한 기간과 가입한 금액에 따라서도 달랐다. 그 대신에 회원들은 막사에서 주요한 경험에 대한 정기적인 보고서를 제출했다. 징집된 회원들도 수비대와 개인적인 연락도 유지한다. 회원은 자신에게 특정한 기관이 있는 지역에서 복무하지 않는 경우에는 주둔지가 있는 지역의 기간과도 연락을 취할 수 있다. 이를 더 자세히 설명할 수 없는 이유는 당연하다.

 

병영들에 대한 지속적인 반대 운동은 벨기에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군인 조직들인 대략 15개의 군인 노조도 현존하며, 이들은 서로 협력한다. 물론 모든 수단을 동원해 숨 막히는 위협적인 불길을 잠재우려는 수고를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조직들을 자주 탄압했지만 늘 다시 박차고 일어났다. 왜냐하면 그들에 든든하고 건장한 뿌리들은 너무도 깊게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한 연대에 3분의 2가 조직하기도 했다. 일부 노조는 사회민주당과도 밀접하게 이어졌다.

 

 

 

선전물은 병영 내로 대량으로 유입했으며, 시내들이나 공공적인 장소에서도 병사들 가운데에 자주 배포했다. 병사들의 면회를 개최했다. 여러 반군국주의 병사들의 노래도 널리 돌아다녔다.

 

물론 당 자체적으로는 격렬하게 반군국주의 반대 운동을 계속해왔다. 그리고 여성과 소녀들은 특히 젊은 수비대들의 반대 운동에 적극적으로 활동했고 병영에서 반대 운동을 일어나게 했던 수고들도 성공적이었다.

 

1896년 여러 판으로 출판한 훈련병 문답집”(Le catechisme du Conscrit)이라는 반박문도 프랑스의 <병사 안내서>(the Manuel du Soldat)와 닮았으며, 후자와 마찬가지로 형사 법원에게 격심한 박해를 입었다는 사실도 같이 언급하겠다.

 

반군국주의 선전가들은 극심한 박해를 입고 있다. 1886년 안젤레(Anseele)는 부루이트(Vooruit)에 실린 어머니에게”(To Mothers)라는 호소문으로 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이 호소문에는 어머니들에게 소집한 자식들이 사람들에게 사격할 수 없게 자라도록 촉구했다.

<징병><병영>이 처음으로 출현한 이래로 잇따라 법원에 회부하고 있으며, 매년마다 이 기관지들에 대해 가혹한 판결을 선고했으며, “청년 수비대들이 이 두 기관지를 발표한 이래로 당연하게도 같은 사태들이 발생했다. 신병에 대한 시련적인 첫 사례는 1897년에 있었다. 두 명의 동지들에게 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한 재판이었다. 1904전국 청년 수비대 연맹의 사무관이었던 코넨(Coenen)은 이전에 브라반트(Brabant)에서 신병들에게 호소하는 벽보와 관련한 다른 다섯 동지들과 함께 배심원들 앞에 출두해야했다. <병영>의 기사로 인해서 코넨에게도 홀로 같은 사태가 발생했지만, 그러나 그는 무죄였다.11) 1890년대 중반에 <훈련병 문답집> 때문에 트로클레(Troclet)에게 내려진 판결도 특별하게 언급할 만하다.

 

처벌에 대한 주요 범죄에는 복종을 거부하고 소집한 사람들에게 군대를 모욕해서 6 개월 징역형이나 적어도 처벌까지 부과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악명 높은 강제력에 대한 침해” (atteinte à la force obligatoire)에는 법적인 권위를 침해했다는 원칙으로 5명 이상이 같이 공모한다면 구속해서 처벌을 두 배로 부과했다. 매년 평균 총 24개월에서 36개월에 이르는 징역형을 선고한다. 1903년 전국 연맹 서기관에게는 3년 징역형을 선고했다. 확실하게 피고인 중 절반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수감자들이 복역하는 체제에는 원칙적으로 정치범과 비정치범을 구분하지도 못하는 가혹한 체제다.

 

당시 벨기에 기준에서 보면 반군국주의자 병사들에 대한 처우는 비참했다. 가벼운 위반에 대해 야만적이고 중세적인 징계를 형벌하고, 지하 감옥에서 수감자를 쇠창살에 가두고 불도 없는 감방에서 빵과 물만 먹는다. 방은 강 위에 지어졌고, 습기로 축축하며 겨울에 그 효과는 대부분 치명적이다. 또한 감옥에서 교도관을 담당하는 경사들이 가하는 정말로 심각한 학대는 하루의 관례다.

 

벨기에가 불과 칼들로 대부분에 완전한 승리를 거뒀다고 자랑할 반군국주의 선전을 얼마만큼 성장할 수 있었는지는 이전부터 언급해왔다. 비판적인 해인 1902년에 시내에서 병사들 가운데서 공공연한 선전을 장교들은 막고자하면 습격을 가했을 정도로 전 국민은 자주 선전에 큰 흥미를 보였다.

 

낡은 군대 조직”(Groupes des anciens militaries)12) 이전에 전국 연맹으로 조직했지만 현재는 지역 기관들로 번성하고 있으며 일간지도 발행하고 있다는 걸 언급하고자 한다. 예비군과 방위군에게 반군국주의 선전과 부르주아 군사회에 맞서는 선전은 주요한 과제다.

 

벨기에에서 얻을 수 있는 태도를 한 마디로 추가하면 전술적인 시점으로 군국주의에서 사회민주주의로다.

 

전쟁에서 대처하는 태도에 대해서 이의제기들은 존재하며, 무엇보다도 전쟁이 발발했을 때 어느 전술을 취해야하는지에 대해서도 만장일치란 없다. 다음에 세 가지 사실만을 언급하고자 한다. 1893년 겐트(Ghent)에서 개최한 당 대회에서는 네덜란드 사회주의자들이 제안한대로 전쟁이 발발한다면 군사적 파업을 승인해 달라는 암스테르담의 전직 군인들이 수신한 전보에 대해서 열성적으로 승인을 표시했다. 1905년 샤를루아(Charleroi) 지부의 사회주의 연맹은 전쟁을 막고자 다음을 결의했다.

 

(1) 군대를 동원하지 못하도록 철도원 노동자들의 총파업을 모은다.

 

(2) 해군과 병력 수송에 필수적인 연료를 교전 중인 국가로부터 박탈하고자 탄광에서 총파업을 조직한다.

 

(3) 전쟁에서 군수품을 위한 공장들과 병기고, 부두에 공구들을 내려둔다.

 

젊은 수비대들”(the Young Guards)의 역사도 이에 대한 주제에서 흥미로운 불빛을 던져준다. 그 중에서도 1897년 회담에서는 전쟁을 막고자 이외의 나라들에서도 국제적이고 반군국주의에 기반을 둔 젊은 사람들로 사회주의 정당들을 조직할 수 있도록 제안하기로 결정했다. 또한 1903년 브뤼셀(Brussels) 회담에서의 논의들도 중요했다. 극심하게 반대하던 두 가지 견해들은 거의 동등하게 모아졌다. 드 만(De Man)은 헤르베(Hervé)의 주장들과 집단적 병역 거부에 따른 군사적 파업, 총파업, 전쟁이 발발할 시에 혁명적 반대 운동을 지속하는 그의 제안들에 모아진 견해를 힘차게 옹호했다. 여타의 견해로는 트로클렛(Troclet)과 피셔(Fischer)가 지지했는데 트로클렛과 피셔는 국제적인 회담의 결의안을 한번에 지지했다. 트로클릿과 피셔의 결의안은 찬성 17, 반대 15, 기권 2표로 통과했다.13) 19061월에 열린 겐트(Ghent) 회담에서 무정부주의 전술은 완전하게 빗나가서 개인에 따른 병역의 거부는 또 거부했다. 드 만이 제시한 동의안은 군인들에게 프롤레타리아 계급 의식을 일깨우고 지배 계급에게 군대라는 권력적 수단들에서 구해낸다는 걸 지적했다. 드 만에게 여타의 동의안에는 군대도 자국의 적과 맞설 수 있는 목적을 기술했다. 반군국주의 선전의 관계에서도 해볼 수 있는 만큼 군인들도 움직일 수 있도록 조언했다. 이로부터 무정부주의적 잔재는 털어내고 모든 애매모호한 수단들은 쓸어내렸다.

 

 

프랑스

 

프랑스에선 반군국주의 선전을 오래해왔고 매우 활발하기도 했지만 벨기에만큼 잘 조직하지도 그 추세도 벨기에와 닮아있지도 않았다. 1894년 디종(Dijon)에서 개최한 제12차 사회주의 혁명 노동자 당(P.O.S.R) 대회에서는 군국주의에 맞서는 주목할 결의안을 채택했는데 여기에는 두 가지에 해당하는 군국주의의 해악과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군국주의에서 흔한 위험을 강조했다. 결의안의 결론은 다음에서 이어진다. “평화로운 시기에는 상비군은 경찰 병력을 제공하고 권리를 위해 싸우는 광부와 공장 노동자들의 투쟁을 피로 흥건하도록 물들이는 사격 기계를 자임한다. 그리고 어리석게도 격노하던 프롤레타리아 병사는 파업 중이던 형제에게 달려든다.”

 

사회민주주의적 반군국주의와 무정부주의적 반군국주의는 함께 발전했고, 반애국적인 사회주의적 반군국주의는 프랑스에서 특수한 변화로 후에 이탈리아와 스위스에도 그 인상을 줬다.

무정부주의자와 준무정부주의자 반군국주의는 주로 주간지 <현시대>(Les Temps Nouveaux)와 다수의 출판물에서 자주 지지했는데, 가끔 독창적이고 대부분은 종이 자체와 같은 프롤레타리아 견해에서 사물을 부분적으로 본다. 소중한 내용들을 담아냈고 크로포트킨만이 아니라 특히 노동조합주의자였던 폴 델레살레(P. Delesalle)도 기록했었다. 여기에는 독립적인 절대적 자유주의자(individualist Libertaire)들의 출판물들도 추가해야한다. 후술하겠지만 국제적인 반군국주의 연맹도 1902년 프랑스 무정부주의자들이 창설했으며, 그보다 조금 이르게는 파리에 본부를 둔 병사의 보호를 위한 국제 연맹(Ligue internationale pour la defense du soldat)이 있다.

 

이후에는 탈퇴했던 걸로 보이나 이 연맹에 참여했던 지식인으로는 무정부주의자였던 얀비옹(Janvion), 말라토(Malato), 급진주의 신문 오로레(Aurore)의 편집자던 조르주 르미트(Georges Lhermitte), 우르뱅 고히에(Urbain Gohier) 등이었는데, 이들의 계획은 상비군 철폐, 군 사법제 폐지, 병사들에 대한 물질적 보장과 개선 확보 등을 목적으로 했지만 이 활동은 너무 지나쳤다. 연맹의 참여자들이 발행했던 그림 엽서, 소책자, 전단지에는 자주 강렬한 삽화를 그렸으며, 지속적으로 군사적 정의여 물러나라!”(A bas la Justice Militaire!) “전쟁도 물러나라!”(Down with war!)라는 군국주의도 물러나라!”(Down with militarism!) “민족들의 평화여 영원하라!”(Long live the peace of nations!)라는 표어를 내걸고 전쟁 구호도 외쳤다. 이 연맹의 참여자들은 프랑스를 지나서 마아도 그 영향을 언제나 확장한 적은 없었다.

 

이 선전은 물론 일관성은 없지만, 개인적이고 집단적으로 군 복무를 거부하고 탈영에 대한 활동들이 큰 부분을 차지한다. 크로포트킨에 따르면14) 전쟁에 반대해서 시작될 군사적 파업은 단지 수동적인게 아니라 사회적 혁명과 해외의 적들에 맞서 혁명을 수비하며 상호적으로 간다. 이는 반애국주의, 또는 <새로운 시대>(Temps Nouveaux)에서 말하는 반민족주의에 대한 주요한 반론들을 반박하고자 했다. 테러리스트 무정부주의자였던, 에밀 헨리(Emile Henry)18928월 카르모(Carmaux)에 악명 높은 폭탄을 투척해서 잘 알려졌으며, 전년도에 푸르미에(Fourmies) 대학살의 반복을 경고하고 막고자 이를 완수했다.15) 대다수의 무정부주의적 특성은 저버린 반애국적 반군국주의 사회주의자는16) 한편으로 통합 사회주의노동당 연합 내에서 실질적인 농업에 종사하는 요느(Yonne)17) 연맹에게서, 또 한편으로는 반의회적인 노동조합 내에서도 강하게 흐르고 지지했었다. 파업 중인 노동자들에게 가장 참혹하면서도 강력한 적이자 자국의 적들에 맞서 군국주의와 투쟁을 직면하는 노동 조합의 사례에서도 반애국주의가 뒷자리를 차지하는 건 매우 논리적이다.

 

1901년 이래로 요느의 젊은 사회주의자(the Jeunesses Socialistes) 기관들은 1900년 통과한 결의안에 따라서 <요느의 병사들>(Pioupiou de Yonne)18)이라는 신문을 발행했다. 첫 번호들의 서두에다가 연대에 입대하도록 소집한 사람들을 위해라고 특히 명시했으므로 반 년마다, 그리고 분기마다 계간지로 발행했었다. 이 계간지로부터 모든 국가를 유지하던 요소들을 제멋대로하고 멈추게하고자 부서의 모든 징집병들에게 무료로 배부했다. 파업 노동자들에 대한 무력 사용 명령이 있었는지를 밝히라는 요구들은 최대한 분명한 방식으로 법적 기소도 쏟아졌지만 대체로 무죄를 선고하는 걸로 끝이 났다.

 

1905년 모네(Moneret)가 여전히 출판했던 <요느의 병사들>은 이베트(Yvetot)와 나란하게 반애국적 반군국주의의 정신적 지주이자 조직자였던 헤르베(Hervé)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헤르베는 190612월 중순부터 파리에서 주간지인 <계급투쟁>(La Guerre Sociale)을 발행하고

작품인 <그들의 조국>(Leur Patrie)에서 자신의 발상을 세부적이고 숙련적으로 공개하고 공식화했다. 이는 반군국주의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을 도왔다. 헤르베는 전쟁이 어떻게 발발했는지 간에 전쟁보다는 반란”(“plutot l’insurrection que la guerre”) 외에는 별다른 해결책은 없다고 알았으며, 침략적인 전쟁들의 문제에 대한 독일 사회민주당 지도자들의 태도를 가장 맹렬하게 비난했다.20) 그는 결코 개인적인 군 복무 거부를 옹호하진 않았다. 그의 사례에서 자국에서 군국주의와 투쟁은 다소 뒤로 밀려났다. 훌륭하게 인정할 희생에 대한 끈기와 채비로 투쟁을 지속하는 헤르베주의에 대해서는 다른 지면에서도 다루겠다.

 

 

1906930일에 발생한 사건은 헤르베의 선전에 독자적인 사건이었다. 그 날은 헤르베와 그의 지지자들은 3구의 젊은 공화당원들과 프랑스 교육 연맹 참가자이 주최하고 트로카데로(Trocadero)에서 개최한 행사에 참석해서 군대에 소집된 사람들에게 경의를 표했다. 이들은 애국적인 군사 축제에 맞서 시위를 벌이다 경찰과 격돌해서 체포되었다.

 

 

 

 

1903년 더블린 노동조합 회담 이전에 서기들이 제출한 보고서에서 노동조합총연맹은 노동조합의 반애국적 반군국주의적 개요를 잘 전달했다, 이는 헤르베주의와 강한 대조를 이루며 해외의 적에 맞서는 군국주의의 뜻을 일방적으로 과소평가했다.

 

이 보고서에서 반군국주의의 교육적인 연구의 방법들에는 다음으로 구분해볼 수 있다.

 

(1) 연대의 노력

 

(a) 병사들의 임금 (Sous du soldat)

 

(b) 노동조합 지부들의 호의적인 환영

 

(c) 군 복무를 기피하거나 규율에 맞서 반대한 피해자 동지들과 연대.

 

선전 노동 공개 면회, 사교의 밤들, 징집병들을 위한 송별회들”, 행진들, 벽보들, 선언문들, 소책자들, 전단, <사람들의 음성>(Voix du peuple)에 삽화한 연례 특별 호, 프랑스 노동 조합 연맹의 기관은 1900년 이래로 출판해서 대다수를 배부했으며 드디어 군 복무의 의무를 져야하는 사람들에게 우편으로 자주 발송했으며, 마지막으로 1903년에 군인들의 새로운 소책자인 <최신 병사 안내서>(Nouveau Manuel du Soldat)는 이미 100,000부를 배포했고, 알려진대로 이전에 사회주의자! 밀랑(Millerand)의 승인을 얻어서 집행부와 재판 당국들에 적극적인 개입을 이끌었다.

 

<최신 병사 안내서>1902915일 알제리의 알제에서 열린 노동조합 총회의 결정에 따라서 출판했으며, 같은 해에는 이미 노동조합 연맹의 두 번째 판을 출간했고 1905년에는 세 번째 판을 출간했다. 이 소책자는 징집병들에게 탈영하거나 병영 내에서 반군국주의 선전을 지속하도록 호소하고, 현역병들에게 명령을 받더라도 자국의 적인 형제인 노동자들에게 발포하지 말라고 호소한다.

 

사회주의자혁명노동당의 전신인 <계급투쟁>(La Lutte Sociale)도 여기서 또한 언급하고자 한다. 이 신문은 알레마네(Allemane)와 헤르베(Hervé)중앙 연방 연합을 위해 출판했는데, 아마도 1904년에 마지막으로 반군국주의 선전에 전념했다.

 

1905년 사회주의자들과 노동조합주의자들은21) 병사들에게 병기들을 프롤레타리아에게 돌리지 말고, 명령을 받으면 자신들의 계급적인 동지들보다 지휘관들에게 돌리라는 내용의 붉은 포스터를 다같이 배포했다.

 

마지막으로, 반군국주의 선전은 1903년 프랑스 세 정당들이 개별적으로 청년 사회주의 조직

(Jeunesse Socialiste)을 가질 때까진 프랑스 청년 사회주의자 조직의 주요 목적이었다. 1902년 이래로 혁명적 노동조합들로 생겨난 젊은 노동조합주의자(the Jeunesses Syndicalistes)도 설립했다. 현재 그들은 다소 혼돈스러운 상태에 있다.

 

요느(Yonne)의 젊은 사회주의자 기관의 활동은 위에서도 다루었다. 1900년 이래로 1906년에 발행한 <징병>이 혁명적 젊은 사회주의자들의 신문에 기관지로 출현한 이후로, <병사의 연대기>(La feuille du Soldat)노동당의 젊은 사회주의자 연맹”(Union federative des Jeunesses Socialistes du Parti Ouvrier)의 기관지로 실렸다. 두 기관 모두 군복을 입은 프롤레타리아들의 계급적 동지들에게 의무를 생각하도록 호소했다. <병사의 연대기>는 노동자들과 맞서 병기들을 들라는 명령이 내려져도 복종에 거부하고 총파업을 선언한다면 총파업에도 가담하기를 공개적으로 촉구했다. <징병>은 개인적인 폭동들로는 서툰 짓이라고 힘차게 거부했다.

 

 

190610월 아미앵(Amiens)에서 개최한 노동조합 회담에서 델레살레(Delesalle)는 이전에 노동조합 회담들이 올바르게 반군국주의와 반애국적 선전에 찬성을 선언했던 걸 지적하면서, 그런 선전은 위원회에서도 만장일치로 추천했다고 전했다. 같은 회담에서 이베토(Yvetot)가 발의했던 결의안도 채택했지만, 더욱 격렬하게 반군사주의와 반애국적 선전을 옹호해서 주로 대부분은 분명하게 반대했다. 소수자들은 반군국주의나 더욱 단호한 반군국주의 선전을 반대했다는게 아니라 단지 반애국적 선전을 강조하고 치중하는데에 대한 반대를 분명하게 했다. 190611월 리모주(Limoges)에서 개최한 프랑스의 사회당 연합 회담에서도 같은 사실을 분명하게 했다. 요느의 연맹에서 반애국적인 견해를 공식화하고 난 후에 동지들에게 어느 편에서든 모든 전쟁의 선포에는 군사적 파업과 반란으로 대응하기를 호소하기를 내세우던 헤르베의 결의안은 표결이 적었다. 그러나 게스데(Guesde)가 발의했던 결의안도 군국주의의 조직적인 자본주의적 성격을 강조하면서 대체로는 사회민주주의적 선전만이 단독적으로 실현할 수 있다고 봤으며 당분간은 복무기간 단축, 군가산점 거부와 민병대 도입을 요구하고 3배나 달하는 상당한 소수자들의 반대에 부딪쳐 부결했다. 바양(Vaillant)이 발의했던 센강(Seine)의 연맹에 대한 결의안은 채택했다. 이 결의안은 국제 회담에서 승인했던 원칙을 명시한 후에 모든 전쟁을 막고자 국제적으로 행동할 준비를 요구하고, 의회적 개입과 공개적인 선동 및 시위에서 총파업과 반란에 따른 모든 행동들을 상황의 요구에 따라 행사할 의무로 규정했다. 1906년 초에, 알다시피 바일랑(Vaillant)전쟁보다는 반란!”(“Plutôt l'insurrection que la guerre!”)이라는 전쟁 구호로 마친 모로코 분쟁에 대한 원인을 그의 유명했던 선언문을 <사회주의자>(the Socialiste)에 발표했다. 자국의 적에 맞서는 군국주의와 관련한 결정을 내리진 않았다. 동시에 이외의 시위 운동들은 프랑스 사회민주주의가 취하고자 했던 태도를 명백하게 드러냈다. 이는 고용한 파업과 노동자들과 맞서면서 병사들은 복종을 거부하고 호소하라라는 구호를 내걸었다. <병사 안내서>(the Manuel du Soldat)에선 병사들에게 다음과 같이 호소했다.

 

 

 

그대를 살인자로 꾸미고자 한다면 복종을 거부하는 건 그대의 의무다.

파업에 반대하라는 명령이 내려진다면 그대는 쏘지 말라!”

 

 

 

유명한 구호인 그대는 쏘지 말라!”(Vous ne tirerez pas!)190512월 반군국주의자들에 대한 대규모 재판 동안에 메슬리(Meslier) 동지가 법정에서 이 구호를 사용했다. 이 구호는 스스로 노동조합주의자로 부르든 사회주의자라고 부르든 간에 오직 계급의식을 프랑스의 노동자들에게 전반적인 전쟁에게 소리친 메아리였다. 1905년 노동조합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이 연대적으로 소집한 군대에게 발표한 호소문에는 가장 철저하고 두려울게 없는 물음의 해결책을 이미 언급했다. 이 호소문에는 소집한 병사들에게 노동자들에 맞서 병기를 내려놓고 파업 노동자들에게 발포 명령이 내려진다면 지휘관들에 맞서 소총을 맞겨누도록 요구했다. 이 호소문을 회의실에서에서 논의했을 때 셈바트(Sembat)는 사회주의자들의 이름을 대면서 나에게 장교들을 사격하라는 조언에 대해 내 견해가 무엇인지를 물었다.” “내 대답은 사례에서 한 장교가 파업 노동자들에게 발포 명령을 내린다면 이 조언을 찬성한다고 했다.” 라파르그도 <인류>(L'Humanité)에서 이런 견해를 돌림 없이 되풀이해서 지지했다. 바로 얼마전까지 프랑스에서 반군국주의자에 대한 대부분의 재판들은 거의 자주 무죄 판결로 이어지는데 선전이 큰 도움을 주었다. 열 번씩이나 무죄 판결을 받았던 이베토(Yvetot)도 결국에는 1904년 루아르(Loire) 남부에서 배심원으로부터 반군국주의 연설과 연관해서 유죄 판결을 선고받고 100프랑의 벌금을 물었다. 후에 그는 감옥 생활에서도 적응했다. 1905년에는 두 명의 무정부주의자들이 엑스(Aix)에서 체포됐다. 그들 중에 한 명은 반군국주의자와 마르세유(Marseilles) 성벽에다가 반군국주의 선언문을 부착했다는 죄목으로 3개월의 징역형을 선고했다. 모렐(Morel)과 프리마트(Frimat)는 유죄 판결을 받아 징역형을 선고했으며22), 브레스트(Brest), 아르망티에르(Armentières)와 리모주(Limoges)에서도 징역형을 선고했다, 1906년 봄에는 툴롱(Toulon)과 랭스(Rheims)에서도 유죄 판결을 선고했다. 훈련병을 위한 <사람들의 목소리>(the Voix du Peuple) 특별 호는 거듭해서 몰수했고 190610월에는 편집자였던 비노(Vignaud)도 체포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190512월 파리에서 대규모로 열린 반군국주의 재판에서 헤르베(Hervé)는 다른 25명과 함께 총 36년의 징역형과 2,500프랑에 달하는 벌금형으로 유죄 판결을 선고했으나 이 가혹한 판결은 완전하게 집행하진 않았기에 주목하고자 한다.

 

프랑스는 반군국주의 선전의 방대한 소책자 인쇄물을 보유하고 있다. <새 시대>(Temps Nouveaux) 외에도 <사회주의 선전 출판사>(Librairie de Propagande Socialiste), <새 사회 출판사>(Société Nouvelle de Librairie et d' Edition)의 조르주 벨레(Georges Bellais) 판본, <사회당 출판사>(the Librairie du Parti Socialiste, S.F.I.O.), 그리고 파리의 스톡(Stock) 출판사는 이런 소책자의 출판물을 발행하는 신호들을 보냈다.

 

프랑스에서 반군국주의 선전은 중요한 성공을 거뒀다. 이에 대해 반군국주의를 공개적으로 수용하고 너무나도 큰 자포자기의 결과를 허용하는 장교가 있다는 사실을 높은 기준으로 둘 순 없다.23) 이런 개별적인 행위에는 러시아와 반대로 프랑스에선 반군국주의를 고려해보기에 단순히 프롤레타리아 계급 운동과 관련해선 흥미가 적다. 더욱 중요한 건 탈영, 복무 혹은 복종 거부 그리고 반군국주의 시위를 벌이는 군인들의 수가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독일의 조건이라는 입장에서 보기에 이 사례들은 매우 가혹하고24) 때로는 놀랍도록 가볍게 판결을 통과한다. 190610월 쉘부르(Cherbourg)에서 열린 군사재판에서 두 해병은 애국 기념비 앞에서 군대는 장교와 같이 떠나라, 군대는 필요도 없다라고 큰 소리로 외쳤다는 죄목으로 각자 15일과 60일의 징역형을 선고했다. 몇 가지를 세부적으로 들어보도록 하겠다. 190553, 32 보병 연대 10중대 61명의 병사들은 열악한 음식과 학대 때문에 병영을 나와서 인근 지역으로 갔다. 19069월에 군인들은 콩피에그(Compiègne) 주둔지에서 예비군의 자살과 관련해서 시위를 준비했고, “인터내셔널가를 부르고 장교들을 모욕했다. 19068월 초에 <번개>(Éclair)는 에티엔느(Etienne) 군단장들에 대한 국방장관의 회람을 출판했다. 그는 생 마이상(Saint Maixent)25) 보병학교를 떠날 때 병장들이 반군국주의를 표명했고, 반군국주의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모으고자 군대에 남았다는 사실을 기록했다. 무엇보다도 덩케르크(Dunkirk), 크루소(Creusot), 롱위(Longwy)(메르하임!), 몽슈아울레 (Montceaules) 탄광에서 다수의 파업들이 발생하는 과정에서 개입에 소집한 병사들이 파업 노동자들과 연대를 선언했다는데 주목해야한다. 신문기자였던 루앙(Nouvelliste de Rouen)이 군대에 관해서 사회민주주의를 과감한 치료를 요구하는 프랑스의 몸에 매우 위독한 상처라고 언급한 건 놀라울게 없다.26)

 

독일 개념들에 따르면, 국방장관이던 에티엔(Etienne)은 좀 전에 언급한 회람에서 반군국주의의 위험과 이를 대처하는 방법에 대해 설득할 때는 지나치게 온건적인 언어를 사용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프랑스에서 의사 표현의 자유라는 헌법적인 권리와 관련해서도 반군국주의에 따른 상당한 폭을 자주 넓힐 수 있었다는 사실도 부인할 수 없다. 반군국주의 재판들에 대한 보고서들은 이와 관련해서 매우 유익하다. 불과 몇 년 전에도 사회주의자 푸르니에(Fournière)는 장교를 위한 과학기술 전문 학교에서도 사회적인 정치들에 대해 강의할 수 있도록 승인한 걸 상기해볼 수 있다. 그리고 바로 최근에는 드몽(Demonge) 대위가 파리의 사회과학 대학에서 사관들을 위한 강연에서 군국주의에 맞서 거침없이, 그리고 가장 혁명적인 방식으로 연설한 건 엄격하고 편협한 군국주의자들을 전율하게 했다.

 

비리비”(biribi)에 대한 군사적인 정의의 범위에서 임박한 제한과 더불어서 정부가 제출한 법안에 관해서는 민방위와 예비군의 복무 기간의 단축을 비록 부결했지만 장교와 부사관들의 공통적인 기원(unité d'origine)인 장교단들을 민주화하려는 피카르트(Picart)의 계획은 프랑스가 군국주의의 보물섬(El Dorado)으로 보이게 했다.27) “사회주의자들이 두 명인 내각에서 대통령인 클레망소(Clemenceau)의 태도는 반군국주의지만 한때 사랑으로 즐거웠던 모든 사회적인 낙관론자들이다. 이전에 설명했지만 이는 군국주의의 성격을 바꿀 수 있는 물음은 아니라는 걸 드러낸다. 군국주의, 그러나 대체로는 반교권주의 때문에 그 외곽만을 바꿀 뿐이다.

 

이탈리아

 

이탈리아 노동운동의 여러 부문들은 프랑스의 노동운동과도 어느 정도는 닮았다. 여기선 또한 정식적인 정당 운동과 함께 반애국적인 노동조합주의자 운동들과 무정부주의와 밀접하게 관련한 반의회적인 무정부주의자 분파들을 알아낼 수 있다. 반군국주의 운동도 이런 구분들에 따라서도 다르게 드러난다. 이탈리아의 운동은 최근은 아니지만 당과 체계적으로 손을 잡은 건 얼마 전에야 이루어졌다. 우선, 젊은 사회주의 기관들과과 무엇보다도 로마의 지방 연맹들에 본부를 둔 전국 젊은 사회주의 연맹”(Federazione Nazionale Giovanile Socialista)을 언급하고자 한다.28) 이 연맹은 벨기에의 젊은 수비대”(Young Guards)와 마찬가지로 반군국주의 분야에서 첫 연맹에서 활동해온 파올로 오라노(Paolo Orano)가 편집하는 <젊은 사회주의자>(Gioventu Socialista)를 발행했다. “

 

장래 징집병들의 연맹”(League of Future Conscripts)1905년 국가적인 연맹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보조적인 특수한 반군국주의 기관에서 설립했다. 이 두 기관들은 모두 당에서도 인정했다.

 

190510월 로마에서 개회한 당 집행 위원회 회담에서 페리(Ferri)가 발의한 결의안은 단 한 명의 위원만이 반대표를 던졌고 통과했다.

 

집행 위원회는 최근에 반군국주의 시위들과 연관해서 사회주의자들과 출판사를 기소한 경찰에 맞서 열중해서 기록하고 배상을 요구해서 항의했고 젊은 사회주의자 기관들은 정당에서 승인한 반군국주의 선동을 지속하고자 했고 정당에서 전부 결의에 집행 위원회도 협동해서 선전의 일부분을 이루었다. 군사적인 관리부에 막대한 국가 화폐를 낭비하고 있다는 여론을 깨우쳤을 뿐만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징집병들과 군인들에게 국방의 의무를 다하지 말고 자국에도 자주 얼룩을 번지게 하고 악명이 높기에 노동자들을 살해하는데 가담을 거부하도록 견문을 넓히고자 했다.

 

그 외에는 이탈리아 로마의 당 대회에서 반군국주의 선전의 전반적인 활동을 알렸다. 반군국주의는 특수한 의제이기도 했다. 두 가지 발의안 중에는 노동조합주의자인 비앙키(Bianchi)사회당 제9차 회담은 군국주의에 대한 논의에서 이탈리아의 젊은 사회주의 기관들의 활동과 형태들을 지지한다.”<아반티>(the Avanti)의 편집자 로무알디(Romualdi)당 대회는 당의 반군국주의 전통들을 동의한다.”는 내용으로 소개했고

 

부르주아지가 자본가와 노동자들 간의 투쟁에서 군대가 순수하게 중립을 지켜야한다는 걸 인정하기를 거부한다는 사실에서도 이와 관련해서 파업 방해자들에게 노동자들을 살해하는 걸 막고 분쟁들에서 젊은 노동자들이 병기들에 의존해서 파업 파괴자를 그만두도록 설득하는 목적에서 선전을 시작하는게 필수적이라고 여겼다. 동시에 당 대회에선 보복하고자 하는 군인들에 맞서고 파업 중인 노동자와 군인들을 형제애라는 공동의 유대가 하나로 묶어준다는 걸 입증하기 위해서 군대들에 폭력을 행사하기를 그만두도록해야 한다는 생각을 노동자들 가운데 선전으로 널리 알리는게 필요하다고 숙고했다.

 

 

반애국적인만큼 반군국주의 무정부주의자도도 논의에서 기술했다. 그러나 좁은 의미에서 사회 민주적 반군국주의가 우세하는 동안 군인들 가운데서 반군국주의 선전은 브레멘(Bremen)의 독일 사회 민주당 회의에서 쓰는 비슷한 주장들을 한 소수만이 반대했다. 젊은 사회주의 기관들의 대리자들은 동지들이 헤르베(Hervé)적인 의식에서가 아니라 군비 지출을 줄여나가고 군인과 노동자 간의 연대의식을 일깨우고자 반군국주의 선전에 돌입했다는 걸 분명하게 했다. 마지막으로 페리(Ferri)와 투라티(Turati)의 발의안을 따라서 결의안을 표결로 부치진 말고 당 집행부에게 이 문제를 맡기기로 결정했다. 한편, 이번 회담에서 특히 중요한 건 압도적 과반수가 채택한 페리의 이른바 통합주의자해결책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을 언급했다.

 

당은 정부의 성직주의가 커지고 있다는 현재적인 상황의 전망에서 반성직적이고 반군주적인 선전을 강화하고, 사회주의를 이탈리아 젊은이들에게 길러서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맞서 직접적인 강압의 도구로 군대를 투입하기를 원하는 지배 계급의 추세를 무효하게 하는 목적들로 반군국주의 선동을 강화하고 실질적인 활동을 발전하고자 한다.”

 

이탈리아에서도 반군국주의 선전으로 군대를 자국의 적들에 맞서 쓰이는 무기로 신뢰할 수 없게 했으며, 또한 계급 정의로부터 다수의 재판들과 가혹한 처벌의 수단들에 민간인 반군국주의자들과 군대 내에 반군국주의자들 모두가 싸웠다. 1905년 토리노(Turin)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잘 알려졌다.

스위스

 

파업들에 투입하는 군인들과 더 자주 손에 손을 잡으면서 스위스에서 반군국주의는 급속도로 확산하고 있다.

 

190310월 올텐(Olten)의 스위스 사회민주당 회의에선 전쟁에 대한 관례적인 태도와 군사적 헌법에 국가와 주민들의 권리들과 의무들을 분명하게 결정할요구들의 결의안을 계속해서 작성했고 파업들에 군대의 투입을 묵인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이 결의안에 대한 불만은 19044월 루체른(Lucerne) 당 회의를 소집하도록 이끌었고, 이 회의에서는 앞서 다음과 같은 요구를 제시했다. 군사적 지출의 대폭적인 삭감, 100만 프랑을 초과한 지출에 관한 사람들의 결정, 군인들을 더 나은 군사적이고 경제적인 지위로 배치, 군사 재판 폐지, 파업들에 군대들 투입 금지.

 

당 대회는 이런 목적에 도달하기 위해선 모든 수단들을 행사하는게 당의 의무라고 성격을 나타내면서도 무슨 수단들로 쓸 건지는 더욱 분명하게 내비치지 않았다.

 

라쇼드퐁(Chaux de Fond)과 리켄(Ricken)에서 파업들에 군사적인 개입은 더 광대한 활동과 더 분명한 전쟁 구호를 채택하기를 요구했다. 열띤 집회들을 개최했고 노동조합 연맹 위원회는 1904915일 이 같은 문장들을 담은 전단지를 발행했다.

 

그러나 어느 사례에서도 병사들은 동료 노동자들에 맞서 사격을 중지하고 병기들을 내려놓고 그럴 때에 복종을 거부할 뿐만이 아니라 모든 수단을 다해서 살인을 막고자 시도해야 한다. 오직 그럴 때만이 그들은 군복을 입은 군인들도 처음에는 주민이었다.’라는 연방 헌법의 정신에 따라서 우리와 행동하고자 한다.”

 

뒤이어 취리히(Zurich)에서 개회한 당 회의에선 다음과 같은 결의안을 통과했다.

 

사회민주당은 파업들의 사례들에서 군인들을 소집해서 파업에 동원할 때는 파업 중인 노동자들과의 연대를 마음에 새기고 계급적인 동지들을 모아 파업할 권리를 수포로 돌릴 수 있는 행동에 동원하는 걸 허락할 수 없도록 한다.”

 

이어서 제네바(Geneva)의 당 대회에서 집행 위원회는 다음 당 대회에서 제출할 군사적 물음에 대한 결의안 초안을 작성하도록 알렸다.

 

그 동안에 반군국주의 선전은 조직화하고 체계화했다. 1905년에 스위스 반군국주의 연맹(Swiss Anti militarist League)을 설립했는데, 목적은 다음과 같다.

 

1. 부르주아 사회 내에서 군대는 노동자의 해방을 방해하고자 한다는 사실을 노동자들에게

계몽한다.

 

2. 자본가들의 권력 수단들을 위한 군대를 무해하게 하는데 적합할 수 있는 어느한 방법들도

옹호한다.

 

 

연맹은 190510월에 첫 회의를 개회했으며 이후로도 빠르도록 성장했다. 노동자들의 기관들에게 보내는 전단지들과 농업과 산업 노동자들에게 보내는 소책자들을 발행하면서 훌륭하게 활동을 해나갔다. 소책자들 중에는 대부분 고전이 됐지만 널리 배부했던 작은 작품으로 <자본주의의 감시견>(The Watchdog of Capitalism)에 대해서 특히 언급하고자 한다.

 

 

19061월에 개회한 루체른 회담의 결의안을 따라서 중앙 도서관과 헤르베의 <그들의 조국>(Leur Patrie)에 번역을 위한 준비를 이뤘다. 또한 연맹은 반군국주의 선전에 노련한 솜씨를 쏟은 <전초>(Vorposten)도 발행했다.29) 해외의 적에 맞서는 군국주의의 물음에 연맹에게 비판을 불러 온 태도로는 즉 사회주의의 단독적인 승리만으로도 전쟁을 물리칠 수 있겠지만, 승리를 얻기 전에는 소유하려는 계급들의 명령을 따라서 소유하지 못한 계급들 간의 상호적인 학살을 막고자 무언가라도 해야만 하고, 이 사례에서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건 군사적 노동력의 철수”, 그러니까 군사적 파업이다. 자국의 적에 맞서 군국주의의 물음에 관련해서 자연스럽게 호소문에 동의하게 한다. 쏘지 말라!(Vous ne tirerez pas!).30) 분명하게 첫 제안은 자본주의에 훨씬 덜 무례하고 특히나 스위스에서, 후자로는 부르주아지가 좋아하는 마키아벨리적 책략을 따라 이런 추세에 애국적인바람과 선전으로 조국을 회피하고” “해외의 적에 대한 국방을 훼손하고 국가적인 반역자로 분개하고 눌러서 바람을 불게 해 정치적 시위를 거스르는 맷돌을 돌려 고생하게 한다. 19062월 아라우(Aarau)의 당 대회는 매우 흥미로운 반군국주의 논쟁의 장소였다. 스위스에서도 특히 해외의 적에 맞서 군 복무를 거부하고 군사적 파업의 생각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밝혔다. 다음과 같은 중요한 결의한을 통과했다.

 

“1. 스위스의 사회민주당은 다른 나라들의 사회민주당과 공동하게 문명화한 민족들 가운데 전쟁의 모든 기회들과 전쟁의 도구들을 폐지하고자 최선을 다하며 국제적인 분쟁들은 중재 법원에서 해결하도록 요구한다.

 

2. 이런 형세에서 중부 유럽의 사람들 가운데서 확립할 수 없다면 당은 외부로부터의 공격으로부터 나라를 수호하고자 정해진 독립적인 민병대만을 수락한다.

 

3. 당은 파업들에 군인을 고용하는 데 항의한다. 근래에 몇 년 동안에도 군인들을 부당하게 고용했으며 당은 그런 관례를 반복할 수 없도록 보증하고자 요구하며 선서한다.

 

이런 보증들이 곧 나올 수 없는 동안에도 당은 병사들에게 파업 노동자들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리라는 복종을 거부하고 또는 병기를 들어 파업 노동자들과 맞서라는 명령에도 복종을 거부하기를 권한다. 사회민주당은 닿을 수 있는 한 피해를 입은 개인과 가족의 재정적인 상태를 덜어주고자 최선을 다하면서 이를 위해서 노동조합 기관들과도 통신하고자 한다. 당은 파업 시에도 군대 고용에 대한 최상의 보증을 코뮌과 주 모두에서 정치적인 힘을 강화하는 데 있다고 밝힌다.

 

4. 당은 일반적인 군 복무에 기반해서 민주적 제도들과 조화를 이루고 헌법 아래에서 모든 사람의 평등권 원리에 상반하지 않는 군사적 기관을 요구한다. 군사비 지출을 축소하기를 요구하고 국방에 절대적으로 필수적이지도 않는 모든 지출에 반대한다.

 

이 결의안의 결과로 항쟁자들의 지원을 위한 기금을 조성하기로 결정했다. 이 결정의 1, 2, 4항은 집행 위원회가 제출한 결의안 초안을 실제로도 다루고 있다. 당 대회는 그러나 집행 위원회 결의안 초안의 3항을 구체화해서 파업에 개입할 때 군인들이 명령들에 불복종하는 요구하는 구절을 더욱 예리하고 명확하게 했다.

 

알려진대로, 그뤼틀리(Gruetli) 연합의 사회민주당원들은 이를테면 예산을 위한 투표 거부를 비난하면서도 군국주의에는 주로 많이 삐딱한 중간계급적 태도를 취한다! 군사적 물음을 시험해보면 무게가 너무 가벼워 바람 앞에 여물처럼 다시 당으로 날아갈거라서 놀랍지도 않다. 신선한 당이 아라우(Aarau) 회담에서 쪼개질거라는 소문이 돌면서 회담이 취했던 강력한 반군국주의적 태도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피해올 수 있었다.

 

성 이미에르(St. Imier)에서 돌던 노동자들의 연구회 간행물에는 유용한 소책자인 군대와 파업들을 포함했다. 아마도 스위스의 프랑스 지역에만 존재하는 젊은 사회주의자 기관들도 일정 부분으로 역할을 했다. 1903년 이래로 로잔(Lausanne)에서 이들 단체들이 발행한 정기적인 간행물인 젊은 사회주의자<La Jeunesse Socialiste>도 그러나 이후로는 청년 사회주의자 신문의 성격을 잃었다. 취리히(Zurich)에서 플루에거(Pflueger) 목사 동지가 설립하고 운영한, 젊은 동시대인들 사회(the Young Fellows’ Society)도 언급해볼 수 있다.

 

스위스에서도 무정부주의가 반군국주의에 주목하는 건 두말하면 잔소리다. 제네바(Geneva)에는 무정부주의자 반군국주의 단체가 있는데, 이 단체는 스위스 전체에서 유일하게 국제반군사주의협회에 가입한 단체로 후에 언급하겠다. 1902년 이후로 취리히(Zurich)에서 발행한 <무정부주의자의 외침>(Anarchist Weckruf)은 무정부주의적 의미에서 반군국주의 운동은 주요한 과제 중 하나였다.

 

여기서 제시하는 건 프롤레타리아 무정부주의라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으며, 오히려 <외침>(Weckruf)이 제기한 반군국주의적 주장들이 전진할 수 있던 상당한 부분에는 프롤레타리아라는 사실도 간과해선 안 된다. 특히 제네바와 취리히 파업에서 증거로 삼아서 스위스 반군국주의가 이룬 성취는 이미 언급된했으며, 이와 연관해서 사법부가 취했던 잊을 수 없는 차후에 조치도 마찬가지다. 이어서 다수의 프롤레타리아 민병대원들은 라쇼드퐁(La Chaux-de-Fonds)에서 파업 중이던 석공들에 맞섰지만 석공을 위해서 행군을 거부했고, 소위 말하는 여론동정에도 불구하고 민병대원 중 6명에게 중형을 선고31)했다는 사실은 기록해두자.

 

오스트리아

 

오스트리아에서 특수한 반군국주의 운동을 언급할 수 있는 건 특수한 젊은 사회주의자 운동이 현존하는 이후부터다. 젊은 사회주의자 운동은 1894년 초기 비엔나(Vienna)에서 민족적인 청년회와 가톨릭 청년들에 직접적으로 맞서는 반대운동으로 젊은 조수 노동자 조합을 설립하면서 활동하기 시작했으며, 곧 다른 지역에서도 퍼져나갔다. 19021015일부터 청년 노동자(the Jugendlicher Arbeiter)를 창간했다. 처음에는 격월지로, 후에는 매월마다 대량으로 발행했으며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젊은 노동자들의 관계들을 대변하던 기관지였다. 1903년 부활절에는 모든 지역 사회를 포용하는 오스트리아 청년 노동자들의 제국 연합을 설립했다. 190341일 이후로 청년 노동자는 제국적인 연합의 공식적인 조직이다. 이미 발행하고 잘 편집한 신문을 흘긋봐도, 젊은이들 중에서도 어떻게 군국주의에 맞서 능숙하게 싸우고 수행하는지를 잘 알고 있다는 걸 볼 수 있다.

 

또한 1896년 초 비엔나에서 출판했던 군인의 삶은 재밌다라는 유명한 소책자를 미리 주목해보자. 이 책자는 군국주의의 죄악을 오스트리아 사람 특유의 색채로 근사하게 묘사하고 무자비하게 폭로한다. 게다가 같은 출판사에서 발행해서 신품 총기들을 위한 2억 달러오스트리아의 살인적인 군국주의라는 소책자들에 포함한 광선”(Lichtstrahlen)이라는 모음집도 언급해야 한다. 이 범주론 1903925일 독일 연방의회에서 군국주의와 이원론의 하강이라는 제목으로 다진스키(Daszynski)의 연설에 대량 배포도 속한다.

 

체코(Czech)의 반군국주의도 특수하게 숙고할 만하다. 여기서도 젊은 사회주의자 운동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190051일부터 젊은이를 위한 신문인 <청소년 모음집>(Sbornik Mladeze)을 발행했다. 체코의 젊은 사회주의 단체들은 반군국주의 선전이 그들의 특수한 과제 중 하나라고 전했다. 1900년 부드바이스(Budweis)에서 개최한 사회민주당 회의에선 젊은 노동자들의 특수한 단체들에 설립을 거부한 건 사실이다. 그러나 이는 당 외부의 단체만을 대상으로 했고, 젊은 사회주의자 단체들은 일반적인 당 운동과도 더욱 친밀하게 했다. 젊은이들의 체계적인 기관은 좋은 진척을 보이고 있다. 대다수의 지역들에서도 젊은 노동자들 중에서 선전을 특수한 과제로 삼는 선전 위원회들도 결성했다. 1901515일에 출간한 <청소년 모음집>190511일 이후로는 격월지로 발행했다. 1902년 프라하(Prague)에서 개최한 사회민주당 전당대회는 젊은이들 중에서 특수한 반대운동을 지속하고 당 내에서도 단체를 준비하는데 찬성한다고 선언했다.

 

1903년에는 노동자의 육상부 연합들을 설립했는데, 이 연합은 특히 젊은이들도 관심을 기울였다. 프라하에서는 190412월엔 상임 선전 위원회를 설립했고 다른 시내들도 그 뒤를 따랐다.

 

 

 

 

 

 

429일 프라하에선 22개의 젊은 사회주의 위원회들은 127명의 대의원들을 대표해서 체코에 젊은 사회민주당원들의 첫 회담을 개최했다. 대다수는 사적이거나 공적인 회의에서 선전을 지속했다. <청소년 모음집>은 특별 기고란에서 군국주의에 대한 논의를 다뤘으며, 이로 인해서 자주 몰수하기도 했다. 프라하에는 잘 참석했던 노동자 학회도 설립했다. 민족주의자들과 군국주의의 분쟁들에서 언어적인 물음과 개별적인 군인들에게 가해지는 폭력은 반군국주의 추세들을 격렬하게 한다. 특히 네르마바의 사례를 언급하고자 한다. 군인이던 네르마바는 무기 소지를 거부했다는 결과로 처벌했고 장례식 음악에 맞춰 붉은 마차들을 타고 애도하는 병사들의 운구 행렬을 시내에서 흔하게 볼 수 있었다.

 

최근 몇 년 동안 발생한 선거적인 싸움들은 군대가 더 이상 지배 계급과 반동에서도 완전하게 안전한 지지대로 간주 할 수 없다는 걸 증명했다.

 

헝가리

 

 

헝가리에선 당과 노동조합들은 하나이거나 동일하고, 오히려 당이 노동조합으로만 존재하기도 하며 1894년 부다페스트(Budapest)에선 어른들의 지도 하에서 수습생 기관들은 소속이 없는 지부들에서 젊은 사람들의 반대운동을 시작했다. 주요한 목적은 교육이었지만, ‘부르주아지의 구세주였던 밴피(Banffy)가 사회주의자들을 혹독하게 박해한 결과로 1897년 이 운동은 무너졌다. 밴피도 몰락하고, 1899년에는 젊은 노동자들을 위한 노동자 교육 협회 지부들을 설립했다. 또한 회원들의 교육에도 전념했다. 그러나 그들도 1901-1902년 겨울에 경찰과 사법부의 모진 박해로 인해서 굴복했다. 젊은이들은 흩어져서도 일반 노동자 교육 및 노동 조합에 가입했다. 1904년 강력한 경제 호황이라는 물결이 유입하면서 조직한 노동조합 노동자의 수는 8000명에서 41000명으로 5배나 증가했고, 젊은 사회주의자들도 얕은 물에서 지나올 수 있었다. 여전히 꾸준히 증가하는 이 운동은 사회 정치적인 성격도 획득했다. 외부적으로는 교육 단체나 지역의 비영리적인 단체들이거나 프레스부르크(Pressburg) 같은 일부 지역에선 체육 동호회이기도 했다. 모든 치사하고 혹독한 대우, 기습적인 공격들, 유죄 판결 및 압수들에도 불구하고 단체들은 번성했다. 성인 노동자들의 지원으로 <어린 노동자>(Ifjú Munkás)라는 신문도 발행했는데, 이 신문은 당이 어디에서나 발전하는 운동의 주춧돌를 구성했으며 현재에는 대략 1500부를 발행했다. “젊은 노동자들의 연합19064월에 설립했으며 190612월에도 여전히 장관의 허가를 하찮게도 대기하고 있다. 이 단체는 공개적으로 사회주의를 지지한다. 안타깝지만 그들이 특수한 반군국주의자 선전을 무슨 형식으로 지속했는지에 대한 여부는 확인할 수 없었다.

 

네덜란드

 

이전에 논의했던 19031월의 철도 노동자들의 파업을 제외하고는 네덜란드에서 군국주의는 아직은 그다지 억압적이진 않았다. 그 결과로는 1900년에 설립했고 1903년에는 일시적으로 중단했다가 1906년에 재조직한 네덜란드의 젊은 노동자들 연합(De Zaaier, Bond voor Jonge Arbeiders en Arbeidsters in Nederland)”32)의 활동은 반군국주의와 관련해선 부수적으로는 중요했다. 1906년 이래로는 롤랜드 홀스트(Roland Holst)가 훌륭하게 편집했던 <씨 뿌리는 사람>(De Zaaier)33)의 신문에선 상당한 지면을 군국주의에 맞선 투쟁으로 차지했다. 네덜란드에서 붉은 겨울이던 1902-1903년 겨울에 롤랜드 홀스트 동지는 특히 암스테르담에서 대다수의 반군국주의 모임들을 주선했다.

 

190648일에는 위트레흐트(Utrecht)에서 개최한 씨 뿌리는 사람대회에서 군국주의의 계급적 성격을 규정하는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통과했다. 이 대회는 젊은 노동자들에게 집회, 강연 과정, 특히 모집 기간 동안에는 전단지와 선언문의 수단들로 군국주의적 성격에 대해 계몽하고자 연합에 합류했고 할 수 있는 만큼은 선전을 지속하면서도 늘 사회민주당과 공동으로 행동하고자 했다. 군국주의에 반대하는 집회들은 매년마다 10월에 훈련병을 소집할 때 개회했다. 190610월 초 암스테르담에선 씨 뿌리는 사람이 주최했던 집회에서 멘델스(Mendels)의 연설 후에는 반군국주의 무정부주의자에 대한 한계에 줄을 그었다.

 

당 대회와 노동 조합 대회 모두 반군국주의 물음들 가운데 특히 군사적인 선전에 대부분을 할애했다.

 

사회주의 젊은이 연합”(“Socialistische Jongelieden Bond”)은 네덜란드에선 오래 현존했으며, 공산주의적 무정부주의자인 윙크(Wink)가 편집했던 <젊은 노동자>(De Jonge Werker)라는 신문을 발행하거나 발행하곤 했다. “연합은 무정부주의에 지도적인 영향을 받았으나 무정부주의를 공개적으로 지지하지는 않았다. 회원 수는 매우 적어서 고질적으로 재편을 겪는 상태로 보인다. 물론 니우벤후이스(Nieuwenhuis)의 개성 때문에 두드러진 반군국주의적 무정부주의자가 대체로 있다.

 

게다가 1903년 이래로는 사회당 대리인인 테 라안(Ter Laan)이 편집했던 월간지 <현역병>(De Milicien)을 발행하는 현역군과 예비군 연맹이 현존한다. 이 연맹은 군사적 학대 근절을 목적으로 하는 계획을 운영하는 일종의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교류협회다. 마이어(Meyer)동지가 편집했고 헬더(Helder)에서 발행했던 기관지인 <해군연맹>(Matrozenbond)은 해군연합과도 대응한다. 해군들의 지위를 증진하고 파업운동들을 계획하고 준비하는데도 큰 도움을 줬다. 가끔 국가 당국의 맹공격이 가해져서 지휘관들을 약식으로 재판하고 선상에서 주류의 판매를 금지했다. 실내에선 자주 담보가 이뤄졌다.

 

스웨덴

 

사회민주주의 젊은이들의 운동은 1890년대 중반 스웨덴에서 출현했다. 젊은 사회주의자 모임

들은 합병해서 젊은 사회주의자 연합을 결성했으며, “”(Brand)은 란스크로나(Landskrona)연합의 기관으로 본부를 뒀다. 이 연합은 당에선 호의적이진 못했고 점차적으로 무정부주의적인 방향으로 운영했으며, 특히 해외의 적에 맞선 국방과 군국주의에 대한 태도에서 특히나 분명해졌다. 이 연합에 반대해서 1903년에는 말뫼(Malmoe)에서 훌륭하게 조직한 사회민주주의 젊은이들 연합을 결성해서 190611일부터 10외레에 불과한 무게가 나가는 월간지인 <앞으로>(the Fram)을 발행하고 있다. 이 월간지는 역시나 당내에선 가까스로 지원을 얻고 있다. 대략 450명의 회원을 보유한 7개의 모임들에서 출발한 연합은 해마다 1903-1906년 동안에 300-400개의 모임과 14,000-15,000명의 회원을 보유한 모임으로 성장했다. 1906년 말에는 연합의 회원 수가 25,000명이었으며 대다수는 지역적인 조직으로 소속해 있었다. <앞으로>의 발행 부수는 35,000-40,000부다. 사회주의자 연합은 대략 10,000명의 회원들을 보유하고 있으며 <앞으로>보단 훨씬 작고 내용이 그닥 좋지 않은 <>(Brand)의 발행 부수는 10,000-12,000부이다.

 

 

두 연합들은 법령을 따라 현수막에 반군국주의 선전을 새겨 넣었으며, 특히 인쇄물로 이를 전달했다. 사회민주연합의 후원으로 말뫼(Malmoe)젊은 사회민주주의자 연합 출판사”(Socialdemokratiska Ungdoms förbundets Förlag)는 다수의 소책자들 중에서도 제스 호글룬드(Z. Hoeglund)<무기를 내려놓고!>(Ned med Vapnen!)와 케이트 달스트롬(Kate Dalstroem)사회민주주의와 무정부주의등을 발행했다. 19063<프람>에 따르면, 이렇게 군사비 지출로 낭비하는 돈으로 작은 농업 관계, 대중 교육, 노동자 보험!”들에 유익하게 사용할 수 있다고 맹공격했다고 전했다. 스웨덴과 노르웨이의 연합이 위기를 겪었을 때 1905년 스톡홀름에서 개회한 첫 대회에서 젊은 사회민주주의 연합은 무엇보다도 군사적 물음을 훌륭하게 논의했고 호소문으로 잘 알려진 <무기를 내려놓고!>는 노르웨이와 전쟁 시에 프롤레타리아트들에게 군 복무를 거부하도록 촉구했다. 제스 호글룬드 동지는 이와 연관해서 9개월의 투옥을 겪어야 했다. 프랑스에서 사회주의자인 밀란(Millerand)과 근래에는 클레망소(Clémenceau), 브리앙(Briand), 비비안니(Viviani) 각료와 마찬가지로 어중간한 사회주의자인 스타프(Staaf)가 수반을 맡은 자유당 내각도 즉시 도전을 받아들였고 이렇게 운동의 중요성을 인정했다. 19065월에는 소문난 무정부주의자 혹은 재갈을 물리는 법을 통과했고, 이에 대해서 또 언급하겠지만, 곧이어 빗발치는 판결들로 1906927일 순스트롬(Sundstroem)은 군 복무의 의무가 있는 젊은이들에게 신중한 단어를 쓰면서 보낸 전단지를 발행한 혐의로 노르코핑(Norrkoeping)의 시 법원은 1년의 징역과 중노동을 선고했다. 게다가 이 판결로 인해서 군인들 가운데에서도 반군국주의 시위가 발생했고, 이틀 후에는 노르코핑(Norrkoeping)에서 인상적인 항의 시위가 일어났으며 경찰은 무력을 동원해서 이를 해산하게 했다. 그러나 이 판결은 신은 책무를 빼앗았다면 감각을 도로 돌려준다는 속담이 진실하다는 걸 확인할 수 있는 또 다른 대단히 즐거운 효과를 알려준다. 스타프(Staaf)는 각료의 명예를 오래 누리지 못했다. 그는 실의에 빠져 겨울의 찬바람을 맞으며 의식을 차렸고, 각료로 계급적 정의의 불을 열렬하게 부채질했지만 이제는 평범한 주민으로 변호사의 웅변으로 가득 찬 양동이를 들고 불을 끄려고 진력을 다했다. 190612, 그는 조엔코핑(Joenkoeping)의 상급 법원에서 순스트롬(Sundstroem) 동지의 항소심을 열었을 때 변호를 맡아서 법을 올바로 해석하지 않았다는 걸 법정에 증명하고자 노력했다. 실제로도 형량은 6개월로 감형했다! 1906년 여름, 올손(Olsson) 동지는 반군국주의 전단지인 스몰란드(Smaland)의 젊은 노동자들에게를 작성한 혐의로 조엔코핑 시 법원은 6개월의 징역을 선고했다. 9월 말에 젊은 사회주의 연합은 헬싱보르(Helsingborg)와 비유프(Bjuf)에서 반군국주의 시위를 준비해서 예비군으로 전환한 사람들에게 환영회를 열었지만 경찰이 개입하고 무기를 꺼내들면서 해산했다. 헬싱보르 9월 시위에 참가했던 여러 사람들은 10월 말에 시 법원은 13개월에서 ‘3의 징역을 선고했다. 이는 매우 가망 있는 시작이겠지만 스웨덴에선 반군국주의 선전의 성격과 성취가 아니라 오직 윤곽적인 영향만을 미칠 수 있었다.

 

19061014일에는 두 단체들 간의 단결과 관련해선 반군국주의 논의에서 특히 주목할 흥미로운 협상을 두 연합들 간에 진행했다.

 

노르웨이

 

노르웨이에는 이를테면 크리스티아니아(Christiania), 드람멘(Drammen), 라빅(Larvik), 트론지엠(Trondhjem) 등지에선 수년 전부터 지역적으로 젊은 사회주의 단체들이 현존했다. 19016월부터는 크리스티아니아의 젊은 사회주의 단체는 반군국주의를 옹호하는 훌륭한 월간지인 <20세기>(net Tyvende Aarhundrede)를 발행했으며, 이후로는 계간지로 전환했다. 34)19036월 드람멘(Drammen)에서 열린 회담에선 크리스티아니아에 본부를 둔 젊은 사회주의 단체 연맹(Norges Socialdemokratiske Ungdomsforbund)을 설립했다. 여러 여성들을 소속해서 대략 2000명의 회원이 있다고 추정한다. 솔베르그(Solberg)가 편집하는 월간지 <젊은 사회주의자>(Jung Socialist)를 발행하며 연맹은 사회와 정치적 교육, 특히 군국주의에 맞선 투쟁을 일반적으로 증진하는게 목적이다. 군국주의에 대한 입장은 사회민주당과도 동일했다. 1905년 오순절에 개회한 연맹 대회에선 모든 형태의 반군국주의적 투쟁도 연맹의 특수한 목적 중 하나로 채택하자는 동의안은 부결했다.

 

이와 관련해서 연맹에 의해 지속한 반군국주의 선전으로 노르웨이 사람이고 중위이던 마이클 펀터볼드(Michael Puntervold)가 쓴 군국주의라는 소책자는 주둔지 시내에서도 널리 배포했다는 걸 언급할 수 있다. 게다가 최근에 발생한 사태와도 연관해볼 수 있다.

 

19061010, 크리스티아니아에서 젊은 사회민주주의 협회는 반군국주의 회의를 소집했다. “이에 따라 모든 장교들과 이등병도 동원을 지시한다.”라는 제목의 전단지들도 모든 병영에 배포했다. 군 당국의 금지에도 불구하고 다들 회의에 잘 참석했다. 순스트롬과 <사회민주주의자>(The Socialdemokraten)의 편집자의 일원이던 펀터볼드 중위도 회의에서 발언했지만 특징적인 사실로 펀터볼드 중위는 당시에 이미 퇴역서를 건냈다. 같은 신문의 다른 편집자로 군 입대를 거부했고 형법에 따른 박해를 받았던 에이나르 리(Einar Li)도 연사 중에 한 사람이었다.

 

덴마크

 

마찬가지로 덴마크에서도 젊은 사회주의 단체들이 반군국주의 선전의 주요한 옹호자들이다. 이들은 반동적인 청년회와 특히 회원 수가 매우 많던 기독교 청년회에 대응하고자 생겨났다.

초기에 젊은 사회주의 단체는 1893년 또는 1894년에 유틀란트(Jutland)에서 생겨났지만 90년대 말까진 두드러지게 성장하진 못했다. 세기 말 무렵에는 유틀란트의 작은 지역에서 대다수가 사회민주주의인 앞선 단계의 부착지들이 성장해서 서로 긴밀하게 연락을 유지했다.

 

1900년 코펜하겐(Copenhagen)에선 젊은 사람들의 사회”(Ungdomsforening)가 설립했다.

1904년 봄에는 코펜하겐의 지역 단체들은 월간지인 <새 시대>(Ny Tid)를 발행하는 덴마크 젊은 사회주의자 연합”(Socialistik Ungdomsfoerbund i Danmark)을 설립했다.

 

원래 연맹은 사회민주당과 합동했으며 스웨덴과 노르웨이의 단체들과도 연관했다. 당시에 연맹은 설립할 전국을 3개의 선전할 지역을 나누어서 19개의 지역 단체들을 형성했으며 반군국주의 선전에도 특수한 관심을 기울였다. 덴마크에선 인쇄할 수 있는 인쇄 노동자를 찾을 수 없어 스웨덴에서 인쇄했으나 그 과정에서 15건이나 차례로 압수했지만 곧 반환했다. 군국주의자들 분기들 중에서 군국주의자 청년회의 설립을 촉구하면서 19064월부터는 광범위한 규모로 반군국주의 운동을 시작했다. 선전 집회 외에도 특히 휴가를 마치고 돌아온 군인들을 중심으로 전국에 5만 부의 <새 시대>를 배포했으며 이와 연관해서 압수 및 체포가 이뤄졌다. 사회주의 연맹은 점차적으로 무정부주의의 길로 들어섰고, 이는 스웨덴의 무정부주의보다 더 눈에 띄게 대응했다. 1905420-21, 대략 500명의 회원을 가진 7개 모임들이 참가한 대회에서 사회민주당에 대해 공개적으로 상반하는 태도를 취했는데, 이는 개별적인 모임들이 취한 태도와는 부합하지 않게 여겨졌지만, 코펜하겐에선 젊은 노동자의 지도와 교육, 자본주의와 무정부주의와 투쟁을 우선적으로 목적으로 삼는 사회민주주의적인 젊은 사람들의 모임을 창립한 원인이었다. 1906년 부활절에 개회한 당 대회에선 전국적으로 비슷한 단체들의 설립을 옹호했고 이 단체에 정신적이고 물질적인 지원을 보장했다.

 

미국

 

미국에 대해서 보고해야 기록할 사실들은 다음과 같다:-

 

1874년에 설립한 북미 사회민주 노동자 당의 계획에는 아직은 매우 특징적으로 군국주의를 직접 언급한 내용이 속하진 않았다. 1879년 위에서 설명한 파업 전투가 발생한 후에 시카고(Chicago)와 신시내티(Cincinnati)의 사회주의자들이 바쿠닌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교육적인 사회 수호라 불리는 여러 노동자들의 군사적 단체를 설립했지만 당과는 격렬한 반대에 부딪쳤다.

 

그 동안에 군대와 민병대에 대해 채택할 전술에 대한 견해는 크게 상이했다. 노동조합들은 특히 군사적 조직들이 파업에 자주 개입했기 때문에 모든 상비군과 민병대 구성원들과는 물러서고자 시도했다. 나머지 사람들은 군대의 구성원들과 더욱 가깝게 접하면서 군대에서 발생할 수 있는 위험을 최소화할 수 있다는 견해였다.35)

미국 사회당에선 반군국주의와 반성직주의를 모두 노동운동에선 부수적인 논의로 간주했다.

그렇다고 군국주의를 무의미한 논의로 다루지도 않았지만 당은 단순하게 반군국주의에만 걸맞는 기관이 되는 걸 막고자 견고하게 힘을 쏟았다.

 

(Lee)는 현재까지 관찰하기론, 1905년까지 군인과 민병대 가운데에서도 사회주의 선전 활동은 거의 이뤄지진 않았지만, 적어도 당은 어느 정도는 반대운동을 시작했다.

 

1904년 사회당의 시카고 강령에서 5항 아래에 최소한의 요구사항에는 다음과 같은 의미있는 요구를 알아볼 수 있다. “파업 중인 노동자에 맞서는 군사적인 사용을 방지해서 노동자들의 국제적인 단결을 강조한다.36)

 

스페인

 

스페인에서도 기록할 건 적다. 당이 전반적으로 혼란스러운 조건으로 인해서 명료하기를 원하기 때문에 분할, 혼란과 무정부주의는 반군국주의 반대운동만이 아니라 젊은 사회주의 단체들이 두드러지게 드러나 보인다. 그러나 사회민주당이 인정한 젊은 사회주의 단체도 하나 있는데, 빌바오(Bilbao)의 산업 도시에 중앙 위원회를 둔 전국 젊은 사회주의자 연맹”(the Federacion Nacional de Juventudes Socialistas)이다. 1906년에 인쇄한 규정에 따르면 이 단체의 목적은 사회주의 원리에 따른 교육과 그렇게 교육 받은 젊은 사람들의 당 내 채용이다.

 

핀란드

 

1906년 봄에 스웨덴 노동자 협회의 지부인 젊은 노동자를 위한 모임이 헬싱포르(Helsingfors)에 설립했고 즉시 40명의 회원이 가입했다. 1906310, 그 동안에도 회원 수가 70명으로 늘어난 이 모임은 스웨덴 왕국 협회과도 협력에 관해서 프람(the Fram)이 제시한 제안에 대해서도 논의했다. 이 제안은 호의적으로 받아들이긴 했지만 정책적인 전제들로 당분간은 거부했다. 이 모임에선 <동지>(the Kamrat)라는 선전지도 발행했다. 핀란드에서도 더욱 모임들을 늘리고 핀란드의 단체들을 포괄할 수 있는 연합을 설립해야한다고 주장했다. 1906129일에 타머포스(Tammerfors)에서 개회한 핀란드 젊은 사회주의자 단체들의 첫 대회에선 핀란드의 핀란드 국적의 젊은 노동자 연합은 노동당에도 가입하는 것이 결의했고 모든 수단을 다해서 군국주의에 맞서 싸운다는결의에 대한 규정을 추가했다.

 

러시아

 

러시아는 그 자체로도 하나의 주제이므로 여기선 세부적으로 논의할 수는 없다. 몇 가지는 일반적인 단평들로 이미 다뤄졌다. 러시아 혁명에 대한 장교의 입장은 노동운동에 대한 장교의 입장과도 상당히 상이했다고는 자주 지적할 순 없겠다. 따라서 플레하노프가 사회민주주의자의 일기(사회민주주의자의 일기) 7권에서 장교들 가운데서도 반대운동을 지속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유지했던 입장은 그 자체로 일관적이긴 하다. 러시아의 반군국주의 운동도 광대한 혁명의 무한한 과정 중에 일부로 매우 중요하다.

 

국제적인 반군국주의 단체

 

국제적인 반군국주의 회담의 개최는 1902년 프랑스 무정부주의자들이 국제적인 반군국주의 협회를 설립하고자 처음 제안하면서 알려졌다. 가장 큰 동기로는 무정부주의 선전의 결과로 국경을 넘은 해외 탈영병이 상당하게 큰 수로 증가하기를 확고하게 바랬기 때문이었다. 회담에서 이런 발상을 지지하던 사람들의 대부분은 위에서 논의했던 국제적인 군인 수호 동맹”(Ligue internationale pour la défense du Soldat)에 소속해 있었으며, 이는 범위가 너무 좁은 강령에 기반해서 국제적인 반군국주의 단체로는 성취하진 못하고 있다. 이 발상은 영국과 다른 나라들에선 지지를 얻었고, 위원회를 결성했으며 모든 출현들은 니우벤후이스(Nieuwenhuis)의 지도 아래에서 이뤄졌다고 한다. 회담에 소집하면서 함께 군국주의에는 단 한 사람도, 단 한 푼도 용납할 수 없다표현적인표어를 내걸었다.

 

그 동안에 19033월이나 4월에 런던에서 원래 개회할 예정이던 회담에 대한 선전은 별다른 결실을 맺진 못했다. 위원회는 사회민주주의 단체들에도 접근했으나 무의미했고 벨기에의 청년 수호대”37), 그리고 온갖 종교적이거나 인도주의적인 반군국주의자들에게도 접근해서 회담에 참가하도록 권유했다.

 

19039월 암스테르담에서 개회할 예정이던 회담도 다시 무기한으로 미뤄질 수밖에 없자 파리에서는 회담의 개최를 찬성하도록 환기하고자 특수한 기관인 사람들의 적수”(L'Ennemi du Peuple)를 설립했다. <사람들의 적수>(L'Ennemi du Peuple) 창간호는 19038월에 발행했으며38), 무정부주의자인 얀비옹(Janvion)이 가장 극단적인 슈티리너주의(Stirnerism) 정신으로 편집했다. 마침내 19046, 무엇보다도 니우벤후이스의 격렬한 수고 덕분에 암스테르담에서 회담을 개최할 수 있었고, 대리인들이 상당한 큰 수로 참석했다. 분명하지만 얼룩덜룩한 사람들이 한데 모였다. 네덜란드, 프랑스, 벨기에, 보헤미아의 소규모 광부 분파 대리인들, 스페인 무정부주의 노동조합 대리인들, 네덜란드 톨스토이주의자, 스케르메르혼(Schermerhorn)에서 온 복음주의 목사와 서로다른 종교적이고 인도주의적인 반군국주의자, 마지막으로 일부 영국 노동조합주의자들도, 모든 색조들의 무정부주의자들이 모였다.39)

 

이 회담은 무정부주의 동맹을 설립할 목적을 막고 명시적으로만 무정부주의 회담을 구성하려는 건 어려웠다. 절차적으로도 자연스럽게 개인주의적인 무정부주의자들40)의 추방에서 시작했고 서로 싸우는 요소들로는 공동 행동을 취하도록 설득할 수 없다는 걸 몸소 보여주었다. 톨스토이와 인도주의자들까지 추방했고, 남은 사람들은 몇 가지 결의안들을 통과했다.

1. 네덜란드 대리인들이 제출한 결의안에는 파업에 대한 군사적 개입에 특수하게 주의를 기울이면서 원칙적으로 군국주의에 맞서고자 군인들과도 우호적인 관계를 맺으며 특히 소집한 노동조합원들과 지속적으로 접촉을 유지하는 걸 노동조합의 의무로 규정했다.

 

2. 프랑스의 지로(Girault)는 노동조합들이 반군국주의 선전 활동을 목적으로 하는 젊은 사람들의 단체들을 설립하고자 결의안을 제안했다.

 

3. 보헤미아의 보리체크(Vohryzeck)는 프랑스 노동조합의 전술들을 전 세계노동조합에게도 추천하는 결의안을 제출했다.41)

 

4. 네덜란드에선 전쟁에 반대하는 수단으로 총파업을 결의안으로 선포했다.

 

5. 네덜란드의 다른 결의안은 젊은 사람들에게 반군국주의 교육을 요구했고 특히 어머니들에게 영향력을 미쳤다.

 

6. 마지막으로 프랑스의 결의안에선 개인적인 병역을 거부했다.

 

그러므로 결의안들이 부족하진 않다는 걸 볼 수 있다.

 

추가로 장문의 선언문도 채택했는데, 니우벤후이스는 자신도 감탄할 선언문의 모호한 이념적인 성격에 대해 엄격한 비판을 가했다.

 

그래도 국제반군국주의협회는 군대를 위해선 단 한 사람도, 단 한 푼도 쓰지 않는다.”는 근사한 표어를 내걸고 설립했다. 니우벤후이스를 비서관으로 지명했다. 동시에 1905년 옥스퍼드(Oxford)에서 두 번째 회담을 개최하기로 결정했다. 옥스퍼드 회담은 개최하지 못했고 19066월 제네바(Geneva)에서 비슷한 회담을 개최하려는 시도도 거의 성공하진 못했다.

 

무엇보다도 제네바에서 개최할 회담의 의제에서 제2항의 항목은 다음과 같았다.

 

(a) 전쟁을 막을려면 무엇을 해야하나?

 

(b) 전쟁이 발생하면 무엇을 해야하나?

 

(c) 전쟁 중에 한 국가의 노동자들이 병기를 소지하는 걸 거부하고 적국의 형제들은 자국에 무력적인 공격을 가한다면 반군국주의자들은 무엇을 해야하나?

 

(d) 중립국에서 전쟁에 대한 노동자들의 태도는 다음과 같다.

 

국제적인 군비축소와 헤르베주의에 대한 물음은 여기에서 모든 바람직하고 솔직하게 실질적인 의미를 제시한다.

 

3항에는 다음의 반군국주의, 부분적인 파업과 공산주의 사회 건설을 위한 사회적인 총파업을 따른다.

 

니우벤후이스의 수고 덕분에 190410월 즈볼레(Zwolle)에서도 반군국주의자 대회를 개회했다. 니우벤후이스는 국제적인 협회의 입장에 매우 낙관적인 보고서를 작성했으며, 무엇보다도 마르세유(Marseilles)에선 <사람들의 적수>(Ennemi du Peuple) 외에도 <반군국주의 운동>(L'Action Anti-Militariste)이라는 신문을 발행했다. 회담은 또한 국제적인 협회의 지부로 네덜란드에도 전국적으로 반군국주의 사회를 이루도록 결의했다.

 

 

프랑스에서 협회는 더욱 급속도록 성장했다. 19057월 에티엔(Etienne)에서 전국적인 대회를 열었는데, “A.LA.”의 보고에 따르면 대다수의 단체들이 참가했다고 전했다. 전국적인 위원회를 구성하고 전국적인 기관지을 발행하기로 결의했지만 1906101일까진 출현하지 않았으며, 이후로는 파리에서 단체 이름의 첫 글자를 따서 “A.I.A.”(L’ A.I.A.)라는 제목으로 월간 협회 회보로 발행했다. 또한 대회에선 전쟁이 발생한다면 예비군들은 파업을 감행하고 병사들은 명령에 복종을 거부하고 반란을 일으키며 총파업에 투쟁하는 노동자 단체들에게 적극적인 지원을 제공한다고 결의했다. 협회에서 옹호하는 행동에는 탈영은 속하지 않았으며 또한 탈영에는 예외적인 사례를 제외하고는 모든 물질적인 책임을 부인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건 협회는 무정부주의자든 사회주의자든 간에 어느 정당의 교리에도 묶이지 않고 독립적이고 정당이 아닌 혁명적 성격을 유지하고자 협회가 결정한다면 반란은 의무로 규정하고 선거에 대한 참여를 거부했으며 후자에 대한 참여는 무정부주의의 발굽을 배신한다. 파리 전국 위원회는 파리에서 “A.LA의 출판물들”42)이라는 회보 외에도 1906년에는 A.LA.43)의 목적, 수단과 행동에 대한 소책자도 출판했다. 19051231일 파리 배심원들에게도 복수를 감행하게 한 잘 알려진 전단지인 <훈련병들에게!>(To Conscripts!)는 전국 위원회의 회원들도 서명했다. 회보에서 수집하는 한에서, 상당한 수의 지역 집단 부문도 존재하지만 재정적인 상태를 보면 회원 수는 적다는 걸 추론해볼 수 있다. 협회의 목적, 수단과 행동에 대한 위에서 언급한 소책자는 협회의 성격을 다음에 따라 간단하게 설명한다. ”협회는 회원들의 투쟁 조직이면서도 주어진다면 직접적으로 폭력적이고 반역적으로 행동할 준비를 요구한다. 이 단체의 유일한 관심사이자 활동에서 유일한 목적은 할 수 있는 한으로 군국주의를 파괴하고 권력에 반역을 일으킨다는 의지로 군국주의에 반대한다. 그러므로 결국에는 무정부주의와 반역주의이다. 이는 협회와 동격이라는 비난에 대한 단일한 논의에서 분명해진다, 즉 협회는 단체라는거다.44)

 

스위스에도 A.L.A 부문은 현존한다.

 

1900년 파리와 1904년 암스테르담에서 각자 국제회담을 개최하는 동안에 젊은 사회주의자들의 국제회의도 열었다. 그때마다 벨기에서 젊은 수비대들의 전국 평의회에도 국제적인 연결도 요청했지만 실행으로 옮기진 못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는 젊은 사회주의 단체들 간에 국제적인 연결은 헛된 시도였지만 조만간은 실현할 수 있다.

참고

 

 

1. 1886년 사회주의 노동당인 앤트워프(Antwerp) 지부에서 발행했던 전단지들 중 하나가 앞에 놓여있다.

 

2. 그들이 추구했던 활동에 관해선 <병영 재판>(Le Procès de la Caserne), 국립출판사(Voiksdrukkerij), 헨트(Ghent), 1905를 참조.

 

3. <훈련병>(The Loteling)<막사>(Kazerne)1887년 이래로, <병영>(the Caserne)1893 이래로, <징병>(the Conscrit)1899년 이래로 운영했다.

 

4. The Flemish organs were placed in the hands of the Flemish Federation of the Socialistische Jonge Wachten in Ghent.

 

플랑드르 단체들은 헨트(Ghent)에 있는 플랑드르(Flemish)의 젊은 사회주의자(Socialistische Jonge) 연맹의 손에 맡겨졌다.

 

5. 후소(Housiaux), <새 시대>(Neue Zeit), 1994423, p. 110와 이후 참조, 그리고 회담 보고서들은 흩어졌다. 현재 플랑드르(The Flemish) 지방 연맹은 대략 1000, 브라반트(The Brabant) 지방 연맹은 대략 500, 왈룬(The Walloon) 지방 연맹은 대략 8000명의 회원을 보유했으며, 끝에는 19059월에 설립했다. 1905년 리에주(The Liege) 회담에서 전국 평의회는 해산했고, 1906년 플랑드르와 왈룬 연맹은 각자 대리인을 선출했고 전국 의회는 세 번째 전국 비서관을 선출하면서 서로다른 형태로 재건했다.

 

6. 여기서 사회주의 문양은 신경쓸 필요는 없다.

 

7. 이 잡지의 전신은 사회주의를 위해 군국주의 맞서자”(Contre le militarisme, pour le socialisme)라는 잡지였다.

 

8. 16쪽으로 구성했다!

 

9. 1906년 동안에 길가에는 대략 2만 장의 전단을 내걸었고 8만 장의 삽화 전단들을 폐기했다.

 

10. In 1906 an edition of 68,000 copies of the Conscrit was printed, about 30,000 copies of Loteling, a somewhat smaller number of copies of the Caserne. 100,000 copies of the Caserne were distributed for special reasons. 1906년에 <징병>(the Conscrit)68,000, <훈련병>(The Loteling)은 대략 3만 부, <병영>(the Caserne)은 특수한 사정으로 이보단 다소 적은 수로 1만 부를 인쇄하고 배포했다.

11. <병영 재판>(the Procès de la Caserne) 참조.

 

12. 전직 군인들의 집단

13. 밴더벨드(Vandervelde)의 단호한 태도가 판세를 역전한 논의에 대해서는 1903815일자 <사회주의 운동>(Movement Socialiste), p. 594 이후와, 19038월 호인 <젊은 사회주의자>(Jeunesse Socialiste)를 참조.

 

14. <새 시대>(Temps Nouveaux), 1905, 1028.

 

15. 이에 관해선 파리의 <절대적 자유주의>(the Libertaire)<애국주의>(Le Patriotisme) 소책자를 참조.

 

16. <새 시대>(The Temps Nouveaux)는 이에 대해선 매우 우호적이다.

 

17. <그들의 조국>(Leur Patrie), p. 246. 여기서 헤르베가 만났던, 욘느(Yonne)에서 그의 지지는 농민들의 뿌리 깊은 군 복무에 대한 오래된 반감이라는 반론으로 자주 반복해서 설명한다.

 

18. 보병(Pioupiou)모집이라는 인기 있는 용어이기도 하고, 다정하고 친근한 기분을 주는 단어다.

 

19. 19031124, <배심원 앞에 선 보병>(Le Pioupiou en cour d’Assises) 참조. 오세르(Auxerre), 1904.

 

20. 헤르베의 반의회주의로는 <사회생활>(La vie sociale), 97, 16 이후 참조. <사회주의 운동>(Movement Socialiste), 190561, 152쪽에서 파게스(Fages)는 반애국적인 운동은 실제로도 반자본적인 운동이라고 언급했다.

 

21. “국제적인 반군국주의 협회”(The Association Internationale Antimilitariste)의 협동과 함께.

 

22. 1905, <새 시대>(Temps Nouveaux), Np. 12, 1905. 에피날(Epinal)과 아미앵(Amiens)에서 로키에(Loquier)와 르메르(Lemaire)의 박해에 대해서는 같은 책, 1905, 26호 참조.

 

23. 그럼에도 메르하임(Merrheim)의 사례는 여기서 주목할만 하다. 롱위 파업 당시에 그는 안장하지 않은 기마병들에게 파업 노동자들에 맞서 병사들을 도발하거나 부상을 입더라도 폭력을 사용하지 말기를 직접 당부했다.

 

24. Especially in Algiers the death penalty is imposed for the slightest offence! Vide also the Besançon affair in the Humanité, December 11, 1906.

 

특히 알제(Algiers)에선 사소한 위반에도 사형을 집행한다! 19061211일자 <유마니테>(Humanité)에 실린 브잔송(Besançon) 사태도 참조.

 

25. 이제는 사라져야 한다.

 

26. 23일자 <교차로>(the Kreuzzeitung)에 실린 폰 제플린(Von Zepelin)의 논설 참조.

 

27. 우선 그들은 군사 학교를 공동의 기반을 두고자 분투하고 있다. 각 군단에는 장교와 부사관 모두가 참석할 수 있는 학교가 하나씩만 있어야 한다. 반동들은 당연하지만 그 발상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19061222일자 <독일 일간지>(The Deutsche Tageszeitung) 참조.

 

28. 1906년에 열린 밀라노 회담에는 5개의 지방 단체들과 2,500명의 회원들로 구성한 북부 이탈리아의 24개의 부문들이 참가했다.

 

29. 이 연맹에는 승리의 찬가”(Heil Dir im Siegerkranz)에 맞춰서 노래를 부르는 매우 인상적인 연맹가도 있다.

 

30. 전초(the Vorposten)당 위원회 결의안 초안”(The Draft Resolutions of the Party Committee)을 참조.

 

31. 레온 톨스토이의 군인들과 젊은이들에게”(“To Soldiers and Young People” ), 1905년 샬로텐부르크, p. 15-16, 개인적인 거부 사례들, 1905<새 시대>(The Temps Nouveaux) 26, 임시적인 감금 기간의 공제 없이 4개월 징역, 2년간 시민권 상실도 참조.

 

32. “네덜란드의 젊은 선전 노동자 연합”(The Sower Union of Young Working Men and Women of the Netherlands)

 

33. 당 위원회는 그러나 형식적인 사정을 들어 지원을 거부했다. 이전에 연맹은 공식적인 단체로 오랫동안 벨기에의 플랑드르 선전에도 동의했다.

 

34. 19063<프람>(the Fram) 참조 현재 편집자는 제이콥 비드네스(Jacob Vidnes)로 월간지를 다시 발행했다.

 

35. (Lee), <사회주의 생활>(Vie Socialiste) 18, p. 90.

 

36. 1904년 즈볼레에서 열린 네덜란드 반군국주의적 무정부주의 대회 기간 중에 다른 지면에서도 논의한 편지가 뉴욕에서도 도착했고, 캐나다의 전국 노동조합 총회에서도 호의적으로 표했다. <각성>(the Ontwaking), 1904124, 참조.

 

37. 그들은 군국주의에 맞서는 투쟁의 어느한 결과에도 겁내지 않고 위에서 언급한 슬로건을 알아본다면 사회민주주의 단체들에게도 연맹 내에 여지가 있다고 니우벤후이스에게 확신했다. 1903년 젊은 수비대 회담에선 이런 참가는 논의 없이 만장일치로 거부했는데, 회담은 이 전제가 충분하게 정리하고 명확하게 숙고하진 않았고 사회적인 인터내셔널 외부에서도 군국주의에 맞서는 국제협회까지는 불필요했고 혼란의 원인이었기 때문이었다.

 

38 이후에 이스벤(Isben)의 극작품 민중의 적이후.

 

39. <각성>(the Ontwaking), 19048월호, p. 186에 따르면, 그들은 더럼(Durham)과 노섬벌랜드(Northumberland)의 영국 광부 116,000명을 설득했다! 위에서 언급한 같은 자료에 따르면 스페인 노동 조합원들은 스페인 노동조합 연맹을 대신했으며 최소 100,000명의 노동자를 설득했다!

 

40. 어느 형태로든 결의안의 통과에 맞서 항의했거나 의회의 결의안을 당연하게 따르지 않았던 사람들이 항의했다.

 

41. 이 결정을 옥스퍼드(the Oxford) 의회에서 실행에 옮겨야 했다.

 

42. 그 중에서도 차르주의와 싸우고자 헌신한 신문인 <비탄>(La Rue), 어머니들에게 보내는 전단지인 <군사적 영광>(A l’honneur militaire)과 메리에(Merie)가 쓴 소책자인 <훈련병에게 보내는 편지>(Lettre a un conscrit), 조르주 이베토(Georges Yvetot)가 생시르 장교 학교의 학생에게 쓴 생시리앙((Saint Cyrien) 편지인 <돈줄>(La Vache à lait)이 있다.

 

43. <L’A.I.A. 목적, 수단, 행동>.

 

44. “L’A.I.A.”, pp.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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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군국주의.

 


이전 반군국주의와 이후 인터내셔널.

 

 

전 세계적인 문학에서 가장 예고적인 작품인 공산당 선언은 군국주의를 세부적으로 다루거나, 그 보조적인 의미를 충분하게 다루진 못했다. 분명하지만, “공산당 선언프롤레타리아 투쟁에서 발생하는 일부 지역들에 반란을 요구하고 따라서 프롤레타리아 해방 투쟁에서 자본주의적 군국주의가 수행하는 역할을 내용적으로 제시한다. “공산당 선언은 국제적으로 무력적인 충돌 혹은 오히려 국가 간의 충돌들 가운데 식민지 정책을 포함해서 자본주의적 팽창 정책에 대해 상세하게 논의한다. 후자로는 자본주의적 발전에서 필수적인 결과로 간주하며 부르주아지의 지배 하에서도 민족적으로 고립한 상태와 민족주의적인 대조들은 더욱 사라지기가 쉬우며 다음으로 프롤레타리아트의 지배에서도 그들은 여전히 더욱 감소한다. 프롤레타리아 독재 하에서 취하고 우선적으로 조처할 계획에는 정치적 권력의 정복으로 군국주의에 대한 특수한 언급은 포기하도록 내려놓는다. 여기에는 이미 정복에 대한 준비를 마쳤으며 즉 군국주의를 전복했다.

 

국제 회담에선 군국주의에 대한 특수한 발언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런 발언들에는 오직 해외의 적에 대한 군국주의에서 전쟁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있다. 1867년 로잔( Lausanne) 회담의 의제에는 “1868년 제네바(Geneva) 평화 회담이라는 항목이 있었다. 이 회담에는 순진하거나 우습게도 국제적인 계획을 채택할 거라는 가정 하에서 평화회담과 협력하기로 결정했다. 전쟁을 계급 투쟁의 결과로 지정했다.

 

1868년 브뤼셀(Brussel)에서 개최한 제3차 국제회담에서 롱게(Longuet)는 위원회 이름으로 결의안을 발의했고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이 결의안에는 경제적 균형의 부족을 지속하는 원인에는 전쟁을 지목했으며, 오직 사회적인 개혁에서만 변화를 줄 수 있다고 강조했다. 노동 조합은 국가들을 일깨우고 선전하는 수단들로 전쟁의 숫자를 줄여나가는 힘을 부여받았으며 꾸준하게 전쟁을 그만두고 마칠 수 있도록 그 작업에 임한다. 전쟁의 사례에서 총파업을 하고 그 회담에는 모든 나라들에 노동자들은 국제적 연대가 이 국가 간 전쟁에서 전쟁에 맞서 노동자들의 도움을 충분하게 보증할 정도로 강력하다는 걸 확신하고 표명한다고 전했다.

 

이제 우리에겐 이후에도 인터내셔널은 온다.

 

이 문제를 다룬 1899년에 파리 회담 결의안은 가장 큰 흥미를 끌고 있다. 결의안에 상비군들은 민주적이고 공화적인 정권을 부정하고, “군주제 혹은 과두적인 자본주의 정권을 군사적으로 표명하고, “반동적 쿠데타 및 사회 억압적 도구로 규정한다.

 

 

 

 

결의안에는 무장한 국가들에 공세적인 정책을 원인으로 여전히 현존하는 공세적인 전쟁들의 체제와 위협적인 국제적인 분쟁들로 결과를 특징한다. 여기에는 군사 기술적인 견해에서 공세적인 정책과 군대들을 즉각적으로 해체하고 사기를 저하할 수 있기 때문에 모두 거부한다. 문화에서 모든 전진에는 적대적인 성질과 그리고 마지막으로 군대들이 국가에 부과하는 물질적 부담들 때문이기도 하다. 결의안에는 상비군 철폐와 민병대를 포괄적으로 도입하고자 요구하고 있으며, 전쟁 자체를 자본주의에서 필연적인 결과로 여긴다.

 

이 결의안에는 군국주의적 특성화와 관해서 그전에 기록한 어느 결의안보다도 더 많은 주제들을 다룬다.

 

1891년 브뤼셀(Brussel) 회담의 과정들도 매우 중요했다. 여기서는 전쟁의 질문들과, 국제적으로 군국주의에 대한 문제들로만 논의했다. 니우벤후이스(Nieuwenhuis) 결의안은 자본주의에서 국제적인 의지의 결과로만 혁명적인 운동에 등을 돌리는 수단들로 전쟁을 지정했고 모든 나라에서 사회주의자들을 모든 전쟁에 총파업으로 대응하고자 요구했으나 부결했다. 에두아르 바일란트, 빌헬름 리프크네히트(The Vaillant Liebknecht resolution) 결의안은 군국주의는 자본주의에서 필수적인 결과이고 국가적 평화를 달성하려는 목적은 오직 사회적으로 국제적인 사회주의 체제를 수립하고자 채택했다. 이 결의안에는 노동자들은 야만적인 전쟁과 전쟁을 조장하는 동맹들에 맞서 꾸준한 선전으로 항의하고, 프롤레타리아의 국제적인 기구들을 완성하고자 사회주의가 승리할 수 있도록 촉진하고, 이를 투쟁할 수 있는 방법으로만 세계 대전이라는 파국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선언했다.

 

1893년 취리히(Zurich) 회담에선 브뤼셀(Brussels) 결의안을 수락했고 군국주의에 맞서 싸우는 방법으로 군사적 신용 거래들에 대한 투표 거부, 상비군에 대한 그칠 수 없는 항의, 군비 철폐에 찬성하는 꾸준한 선동, 세계 평화를 이루고자 싸우는 모든 연합들에 대한 지원들로 지정했다.

 

1896년에 런던 회담에서는 군국주의의 양면들에 대해 다시 논의했다. 전쟁의 주된 원인으로는 여러 국가들의 지배 계급들이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을 강요한 경제적 모순으로 지적했다.1) 전쟁들은 노동을 희생하면서 지배계급들이 그들의 고유한 이익적인 행하는 행위로 간주했다.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을 파괴하고 군사적 억압에 맞서는 투쟁은 노동자 계급의 의무였고, 현존하는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도구들인 자본가 계급들이 목적을 고정하고자 했던 권력적인 수단들을 정부들에 손에서 빼앗고2) 정치적 권력을 정복하는 착취에 맞선 투쟁에서 일부를 이룬다고 여겨진다. 회담에 따르면, 상비군들은 전쟁의 위험을 증가하게 했고, 야만적으로 노동자들을 억압하는데 조력했다. 즉각적인 요구들에는 상비군들의 철폐와 민병대의 도입과 함께 국제적인 중재 법원들과 사람들이 전쟁과 평화를 결정하도록 했다. 그러나 결의안은 노동자들도 목적을 달성하고서 입법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확고하게 확보하고 국제적으로 사회주의를 수립하고자 국제적으로 힘을 합친 이후에서야 이를 인정했다.

 

 

 

1900년 파리 회담은 자본주의에서 식민지 확장 정책에 포괄적인 결의안을 통과했고 국제적인 분쟁이 생겨나는 자본주의가 품은 민족 억압 정책을 규탄하고 특히 야만적인 사례의 일부들을 인용하면서 군국주의에 맞서는 투쟁에 각별한 흥미를 기울였다. 결의안은 1889, 1891, 1896년의 결정들을 언급하면서 제국주의 세계 정책의 국제적이고 민족적인 위험들을 지적하고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최선을 다해서 국제적인 투쟁을 벌이기를 촉구했으며 다음을 따르는 실질적인 수단들 국제적인 항의 운동들, 모든 군사적, 해군 및 식민지 지출비 거부, “군국주의와 싸우는 걸 목적으로 하는 젊은 사람들에 교육 및 조직을 제안했다.

 

이런 결정에 대한 조사서들은 해외로 진출하는 적들에 맞서 군국주의에 대한 실질적인 정치적인 착실하게 성장하고 자국의 적에 맞서는 군국주의에 의미만이 아니라 전쟁의 원인과 위험들에 대한 인식을 더욱 깊고 전문적으로 다루고 제시한다. 그러나 군국주의에 맞서 싸우는 수단들에 대해서, 1868년에 전쟁에 맞서는 총파업에 대한 발상은 당시보다 시간적으로 너무나 획기적이었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병사들이 일반적으로 파업하는 방법들은 이후에 모든 회담들에서 거부했고, 주어진 상황 아래에서는 전적으로 당연했다. 그러나 인정받은 전투적인 수단들은 더디게 전진할 뿐이었다. 프롤레타리아트에게 권장하는 군사비용에 대한 지출 거부에는 군국주의에 반대하는 오직 권력에 대한 직접적인 정치적 선언이며, 더 언급하지 않아도 즉각적인 효과로는 미미하다. 여타의 모든 제안들은 법적 지위에 변화들과 미래적 행위들을 지지하는 선전의 판도 내에서 움직인다. , 당분간은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방대하게 공개하는 유일한 판도 내에서 이외의 경우에도 제시했으므로 규칙대로 군사적 신용 거래들에 대한 거부조차도 선전하는 수단들의 일부로 간주해야만 할 것이다. 당분간은 특히 독일에서 주된 어려움은 반군국주의 선전의 형식과 방법을 결정하는데 두고자 한다. 회담의 결정들에서 형식과 방법을 더 세부적으로 아직 정하지 못한 건 각국의 대내외적 상황이 상반하기 때문이고, 이런 관점의 형식에서 볼 때 편리하고 심지어는 필수적으로 드러날 수도 있다. 그러나 아직은 이런 결정들의 취지에는 반군국주의 선전에 더욱 광범위하고 전문적으로 하는데 중점을 두고자 한다. 파리 회담에서 결정들은 이를 가장 명백하게 이룰 수 있는 절차를 제시했다. 이는 국제적인 프롤레타리아트의 자의식이 증가했으며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 의식적 힘을 발휘하면서 국내외적으로 군국주의에 맞서 부분적인 성공을 이미 자본주의 사회 체제 내에서도 달성해야한다는 확신도 성장하고 있음을 동시에 반영한다.

 

 

결론적으로 모로코(Morocco) 분쟁과 함께 인터내셔널의 프랑스 지부의 선전으로 190511 월 국제 사회주의 안내소가 보낸 안내문을 기록해야한다. 전쟁에 맞서는 행위들과 관련해선 적극적인 제안을 하진 않았지만, 전쟁이 발발한다면 안내소에 소속한 구성원들은 전쟁을 피하거나 예방하는 데 적합한 수단들을 고안하고 투표하고자 즉시 연락을 취할 수 있고 두 말할 것도 없고 최대한 간단하게 요구하고자 한다.

 

 

 

 

참조

 

그리고 계급적 모순은 아니다! 이 질문의 측면을 여기서 특수하게 처음으로 제기했다.

 

 

2. 후자로는 실제로 정치적 권력의 정복적 대상은 아니지만 정복 그 자체적인 본질로 기관으로부터 보호하는 건 프롤레타리아트의 손에서 통과했고 물론,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는 프롤레타리아트의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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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국주의의 방법과 효과.

 

당면한 임무.

 

이제 우리는 당면한 방법과 효과에 대한 특수한 검토를 마치고 프로이센 독일의 모범적인 방식을 위해 들러붙고자 한다. 관료적인 수학자 자본주의적 군국주의와 군국주의의 최악의 형태를. 국가를 넘어선 국가를.

 

현재의 군국주의가 사실일지라도 자본주의적 사회의 징후는 아닌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견고해진다.

 

군국주의를 끝내기 위해선 유용한 군대를 유연하고 효과적인 부대로 바꿔야한다. 반대로 그것은 아주 높은 가능성을 군사적 기술과는 반대로 기계가 아닌 사람으로 구성된 살아있는 메카니즘으로 제시하기 때문에 올바른 정신으로 채워져야한다.

 

첫 번째 측면은 재정적으로 해결된다. 이후에 논의하겠지만 우리는 이제 두 번째 측면에 몰두할 것이다.

 

그것의 내용은 세 가지이다. 군국주의는 군사적 정신에서 생산하려는 것을 보고, 우선적으로 활발한 군대로부터 예약하고 예비군들이 중요해진다. 동원되고 지원되는 마침내, 주민계급들은 환경을 제공한다. 주민계급들은 양육하고 군국주의와 반군국주의에 부합되기 위해 고용된다.

 

군사 교육학에서 병사들의 훈련.

 

진실한 군인정신은 애국정신이라고도 하며 프로이센-독일은 왕에 대한 충성심의 한마디로 세계적인 명령을 따라 모든 적들의 국가를 침략할 수 있다는 걸 의미한다. 이 정신은 멍청하고 저능한 대중적인 지도를 필요하도록 한다. 이익관계에서 존재적 명령으로 직접적으로 교류한다. 폰 아이넴의 국가의 장관들의 가입은 충실한 왕의 군대를 제공한다. 군대는 나쁜 말로 누구의 생각을 묻지 않으며 덜 올바른지도 묻지 않는다. 독일 군국주의의 대표를 완전하게 아래로부터 말한다. 하지만 군국주의는 악마와 심해에 있다. 무기의 기술은 전략적이고 텍티컬하며 현재의 위대한 군인의 지식인1)과 그러므로 군인은 더욱 지능적이고 캐테리스 파리버스2) 또한 그러하다. 이러한 이유로 홀로 군국주의는 거의 멍청한 대중들에겐 훌륭하진 않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멍청한 대중을 사용하지 않으며 또한, 경제적 기능은 대중들에게 공연하기 때문에, 필수적으로 프롤레타리아로부터 온다. 이 명령은 착취할 수 있으며 더욱 큰 가능성의 이익을 필연적인 삶의 위험을 커지게 한다. 자본주의는 강제한다. 자본주의는 비극적인 운명을 시스템적으로 어마어마한 노예들을 매우 지능적으로, 자본주의는 가득차게한다는 것을 안다. 고유한 죽음과 해체를 야기하면서도 모든 시도들은 능숙한 책략과 교활한 조직으로부터 교회와 학교로부터 자본주의의 함선을 조종하기 위해 지능적인 스킬라 괴물의 적은 착취를 만든다. 다른 매우 위험하거나 프롤레타리아 자신으로부터 짐승이 부담하기에 적합하지 않고 교육의 카라디브스로부터 필수적인 자본주의의 파괴를 계급의식으로 증가한다. 모든 부분들과 혁명과 학대받는 모든 시도들은 실패할 것만 같다.

 

동엘비아 지역의 농부들은 크로체의 기록에 따르면 대부분 쓸모없는 노동자들이었지만 최고의 융커들이긴 했었다. 명령에 따르는 대규모의 군국주의에 기여했다. 그럼에도 이 유형들은 군국주의에서도 낮은 지능을 가졌다.

 

최고의 병사는 사회민주주의자들이다.”라고 한 사람은 자주 말했다. 세계적인 병영 아래에

군인정신을 주입하는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보여준다.3) 단순히 노예로서 맹목적인 복종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실용적이지도 않기 때문에, 군국주의는 총 쏘는 기계”4)를 생산하기 위해 간접적으로 남성의 의지를 강제한다. 도덕적이거나 심리적인 영향을 강제하거나 폭력적인 수단을 사용하는 의지를 생산하며, 속이거나, 강제한다. “평화에 땀을 흘릴수록 전시에 피를 덜 흘린다.”는 격언은 여기에 적용해볼 수 있다. 외부의 적에 대한 군국주의가 요구하는 기능의 진정한 정신은 완고한 쇼비니즘과 편협하거나 이기적이며, 둘째로 국내의 적과 관련해서 모든 진보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거나 심지어 증오한다. 위협적인 사업이나 시도를 지배계급 하에서 권력을 장악하고자 한다. 군국주의는 계급적 관계인 쇼비니즘에 매우 반대하는 사람들과 이러계급적 관계에서 모든 것이 진보하는 사람들에게 호의적인 영향에서 군인들의 생각과 감정을 이끄는 통로이다, 기존 사회 질서의 몰락이 초래될 때까지 유일한 합리적인 목표로 나타나야 하며 그리고 비록 규칙적이긴 하지만, 징병의 연령대에 젊은 군인들은 프롤레타리아라는 사실을 무시할 순 없다. 이들은 독립적이거나 정치적 통찰력에 있어 동시대의 부르주아보다 뛰어나고 계급 의식이 확고하진 않다.

 

체제는 군인들에게 도덕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파렴치하거나 교활하다. 사회적인 계급에 따라 분류하는 대신에 지배계급에 의해 연령을 분류하고, 체제는 노년의 계급에 있는 사고와 감정을 20~22세의 프롤레타리아로 구성해서 특수한 계급으로 형성하고자 한다.

 

우선 제복을 입은 프롤레타리아들은 무자비하게도 그들의 가족들과 동지들에게 단절되어 있다. 그들의 고향을 잊게하고 독일에선 효율적으로 병영5)에 가두는 것으로 영향을 미친다. 이들은 수도원 생활에 대응하는 예수회 생활을 방불케한다.

 

다음은 이 격리를 지속하고자 하는 시도를 가능하게 한다. 군대와 기술적 관점에서 장기복무의 필요성이 없을 경우 격리를 연장하려는 경향에는 재정적인 난관을 1892년에 2년 동안의 독일의 상황6)에서 확인해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장기복무에 할당된 시간을 활용하는 것은 문제며, 훈련받은 사람들의 정신적인 관점에도 영향을 미친다.

 

교회의 사례에서도, 모든 사람들의 약점과 감각은 군사교육에 수용된다. 열망과 허영심을 자극하고 군복은 최고의 제복을 수여하고, 병사들의 명예는 특히 위엄있게 미화된다. 군인계급들은 가장 중요하면서도 존경과 찬사를 받으며 칭송한다. 그리고 실제로도 많은 특권을 부여받는다.7) 그리고 군인계급들이 끌어들일 하층민들의 거친 취향을 따라 제복을 재단하고 장식하면서 과시한다. 순수한 군사적 목적과는 다르게 군인계급들은 카니발 의상처럼 작은 장식들로도 제복을 다듬는다. 모든 종류의 반짝이는 구별된 장식들과 좋은 촬영을 위한 줄무늬들은 매력적으로 방탕하게 제복을 꾸미려는 과시욕과 뛰어난 사람으로 인정받는 것에 대한 욕망처럼 저급한 본능이다. 그리고 군인들의 고통에는 반짝이는 장식들과 화려한 군악대들과 함께 진정된다. 아이들, 얼간이, 하녀, 프롤레타리아의 잔재들 사이에서 웅장한 군대를 자랑스러워 한다. 한때 행진을 본 적이 있는 수상한 대중들과 베를린의 왕궁 친위병들의 행진을 본 적이 있다면 꽤 이해할 것이다. 특정 민간인들에게서 느껴지는 제복에 대한 호감은 군대 내에서 미개한 요소들에 대한 강한 유혹을 끈다.

 

이러한 모든 수단들은 현저한 지적단계와 사회적 위치에서 더욱 효과적이다.

 

단순히 판단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최상의 제복을 입은 미국의 흑인8)들과 동프러시아 노예들이 싸구려 군장신구들로 사람을 유혹하기란 쉽다. 그러나 그들의 군사적 위상과 민간인적 삶의 단계는 상이하다. 그러므로 이 수단들은 유능한 산업적 프롤레타리아들에게 군국주의에서 계획되고 지정한 비극적 모순에도 좋든 나쁘든 필수적으로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며 적어도 당분간은 군국주의에 유연한 소재를 제공한다. 그럼에도 군국주의에선 정신적으로 동의하면서 보존할 수 있는 수단을 동원한다. 이를테면 카이저의 생일을 축하하는 연대축제가 있다.

 

중독된 상태로 병사들에게 모든 걸 주입할 때, 영혼은 죽고, 타오르는 공상들과 감정은 체계적으로 권력의 수단으로 이용된다. 병사들은 군국주의에 적합하게 자신을 맞추며 왜곡되고 미숙한 세상들로 채워나가기 시작한다. 본성적으로 군국주의 교육은 모든 유능한 산업 프롤레타리아를 양성하는데 적합하지 못한 능력을 갖거나,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군국주의 교육을 가르친다. 병사들에게 군국주의와 적합하지 못한 교육을 가르치는 건 궁수가 쏜 화살에 튕겨진 화살과 닮아있다. 이 사례는 막스 로네즈와 우편들에서 이익을 위한 경쟁에 제빠른 리버트 장군에게 전달되었다. 반사회적이고 반민주적인 교육에 의존하고 가혹한 훈련, 병영에서의 생활, 장교9)와 부사관10)들의 제복을 신성하게 바꾸며, 병영생활의 많은 부서에선 모든 사고를 근무 중이거나 비번일 때조차도 짐쇠에 물려서 병사를 규율에 복종하게 한다. 탄력적으로 복종하는 모든 병사의 의지는 가장 부러지기 쉬운 척추를 구부리고, 당기고, 뒤틀려서11), 탄력적이고 필수적인 생산을 제공한다.

 

18921월에 독일의회는 비록 편견 없이 거부되긴 했지만 열성적으로 종교정신을 부합하고자 요청했다.

 

정신적 훈련은 군사적 억압과 노예제도를 완성하기 위해 예전된 군사적 교육으로 특별한 대상을 분명하게 조직한다.

 

명령과 종교적 비방은 당근과 채찍이 따른다. 채찍은 오직 베일에 감춰진채로 해를 가하며

항복문서의 체계12)와 고급화된 전망13)으로 성공적으로 고용된 군대의 영구적인 장식용으로 채워진 대형을 위한 미끼로서 당근을 겸한다. “장교”14)나 부사관에 의뢰하지 않거나, 민간인의 삶에 대비하는 증서15)와 매우 교활하고 위험한 배치로 군국주의는 공적인 삶도 오염시키며, 후에 보겠지만 가장 선두에서 규율의 체계16)에서 군국주의에 따른 위협을 전쟁범죄와 최소한의 반대야당을 군사적 정신으로 무장하게 하고 군사적 정의는 준-중세적인 절차에 따라 잔혹하고 상스럽게 처벌하기 위해 최소한의 불복종조차 허용하지 않는다. 과도할 정도로 헌신적인 상급자들은 종속된 부하들에게 최소한 벌을 주고 자기보호의 권리마저도 훔쳐가도록 부하들에게 반복적으로 학습하게 한다. 군국주의에 투쟁할 수 없도록 유익하지도 선동적이지도 못하게, 군사적 논문들과 군사적 범죄 사례를 정독하지 못하게 하고선

 

여기에 혹사된 군인들의 사례를 후에 기회가 된다면 언급하도록 하겠다. 학대는 법적으로 제재할 수 있는 수단이 아니지만 군국주의에선 강압적인 징계의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다.

 

병사들을 야생짐승들로 길들이고자 하며 집합하고, 아첨하고, 억압하고, 투옥하고, 손질하고,

때려서 감각을 죽여버린다. 밀알이 섞여서 군대를 강력한 조직으로 공격할 수 있게 하고

벽과 벽으로 방벽을 쌓아 혁명의 유입을 가로막는다.17)

 

“1년 자원봉사자들”. 예비역 장교들에게 계획된 부르주아의 자식인 “1년 자원봉사자들은 반군사적이고혁명적 경향에 의심을 부른다. 그러므로 장교들은 막사에서도 떨어져서 그들의 고향에서 떨어져 병영에 갇히거나, 교육을 받고 교회에 나가는 것을 피할 수 있다. 심지어 가혹한 훈련에서도 예외이며 규율의 법적 범위에서도 자유롭고 군사형법에서도 가볍게 예외로 풀어주는 건 당연한다. 예비역장교들이 병사들을 학대하고 문화적인 모든 것에 강력하게 증오를 품을 수 있음에도 예비역장교를 훈련하는데 사용되는 기구나 설비들은 강력한 증거를 제공한다. 군사적 규율에서 조직 속의 개인들은 독립성을 상실한다. 군대에서 각 개인들은, 노예선박선의 범죄자와 같이 모든 독립적인 행위를 한심하게 제한하도록 쇠사슬로 묶어낸다. 수천년에 걸친 압도적인 권력은 독립적인 행위를 만들어내는 압도적인 힘을 방해한다. 모든 강력한 조직의 구성원들은 강력한 원칙들과 명령에 노출된 상태로 특별한 종류의 최면술로 지배한다. 군중들을 최면에 사로잡힌 것처럼 속이고 군국주의에 반대하는 계몽되고 단호한 군국주의 반대자들과 상대들을 애초에 존재하지 않은 것으로 포박해버린다.

 

병사들에게 갈등과 난관을 교육하는 영역에서 군국주의는 두 가지 사실을 보인다.

교육과 장비가 적용된 군사훈련은 더욱 건방지고 증가하는 단계에서 병사들의 독립을 제어한다. 병사들은 자본의 감시자로 독립조차 요구할 수가 없다. 어떤 요구들도 할 수 없다는 사실로 인해 자살로 죽음을 선택할 자유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단순히 전쟁은 병사와 외부의 적들과 싸울 수 있는 노예들과 기계를 필요로한다. 장비와 무장도 제외할 수 없다. 밝은 제복과 반짝이는 부대마크, 전투모와 표식깃발, 행진훈련, 기마병의 공격, 자국의 적들과 싸우는 계급적인 정신에 필요한 찌꺼기들이 필요하며 외부의 적과의 전쟁에선 치명적이거나 사용할 수 없게 된다.18) 모든 군국주의를 옹호하는 순진한 비평가19)들은 군사훈련의 기준에서 숨막히는 비극적인 전투를 무시하고 많은 측면에서 과장되게 묘사된다.

 

군국주의의 내부에 존재하는 자기모순은 첨예하게 대립하는 경향이 있으며 국내외의 정치적관계와 어느 쪽이 우위를 차지하는데에 따라서도 이익관계는 두 가지가 상반된다. 이 사실에서 정신을 속이는 세균들을 전파하며 군국주의는 스스로를 파괴해나간다.

 

무장된 혁명은 자국의 적들과 투쟁할 때 단순히 군사기술적인 성격의 끔찍한 측면을 가정하여 장식된 노예들과 기계들이 혁명을 억압할 수 없게 한다. 그러면서 소수에 의한 강압적인 지배의 마지막 기간에는 자본가들의 과두정치는 타격을 입을 것이다.

 

왜곡되고 혼란스러운 프롤레타리아의 계급의식에서 일반적으로 군사정신의 수단을 아는 건 매우 중요하다. 군사정신에서 일어나는 순수한 군국주의의 오염을 제외하고 모든 공공생활에서 일어나는 전반적인 모든 작용을 동시에 오염시키며 자본주의에 순종하도록 한다. 군국주의는 손쉽게 경제, 사회와 정치에서 프롤레타리아를 노예상태로 생산하고 착취한다. 또한 군국주의는 해방을 위한 프롤레타리아의 계급투쟁을 늦추는데 상당하게 일조한다. 우리는 이를 반드시 돌려낼 것이다.

 

준 공식적이고 준 군사적인 조직과 평범한 사람들의 집단

 

군국주의는 방대한 규모로 현역군을 강력하고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이를테면 평범한 사람들을 군사적 관활권(사법)으로 광범위하게 확장하고 예비역 장교와 지휘관들에게도 적용되는20) 군사법정의 지배체제의 수단들은 무제한적인 권한으로 평범한 사람들에게 침범하려한다. 여기서 특징은 통제위원회에 출두하도록 소집된 사람들을 군사적 관할권에 복종하게한다. 군당국은 군 통제위원회가 앉아서 공개적으로 종일 법을 위반하면서도 관할권을 주장한다. 이에 대한 근거들은 조금도 없으며 통제위원회는 군복을 입은 젊은이들의 국방모임과 준-공식적이고, -관료적인 경영을 하는 군대 모임들이 속하며 우둔하거나 포식적인 잔치를 벌인다. 이 군국주의 활동 영역에서 매우 중요한 것은 군대의 계급정신을 민간인들의 생활에도 도입하고 이를 영구화하려는 예비군 장교들의 활동이다. 더 나은 민간인과 관련해선 더 큰 해악을 끼친다. 국가 및 공공 행정부의 공무원들뿐만 아니라 처벌하고 교육적인 체제21)의 공무원들도 거의 예외 없이 군대 규율, 군인 정신, 전체적으로 군국주의적 생활적 개념에 복종한다. 모든 어색한 반대운동들을 꼭 가로막는 건 아니다. 민간관료(행정)은 복종하고 부관과 하급관리들에게 동일한 병역입영자”22)를 연계하여 확보한다. 그러므로 계급정의의 계급교육의 나무들은 군국주의의 하늘로 높이 자라는 반면23) 민주적고 자치적인 나무들은 철저히 가지치기하도록 규정한다. 우리는 현역 장교와 예비역 장교들이 문서작성에 관여하는 일은 명시적으로 금지되어 있다는 사실은 무시할 수 없다. 매우 교훈적인 가드케 사건과 더불어서 군국주의는 정신을 정복하고 손에 닿는 모든 걸 중앙적인 부서를 통제하기 위해 분투한다는 건 가장 강력한 증거이며 합법적이거나 불법적인 수단으로 영향력의 범위를 지속적으로 확장하려는 경향과 만족할 줄 모르는 과격한 성향을 확장해나가며 법적이거나 불법적인 수단들을 동원하여 권력을 열망한다.

 

민간인들에게 미치는 군사적인 다른 영향.

 

군국주의자들의 확장에 대한 열망에서 중요한 결실에는 심지어 예비군 장교들이 저지른 활동조차도 "병역입영제"라는 비참한 체제다. 순수한 국가적 목적과는 별개로 병역입영제체제는

충실하고 열성적인 대리인들과 국가 및 지방행정부의 분파인 군국주의 정신의 옹호자들을 모든 국가에 전파하고자 한다. 동시에 관료기구의 신뢰와 준비24)를 기꺼이 자본주의에 똑바로고정하도록 국가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사고를 다수의 국민들에겐 특별한 교육적 필요로 전달한다. “민간인 생활의 지급증명서교육적 목적은 부사관들의 보험료에 대한 논의에선 훌륭하게도 만장일치와 대담함으로 인정되었다. 18912월 독일 제국의회에선 카프리비 제국총리와 지배계급 대표들에 의해 대중교육의 국가를 이상적으로 유지하게 했으며 운 좋게도, 이전의 소지자였던 상등병이 떠나야했던 이후에 우회적으로 부사관들에게 체계화되었다.

 

그러나 교육의 결과는 너무나 빈약하다. 군국주의자들에게 가난한 마귀인 하급관리의 자리를 차지한 "병역예정자"들은 악마는 매우 열악한 봉급 받는다. 장기적로도 독일에서 아직 임관되지 못한 장교들도 프로이센의 왕25)을 위해 일하기란 불가능할 정도다. 이는 혁명을 매수하려는 끊임없는 문제다.

 

군인들의 군사적 열정이 생산되고 유지되고, 군복과 장식에 꾸며진 과시와 동시에 군국주의의 범위 밖에 있는 주민들과 군대를 모집하는 계층들의 영향을 미치거나 그 비용을 감당하고 자국의 적들에게 굴복할 "위기"에 처한 수단들을 추가로 언급해야겠다. 1906년 가을 프로이센을 방문한 영국의 전쟁 장관 할데인은 이것을 재빨리 알아차렸고 자신을 이렇게 표현했다. “군국주의를 성취하고 귀중한 현상에는 군대에 손쉽게 다가가고 전쟁을 준비하는 국가는 냉정함과 충성심을 배운다.”26)

 

군국주의는 그 정신을 전파하기 위해 상당히 다른 방식의 수단을 지닌다. 군국주의는 소비자와 생산자의 수용과 전략적 중대성이 큰 국가경제에도 영향을 미친다. 군대에 존속하는 고용인들인 생산회사의 장인들과 상인들을 전체적으로 주최한다. 장비를 필요하는 요소를 생산하거나 수송하며 군대의 막사로 옮기거나 유지하며, 모든 군인이 사용하는 요소를 때로는 전체의 공적인 생활에서 깊은 인상을 준다. 특별하게 작은 국경수비대는 더욱 강력한 규칙 제국의 지배 하에서 귀족모임의 규칙으로 국가를 처음으로 주무르도록 돕는다. 국경수비대는 군국주의에도 영향을 끼치고 착취하도록 허용하며 경악스러운 열정과 귀를 막는다. 군국주의는 재반납하며, 열성적으로 지지한다. 자본가들은 선동하는데 제국주의가 흥하는데 도움을 준다. 이름들도 알만하다. 크룹, 스텀, 에크하르트, 로워, 워크맨, 티플스커치 노벨 권력반지가 있다. 크루프는 장갑판으로 수익을 얻고, 터펠스카르체는 뇌물로 수익을 얻고 팽창된 우르만의 운임 및 화물초과료와 100% 150%에 달하는 파우더 링의 순익은 독일 재무부의 100만 달러를 덜어주었던가?27) 특히 오스트리아에서 납품업자들의 사기는 큰 반향을 일으켰다.28) 각각의 유세에는 사기꾼들의 황금 수확을 의미한다. 비단 러시아만이 아니라 기생충으로 포장하기 위해 채취된 수단들이다.29) 위대한 귀족들은 군국주의에 가장 기독교인적인 포교로 인민을 약탈하며 군국주의에 보답한다. 귀족들은 군국주의에 거룩한 망령들인 그들우르만과 의존하는 모든 것에 쏟아붓는다. 혁명에 맞서서 무자비하게 전쟁을 한다. 물론 노동자들의 실질적인 물질적 흥미도 소규모의 방위공조회사의 대부분은 군대와 관련한다. 상비군 무역과 산업이 없는 국가들은 상비군을 보유한 국가들보다 덜 번영한다. 군사생산의 종사자들은 군대가 없어지더라도 경제적으로 더 나빠지진 않는다. 그러나 대부분 그들은 자신의 코끝 너머를 보지 못하고 군사주의적 영향에서 쉽게 굴복하고 반혁명은 큰 난관에 직면한다.

 

방대한 규모의 경제적으로 관계한 식량경리부, 유지공장, 의류 부서, 수리 창고, 무기 및 군수 공장, 조선소 고용주들은 군국주의에서 가장 신속하고 예외없이 그 직원들은 19041031, 독일 육군과 해군 행정부에서 국가의 직접 지배 하에 총 54,72330)을 고용했으며 사회민주주의에 맞서 제국연합과 같은 반동적 애국 선동에 투입했다. 군국주의는 대부분 미끼의 수단인 냉혹한 방법으로 선전물의 표제, 장식들, 군인회관과 유사한 축회와 무리한 장려금, 심지어 노동조합을 비방하고 실제 병영 규율31)로 조직적으로 애국적인 애국주의자를 계발하고자 한다. 군사작업장에선 더욱 프롤레타리아를 계몽하고자 한다. 물론 노동계급에겐 적대적인 영향으로 인해 한계가 있으며 군사 행정부는 특히 제국의선박 노동계급을 중심으로 달성한 사회민주당의 성공에 대한 환상으로 여기며 환영하지 못한다.

 

노동계급을 중심으로 사회민주당 투표가 계속 증가해야 한다면 (이를테면, 1903년 스판다우 선거에서 채택한 방해공작으로 군사작업장을 폐지하겠다는 모든 협박은 매우 순진하다. 군국주의는 노동계급에게 계속해서 근소한 임금을 지불하고 따라서 그들을 사회민주주의의 반열이 있는 한 계급의식의 발전을 방해할 힘은 없다. 국왕이 허가한 공장의 노동계급 가운데서 임금인상을 위한 잦은 운동과 군사행정부32)와 가진 무수한 투쟁을 기억하면 비관적일 수만은 없다.

 

방대한 철도, 우편 및 전보시설들은 전략적으로 자국에서 적과의 전쟁은 적의 진출에 맞서는 만큼이나 중요하다. 전략적 중요성의 이런 필수적인 요소들은 군사조직의 완전한 붕괴로 이어지는 파업에 의해 군국주의에 타격을 줄 수 있다. 군국주의에선 통신수단과 군국주의와 동맹한 생산적 관계인 철도 가판대, 역마차 공장와 관련한 공무원과 노동자 조직에게 군국주의 정신을 주입하려하고 그 시도가 얼마나 비도덕적인 방식으로 추구되는지 이유를 설명하고자 한다. “병역예정자의 제도는 제외하고, 그 직원들은 독일의 주마다 달성된 군사법에 복종한다. 또한 독일과 프랑스의 경우33) 행정명령과 이탈리아, 네덜란드, 러시아에선34) 특수한 법적 수단으로 노동조합을 형성할 권리를 박탈하며 군국주의 국가에선 직원들의 정치적 위치와 피상적인 견해를 살펴볼 수 있다. 물론, 우리는 군국주의적 이익과는 별개로 자본주의 국가에서 통신수단의 직원들을 대체로 국가에 대한 적대적인열망에 굴복하게하고 전반적인 이익이 있다는 사실은 감안해야 한다. 그러나 자본주의 국가의 분투는 장기적으론 실패하며 노동운동에 어려움을 줄 수도 있지만 사실상 통신수단의 직원들은 프롤레타리아의 위치에서 낮은 임금으로 지쳐있기 때문이다.

 

교활하고도 정치적으로 규제하는 군국주의

 

 

그러므로 군국주의는 먼저 차제적으론 군대에서 등장하고, 군대에서 제도로 나아가 군국주의 및 준군국주의 기관들의 조직에서 전반적인 사회로 침투한다(통제체제, 명예로운 법정, 글쓰기 활동 금지법, 예비군 장교 계급의 "민간인 생활 보증서", 관료기관의 군사화, 끔찍한 병역입영제도”. 이외에도 젊은 남성들의 방위모임, 군사모임 등은 예비군 장교 계급 및 "예비군" 제도에서 유발해서 군사화되며 해를 가한다. 또한 군국주의는 군국주의적인 정신으로 사회의 모든 공공 및 사생활까지 물들인다. 교회, 학교, 저렴한 예술 성향, 언론, 부패한 작가들의 비열한 무리와 "우리의 영광스러운 전쟁군대"를 포위하여 사회적인 후광을 얻아 생활에 먹구름을 끼게하며 집요하고 교활한 방식으로 작동한다. 군국주의는 가톨릭 교회와 함께 가장 최악의 마키아벨리주의이며, 자본주의의 모든 마키아벨리주의 중에서 가장 교활하다.

 

코페닉의 장군를 언급한 적이 있는데 군국주의 교육 방법과 교리문답, 그 결과들은 시사점을 제시한다. 이 교리에서 가장 탁월한 지적은 한 부르주아 사회에선 전반적으로 장교의 제복을 신성하게 여긴다는 사실이다. 극 중에 재소자가 진행했던 시험은 6시간 동안 지속했는데, 그 시험에선 우리의 군대, 관료제도, 프로이센에 대한 충성이 시험대상으로 제시되었다. 모든 학생들이 그 시험에서 나아가 결과에서도 선생님들의 교육에서 핵심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보고 머리카락을 곤두설만큼 놀라게 한다. 게슬러의 모자도 이렇게 자기비하적이고 고분고분한 복종으로 불멸하는 장군의 모자만큼 따르진 못했을 것이며 이렇게나 신성한 트리어의 붉은 망토도 제복에 그렇게나 헌신적인 사람들은 없었을 것이다. 이 고전적인 풍자에서 큰 효과는 군국주의 교육학의 원리를 죽음으로 몬다는 사실이다. 군국주의는 세상의 조롱과 비웃음과 함께 법원에서도 꺼저야 한다면, 현재 부르주아 사회에서 마법사의 제자를 자처하는 군국주의는 일상에서 먹는 빵과 숨쉬는 공기만큼 아깝지가 않다. 자본주의에서 강력한 집행관인 군국주의는 서로를 사랑하는게 아니라 오히려 두려워하고 증오한다. 이들은 서로에게 다양한 이유를 대며 필수적인 악으로 여긴다. 그래서 코페닉의 교훈에는 부르주아 사회에서 따를 수 없는 사회민주주의35)와 반군국주의을 손에 쥔 강력한 선전수단으로 남을 것이다. 이들이 군국주의의 문제를 심화할수록 더욱 번성하리라.

 

쾨페니크의 장군이 장군의 역할을 해낸 것은 구스타브 투크라는 1880년대에 두툼하고 먼지가 묻고 오래된 사회적 의미에서 확장된 군사국가라는 서적에서 군국주의는 민족적이고 문명적인 사회주의이며 모든 걸 태우고, 비추며 지배하는 태양을 중심으로 심장과 영혼으로 이뤄진 미래사회를 소개했다. 이 책이 소개한 사회는 하나의 군영으로 뒤바뀌며, 그 군영은 초등학교, 대학 및 애국심을 생산하는 공장이며, 군대는 일제히 파업을 파괴하는 조직으로 변모한다. 군국주의의 새천년에 열광적인 망상은 실제로는 조직적인 광기에 불과했다. 그러나 군국주의적 목적과 방법을 흐리게 하는 모든 사고에서 자유롭게하고 이를 극도로 사고한 조직적인 광기였다는 사실은 징후적인 의미를 지닌다.36)

 

적어도 한 가지 측면에선, 지배적 성격에서 군국주의는 현재에 계급제도의 법률, 관료주의, 경찰행정, 계급적 정의와 교황주의의 종류라는 태양을 중심으로 돌며 모든 계급정치에서 은밀하게 드러나는 최종 규제자이며, 자본가 계급만이 아니라 노동계급의 계급투쟁에서 전략, 노동조합조직과 정치조직에서도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는 걸 세부적으로 설명할 것이다.

 

참조.

 

1. 1891227일 카프리비의 발언을 참보하라; 제국의회에서 당시 폰 칼텐보른 슈타카우 국방장관도 새로운 무장, 훈련규정으로 인해 비위대장들에게 요구된 것이 크게 증가했다고 언급한다.

 

2. 바이에른 주의 장군인 폰 자우어가 198810월 말 뮌헨의 정치경제 학회에서 한 발언을 참조하자. - (베벨, 상비군 부재, 77)

 

3. 이와 관련해서 1891227일 독일의회에서 카프리비의 언급을 참조해보자.

 

4. 이런 "사격 자동화 장치"에 루크 하사는 비공인된 사람이 작동할 수 있으므로 위험을 초래할 수 있지만 부르주아지들의 비명도 들을 수 있을 거라고 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신성한 존재, 즉 자본가적인 유사성만이 아니라 자신들의 봉건적인 파벌에 대한 두려움도 느낄 것입니다. 그리고 더벅머리 페터의 사냥꾼처럼 고통스러워하며 "도와주세요, 착한 사람들아!"라고 외칠 것이다. 이에 부르주아들은 "독일군대의 규율은 병사들이 판단할 수 없을 정도로 상승했군"이라고 헛소리한다. 라이프치히 일간지와 같은 신문이 코페닉 사례에서 기록했다. 물론, 부르주아지들도 절망적인 상황에서 군국주의라는 광기어린 파괴의 신의 자유로운 희생을 막지 못한다. 또 다른 비극적인 충돌이다!

 

5. 보건적인 측면에선 매우 심각한 문제며, 프랑스에서는 결핵과 매독으로 인한 인구 감염이 높은 수준으로 발생했다. 이를테면 프랑스에서는 독일 군대보다 결핵 환자가 5배에서 7배 더 많이 기록되었다. 한 사람은 프랑스 병영숙소는 사라져야 한다고 경고했으며, 몇십 년 후에는 프랑스의 인구 감소를 겪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6. 슈펠(Schippel)의 소책자, P. 929 참조.

 

경찰은 앞선 군대, 특히 남용을 저지른 장교들에 대해선 무력한 상태임을 유념해야한다. 더 나아가 군사적 미학으로 지속적으로 거리를 막고 도로교통을 방해하는 군사행진의 특권에 주목해야 한다. 몇 년 전에 베를린에선 이런 조롱에 대한 우스꽝스러운 거만이 극한에 이르렀으며 일반적인 위험으로까지 이어졌다. 화재 대응을 위해 출동하던 소방서 부대가 군사행진에 막혀 상황을 대처하지 못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 행진은 소방대원들이 차지할만한 자리를 내주지 않았고, 고상한 군사적 행진이 방해받지 않도록 그대로 진행했다. 이러한 행동은 후에 비난받았다.

 

7. 경찰이 도움을 주지 못하는 국가에 기록에 따르면, 전문가로 위치된다. 군대에 앞서,

특수하게 관리자들은 초과하게 전념한다. 우리는 게다가 특권을 기록하고자 하며, 군사적 관리에 따르면 자주 길가에선 더욱 길이와 랭크가 닫게된다. 교통을 간섭하고, 감각과 근거들도 없이, 물론 퍼레이드는 군사적 미학에 전달도니다. 지난 몇 년간. 우리는 베를린에서 우스꽝스럽고 과장된 지나친 흥분을 본다. 한계와 흔한 위험을. 화력군단의 부분에선 화력은 멈추고, 군사적 기둥으로 멈춰지고, 행진한다. 고상한 집안을 교란하는 걸 제외하고, 아름답고 위엄있는 명령에 주며, 후에 반대하는 행위를 한다.

 

8. 미국의 흑인 병사들, 1906, P.638, 베를린에 Lokalanzeiger의 논문을 참조하라.

 

9. 참으로 의심쩍은 성자들! 1903년의 11월의 빌제 사건, 폴바흐와 같은 "작은 요새" 사건, 도박과 샴페인 마시기에 관한 규칙, 장교들의 결투 - 장교 명예에는 훌륭한 꽃들인 브뤼에즈비츠의 살인(189610), 후에 일어난 총격사건(아렌베르그, 13쪽과 이어지는), 하름로스와 루스트랏 사건, 사진적으로 생활을 사진처럼 정확하게 묘사하는 빌제와 바이어라인 소설, 슐리히트의(반디신 백작) "일류 남자들", 예스코 폰 푸트캄어, 마지막으로, 이 소설에서 프린스 아렌베르그 스캔들을 상기해보면 된다. 프랑스의 작은 요새도시인 베르당은 1906년 가을에 꽤 호응을 얻었다. 물론, 군복을 신성시하는 사람들에겐 이 모든 건 재미있고 사랑스러운 약점이겠지만, 여전히도 기독교적 믿음을 굳게 고수한다.



다시 우리에겐 눈부신 최고의 국제적 연대의 선언이 여기에 있다. 영국 근위병 장교들은 서로를 채찍질하는 했다는 건 흥미로운 사례이다! 청년 사회주의, 19033

 

 

10. 이 부사관은 신의 대표자이다.

 

11. 가장 강력한 증거는 군인들의 자살 통계자료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역시나 국제적인 문제다. 공식적인 "통계"에 따르면 독일에선 1901년에 3700명 중 한 명이 자살을 했고, 오스트리아에선 약 920명 중에 한 명이 자살을 했다. 오스트리아 제10군단에서는 1901년에 80명의 군인과 12명의 장교가 자살했으며, 127명이 자상을 입거나 학대를 당한 결과로 정신을 잃고 군인의 효력을 잃었다. 동일 기간에는 같은 군단에서 400명이 탈영했으며, 725명은 고역 노동이나 엄격한 감금을 받았다! 이는 분명하게 민족 간의 투쟁으로도 악화한다.

 

12. 법에서 정한 기간보다 오래 복무하는데 서명한 독일 군인을 말뚝박은 사람이라 불린다. “말뚝에는 추가 2년 복무를 약속하는 계약서에 서명하고 100마르크 (£5)의 보너스를 받는다. 이는 부사관이나 간부가 되기에 적합한 병사들을 선택한다.

 

13. 1891년 독일에서 도입했으며 (최대 1000 마르크). 이전에는 작은 지역에서만 있었고, 비정기적인 수당 지급으로 제국 내에선 선례를 확립했다. 또한 다른 국가에서도 유행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프랑스에선 계좌가 훨씬 크다(최대 4000 프랑). 부사관 학교도 여기에 속한다. - Vogel von Falkenstein189132일 제국의회 연설 참조.

 

1891227일 카프리비의 제국의회 연설에는 아름다운 자본가이자 군국주의자의 고백으로, 그의 두려움과 욕망, 희망과 목표, 그리고 그 목표를 추구하는 방법들이 담겼다. 이 연설은 마음의 창문을 열어주며, 그의 가장 깊은 비밀까지도 자세히 살펴볼 수 있게 해준다. 연설은 “()사회주의법을 재도입하지 않을 조건도 내걸었는데 사회민주주의를 기반에 대항하거나 그에 대항하는 대비책을 내야한다.”는 진술로 시작한다. 이 조치 중에 하나는 부사관들에게 민간인 예비 증명서와 함께 보험료를 지급하는 것이었다. 카프리비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14. “프로이센에선 더 나은 교육을 받기 때문에 부사관들에게 요구되는 것이 증가하고 있다. 책임을 지는 장교들은 부하들보다 우월하다고 느낄 때만이 그 자리를 채울 수 있다. 만약 지금 규율을 집행하는게 어렵다면, 우리는 사회민주주의에 맞서 싸우기가 한층 어려워질 것이다. 이싸움은 단순히 총을 쏘거나 찌르는 걸 의미하지 않는다. 나의 기억인 1848년으로 돌아가게 한다. 그 당시엔 오랜 기간의 교육으로 생각이 표면화되기 전이었기에 부사관들은 매우 좋은 군인들이 사회민주주의를 상대해야 하는 지금보다 조건이었다. “우측에선 옳소, 옳소라고 한다. 그리고 극단적인 경우로 우리는 적과 싸우는 것보다 사회민주주의들과의 싸움에 훨씬 더 나은 비위원장들이 필요하다. 적들에게 군대는 애국심과 고귀한 감정들로 자신을 희생을 감내하도록 유도할 수 있지만 거리의 싸움으로 일어나는 모든 건 군대의 존엄성을 높일 순 없다. 군인들은 언제나 자국 국민들과 맞선다고 느낄 것이다. 비위원장들이 우리가 그들을 키우려고 노력해야만 우리의 우월성을 유지해야한다. 연합국 정부는 부사관 계급의 수준을 높이기를 바라며 그는 또한 비위원장들을 국가와 끈적하게 연결된 존재로 만들어야 한다고 언급했다.

 

이는 동시에 엘리트 병사들의 심리를 잘 묘사한 발언이었다.

 

15. “민간인 생활 증명서는 군 당국이 부여하는 문서다. 군 당국에서 해당 인물은 현역에서 일정 기간을 복무한 사실을 증명한다. 규정된 규정에 따라 제국 및 연맹 당국에서도 민간 일자리를 제공받는 자격을 부여한다.

 

16. 어중간한 식단, 침대와 조명, 누적된 피로로 억류된 것 외에도 미개한 처벌의 영역에서

구속이라 불러진다. 오스트리아 군인들을 구부러진 자세를 핀으로 고정하고벨기에 군인들은 국제적으로 동원된 해군 군함과 지하감옥에선 채찍이 사용된 것으로 잘 알려졌다.

프랑스에선 훈련상으로 제외된 프랑스 군인들에게 끔찍한 고문기구들을 정치범에게도 사용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1902년에 출판된 현대적인 사회주의자들 연합이란 백니스 군대들의 소책자에 담긴 삽화를 참조하면 엄지 고문기구, 수갑 및 포박을 사용했으며, 조지 다르엔 브리타뉴에서 비밀리에 언급한 북아프리카에선 군사적 징계기관을 총칭하는 비리비가 있다. 프랑스 외인부대와 징계회사, 교도소, 고문 노동을 담당하는 회사인 de discipline, penitencieurs traveux forces의 희생자들에 대해서는(데이쿠미그, "Neue Zeit", 99-100, 페이지 365 및 페이지 369)과 같이 1906128일과 10일의 회의실 토론에선 현재에는 비리비를 적극적으로 규제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영국의 수류탄 투척병 장교들은 높이 평가할만한 민주적 열정으로 서로에게 가하는 징계적 비난 (Jeunse Socialiste, 19033)에 대한 열의는 언급될 가치는 있다.

 

17. 군사적인 시각에서 이 모든 교육 방법들의 결과는 다른 곳에서 논의되었다. 여기선 부르주아뿐만이 아니라 무정부주의자, -무정부주의자들도 군대에 대한 반대로 인해서 지나친 분노의 외침을 보인 도덕적인 결과에 대해 주목하고자 한다. 안토니 프랑스의 군대는 범죄를 위한 학교이다.”라는 지적이나, 리히트 교수는 음주, 경범죄, 위선들은 바람직한 군대 생활의 부분이다라고 지적했다. "manuel du soldat"에 따르면 병역기간은 잔혹한 악행을 수습하는 과정이며”, “난폭한 행위의 교실이며, “도덕적으로 비겁하고, 순종적이고, 노예적인 공포를 초래한다고 전해진다. 사실, 한 군사 축제는 국가를 유지하는의미로 당연하게도 취기에 취해지는 걸 쉽게 상상할 수 있다. 1906121일의 Leipziger Volkszeitung은 목사 César술에 취한 난투라 불리는 군사모임의 축제를 언급한다. 보건적으로도 결코 즐거움을 주지 못한다. 프랑스 군대에 대해서는 기록의 p.25를 참조하라. 민주주의 국가인 영국과 미국의 상비군들의 위생 상태도 매우 열악하다. 1906-07년에는 죽은 인원들은 독일보다 훨씬 많았으며 L. M. O'Reilly 군의 의사 총장의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 군대는 7.13 6.18 명 중 1명이 기질염과 알코올 중독으로 전 세계 어느 곳보다 더 만연하다.

 


18. 자국의 적과 투쟁을 언급할 땐, 자연스럽지만 해외의 적을 상대하는 군국주의에 맞서는 국제 연대의 정신과의 투쟁들도 포함한다.

 

19. 관련 자료로 장교가 직접 쓴 예나 코스트노블 사회민주주의와 군대와 베벨의 상비군을 대신하는 시민군에서 46쪽 이후에 소개된 자료들, 그리고 사회민주당 유권자를 위한 안내서”(1903)33쪽 이후에 소개된 자료가 있다.

 

20. 이와 관련해서 유명한 Gaedke 사건을 참고해보자, 프러시아의 항소법원은 군국주의의 놀라운 야망을 합법적으로 인정해 세간에 알려졌다.

 

21. 의사들 중에서도 다수가 이런 압력을 받는다. 이에 대한 결과론 1894117일자 Vorwaerts 신문의 주석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런 압력에는 예비 군의관뿐만이 아니라 전문적인 기관에도 영향을 미치고, 이로부터 비군인 의사들에게도 압력을 가한다.

 

22. “병역 입영자들은 독일에서 장기간 복무하거나 군에서 퇴역한 사람들이 민간인으로서 직업적으로 일할 권리를 획득하는 걸 말한다. 그들이 특정 직업에서 일할 수 있는 민간 생활 보증서를 얻으며, 해당 직업적으론 병역 입영자가 전체의 50%를 차지한다. 이들은 민간인들보다 우선권을 가진다.

 

23. 지능적인 신발장수이자 죄수였던 볼트와 대담한 쾰펜닉의 대장의 모험담은 자유당들에게 경고를 받았다.

 

24. 이 단어는 문자 그대로와 비유적인 의미에서 모두 적용한다! - p. 48쪽을 참조하라.

 

25. 독일에는 이런 공무원들의 조합인 독일 군 취업 예비자 연합이 존재한다.

 

26. 1906Lokalanzeiger, No. 496을 참조하라.

 

27. 프로이스터(Feuchter)파우더링”, 1896, p. 25~30 참조

 

28. “군대생활의 즐거움”(“Lustig ist’s Soldatenleben”). p. 51 세부항목

 

29. 동아시아 전쟁과 관련해선 대부분의 패잔병들이 마지막 남은 곳은, 1906년 말에 큰 충격을 주었던 그루코-리드발스(Gurko-Lidvalls)의 일가가 있던 곳이다.

 

30. 해군 행정기관, 18,939; 프러시아 육군 행정

 

31. 1906년 겨울 포젠(Posen)에서 발생한 무기 도난 사건의 경우에, 스판다우(Spandau)의 공장 노동자로 피고인은 계속해서 "장교로" 어느 정도 자신의 상급자이자 도둑이었던 포페(Poppe) 중위의 명령을 따라야 했다고 진술했다. 이는 그들은 훈련을 받았고 포페는 피고인이 소속했던 공장에서 일하지도 않았다. 진품 장교복은 코페닉(Koepenick) 대위의 불법 복장과 마찬가지로 민간인들 사이에선 그의 미심쩍은 일에 도움을 주었다.

 

32. 스판다우 공장에서 발생한 고난은 매년 제국의회(Reichstag)에서 논의되고 잘 알려졌다. 베를린 군단의 의류 부서에 관한 내용으론 1906825일에 출판된 슈니더(Schneider) 전문지를 참조하면 된다. 프랑스 해군 공장인 브레스트(Brest), 로리앙(Lorient), 셰르부르(Cherbourg), 로쉬포(Rochefort), 툴롱(Toulon)의 내용은 19051111일 자의 템스 누보(Temps Nouveaur) 신문을 참조하면 된다. 현재 190612, 툴롱 해군 공장의 공장 노동자들 사이에선 강력한 운동이 일어나고 있으며, 어떻게 끝날지도 예측할 수 없다.

 

33. 프랑스 정부는 이런 조치들을 공식적으로 정당화하려고 템스 누보(Temps Nouveaur) 신문 등의 반군국주의 선전에 주목했다.

 

34. 1905122일 법률과 관련한 라이프치히 대중신문(Leipziger Volkszeitung), 19061214일자를 참조해보자.

 

35. 미궁 속에서 크로이차이퉁(Kreuzzeitung)이 꼼지락거리는 걸 보는 건 즐겁다. 절망적인 처지에서 그들은 사회민주주의가 난관에 빠졌다는 걸 주장하며 그 관점을 바꾸려고 시도하고 있습니다. , 쾨페닉(Koepenick) 공격에 혁명 발생할 경우에 사회민주주의자들이 계획한 건 세상에 너무 일찍 드러내었고, 이제 그 계획들은 실패할거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런 주장들을 촉발하는 건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 비롯하며, 이러한 계획들은 자본주의 질서 아래에선 절대로 실패할 수 없으며, 크로이차이퉁(Kreuzzeitung) 기사들은 그런 절망적인 노력으로 손가락을 움직일 일이 없을거란 건 착각이다. “부디 감사합니다. 우리는 아직도 군대에 의지할 수 있습니다!” 결국 이 말은 쾨페닉(Koepenick)에서 용감하게 일어난 일 직후에 우리 부르주아 속물자들이 안심의 한숨을 쉬던 정직한 탄식일 뿐이다.

 


 

군국주의의 주된 죄악에 대한 상세한 내용

 

병사들에 대한 잔인한 대우, 회개하지만 고집스러운 죄인으로서 군국주의, 두 가지 모순적인 상황

 

군국주의는 어리석진 않다. 교육체계로부터 극도로 교활하게 개발된 교육체계에서 작동한다. 대중의 심리학에도 영향을 미치는 추측에서 상당한 기술을 보여준다. 고용된 병사와 인구의 최하층으로 이루어진 프레드리히의 상비군은 보다 기계적인 성격의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 가병사들에게 가혹한 훈련과 타격을 주는 수단과 그 잔재들로 유지될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의 군대는 전체 인구 중에서 택해지며 고차원적인 지능과 도덕성을 지니며 시민적 의무의 원칙에 따라 더욱 개인에게 보다 큰 요구를 한다. 이를1) 즉시 알아차린 샤른호르스트와 그나이제나우의 군대조직은 체벌을 페지할 것을 발표해서 세간에 알려졌다. 그럼에도 악용하고, 타격을 주는 체벌과 모든 종류의 고문기술들은 군국주의의 교육체계의 장사도구를 여전히 이용하고 있음이 밝혀지고 있다.

 

군국주의자들이 병사들에 대한 학대에 대해 취하는 태도는 윤리, 문화, 인도적이거나, 정의, 기독교 및 유사한 것으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편의적으로 예수회적으로 궤변적인 이유로 고려사항들을 결정한다.

 

아직도 이런 학대2)에는 군사적 규율과 심지어 군인 정신”3)을 위협하는 비밀스러운 지하조직의 위협으로 인식하는 일은 많지 않다. 고참의 병사들이 초라해보일 정도로 야유하거나 골칫거리 신병들을 비웃음을 사거나 굴욕하는대상이 되고, 저속한 표현과 모든 종류의 거친 학대, 덮치기, 찌르기, 두들겨 패기 등이 있다. “사람들을 공중에 던져 떨어뜨리거나” “의식을 상실할 때까지 사람을 끌어다니는 것도 있다. 이러한 일들은 하급 장교들과 심지어는 군인들과 거리를 축소하고 편협한 정치가로 훈련된 상관들의 대부분으로 양심의 가책도 없이 심리적으로도 승인한다. 실제로 이러한 일들로 장교와 상관들에겐 필수적으로 치부한다. 이런 과한 일들에 대항하려고 할 때마다, 그 사람은 첫째로 단호한 수동적 저항을 마주한다. 매일마다 상급자들이 동기들에게 인간의 존엄성에 어울리는 방식으로 대우하는 걸 요구하는 걸 멍청하게 지껄이는 인도주의적 속담이라고 비난하면서 목소리를 높이진 않고 그들끼리 비밀스럽게 말하는 걸 들을 수 있다. 군 복무는 힘든 복무다. 하지만 지하에서 진행하는 규율적인 학대의 위협을 보더라도, 강압적인 체제는 자연적 발전의 길을 따르지 않기 때문에 단계마다 모순적인 상황에 자연스럽게 휘말린다. 이런 모순적인 상황들 중 일부도 이미 밝혀졌다. 더 상세한 내용은 후에 서술하겠지만 군국주의 교육에서 학대의 방법에는 발생하는 훈련의 필수적인 도구 수단이다. 자유의지에 기반한 규율은 자본주의에선 도달할 수 없다. 군사주의 교육에서 학대는 양심의 가책과 후회에도 불구하고 공식적이거나 준공식적으로 필수적이면서도 불법적이다.

군국주의자들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양심이 나쁘다. 무자비하게 사회민주주의적 비판들은 군사 조직과 중산층의 넓은 계층들을 군국주의 도덕관을 후퇴하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군국주의는 최상의 사령관들도 연출된 무대를 선보이고 지휘하는게 아니라, 폭도들의 대표회의 기구인 제국의회의 대리인들조차도 물질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악당들에게 의존하게 한다. 군국주의는 자신의 노출을 수 차례나 잔인하게 드러냈으며 제국의회에 면제와 보호를 받는다. 군국주의에선 그 자신의 분노를 억제하면서 비천한 사람들을 데려다 모은 제국의회의 동료들은 공공연하게 경멸하고 멸시받는 대중의견을 기분 좋게 유지해야 한다고 본다. 군국주의자들은 부르주아지들이 주장하는 모든 성과의 대상인 군사적 믿음이 아니라, 특히 금융적 압박이 있는 시기에는 빈번하게 반대를 주장하는 부류이기도 하며 생활양식에서 대부분은 반군국주의 계급에 속하지만 자신들의 계급 위치를 인식하기 시작하면 전향할 수 있는 유권자들에 대해선 즉시 사회민주주의자가 될 수 있다. 그래서 군국주의자들은 사회민주주의 선동에서 가장 효과적인 무기를 박탈해야 했기 때문에, 군국주의자들은 은폐하고 얼버무리는 전략을 따랐다. 군사법정의 절차는 비밀리에 개최했으며, “군국주의자의 어두운 심장에는 한 줄기의 빛도 스며들지 않았다.” 한 줄기의 빛이 스며들었더라도, 군국주의자들은 분쟁을 최대한 부인하고 반박하면서 사실을 속이고, 꾸미려고 할할 것이다. 그러나 사회민주주의자들의 횃불은 군사 수용소와 요새의 문 뒤의 창살에서 빛을 내기 시작한다. 지난 80년대와 90년대 세기의 제국의회에서 발생한 군사 토론은, 군국주의의 정기적이면서도 빈번하거나 일부는 유기적인 특징을 띠면서 고립적인 사례로 출현하는 현상은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기 위해 열렬하게 싸웠다. 이 다툼에는 타국의 군사재판 절차가 공개적으로 진행되어 군사적인 학대가 군국주의의 일반적인 속성이라는 걸 입증하는데 더욱 쉬웠으며 증거를 제공했다. 군국주의에서 군사학대는 프랑스 공화국의 군국주의, 벨기에 군사주의, 그리고 더욱 증가하는 스위스 민병대의 군국주의의 특징이기도 하다. 사회민주주의적 비판으론 189168일년에4) 작센의 게오르그 왕자(Prince George of Saxony)의 법령과 1892년 초에 포워츠(Vorwaerts) 신문에 발표된 1213일 바이에른 군부에게 각인을 준 것에 큰 승리를 거두었다. 또한 1892215일부터 17일까지 이어진 제국의회 회의에서도 그랬다. 또한 일반적인 "고려사항"들과 각종 논쟁으로 결국 1898년 군사형사 절차 의 개혁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이 개혁은 여전히 언론의 공개를 제외하는 수단으로 군국기지에 대한 끔찍한 비밀을 기독교적인 사랑의 망토로 걸도록 했다. 모든 학대의 대비책과 빌제 사건을 재판한 판사들이 취했던 매우 주목을 끈 조치에도 불구하고, 개혁은 곧 학대의 끔찍한 사례들이 나오면서, 사회민주주의적 비판들 제기하고 반대했던 모든 끔찍한 학대에 대한 사례들은 군국주의에 먹구름이 낄 정도로 터져나와서 단순하게 밀어낼 수 없었고, 군인들의 고문은 군국주의에서 국가를 유지하기 위한 일부라는 사실은 마지못했더라도 거의 사방에서 인정했다. 군국주의자들은 사회민주주의의 정치적으로 활동에 유리한 통제를 부르는 제도와도 조금은 부정직하게 대립하고자 했다. 군국주의자들은 사회민주주의가 성공을 성취할 것이라고 믿지 않더라도, 군국주의자들은 이를 제거하기 위해 혈안이 될 준비가 되었다는 인상을 주고자 했다. 군국주의자들도 군인들을 고문하는 가해자들에게 상당히 철저하게 기소하려 했지만, 군국주의에게 있어서 군대에서 발생한 학대에 대한 다툼에는 군사 규율을 유지하고 민족과 국제적 관계에 대항하기 위한 사람들의 무장을 강조하기보다도 덜 중요하다. 이를테면 군인들에게 가하는 미약한 위반사항으로 인해서 거의 자주 상급자를 자극하거나 감정에 취한 상태로 상급자에게 범하는 행동에 대해 내린 판결과, 흔한 유형으로 군인 가해자들에 대해 내리는 판결을 나란하게 놓으면 된다. 한편으로는, 군국주의에선 신성한 원칙에 대해선 가장 경미한 위반조차도 피에 굶주린 용과 같이 엄격하게 처벌한다. 반면에 군인들이 불공정하고 잔인하게 대우를 받은 경우에는, 범죄 행위의 심각성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관대하고 방조하고 묵인한다. 그 결과로는 군사법원의 군인 학대에 대한 노력들은 하급자들이 독립의식이나 평등한 권리의 자각들에 대한 모든 요구에는 냉혹한 억제도 함께 이루어지기 때문에, 실제로는 거의 결과를 산출하진 않는다. 작센 마이닝엔에서 세속된 귀족은 모든 걸 설명한다. 그 귀족은 병사들에게 학대에 대한 투쟁을 지원하도록 호소했으며 더욱 강한 의지로 이 문제의 악의 뿌리를 해결하기 위해 평소보다 더 적극적으로 지원할 걸 요청하는 용기는 지녔다. 그러나 이런 대담한 행동으로 인해서 이 귀족은 곧 군대에서 퇴역을 강요받았다.5) 이 사례는 군대 내의 학대 문제와 관련해서 공식적으로 시도된 노력의 부정과 허무함을 타오르게 조명했다.

 

우리의 동료였던 전 바이에른 군인인 루돌프 크라프(Rudolf Kraff)가 쓴 카잔의 희생자들(막사의 희생자들)이라는 책은 귀중한 자료를 담았으며, 전문적인 기술로 구성했다. 그 책은 그가 직접 체험한 일들을 바탕으로 작성했다. 또한 해군에도6) 시험적으로 제작해서 일부 기간 동안에 방대한 자료를 공개해서 배포할 수 있었지만 아쉽게도 아직 정리하진 못했다.7) 이 작업은 누군가가 해낼 수 있는 중요하고 유용한 작업이다.

 

 

우리는 기본 원칙에 따라 군국주의에 대한 환상을 품지 않는다. 군사적 처벌에 대해서 샤른호스트 법령은 다음과 같이 의사를 밝힌다. “군사적 경험은 신병을 갈굼 없이 훈련하는 방법을 배운다. 이를 비현실적이라고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장교는 병사를 가르치는 데 필요한 능력이나 확실한 개념은 부족하다.” 물론 이론적으로는 사실이지만 실제로 적용해보기엔 너무 진전한 시기였다. 군사적으로 군인에 대한 학대는 자본주의적인 군국주의의 내적인 본질에서 기반한다. 인적 자원에서 대부분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도 군사적 요구를 충족할 순 없으며 특히 열병식 훈련의 요구를 충족할 수 없다. 프로이센에선 군사 정신에 적대적이고 위험한 생애를 바치고자 군대에 입대하려는 젊은 사람들이 점차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이는 과거의 영혼을 씻어내고자 동료와 왕에게 충성하는 새로운 애국적인 영혼을 이식한다. 모든 문제에는 가장 숙련된 교관조차도 해결할 수 없으며, 군국주의가 처분할 수 있는 종류의 교관들조차도 군국주의는 생각보다 더 경제적이고자 한다.8)

 

그리고 이런 군 교관들은 생계를 보장받지 못한다. 그들의 상사에 친선과 독단에 전적으로 의존하며 상사들은 중단하고자 한다면 언제든지 해고를 예상할 수 있다. 상사들의 주요 업무는 군국주의의 인상들을 대중들에게 유행하고자 하며 이 업무는 군 상급자들인 장교 및 부사관들의 권위적인 명령의 손에서 매우 순응하게 하는 전반적인 전체적인 조직체이자 훌륭한 수단이다. 그런 상급자들은 곧 내 명령을 거역하면 폭력을 사용하겠다.”로 축소한 신경질적이고 가차없이 부하를 훈련하고자 한다는 걸 알 수 있다. 결국 절대 권력을 가진 상급자는 무조건적으로 복종하는 부하들의 생명까지도 학대하는 방법으로 폭력을 행사하는 건 자연스럽고 인간적으로 필연적인 귀결이었으며, 갓 구워진 일본의 군국주의도 그 자체로 매우 신속하게 여기에 연루했다.9) 군국주의는 또한 이 모순적인 환경에 그 자신을 처한다.

 

이런 "음탕한 재미"의 원인은 모든 곳에선 동일하다. 무엇보다도 사람들의 교육 수준을 강력하게 수정하고자 영향력을 미친다.10) 프랑스 식민지 군국주의조차도 프러시아-독일 조국의 군국주의와 유리하게 대조한다는 사실은 놀랍지도 않다.11)

 

 

이러한 체제에 내재하는 불가피한 폭력의 유형을 징계 조치로 대처하는 건 우리에겐 군국주의에 성공적으로 투쟁할 수 있는 훌륭한 수단을 제공한다. 군국주의에 반대하는 대중을 더욱 늘리고 아직은 군국주의와 투쟁하는데 접근했거나 접근하기가 어려운 계층과 계급의식을 확산해서 투쟁에 일격을 가하는 수단이다. 군국주의적 계급 정의관과 결합한 군사적 학대는 문화적으로도 낙후된 자본가들의 조짐 중에 하나다. 군사적 학대는 동시에 군사적 규율에 대한 지하조직에 위협을 줄 수 있는 프롤레타리아트의 해방을 위한 투쟁에 대한 가장 효과적인 무기이기도 하다. 자본주의의 죄악은 이중권력으로 그 자신을 떠넘긴다. 그리고 그 죄인은 정직하게 낙담해서 무력감이나 교활한 여우처럼 뉘우치려할 수 있지만 우리는 이 무기를 빼앗길 순 없다. 참회복과 십자가의 잿더미로도 뉘우치려는 녀석을 구원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군국주의의 비용, “고통스럽거나아니면 모순적인 처지.

 

변증법적 진화가 알려준 역사적 유물론에는 보복이 필연적으로 내재한다고 알린다. 모든 계급 사회에선 불우하게도 자살을 저지르며 모든 계급 사회에선 항상 나쁜 걸 원하거나 좋은 걸 행하는 힘이다. 모든 계급 사회는 그 계급적 성격을 상속한 죄로 파괴로 인해 죽음을 맞이한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모든 계급 사회는 오이디푸스를 배출하여 언젠가는 파괴한다. 그리고 테베의 전설과는 달리, 그런 사실을 완전하게 의식할 것이다.

 

이 사례는 존속살해한다는 걸 인식하지도 못하는 자본주의 사회 질서와 프롤레타리아에게도 적용해볼 수 있다.

 

자본가들은 물질적 이익을 지키기를 원하는 자본주의 사회 집단과 노동자 계급에게 이러한 말이 적용됩니다. 확실히, 확실히 자본주의의 지배 계급은 물질적 이익관계에 동요 없이 유지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런 냉정에는 자본주의 경쟁, 국내 혹은 국제적으로도 관계없이 용인할 수 없으며, 자본주의가 고문을 가하는 사람들의 가죽의 끈을 벗겨내듯 장기간 맛을 내진 못한다. 그래서 자본주의는 임금 노예와 이윤의 성역을 보호하고자 무기로 무장해 끔찍한 강압적 지배의 성채를 세운다. 군국주의는 자본주의에게 매혹적인 부분이지만, 대조적으로 실제로는 군국주의가 초래하는 방대한 비용에는 자본주의에게 매우 불쾌하다. 그러나 오늘날은 예전 카드무스의 권고에 따라 이를 깎아내는 것이 더 이상 어렵기 때문에, 무장한 군인들의 큰 희생을 요구하는 몰록적인 본성을 받아들여 자본주의의 탐욕을 충족하고자 한다.

 

 

의회는 군국주의의 자산인 병사들의 큰 희생을 삼아 지배계급들의 예산 논의가 이뤄지는 장소다. 초과가치를 생산하는 자본주의는 다시 재정적인 부분에서 기본적으로 약점에서 타격을 받을 수 있다.

 

군국주의에 드는 고가의 비용에는 적어도 자본가들이 비용을 직접 부담하기에 적어도 제한된다. 사실 자본가들의 도덕성은 여기에서 편리하면서도 비열하게 폭리를 취하면서 대비책을 찾아내고 성공하고자 한다. 자본가들은 군사적 부담의 대부분을 차지하거나 적어도 일부는 가장 약하면서도 학대받는 인구 계층의 어깨에 부담을 짊어지게 하고 괴롭게하려는 건 군국주의가 착수하려는 목적이다. 자본가 계급들은 이외의 사회체제에서 지배계급들과 마찬가지로 프롤레타리아트의 착취에 기반한 강압적 지배로 억압 받고 착취된 계급의 사슬을 생산하며 그에 따른 비용을 지불하고자 한다. 이 비용을 지불하고자 군국주의는 한 사람들의 자녀가 사람들의 학대자로 바뀌는 걸로는 충분하지가 못해서 학대자들의 임금조차도 최대한으로 평범한 사람들의 땀과 피에서 짜내고자 한다. 그리고이 교묘한 속임수로 피비린내나는 자극적인 행위를 여기저기서 감지하더라도 자본주의는 황금 송아지에 대한 믿음, 그러니까 돈을 숭배하는 믿음에 죽도록 충실하다.

 

가난한 계급들의 어깨에 군사적 부담을 짊어지게하거나 떠넘기면서 가난한 계급을 착취하지 못할 정도로만 그 정도를 낮아지게 할 순 있다. 그러나 어떤 궤변들도 사실을 제거할 수 없으므로 이 사실은 착취를 선호하는 자본주의에 따르는 큰 희생들과 투쟁하는데 이로울 수 있다.

 

군국주의는 생계의 전체에 비중을 둔다. 그러나 군국주의는 특히 경제적 부담, 경제생활에 신음하는 걱정거리들로 국가적인 최고의 기운들과 미쳐있는 지출로 생산과 문화적 노동을 중단하게 하고 직접적으로 매년 경제적 부담을 거듭하도록 해서 그 피를 빨아마시는 흡혈귀다.

 

현재 독일에선 대부분 20~22세이면서 655,00012) 정도가 생산에 가장 적합한 최강의 남성들인 영구적으로 실직했다. 이를테면 독일에서는 1906-7년 기준으로 군사 및 해군 지출이 급증하여, 13억 마르크, 65백만파운드13) 또는 대략 13분의 1백억 마르크였으며 여기에는 식민지에 대한 추가적인 지출을 포함하진 않았다.14) 이외의 군사 국가들의 군사 예산도 역시나 비교적으로 가벼운 편은 아니었으며, 이를테면 특혜를 더 누리는 미국 연방이나 영국의 (1904-5년 기준으로 육군과 해군에 1321만 마르크, 66백만 파운드) 국가에서 군사 예산도 예외는 아니었다. 벨기에와 스위스도 군가예산의 지출에 군사비용은 막대한 부분을 차지해서 예산 내에서 중요한 항목 중 하나다. 이런 비용의 증가적인 추세는 전 세계적으로 나타났으며, 지출의 한계치에 도달할 때까지 계속 증가했다.

새로운 병사 개론서”(Nouveau Manuel du Soldat)의 선집은 참고해보기에 매우 좋다.

 

 

"1899년 유럽은 군사 예산으로 718,4321,093프랑(28,737만 파운드)을 비용이 들었다.

 

군사적 분야에서 고용된 인원은 4,169,321명이었다.

이들이 노동할 경우 하루에 한 사람 당 3프랑의 소득을 얻을 수 있으므로, 노동할 때의 하루 소득은 1,2507,963프랑(503,180 파운드)이다.

게다가 유럽은 군사적 목적으로 71342마리의 말들을 필요로 했다.

유럽에선 말 한 마리가 하루에 2프랑의 가치를 얻을 수 있다.

이들의 하루소득의 가치는 14268,4프랑(대략 56,827 파운드)이다.

이를 300으로 곱하고 예산을 더해보면, 생산적 가치 손실은 1,1362,9159,913프랑(4,5451,634만 파운드)이다.

 

하지만 1899년부터 1906/1907년까지 독일의 군사예산으로만 약 92천만 마르크(46,000,000파운드)에서 약 13억 마르크(65,000,000파운드)40% 넘게 증가했다. 유럽 전체의 총 군사 지출액은 현재로선 대략적으로 다음과 같다.

 

130억 프랑(52백억 파운드)에 해당한다.

 

이는 러시아와 일본 전쟁에서 지출된 비용을 제외하고, 세계의 외교무역에서 약 3%를 차지하며, 실제로는 파산으로 끝내야 할 거래 방식이다.

 

러시아 발트해 연안 지방에서에서 혁명적인 운동들에 대한 군사적 탄압은 혁명 운동은 혁명에 휘말린 남작들에게도 장기간 이전했다. 따라서 미국에서도 평화로운 시기에 자본가 계급에게 일부 자본주의적 질서를 유지하는 걸 맡길 수 있는 무제한적인 기회가 생겼다. 이는 계급투쟁에서 즉각적으로 고용된 법적 기관인 핑커톤(Pinkertons)의 수단이기도 하다. 벨기에의 방위군과 법적 기관은15) 군인 학대, 지출을 수반하고 군국주의를 동반하는 현상에서 부르주아들이 그토록 부정하는 경제적 비율을 조정한다는 이점이 있다. 그래서 자본주의 사회에선 그 적들에게 부분적으로 매우 효과적인 선전물을 허용하지 않게 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엔 어려움이 있다. 앞서 언급했지만 이는 프롤레타리아를 기쁘게 할 수 없고, 자본주의 국가에선 은폐하는 규칙이다. 전망적으로 경제적 관점에서 볼 때 부담이 적은 민병대 제도를 채택해서 자국의 군대에 대한 정치적 임무인 계급투쟁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지만 사실은, 군대가 수행하는 이 기능은 민병대를 제거하려는 분명한 경향을 보여준다.

 

1906-7년도의 독일 제국의 총 지출액인 2,397,324,000프랑 (119,866,200파운드)와 군대와 해군에 쓰이는 비용을 비교해보면, 이 거대한 부분과 반대해서 이외의 모든 항목이 위성의 역할을 한다는 걸 알 수 있다. 전반적인 과세 제도와 재정 정책은 군사 예산을 중심으로 군사 예산은 태양 주우의 별들처럼 대규모로 이뤄진다.

 

그래서 군국주의는 현재의 사회 질서에 이익이 될 수도 있는 문화 발전에 위험한 방해물이면서도 무덤을 파는 원인이기도 하다. 학교, 예술과 과학, 공중보건, 통신 체계 등 이 모든 걸 가장 비열한 방식으로 치부하는데에는 잘 알려진 구절을 빌리자면 몰록의 탐욕이 문화적 과제에서 무엇도 남기지 않기 때문이다. 한 장관은 문화적 과제로 괴롭지가 않는다.”고 언급했다. 장관의 언급에는 문화에 대해 제한된 요청을 한 동유럽 융커들에게만 진심 어린 승인을 얻을 수 있었다. 이 언급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외의 대리인들은 역설적이게 웃음을 내지었다. 1906년 독일이 군사비용으로 지출한 133천만 마르크(66,000,000파운드)와 프로이센이 1906년 모든 종류의 교육에서 지출한 171백만(8,550,000파운드), 오스트리아-헝가리에서 1900년 군사적 목적으로 지출한 42천만(21,000,000파운드), 초등학교에 지출한 5백만(275,000파운드)을 나란하게 놓으면 충분하게 알 수 있다. 최근의 프로이센 법률로 학교 유지 및 사소한 문제와 선생들의 임금노동에 대한 급여 문제를 규제하는 방식만큼이나 마을에서 선생들의 임금노동에 대한 급여를 인상하지 못하도록 한 스투트(Sudt’s)의 악명 높은 법령은 많은 걸 전해준다.

 

 

독일에선 문화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부유할 수 있었다. 그리고 더욱 문제를 해결할수록 국가에 드는 비용을 지불하는게 더 쉬웠을 것이다. 하지만 군국주의라는 장벽은 그 길을 차단했다. 군사비용의 지출은 독일과 프랑스에서 군사비용을 충당하는 방식으로 특히나 역겹다. 군국주의는 억압적이고 부당하게 간접적으로 조세 제도의 창조자이자 유지자이다. 전반적인 제국의 관습과 조세 정책으로 대중을 착취하고자 하며 융커사회만이 아니라 매우 방대한 규모로 군국주의의 이유를 대면서 다정하게 간청하고 부름을 받는 기생적인 계급의 일원을 확보하고, 군국주의의 주된 목적을 제공한다. 주로 조세 정책은 군국주의 때문에 발생한다. 예를 들어, 1906년 대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의 생계비를 1900-1904년 평균과 비교하면 10~15% 상승했다.

 

다시 우리는 합리적인 자본주의가 그 자신의 이익을 지적으로 의식해서 확대와 개선을 최선의 이익으로 삼고 통신 체계의 교통과 기술의 발전이 요구하는 해답을 충족하지 못한 군사주의에 감사하다. 군국주의는 평범한 사람들에게 특수한 간접세를 부과하기 위해 손쉬운 돈줄인 통신 체계를 젖소로 이용한다. 스텡겔(Stengel)이 소개한 마지막 제국의 재정 법안에 대한 이야기는 장님도 눈을 뜨게 할만하다. 이 법안에는 군국주의가 국가의 재무부에 다시 두드린 2억 개의 구멍을 메울만한 청구서를 필요하다는 걸 한 푼으로도 계산할 수 있다. 그리고 대중이 소비하는 맥주, 담배 등과 자본주의의 활력을 유지하는 공기인 수송은 조세 법 체계에서 무거운 부담을 주면서 위에서 언급한 내용에 대한 훌륭한 삽화다.

 

군국주의가 여러 측면에서 자본주의를 부담스럽게 하는 건 의문의 여지가 없지만, 이 부담에는 선장 신밧드에서 바다의 노인이 목을 매달렸듯이 자본주의라는 목에 단단히 달라붙어 있다. 전쟁 중에는 스파이가 필요하고 평화적 시기엔 교수형 집행자와 고문 담당자가 필요하듯이 자본주의는 군사주의를 필요로 한다. 자본주의는 군국주의를 싫어하지만 군국주의 없이는 살 수 없는 것처럼, 마치 교양 있는 그리스도인은 복음에 어긋난 죄악을 싫어하지만 죄를 짓지 않고는 살 수가 없는 것과 같다. 군사주의는 자본주의의 유전된 죄악이며, 자본주의는 사회주의의 연옥에서만 그 죄악을 제거할 수 있다.

 

경제 투쟁에서 프롤레타리아트가 맞서는 수단에서의 군대. 예비 발언.

 

앞서 군국주의가 어떻게 정치, 사회 및 경제 생활에서 도는 축이되었고, 군국주의가 자본주의 인형극의 인물을 춤추게하는 배후의 조종자가 되는지도 살폈다. 군국주의의 목적이 무엇이며,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어떻게 노력하고, 그리고 그걸 추구하는 과정에서 본성적으로 죽음을 초래할 독극물까지 생산하는 취미가 있었는지도 살폈다. 또한 군사주의가 남성적인 견해를 형성하고 민간인들만이 아니라 제복을 입은 사람들의 머리에 군국주의자의 사상을 주입하는 학교와 군국주의를 수행했지만 그다지 성공적이지 않은 국가의 유지하는 역할에 대해서도 논의했다. 그러나 군국주의는 이에 만족하지 못하고 평화로운 시기인 현재에도 다양한 방향으로 국가 유지에 대한 영향력을 위해 분투하고 있다. 군국주의는 오랜 기간 견습생으로 복무한 후 자신의 걸작을 내놓을 최후의 날을 위해 훈련하고 준비하고 있다. 거대한 격변의 날, 자신의 스승과도 맞서기 위해 뻔뻔하고 반항적으로 견습생과 여행자로 오랫동안 봉사한다.

 

 

군국주의의 경호원들은 내일이 아니라 오늘, 그 위협에 맞서고 싶을 것이다. 내일이 아니라 구름은 더 확실하게 폭우로 변해서 사회민주주의가 침수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날은 왕과 조국을 위해 마음껏 학살하고 총알과 파편으로 대학살할 것이며, 신의 원조를 받아 1905122일과 18715월의 피의 주간에 군국주의에 알맞은 모범을 채택할 것이다. 비엔나 군단 사령관 쇤펠트(Schoenfeldt)18944월 한 만찬에서 부르주아들에게 다음과 같이 맹세했다. “사회의 존립과 애써서 번 재산의 향유가 위협받고 있을 때 당신들도 우리를 찾을 수 있으니 안심해도 좋습니다. 부르주아가 최전선에 있다면 군인은 그를 돕기 위해 서두릅시다!”

 

따라서 쇠사슬로 장갑한 주먹은 늘 큰 타격을 가할 준비가 되었다. 위선자들은 법과 질서 수호”, “노동의 자유 수호에 대해 말하지만, “억압 보호”, “착취 보호를 의미한다. 프롤레타리아트가 과도한 활기를 보이거나 힘을 쥔 군국주의가 한꺼번에 나타나면 칼을 휘두르며 겁을 주려고 한다. 이 전능한 군국주의는 국가 권력이 노동자에 대해 취하는 모든 행동의 배후에 있으며, 최후의 수단으로 천하무적의 힘을 공급한다. 군국주의는 경찰과 헌병대의 선봉대 뒤에 숨어 큰일을 대비하는게 아니라, 자본주의 질서의 기념비를 보강하기 위해 그 목적을 충분하게 의식하면서 매일의 노동에도 항상 도움을 줄 준비가 되어 있다. 교활한 자본주의적 군국주의는 다양하게 활동하고 교활하게 특정한다.

 

자유 노동자들의 경쟁자로서 군인들.

 

자본주의의 하수인인 군국주의는 자신의 첫 번째이고 가장 신성한 의무가 자본가들의 이윤 축적을 돕는다는 걸 잘 알고 있다. 따라서 비인간적인 착취와 잔인함으로 인해 농업 노동자가 부족할 때 이를 돕는 짐승 같은 군인을 고용하는 계급이나 유별난 융커계급의 처분에 맡기는 걸 공식적으로 또는 준 공식적으로 정당화하거나 심지어 구속할 수 있다고 느낀다.

병사들에게 추수감사절에 모여서 수확하는 건 노동의 관계에 해롭고 적대적으로 거듭한 규칙적인 관습이다. 또한 장기복무를 순전히 군사적 필요에 따라 간주해서 병사들의 거위 행진과 열병식의 광신자들에게서 대단히 파렴치하고 어설픈 사기를 명백하게 드러내며, 이는 예나 이전에 소대조직에 대해 아첨했던 회상들 외에는 누구도 부를 수가 없다. 이를테면, 대다수의 논의가 있던 총사령부의16), IV, X17)XVII의 사단에 대한 법령을 상기해볼 수 있다. 1906년 프로이센 군단. 우체국과 철도의 교통량이 증가 할 때 군인들에게 도움을 요청한 다수의 사례도 여기에 속한다. 범주에도 속하지만 그 목적은 훨씬 더 깊다.

 

군대와 파업파괴자.

 

군국주의는 군인들을 군 지휘 하에 파업 방해자로 고용하고 해방을 향한 노동자들의 열망을 직접적으로 방해하고자 한다. 최근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모략에 반대하는 제국주의 연합의 현 사령관인 폰 리베르트 중장이 다시 전면에 나선 사례를 상기해보자. 그는 이미 1896년에 일반적인 대령으로 파업이 화재나 물부족 사태와 같은 공공적인 재난이라는 사실을 파악했는데, 물론 그 자신을 수호천사이자 집행자라고 여기는 고용계급에게는 재앙이었다.

 

1906년 뉘른베르크 파업에 적용했던 이 방법은 독일에서 특히 악명이 높았다. 이 방법에서 기한을 채운 군인들은 부드러운 압력으로 파업 방해자에 소속해서 사회민주주의자들과 부딪쳤다.

 

독일의 밖에서 발생했던 세 가지의 사건은 훨씬 중요하다. (1) 19031월에 네덜란드의 철도 총파업 기간 동안에 군대를 동원해 대규모의 검은색 타이즈들은 진압하고자 했다. 이 파업의 결과로 철도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결성할 권리를 법적으로 박탈했다.18) (2) 1904년 헝가리 철도 노동자들의 총파업의 경우에 군사행정은 더 심했다. 군사행정은 법에 어긋나게 현역에서 복무하는 사람들을 구성해서 파업파괴자(Black Legging)들을 고용했을 뿐만이 아니라 그 색채를 유지한 채로 복무기간이 끝난 예비군과 예비역들을 소집하는 걸 부끄러워하지도 않았다. 기술적으로 적합한 사람들을 불러내서 칼을 휘두르며 철도 노동에서 파업 파괴자로 노동을 강요했다. (3) 그리고 마지막으로 190713일에 선언한 불가리아 철도 파업의 투쟁은 덜 알려졌고, 190612월 초에 헝가리에서 농업부 장관과 전쟁부 장관은 농업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파업할 수 있는 권리와 투쟁할 때 이를 방해하고 수확을 거두고자 파업파괴자”(검은색 타이즈)들은 조심스런 훈련을 앞세워 가담했다.

 

 

프랑스에서도 군인들의 파업파괴자들은 잘 알려졌다.19) 군사 교육은 검은색 타이즈를 체계적으로 기꺼이 조성하고자 했고, 현역 군대를 떠난 노동자들은 계급적 동지들의 등을 뒤에서 찌를 준비를 마쳤기 때문에 타오르는 프롤레타리아에게 위험할 수 있다는 사실은 국제적인 군국주의가 취득한 일부다.20)

 

파업에서 무장할 권리

 

예전부터 모든 군사 기관들은 자본주의의 진리로 파업의 이면에 혁명의 히드라가 고개를 든다는 소문에 홀렸다. 경찰들의 주먹, , 권총만으로 소위 말하는 과도한 파업에 즉각적인 결과에 소용이 없다면 군대는 고용주에 대한 반란으로 노예들을 날카로운 칼과 장전된 소총으로 겁을 줄 준비를 마쳤다. 이는 모든 자본주의 국가에도 해당하며 본성적으로나 전반적으로도 자본주의적이지도 않고 특수한 정치적, 문화적 조건으로 인해 그렇다고 아직은 전형적으로 간주할 수도 없는 러시아는 적어도 가장 큰 규모에 해당한다. 그리고 여기에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가 비록 선두에 서있다고 하더라도, 영국을 제외하고는 군인들이 파업을 분쇄하고자 고용계급의 손을 열렬하게 흔든 국가는 어디에도 없었으며, 벨기에와 프랑스 같은 준 공화주의 및 전반적인 공화주의 국가들에서도 군인들이 그토록 피에 굶주리고 잔인한 방식으로 행동한 곳도 없었다는 걸 거듭해서 지적하는 건 자본주의 정치경제의 노선에서 공화주의 국가의 유형을 역사적으로 평가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하다. 이에 비하면 세계에서 가장 자유로운 국가인 스위스와 미국은 스스로를 그나마 잘 유지할 수 있었다. 물론 러시아는 서로다른 측면에서 잔혹한 행위에는 도저히 따라잡을 수가 없다. 야만, 아니 그보다 더 야수같고, 흉포한 러시아 지배 계급의 일반적인 문화적인 상태를 가르킨다. 군국주의의 야만에는 프롤레타리아트가 처음으로 무고하게 동요하기 시작해서, 절망적이고 극도로 필사적으로 안도의 눈물을 흘리며 구제를 호소하던 평화로운 노동자들의 피들을 그야말로 급류로 씻어내렸다. 여기서 단일한 사건을 하나씩 거론할 수가 없는 이유는 그렇게하면 시공간에서 끊임없이 이어진 이 무한한 사슬을 자의적이고 사소하게 하나의 고리만으로 분리하는 건 무의미하게 찢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경제적 자유를 위한 투쟁에서 서로다른 모든 유럽 국가는 흘린 피의 방울마다 전제군주제인 차르주의는 노동운동의 가장 겸손한 포부를 억압하고자 프롤레타리아의 삶을 빼앗았다.

 

식민지 군대의 활동과, 가혹한 착취로부터 굴레를 씌우는 식민지에 대한 지배를 거부하는 원주민들에 대한 보호 부대의 활동에는 군사력 적용의 방법과 본질적으로 연류한다. 하지만 이 질문에는 더 상세하게 다룰 수는 없다.

 

군대와 헌병대, 경찰 사이에 명확하게 구분하는 건 어렵다. 그들끼린 손에 손을 잡고 서로를 대체하고 보완하며, 여기서 작용하는 바로 그 특성, , 공격적인 폭력성, 무례하고 악랄한 방식으로 진압용 무기를 들고 사람들을 덮칠 준비를 마치고 밀접하게 연류한다. 경찰과 헌병대의 주요 특징은 막사생활의 주된 산물이며 군국주의 교육과 훈련의 결실이다.

 

이탈리아

 

오타비오 디날레는 이탈리아의 노동자 대학살에 대한 두 개의 교훈적인 기사를 함께 게재했다.21) 그는 거리에서 발생한 대학살만이 아니라 파업과는 별도로 경제적 투쟁에서 노동자들의 시위와 관련해서 계획한 학살에 대해서도 다루었다. 이 기사에는 이탈리아 군대가 얼마나 빠르게 현장에 도착했고, 군대가 무방비 상태에서도 군중에게 극도로 엄격하게 그토록 공격하고자 시덥잖은 이유를 대는지, 군대가 군중이 해산하거나 도주한 이후에도 계속해서 발포하고 타격하는 걸 강조하고 그는 이탈리아에서 왕의 총알들로 매년마다 다섯 번, 여섯 번, 심지어 열 번이나 이탈리아 노동자들을 불구가 될 정도로 뼈를 박살냈다는 걸 설명한다. 그는 학살의 원조인 이탈리아 부르주아지는 대학살에서 전 세계적으로 가장 반동적이고 퇴보했으며, 부르주아지들의 눈에 사회주의는 정치적 개념이 아니라 일종의 범죄적 사고 방식일 뿐이었으며 공공 질서에서 가장 위험한 범죄였다.

 

오타비오 디날레는 그라미첼레 학살 다음 날 아침에 밀라노 신문 이상과 해방(Idea Liberale)에서 인용한 사망자와 부상자, 이들은 운명으로 떠났다, 문명과 지배의 가장 소중한 진실은 파편이다.”고 언급했다.

 

 

 

 

이런 기준들이 마련된 후에 지올리티(Giolitti)와 같은 소위 말하는 민주적인 정부조차도 저지른 이 피비린내 나는 열성적인 만행에 대해 군대에게 책임을 묻지 않은 건 놀랍지도 않다. 오히려 군대는 의무를 다했다며 공식적으로 찬사를 얻었다. 의회의 회의장에서 사회주의 분파가 제기 한 대중과의 충돌에서 군대의 고용을 제한하자는 동의안을 부결한 건 여전히 더욱 자연스러울 정도다.

 

18985월에 발생한 총격 사건은 눈이 멀고 근시안적인 낙관주의자들에게도 계급 투쟁에 대한 상황을 명확하게 밝혀냈다. 이건 최근에 매년마다 일어난 유혈 사태에 대한 대부분은 완전한 기록이다.

 

희생자. 사망자. 부상자.

베라(Berra), --------------------------------------627

1901----2------10

파투그나노(Patugnano), ----------------------------54

I902-----1-----7

카사노(Cassano), ----------------------------------85

1902-----1-----3

칸델라(Candela), -----------------------------------98

1902-----5-----11

지아라타나(Giarratana), ---------------------------- 1013

I902-----2-----12

피에르(Piere),-------------------------------------- 521

1903-----3-----1

갈라티나(Galatina), ----------------------------------420

1903-----2-----1

토레 아눈치아타(Torre Annunziata), -------------------831

1903-----7-----10

세리뇰라(Cerignola), -------------------------------- 517

1904-----3-----40

부게라(Buggera), ------------------------------------94

1904-----3-----10

카스텔루조(Castelluzzo), ------------------------------911

1904-----1-----12

세스트리 폰테(Sestri Ponente), ------------------------915

1904-----2-----2

포기아(Foggia), --------------------------------------418

1905-----7-----20

성 엘피디오(St. Elpidio), ------------------------------515

1905-----4-----2

그라미첼레(Grammichele), ----------------------------816

1905-----18-----20

무라(Mura), ----------------------------------------323

1906-----2-----4

스카라노(Scarano), ----------------------------------321

1906-----1-----9

칼리네라(Calinera), ----------------------------------430

1906-----2-----3

토리노(Turin), ---------------------------------------44

1906-----1-----6

칼리아리(Cagliari), -----------------------------------512

1906-----2-----7

네비다(Nebida), -------------------------------------521

1906-----1-----2

소네자(Sonneza), ------------------------------------521

1906-----6-----6

벤벤타레(Benventare), --------------------------------524

1906-----2-----2

 

총합 23건의 학살로 78명이 사망하고 218명이 부상을 당했다! 풍년일 정도다! 

 

이탈리아에서는 경제적 원인으로 시위를 벌일 수밖에 없었던 파업의 참가자 혹은 노동자와 소작농을 상대로 군대를 동원하여 유혈 사태가 끝나지 않았던 사례가 없었을 정도다. 이런 군대의 훈련은 알프스 산의 반대편에선 일상생활의 일부분이자 선물이었다.22)

 

그리고 바로 여기서 우리는 흔하게 알 수 있는 걸 거론하고자 한다. 헤르베(Herve)의 증언에 따르면23) 한때는 해가 지지 않았지만 현재엔 해가 뜨고 싶어하지도 않는 스페인에서 파업 중이던 노동자와 농민들의 학살을 세는 건 이탈리아와 마찬가지로 어렵다.

 

 

오스트리아-헝가리.

 

흔히 알려진대로라면 같이 국가의 업무가 흑인과 황인이던 이중의 군주제에선 그렇게 나아지진 않았다. 1903923일 오스트리아 의회에서 사회주의 대표 다친스키(Daszynski)파업이나 민중 시위는 각 국적들의 의사가 불타오를 때 노동자와 농민에게 총검을 겨누는 건 언제나 군대였다고 외친 건 매우 정당한 발언이었다. 여기에 정치적 왕국이 연류했다는 걸 보여주고자 다친스키는 우리는 평화로운 시기에도 군대가 이질적인 부류로 묶는 유일한 시멘트인 상태로 살고 있다.”라고 발언하면서 1897년 그라츠(Graz)에서 발생한 사건과 그라슬리 츠(Graslitz)에서 발생한 유혈 사태를 암시했다. 우리는 189711월 바데니(Badeni)가 전복했을 때 군대가 개입하여 비엔나(Vienna), 그라츠(Graz), 부다페스트(Budapest)에서 유혈 사태가 발생했다는 걸 알고 있다. 특히 갈리시아(Galicia)에서 흔하던 노동자 학살은 모든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으며, 1902년 부로비츠키(Burowicki)와 우비니(Ubinie)의 카님카(Kanimka)에서 농업 노동자들은 피를 흘렸고 팔케나우(Falkenau), 누에르샨(Nuerschan), 오스트라우(Ostr)의 피비린내 나는 사건을 마찬가지로 언급했다. 그러나 후자에서 헌병대(gendarmerie)는 비난받아야하며 군사 당국의 명령을 따르고 부분적으로는 민간 행정부의 명령을 받아서 국가의 질서를 유지하고자 고안했지만 순전하게 군사 규율을 따랐다. 1902년 트리에스테(Trieste) 총파업 당시에 군대와 충돌도 발생하여 10명이 사망하거나 부상을 입었다. 1902년 렘베르크(Lemberg)에서 일어난 석공들의 파업에서 발생한 사건도 언급하고자 한다. 파업과 관련해서 정치적 시위가 열렸을 때 경기병들은 말을 탄 상태로 군중들 사이에서 총을 난사하여 5명이 사망했다. 1905년 인스부르크(Innsbruck)에서 일어난 폭동은 전적으로 민족주의적 성격을 띠었기 때문에 업무로 볼 땐 외부의 범위였다.

 

군 당국은 사람들에게 저지른 대규모의 선을 넘은 행위들에는 현재까지 헝가리에서 자주 발생했으며, 헌병대는 평화로운 농업 노동자들에게 아무런 원인도 없이 사격한 타마시 푸스타(Tamasie Puszta)의 폐해의 사례를 참조하기에도 완전하고 전적으로자연스럽게 의무를 수행했다. 최근의 한 가지 사건, 190692일 후에 훈야드(Hunyad) 지방에서 벌어진 군대가 초래한 전투에서 페트로세니(Petroseny) 탄광의 파업자들 가운데 큰 피해가 일어난 전투를 유념하고자 한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중상을 입었고, 150명이 경상, 2명이 사망했다.

 

합스부르크(Habsburg) 이중의 군주제에서 발생한 정치적 싸움에서 군대와 프롤레타리아트 가운데에서 일어난 소규모의 충돌과 투쟁은 이외의 지면에서도 언급하고자 한다.

 

이미 인용한 연설에서 다친스키는 총검이란 무력으로 정치를 뒤볶을 순 없다는 주장을 펼쳤다. 그러나 모두가 알겠지만, 그 이후로도 군대는 더욱 강력한 힘과 결단으로 정치에 개입했다.

 

벨기에.

 

벨기에에서 노동자 학살은 오래된 이야기다. 1867년과 1868년의 사건은 국제적인 개입 때문에 중요하다. 시위를 벌인 비무장 노동자들의 행렬에서 군인 중대에 의해 타격을 입고 잘려나간게 사건의 발단이었다. 1867년 마르시엔(Marchienne)의 굶주린 봉기로 공은 굴러갔다. 18683월에는 샤를루아(Charleroi) 대학살이, 1869년에는 악명 높은 세랭(Seraing)과 보리니지(Vorinage) 대학살로 이어졌다.

 

생산량 제한과 임금 체불로 필사적인 광부들을 대상으로 한 샤를루아 학살은 군대와 헌병대가 계획하고 수행했다. 이를 계기로 국제적으로 벨기에에게 강력하고 격렬하게 선동을 지속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총회에선 선언문을 발표했고, 이 선언문은 국제적인 조직24)을 개선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1886년 이른바 굶주린 봉기가 발생했을 때, 보편적인 선거권에 대한 요구를 명확하게 명시하진 않았지만 경제적 문제와 함께 1860년대의 장면을 반복했다. 188643, 반더스미센남작 장군(General Baron Vandersmissen)은 악명 높은 사안을 발표했는데, 이후에 그 사안의 회의에서도 못마땅했다. 이 사안에는 냉소적으로 무기의 사용은 사전에 경고 없이도 사용할 수 있다.”고 명시했다. 희생자의 수는 이례적이었다. 벨기에의 루(Roux)에선 한 번의 일제 사격으로만 16명의 노동자가 사망했습니다. 그리고 계급 정의로 대다수의 노동자들에게 중형을 선고하고 이 모든 걸 승인하는 도장을 찍었다. 1866년부터 1902년까지 벨기에에서 군대의 개입 없이 파업을 섬뜩하게도 마무리할 순 없었다. 이 기간 동안에만 대략 80명이 사망했다.

 

1893년 총파업은 전장에 남겨진 사망자는 많았던 정치적 성격의 주된 사건이었지만 이 사건을 언급하고자 한다. 베르비에(Verviers), (Roux), 라 루비에르(La Louvière), 제마페(Jemappes), 오스텐데(Ostende), 보르거하우트(Borgerhout), (Mons)에선 계급 의식을 지닌 벨기에의 노동자들에겐 불의 문자들이 불길로 타오르고 있다. 벨기에의 노동자들은 벨기에 자본주의의 죄악에 대한 견고한 책에 피 묻은 나뭇잎을 꽂았다. 상비군을 마지막으로 동원한 건 1902년 총파업 당시 예비군을 소집했을 때였다. 병사들의 사고와 분위기는 곧 "라 마르세예즈"(Marseillaise)를 부르고 장교들을 경멸하는 등으로 상당하게 드러낸 방식과 혁명적 사상을 표출하면서 국방부에 불리한 보고를 줬다. 이 결과로 이전에도 자주 일어났던 플랑드르(Flemish) 군인들은 왈룬(Walloons)에 거주하는 구역으로 발령했다. 그 반대에도 마찬가지였지만 마침내 상비군은 결국 사라졌다. 1902년 이후 벨기에의 프롤레타리아 병사들은 적어도 자국의 군국주의에 대해선, 앞서 살펴본대로 헌병대와 방위병을 선호하는 자본주의의 감시기구, 고용 계급의 금고 앞에서 보초 임무를 수행하는 떠오르는 기념비라는 명예로운 역할을 포기했다. 착취라는 신성한 특권을 지키고자 부르주아지는 어느 경우에도 비무장 대중들이 반대할 때 그 자신이 위험에 처한다면 문제를 마다하지 않고 자신에게 목숨을 건다. 방위군들이 자국의 적에 대항해 감탄스러운 그 기능을 수행한다는 건 이미 어느 곳에서나 입증했다.

 

프랑스

 

프랑스에서는 계급 투쟁의 역사가 피의 문자로 새겨져있다. 사흘 동안 지속한 18307월 전투, 1848623 부터 26일까지의 시가전에서 사망한 10,000, 1851121일 카바이낙(Cavaignac)1852"작은" 나폴레옹들의 사형을 집행한 18715월의 붉은 주에 코뮌을 무너뜨리려고 프랑스 부르주아지가 분노로 울부짖으며 자본주의의 의무이자 원한으로 일어난 28,000명의 영웅의 피 바다를 떠오리는 건 아니다. 이 사건들은 영웅적 행위에 따른 비극적인 표시로 프랑스의 묘지들이 아니라 군국주의가 저지른 끔찍한 혁명적인 행위로 우리의 역사적 조사에선 벗어난다.

 

 

 

파업 중인 무방비 상태의 노동자들과 맞선 군국주의의 영웅적인 행동은 일찍부터 시작했다. 183111, 군대가 평화로운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면서 리옹의 견직공 노동자들은 일하며 살거나 싸우다 죽거나라는 유명한 문구가 적힌 현수막을 내걸고 이른바 반란을 시작했다. 분노한 노동자들은 이틀 만의 투쟁 끝에 마을을 점령했고, 방위군은 분노한 노동자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지만 군대는 곧 칼을 뽑기도 전에 마을에 진입했다. 리카마리 황제(Empire Ricamari) 치하에서 성 오뱅(St. Aubin)과 데카제빌(Decazeville)은 출전으로 유명한 지역이다. 당시에 부르주아 공화주의자들은 군인들이 파업 경기장에 투입하는 걸 열정적으로 반대하며 싸웠다. 그러나 같은 공화주의자들은 정치권력을 장악하자마자 방금까지 싸웠던 보나파르트주의 방식을 습득하기 시작했고 곧바로 더 앞선 방식으로 나아갔다. 성직자나 군주제지지자들이 유죄를 선고받을 때만 정치적 원한으로 혹평했을 뿐이었다. 189151, 르벨식 연발 소총의 총알은 당시에 어린 소녀였던 마리아 블론도우(Maria Blondeau)의 몸을 관통하면서 새로운 정권은 피의 세례를 받았다. 145 라인 연대가 의무를 서던 날에 10명이 사망하고 35명이 부상을 입었다. 그러나 프루미스(Fourmies)의 콘스탄트(Constant) 도살자와 그의 동료 샤푸이(Chapuis) 대위는 고립된 사건이 아니다. 프루미스를 따라서 1988년 샤롱(Châlons), 1900년 라 마르티니크(La Martinique) 19055월과 6월 롱위(Longwy)에서 프랑스-러시아 동맹을 체결하고 이를 기념하고자 장교들은 채찍을 들었다. 1905417, 빌프랑슈르손 (Villefranche sur Saône)에서25) 특히 리모주(Limoges)에서26) 무엇보다 기병대의 공격과 연속사격이 있었고, 190512월에는 콩브레(Combrée)의 비극27)은 발생했고, 1907120일에는 파리의 거리에서 일요일 휴무에 찬성하는 시위를 하는 대중들을 막고자 막강한 군대를 소집했다.

덩케르크(Dunkirk), 크루소(Creusot), 몽소 레 마인(Montceau les mines)을 포함하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더블린에서 열린 국제회의에 제출한 노동 총연맹의 난관”(“Confédération Générale du Travail”)의 보고서에 따르면 이 회의에 참석한 한 군인들은 파업 노동자들과 연대를 선언했다.28)

최근에는 반군국주의자들에 대한 대심판에 메슬리에(Meslier)는 진실로 외쳤다. “프루미스(Fourmies)에서 어린 마리아 블론도의 살해 사건 이후에 프랑스의 노동 계급은 오랜 순교자적 고통을 겪었고 대다수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이 사건은 터무니 없이 부조리하고 프랑스에서 눈에 띄는 반교권주의와 공화주의 견해와 활동에는 평화로운 고대의 새로운 방법적 환상에 큰 자극을 주었다는 사실 외엔 더 큰 발전은 없었고, 지난 5년 간 프랑스의 밀러란디즘적 사회주의는 감소했지만 반면에 파업을 가혹하게 처리하는 군대 수도 증가했다. 최근에 수립한 두 명의 사회주의자가 있으며 급진적 민주주의였던 클레망소 부처에서도 마찬가지로 어느한 변화도 주지 못했다. 라파르그는 현대 군대는 식민지를 훔치는데만 관여하지 않으며 자본주의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서도 고용한다.”고 마찬가지로 프랑스의 정곡을 찌르면서 신랄하게 언급했다.29)

 

 

미국

 

자본주의는 매우 효과적으로 자신의 고유한 어조를 유지하는 논조를 알고 있으며 필요에 따라서 "사격소리", 소총의 장전소리와 칼이 휘두르는 수단들로 필요한 경우 미국의 자본주의 사회 및 공공 생활에서 조정되는 평등 권리의 논조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지 알 수 있으며30) 이로인해 당분간은 미국에서도 자본주의가 프롤레타리아를 이길 수 있다. 이 사실은 군대를 모집하고 훈련하는 군사적 방법에서 가장 중요하고 자국의 적에 맞서서 군대를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데 매우 유익하다. 병력을 모집하고 훈련하고 다른 부대로 병력을 이동하는 특이한 조건에서도 노동자들은 자주 잘 무장했기 때문에 미국은 특이한 상태을 띠고 있다.

 

벨기에와 마찬가지로 미국에서도 노동자 대학살의 기간은 실업자 운동에서 시작한다.

 

1874113, 뉴욕에서 강한 경찰 병력들이 별다른 도발 없이 실직자 행렬을 공격을 감행했다. 수백 명의 노동자들은 치명적인 중상을 입었고 톰킨스 광장(Tompkin’s Square)의 전장에 쓰러져갔다. 그러고나서 18777월 철도 노동자들의 파업이라는 극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주지사는 볼티모어(Baltimore)와 오하이오(Ohio) 철도의 파업에 맞서 주 민병대의 여러 중대를 파견했지만 역부족이었다. 헤이즈(Hayes) 대통령은 중대를 돕고자 250명의 정규군을 더 파견했지만 성공적이지도 못했다. 메릴랜드(Maryland)에선 소집한 민병대원 중 10명이 소총 사격으로 사망하고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피츠버그(Pittsburg)에선 보안관을 소집한 지역 민병대가 개입을 거부했다. 다른 부대로 병력을 이동해서 다시 분류하는 오래된 속임수를 이용했다. 필라델피아(Philadelphia)에서 온 민병대원 600명은 파업자들과 짧지만 격렬하게 전투를 벌였고, 다음 날 아침 정규군들은 패배하고 도망쳤다. 펜실베이니아(Pennsylvania)의 레딩(Reading)에서 파업에 반대하는 민병대원들은 대부분 파업 노동자들과 친분을 쌓고 탄약을 공유하며 파업 노동자들에 대항하는 민병대원들에게 무기를 휘두르겠다고 위협한 노동자들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은 한 부대에서 독점적으로 소유 계급들 가운데 모집했고, 고집스러운 장교가 이끄는 한 중대는 군중을 향해 발포해서 13명을 죽이고 22명을 부상 입혔다. 이 중대는 영웅적인 행위의 결실을 오래 누리진 못했고, 압박을 받아 곧 후퇴해야했다. 한동안 파업 노동자들의 손에 완전히 장악했던 세인트루이스(St. Louis)에선 파업 노동자들은 집행위원회 본부를 정기적으로 포위해서 민병대의 여러 중대와 함께 투입해서 타격한 후 마침내 전체 경찰 권력의 법과 질서에서31) 승리해 되찾았다.

18865월 시카고(Chicago)를 휩쓸었던 두려움의 원인은 핑커톤(Pinkerton)의 입구와 경찰들에게서 찾을 수 있다. 재봉틀 생산업체인 코믹(Mr. Cormick)노동하려는 사람들을 보호한다는 근거 없는 혐의를 들어 파업 노동자들에 맞서는 300명의 무장한 핑커톤을 풀어 주었고, 그 결과 경찰의 유혈 공격에 자극을 주어 남성, 여성, 어린이를 무차별적으로 공격해서 6명이 사망하고 많은 사람들이 부상을 입었다. 이 사건은 53일에 발생했다. 54일에는 그 유명한 다이너마이트 폭탄을 투척해서 치열한 거리 투쟁의 신호탄을 알렸고, 이 투쟁으로 노동자 4명이 사망하고 50여 명이 부상했으며, 경찰의 손실로는 7명이 사망하고 60명이 부상을 입었다. 188654일의 섬뜩한 사법적 속편으로, 미국의 민주주의 계급적 정의가 타격방식을 취할 수 있는지를 입증한 이 사건은 널리 알려졌다.

 

1892년과 1894년에 일어난 사건도 자세히 살펴보자.

 

첫째로, 18927월 정부가 공여하던 농지이던 카네기 철강 작업소 공장에서 파업이 일어나는 동안에 고용주가 고용한 무장한 핑커톤과 파업 노동자 가운데서 격렬한 전투가 일어났다. 이 투쟁에서 12명이 사망하고 20명이 중상을 입었다. 핑커톤은 패배했지만 후에 정부군은 마을을 점령하고 계엄령을 시행해 파업대를 해산했다. 거의 동시에 아이다호(Idaho)에서 광부들의 파업이 발생해서 파업방해자들과 파업대들 가운데 충돌에서, 대략 백 명의 민병대로는 무장한 파업대원들을 상대로 맞설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오직 주지사가 요청했던 연방군만이 파업대를 해산하는데 성공할 수 있었다. 18928월 버팔로(Buffalo)에서도 철도 신호원들은 파업에 나섰다. 파업이 시작했을 때 출동한 지역 민병대는 팻말 시위를 막으려고 하진 않았다. 마침내 보안관은 주지사에게 48시간 이내에 병력을 요청했고 거의 대다수의 주에서 민방대는 파업대보다 20배나 넘게 현장에 출동해서 평화를 원상복구하는 데 성공했다. 같은 달에 인맨(Inman)의 철광산, 올리버 스프링스(Oliver Springs)의 탄광, 콜 크릭(Coal Creek)의 파업으로 주지사에겐 주 민병대 전체에 주력할 기회를 주었고, 파업으로 대부분의 민병대는 고립하거나 파견됐고 결국 무장을 해제하고 자신의 고향들로 돌아갔다. 이 파업을 무산한 후에도 계급적 정의는 무자비하게 행동했다.

 

마지막으로 일리노이(Illinois)32) 주지사였던 알트겔드(Altgeld)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미국 대통령은 연방군을 주에 파견하여 주의 민병대와 결합해 파업을 진압하고 12명이 사망한 1894년 시카고 풀만 파업(Chicago Pullman Strike)을 상기해보자. 이 사례에는 이전의 모든 사례들보다 군국주의와 손에 손을 잡은 계급적 정의로 악명 높은 명령들과 대량의 체포적 수단들로 노동자들을 좌절하고자 했다. 파업 지도자였던 유진 뎁스는 이렇게 언급했다. “우리는 철도가 아니라 군대에게 쳐맞았습니다, 군대도 아닌 미국 법원이 휘두른 권력에게 쳐맞았다라고.33)

 

그러나 민병대는 명령을 거부하고 파업대들이 자주 무장했다는 사실과 언급한 모든 사례에서 군사 권력은 노동자들의 패배를 가져온 결정적인 요인이라는 건 여전히 사실이다. 이후에도 미국의 파업은 주요한 사례에서 지역 경찰들과 주 민병대 또는 연방군의 도움과 의심 해볼 여지도 없이 정부가 명령한 수단들의 도움으로 부딪쳤다. 이에 다소 비관적인 성향이 있던 힐리킷(Hiliquitt)에 따르면34) 대부분 파업은 예외없이 노동자들의 좌절로 끝이났다.

 

캐나다

 

캐나다에서 자유의 땅이던 해밀턴(Hamilton)에선 노동자들의 피로 얼룩졌었다. 19061124. 파업 중이던 철도 노동자들과 충돌해서 민병대는 50명에 부상을 입혔고 그들 중 일부는 중상을 입었다.

 

스위스

 

스위스의 군대를 이용한 죄의 목록은 정말로 오래됐다. 1869년 제네바 주 정부는 경찰과 함께 파업 중이던 노동자들을 상대로 민병대를 파견했다. 같은 해에 보주(Vaud)의 주 정부는 대대에게 전보해서 실탄을 지급하고 노동자들이 파업을 벌이고 있는 마을로 총과 검으로 행군하라고 명령했다. 1869년 바젤 주 정부는 견직공들의 열악한 환경을 개선하고자 파업을 벌였을 때 군인들에게 같은 방식으로 의무를 다하라는 팻발을 들라고 지시했다. 같은 해에도, 라 쇼드퐁(La Chaux-de-Fonds)에서 시계 제작자들과 조각가들 가운데 파업이 발생하자, 새로운 부르주아 정부는 민병대를 동원할 필요를 예상하고선 무기와 탄약을 제공했다. 1875년에는 유혈 사태가 발생했다. 우리(Uri) 주에서는 건설 계약업체가 처분하고자 2만 프랑 정도를 취득해서 알려진 정부는 고타드(Gotthard) 터널에서 주로 파렴치한 실물 급여 제도에서 자신을 보호하려던 2000명의 파업 참가자들에 맞서 민병대를 동원했다. 격렬한 공격으로 희생자는 속출했고, 계급 전투의 전장에선 여러 사망자와 대략 15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1901년 발레(Vallais) 주에서도 정부는 두 개의 중대를 파견하고 심플롱(Simplon)의 파업을 진압하고 피가 흘러내렸다. 그 결과로 대다수의 노동자는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같은 해에 티치노(Ticino)에서는 석공들의 파업에 의무적으로 반대하는 팻말을 들고 두 개의 소대를 투입하기도 했다. 제네바에서 잘 알려진 사건은 190210월에 발생했다. 노동자들은 미국의 착취업자들에 파업을 벌였고 정부의 명령을 따라서 양처럼 몰아 얻어맞았다. 당시에 군인들은 치안의 의무를 거부하면 감옥에 갇히고 시민권까지 박탈했다. 당시 소집하지도 않았지만 부르주아지들은 노동자들을 반대하고자 그 자신들이 대규모로 무장했다는 건 지나가는 말로만 언급하겠다. 거의 같은 시기에 바젤(Basle)에서는 파업에 반대하고자 민병대를 동원했다. 1904년 라 쇼드퐁의 건축 청부업자들은 건설 노동자들의 파업에 대해 정부에 군사적 지원을 요청했다. 놀랍게도 파업은 모든 도발에도 불구하고 체계적으로 전진했기 때문에 고용주의 입장에서는 절망적이었다.

 

기병대와 보병의 한 대대가 한꺼번에 현장을 출동할 정도로 대응은 신속했다. 이들은 합법적인 방법으로 투쟁하던 프롤레타리아들을 위협적인 성향이 있었고, 프롤레타리아들을 다시 공장의 노예 생활로 내몰았다. 1904년 성 갈(St. Gall) 주의 리켄(Ricken)에서 과일과 채소 농작물을 보호하고자 파업을 벌이는 동안에 군대를 동원하기도 했는데, 이 파업은 전혀 위험하지도 않았다. 성 갈 주의 임금 분쟁 중에 흥분한 한 군중은 프랑스 고용주가 운영하는 주조공장의 유리창을 깨자 로르샤흐(Rorschach)에 민병대를 파견한 방식으로 민병대를 파견했다. 1906년 여름 취리히에서 발생한 사건의 성격은 심각했다. 생필품의 가격을 크게 상승한 결과에 따른 임금 인상을 목적으로 한 파업은 수 차례 발생했지만 아무런 원인도 없이 민병대는 개입해서 유혈 사태가 발생했다. 민병대는 가장 잔인한 방식으로 파업 노동자를 때리고 구타했다. 파업의 노동자를 연행했을 뿐만이 아니라, 특히 외국인들까지 막사로 끌고 가서 승마용 채찍으로 채찍질했다. 이 방식은 장교들의 명령을 따랐으며, 파업 중에 팻말 시위만이 아니라 어느 한 시위의 개최도 금지했다. 수치스러운 사건에 대한 대의회의 해명은 우선적으로 무기한 연기했으며 부르주아 정당의 소규모 단체에선 논의없이 묵인했다. 그리고 이를 마무리하고자 6명의 파업 지도자들은 법정에 출두했다. 1906824, 법원은 이들 중 5명에게 무죄 판결을 선고했고 시그(Sigg)는 민병대에 반군국주의 전단을 보내서 반란을 선동한 혐의로 8개월의 징역과 1년 간의 시민권을 상실하는 형을 선고했다.

 

실제로 이는 부르주아 공화국과 민병대에서 예상을 이루는 한계에 해당한다. 이러한 자료들에 특별한 의미가 부여되는데, 이미 다른 관련 부분에서 언급된 것처럼 1899년에 스위스의 민간인들은 병역 의무가 없는 시민들이 총알을 보유할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이 있다. 이외의 관련한 부분에서도 언급했지만 이에 대한 자료에는 특별한 섬광을 비추는데 1899년에 현역으로 복무하지 않는 스위스의 민간인들에겐 탄약을 보유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로 인해 더욱 치열해진 계급투쟁에서 고용 계급의 이익관계는 민병대의 고용을 촉진하고자 제 시간에 맞춰 이뤄졌다는 걸 알 수 있다.

 

19061221, 국민의회는 찬성 65, 반대 55표로 군조직법 수정안을 채택했다. 이 수정안에 따르면 경제적 성격들과 충돌했을 때만 국내의 질서를 어지럽히거나 위협하는 경우”, 군대 동원은 공공 질서 유지를 위한 목적으로 필요로 했다. 이 법은 105표 반대 4표로 통과했다. 그리고 의심 할 여지도 없지만 앞에서 언급한 수정안은 이미 군대 개입에 대한 기준을 구성하지도 못했으며 초라할 정도로 쓸모가 없는 이 수정안에 반대표를 던졌을 큰 소수들에게 생각을 잠기게 한다.

 

노르웨이

 

자유로운 노르웨이, 1905년 여름에 세계에서 가장 평온하게 혁명을 지나서 원시적인 욕망을 채우고자 군주국가를 세우고 왕위를 올렸다. 이 나라에는 모든 소작농적 낭만에도 불구하고 전적으로 자본주의 국가의 발자취를 따른다. 소작농적 민주주의 국가인 이 나라에서도 파업 참가자에 대한 군사적 권력의 사용은 드문 일은 아니다. 190351일자35) 티벤데 아르흔데(Tyvende Aarhundrede)의 기사에 이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1902년에만 던드랜드 달렌(Dunderlands Dalen)과 트롬쇠(Tromsoe)에서 두 건의 사례가 발생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독일

 

그래도 독일은 여전하다. 독일에서는 경제적 투쟁에서 군대를 고용하는 건 관습은 아니다.

적어도 아직은 군대가 적극적으로 활동한 사례는 기록하지 않았다. 1847년 방직공 폭동에서 프로이센 보병은 11명을 죽이고 24명에게 부상을 입히고 프롤레타리아를 죽음에 이르게 할 정도로 비참한 고문과 계급적 정의라는 왕권에 기반해서 대다수에게 고된 노동형을 선고하고 마무리했던 예외가 있다. 또 다른 예외로는 1889년 광부들의 파업으로, 510초대 대통령이던 폰 하게마이스터(von Hagemeister)가 요구했던 군대는 몰트케(Moltke) 광산에서 3명이 사망하고 4명이 부상입었으며, 보훔(Bochum)36) 전장에선 2명이 사망하고 5명이 부상을 입었다. 18922월 베를린 실업자들의 소동에는 군대를 개입하지 않았지만, 신뢰할 만한 소식에 따르면 베를린 군대는 1894118일 실업자들이 궁전 앞에서 시위가 일어날 계획이라는 시답잖은 소문으로 막사에서 대기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런 군국주의자들을 완화하는 결과에는 결정을 내린 당국의 관계자들이 유난하게 친절하거나 건전하게 사고하는 방식들과는 상관이 없었다. 정반대로! 독일은 고용 계급의 관점에서 우수하고 강력하게 조직한 경찰과 헌병대를 보유하고 있다. 독일이 저명한 경찰 국가라는 건 헛소리가 아니다.

 

잘 무장된 경찰과 잘 무장된 헌병대는 타지에서도 군대가 맡은 임무를 독일에서 수행하며, 더 번거롭고 투박한 방식으로 행동하는 군사 기계들보다도 은밀하게 수행하고 순식간에 다방면적인 지시에도 더 잘 적응할 수 있다.

 

 

독일에서는 파업 노동자와 경찰 또는 헌병대 간의 유혈 충돌도 꽤 자주 발생한다. 1900년 베를린(Berlin) 시내의 이동수단인 전차 파업과 1906년 이른바 브레슬라우(Breslau) 폭동도 예외는 아니다. 비발트(Biewald)의 손으로 군국주의를 생산한 경찰의 거친 진압과 쥐어뜯은 흔적으로 잘려나갔던 역겨운 사례일 뿐이다. 비발트의 손은 여러 수의 두개골, 도려낸 귀, , 손가락 이외의 부위들이 잘린 채로 좋은 회사에 소속했으며, 이 좋은 회사는 급속도로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다. 독일에선 무장한 국가 공권력에 의해서 파업 희생자의 수는 이외의 국가에 비해선 보다 적다. 경찰과의 충돌로 부상당한 사람들의 수는 완전하게 기록했거나 알려지지조차 않았기 때문에 대략적인 추산조차도 어렵다. 독일에서 이런 희생자들이 여타의 국가들보다 적은 건 자본주의 국가에서 고용 계급들이 호의적이고 다정하기 때문이 아니다. 이는 군대가 막사에 소집하고 대규모 파업에 대비하여 준비 태세를 유지한다는 건 거의 다반사라는 사실은 우리들에게 가장 분명하게 입증했다.

  

이와 관련한 가장 심각한 사례는 190518일부터 210일까지37) 지속한 루르(Ruhr) 광부들의 파업에서 제공한다. 그와 반대로 이 결과는 전적으로 독일 노동자들의 신중하고, 차분하고, 엄격한 자제한, 훈련과 계몽에서 기인한다. 프로이센과 작센(Saxon)정부가 북과 나팔, 칼과 총을 들고 경제적 투쟁에서 두 번 생각해보지도 않고 고용 계급의 편을 들거란 건 조금도 의심할 여지도 없다.

 

군사회와 파업

 

군국주의는 현역 복무 기간 이후에도 사람들의 군국주의적 성향을 유지하고 군대 집단이라는 매개들로부터 이를 확산하고자 분투하기 때문에 군대가 파업에 개입하는 건 대부분 알 수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는 사실이다. 군국주의는 노동당의 경제적 투쟁을 폭력으로 진압하려는 활동을 내버려 둘 순 없지만, 아마도 검은 타이즈를 위해 고안한 조직으로 특징할 수 있다. 어쨌든, 특정 분기에 이용할 수 있도록 그들을 너무나 쉽게 고용고자 한다. 모든 대비책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비율로 반대하고 심지어 사회 민주주의적 요인들을 담아낼 수 있는 상황만이 이런 군사 집단의 활동을 최대한으로 막을 수 있다. 이런 집단을 활동하지 않게 막아내는 건 고용계급과 노동계급 가운데서 사회적 시각이 부족하고 흔한 양처럼 온순하던 노동자들도 투쟁에서 가장 먼저 분노하고 계급투쟁과 자신의 계급적 위치를 알아차린다. 게다가 고용주들의 일부분인 기독교 와 자유주의 노동자 단체들의 뒤에서도 설립했으며 그 선을 넘어버렸다. 그럼에도 19066월 오스트하임(Ostheim)에서 개최한 작센-바이마르 대공국 군사회 연합파견 회의에서 이에 대해 논의한 내용은 매우 흥미롭다. 이 논의는 파견 회의에서 채택한 원칙들과 관련해서 시작했다. 이 원칙은 국가에 적대적인 정당을 지지자나 특히 사회민주당으로 판명한 회원을 제명하는 걸 모든 회원의 의무로 규정한다. 파업에 가담했거나 적어도 황제, 왕자 및 조국에 대한 충성하는 의무를 위배하는 파업에 참여했다는 건 국가에 적대적인 혁명적 견해을 지녔다는 사실을 확증하는데 주목했다. 파업으로 인해 그러한 충성심이 언제 어디서 위험에 처하는지 공표하는 건 군사회에서 한가하게 빈둥거리는 고위급 인사들에게 달렸으며, 경찰과 사법부와 마찬가지로 직간접적으로 고위급 인사들은 자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익에 타격을 주는 모든 파업을 사회민주주의를 책략으로 간주했기 때문에 이에 군사회에선 생산적인 작업을 수행한다고 착각했다. 그러나 노동자를 계몽하고 어설프고 어리석은 군사회를 약화하는데 기여하는데 좋은 건 사회민주주의만큼 고용 계급들에게 유익한 건 없다. 군사회는 사회민주주의자만이 아니라 현대 노동운동의 규칙을 지지하는 모든 노동조합의 구성원들을 더욱 더 체계적으로 추방하고자 한다. 대체로 군사회에서 화려하게 치장한 장식”38)과는 별개로 상당히 높은 회비를 납부하면서 얻는 특정한 물질적 이득39)에 묶여 있기 때문에 당분간은 작은 도시의 노동조합에선 활동하는 조합원들은 일정한 어려움을 겪는다는 건 분명하다.

 

군사회는 계급적 정의와 관리부에서 그 목적을 강력하게 지원하며, 정치적 선전적인 성격을 모든 모공에서 내뿜지만 여전히 사회민주주의자들을 비정치적 조직으로 취급하는 무모한 용기를 가졌다. 군국주의에게 자본주의 국가에서 이런 기관들은 자본주의 사회 질서를 보호하고 공공의 높은 이익관계와 결속으로 묶여 있기 때문에 손을 내밀 수밖에 없다.

 

 

프롤레타리아트에 맞서는 무기들인 군대의 정치투쟁 또는 무장할 권리.

 

정치 투쟁은 가장 집중된 형식의 계급 투쟁 자체이기 때문에 우리는 정치투쟁에서 직간접적으로 군사 개입을 예상할 수 있다. 애초에 군사주의는 생산자이자 소비자로서 경제 강대국 역할을 합니다. 처음부터 군국주의는 생산자이자 구매자로 경제적 힘을 좌우한다. 모든 사회민주주의자를 잔혹하게 배척하거나 혹은 군사 생산 시설에서 사회민주주의자라는 혐의를 받은 사람들을, 예를 들어 슈판다우(Spandau)에서 노동자들은 군국주의에 작용을 받은 반동적인 정당, 특히 "사회민주주의와 맞서는 제국주의 노동조합"에 무조건적으로 굴복하며 수백의 어두운 독일인들은 동시에 사회민주주의와 가벼운 접촉도 완강하게 막으며, 군국주의는 고용주 보호 주요 임무를 얼마나 훌륭하게 파악하고, 실제로도 군사적으로 빈틈없이 수행할 수 있는가를 판단하며, 권력을 지지하거나 방어하려는 열망에서 군수 회사인 크루프(Krupps)와 스텀즈(Stumms)를 능가한다. 이를테면, “사회민주주의에 반대하는 제국주의 노동조합은 슈판다우의 군사 생산 시설에서 대부분은 왕의 모든 노동자를 통제하는 왕의 감시자 역할을 자임한다. 그 뜻은 어느 노동자를 해임할지를 즉시 결정한다. 1906년 여름에 군 생산 시설은 미숙련 노동자들의 무해한 노동조합들을 집행위원회에서 해임을 내린 사건에서 현저하게 입증했다.

 

사실, 군사적 거부 운동에서 발휘하며, 노동자 조합이나 여타의 사회민주주의적 성향을 띠는 어느 단체든지 활동하는 술집을 운영한 사람들에게 군사적으로 불매 운동을 가하기도 하는데는데, 이는 유력한 작용들을 미치기도 하지만 급속하게 감소하는 추세다. 이 불매 운동에는 위에서 논의했던 군국주의의 교육적인 세력들에 속하는 혁명이라는 독약에 접촉할만한 병사들을 보호하는 일석이조를 가져왔다. 게다가, 노동자들은 공중실 하나도 빌리기가 어렵기 때문에 칸이나 공간을 확보하기가 어렵다. 이를테면 베를린에서는 불매 동맹에는 효력이 없으며 대부분 버려진 걸로 드러났지만, 소도시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경제적 투쟁이라는 흑사병에 직접적으로 맞서는 동지들은 이로인해 괴로워한다.40)

 

그러나 이는 사소한 죄악일 뿐이다. 군국주의는 매일 일어나는 시답잖은 정치 투쟁에 끊임없이 개입하고 그 속내를 파보려는 걸로는 부족하고 무한하게 큰 열망도 가졌다. 군국주의는 혁명에 대한 모든 능숙하고 심각한 왕좌의 제단을 자본주의적 반동으로 가장 고결하고 위대하게 지지한다. 이전의 모든 거대한 혁명 운동 동안에도 마찬가지로 규모 면에서도 전반적인 저울을 던졌다. 이를 쉽게 설명하겠다. “어린 나폴레옹들의 폭동이 일어났을 때 18307, 18486, 18715, 1852122일에 가시로 뒤덮은 섬뜩한 월계수로 장식한 회관을 쓴 자본주의적 군국주의와 파리의 프롤레타리아트의 투쟁은 이전에도 다루었다. 1839년 영국에서 일어난 뉴포트(Newport)와 버밍엄(Birmingham)에서 10명이 사망하고 50명이 부상을 입은 차티스트(Chartist) 대학살에서 특히나 흥미롭다. 러시아 전체는 지난 2년 동안에 차르의 전제 군주제로 잔혹한 야만적 만행을 저지르는데 조력하고 계엄령이 내려진 불행한 나라를 공동묘지로 바꿔놓은 군인들은 주먹, 채찍, , 소총과 총기 류로 해방 운동을 잔인하게 짓밟았다. “이 짐승 같은 놈들아!” 오직 혁명적 발전의 전진에는 혁명 세력들이 보여준 행동력과 필연적으로 손에 손을 잡은 군대의 해산만이 기독교적이지만 자살 계획을 옮길 수 없다는 걸 시기적으로 안전하게 보장한다. 반복적으로 언급했지만 러시아에서 자본주의 국가를 조사할 때는 대다수의 예외를 충분하게 고려한다.

 

중요한 부분에서도 첫 번째 벨기에(Belgian)는 선거전에서 상비군을 투입한 만큼 1902년 두 번째 벨기에 선거전에선 부르주아지의 특수한 군국주의적 기구에서 국가 정규군들을 계급투쟁에 이용하고자 투입했다. 189651일 오스트리아 빈의 프라터(공원)에서 시위를 벌인 노동자들을 상대로 군대를 동원하고 1897년에 프라하, , 글라츠(Glatz), 1902년에 렘버그(Lemberg)와 트리에스트(Triest)에서 일어난 사건과는 별개로 오스트리아는 특히 1905년 선거전에서 대규모의 군국주의 정치적 행위에 나선 두 번째의 훌륭한 사례를 제공했다. 알다시피 보헤미아(Bohemia)는 특히 내전의 현장으로 변질할 시점에 처해 있었다.41) 1905115일과 28, 선거 시위가 열리던 날, 프라하에서 파업을 벌이던 광부들은 동시에 혼잡하게 군대가 몰려들어 주변을 포위하고 높은 고지를 선점하고 발포 준비를 마친 포병들은 대략 80명을 사살했지만, 실제로는 경찰들이 저질렀다.

 

이 사건은 이미 이탈리아의 항목에서 언급했었다.

 

다시 독일로 돌아와서, 독일에선 모든 나라들에 반군국주의 선전에서 상비의 무기고를 지키는 가장 유능한 무기들 중의 하나로 연설을 알린 한 장성 장군은 병사들에게 안식일을 지키라는 네 번째 계명에 대해서도 미심쩍은 해석을 전했다. 이 장군은 1895년 세단(Sedan)의 날 근위병들의 연회에서 폭도에 맞서는 유명한 연설을 전했을 뿐만이 아니라 1901328일에는 알렉산드리아(Alexandrians)에서 유명한 호소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헌법"의 안전한 대들보인 프롤레타리아트들은 군사적 무장과 랑겔(Wrangel)의 기습을 의미했다. 실질적으로 부르주아지들은 거의 모든 전선을 저버리고 1848-1849년에 독일 혁명의 생득권을 불리하게 남게하고 파렴치하게 강탈하고 짓밟았다. 18709월 보옌(Boyen)-로첸(Loetzen) 연쇄 사건과 비스마르크 푸트카머(Puttkamer)의 피비린내 나는 기억을 상기해보자. 악명 높은 사회주의 법을 재촉한 19세기의 영웅들은42) 고뇌하는 노동자들을 거리로 내몰거나, 군대의 칼로 난도질하고, 소총과 포탄의 파편으로 뒤덮으면서 대단히 예술적이고 정정당당한 방법으로 보여주기를 고대하고 갈망했다. 5월 축제43)와 독일의회 선거의 사례에서도44) 군대가 막사에서 채비할 태세를 갖추었다는 사실은 비교적 최근에도 너무 잘 알려진 사실이다. 1896년 작센(Saxon) 선거권 도난과 1905-1906년 작센 주민들의 화해를 위한 군대의 관여와 관련한 사건들도 마찬가지로 잘 알려졌다.45) 190511월에 함부르크(Hamburg)에서 열린 피의 수요일선거 시위는 경찰의 칼과 권총으로도 충분했고, 함부르크의 원주민으로 이뤄진 군대가 그 주위를 지켰다. 자유로운 한사(Hansa) 마을에 두 명의 시체들이 포장도로를 장식한 건 경찰의 작업 덕분이었다.

 

1906121일은 자본주의의 옹호자들이 가장 큰 영광을 누리는 날이었다. 베를린의 포장된 거리에서 총성이 울려퍼진 걸 들은 사람들은46) 이 날에 군국주의의 마음과 영혼을 자세히 들여다봤다. 이 기관총성은 현재에도 여전히 귓가에 반향해서 울리며 아낌없이 무자비하고 꾸준한 결의로 군국주의에 맞서 임금을 위해 투쟁하는데 박차를 가할 것이다.

 

1906121, 부끄러운 프로이센의 3급 선거제도를 반대하는 시위가 발생했다. 그러나 쿠데타로 반동적인 의미에서 국가 헌법을 수정하는 문제였다면 군국주의가 칼을 풀고 탄환을 발사하는 성향이 있다는 걸을 알고 있다. 그리고 최근 호헨로헤(Hohenlohe)와 델브뤼크(Delbrueck)의 폭로에는 1890년에 비스마르크가 제국 의회를 해산하고 선거권을 도난하고 프롤레타리아 대중들을 거리로 내몰아 총과 소총에 직면하고, 속수무책의 노동자 대열을 박살내서 사회민주주의를 무너뜨리고47) 프롤레타리아 시체들의 무덤에는 반동적인 비스마르크-융커들이 테러 행위와 강압으로 무서운 요새를 건설했다. 게다가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독일 황제는 이 계획을 승인하지 않을 거라는 소식도 있었다. “노동자들의 근거가 충분한 불만을 납득하고, 모든 사건들에 노동자들의 요구를 충족하고자 마주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 노동자들은 노동자의 한 근거들을 지니고 요구하는지에 대해 지배계급과 완전하게 서로다른 견해가 있다는 걸 알고 있으며 독일 북부에서 매우 세력 있는 모임들이48) 독일 의회 선거권에 대한 모든 사건들에 취한 적대적인 태도는 더욱 두드러졌으며, 호헨로헤(Hohenlohe) 회고록에서도 폭로했지만 이전의 공산주의자 미구엘(Miguel)도 이런 권리에 대해 가장 적의에 찬 적대를 표시했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우리는 소구경 소총과 대구경 대포의 수단으로 사회적 문제에 대한 "군사적 해결책"에 대한 위험에서 그 어느 때보다도 가까이 다가왔다.49) 최근의 예고에 따라 헬무트 폰 몰트케(Helmut von Moltke) 참모 총장이 제국의 수상이라면 악명 높은 군사 법정 당의 승리를 의미 할 것이다.50)

 

세계 역사상 파편적인 왕자들, 파편적인 융커들, 파편적인 장군들이 부족했던 적은 없었다. 모든 걸 대비해야하며, 잃을 시간조차도 없다.51)

 

정치투쟁에서 군사회

 

군사회는 당연하게도 눈을 속이고 침묵하기 때문에 독일 재판부가 볼 수 없도록 매우 격렬하게 정치 활동을 하는 건 자연스럽게도 명백하다. 선거 기간 동안에 이런 단체들을 어떻게 동원하고 회원들이 야당의 정치 조직을 떠나도록 강요하는지는 누구나 알고 있다. 군사회는 집회 장소에서 계급 의식을 지닌 노동자들을 추방하고 왕에 대한 충성을 드러낸 건 언급할만 하다. 앞에서 제시할 두 가지 신선한 사실은 다음과 같다. (1) 190910월에 찍은 전직 16사단 군인 협회인 뒤스부르크 비크(Duisburg Beek) 육군 사단은 190610월 광부들의 집회를 위해 빌려준 뒤스부르크(Duisburg)의 카이저호프(호텔)를 불매 운동하기로 한 결정과 (2) 집회장을 빌려주고 노동자들을 호텔을 사용하도록 허락한 호텔 주인을 작센의 (Saxony)의 군사회에서 추방한 사실이다.52) 노동자들이 잘 조직된 작은 마을에서도 바람이 세차게 부는 수단들로 맞서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이 범주에 속하는 소재들은 소규모로 싸우는데 사용하고자 체계적으로 수집할만 하다.

 


평화를 위협하는 군국주의

 

민족주의 모순에는 인구 증가로 인한 국가 확장의 필요, 자연적으로 재산을 보유한 토지의 합병 필요, 국가적 재산인 지배 계급의 재산을 늘리고, 그리고 국가를 자급자족으로 전환해서 구성원을 자급자족하려는 시도, 생산과 관련해서 자급자족하는 단위로 관세를 보호하는 정책을 확장하려는 자연스러운 경향들에는 현재에도 국제적인 정치에도 팽팽한 긴장을 생산해서 더 큰 규모의 국제적 분업에 직면해 성장을 줄어들게 한다는 사실에 직면한다. 한 국가 내에서 외국과의 연락을 촉진하는 필요, 일반적인 문화적 수준, 특히 정치적 발전 단계에서 대조에는 국제적인 정치적 긴장을 생산할 수 있다. 이미 살펴봤지만 현재에 국제 전쟁에 연루하게 하는 가장 중요한 정치적 긴장에는 세계 경제 내에서 개별적인 국가들의 경쟁, 세계 무역, 복잡한 세계 정책, 특히 식민지 정책으로 인해서 발생한다. 이런 긴장들을 비난할 주된 사람들에는 산업과 무역의 확장에만 흥미를 두는 권력자들이며, 이들은 전쟁의 성공에만 흥미를 둔다고 지적할 수 있다.

 

군국주의는 현저한 방법들로 정착한 상비군들의 존립에는 그 자체로도 국제 평화에 대한 위협이자 전쟁도 위협하는 독자적인 위험이다라는 사실에 눈을 감을 수 없다. 그리고 이런 끝없는 나사들인 군사적 부담을 증가할수록 군사적 우월을 확보하려는 풀리는 순간을 놓치지 않거나 군사력의 관계에서 불리한 변화를 막고자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군사 전투를 개시하는 사실과는 완전히 별개의 목적이다. 알다시피, 이런 성향은 모로코 전투에서 프랑스에 영향을 미치는데까지는 실패했지만 전쟁이 발발했다는 자체적인 사실보다는 전쟁이 발발한 시기를 결정한다. 그러나 상비군은 민병대보다 훨씬 적은 규모로도 현대적인 전사들의 사회적 계급, 즉 초기에 전쟁 훈련을 받은 계급, 전쟁에서 모험과 승진을 모색하는 정복자 계급에게 특권을 준다. 이 범주에는 전쟁의 사례에선 도끼를 갈고, 무기, 군수품, 전함, , 장비, 군복 소재, 운송 수단 및 식량보급을 공급하는 군수업자 계층들이 속한다. 물론 적은 규모지만 민병대가 거주하는 지역에도 존재한다. 이들 집단은 알고 보면국가에서 가장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동시에 전쟁과 평화에 대한 표면적인 결정을 내려야하는 권력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들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군국주의를 악용하여 처음에 획득한 영향력을 누런 황금으로 바꾸고 프롤레타리아의 시체를 이윤의 제단에 올려 대학살로 희생하고자 한다. 식민지를 지지하는 선동자들은 친애하는 조국을 위험하고 높은 비용이 드는 모험으로 몰아넣고, 선동자들은 해군을 지지하면서54) 같은 조국을 이외의 방식에서 구하고, 선동가들은 다시 큰 이득을 얻는다.

 

따라서 상비군들과 강경한 애국적인 군국주의 정신에 맞서 싸우는 수단들은 민족들의 평화에 대한 위험에도 맞서 싸운다는 걸 의미한다. “평화를 바란다면 전쟁을 대비하라는 오래된 속담에는 군국주의 국가에 둘러싸인 일부 개별적인 국가에 적용할 수 있지만, 사회민주주의가 직접 국제적으로 선전에 맞서는 자본주의 국가 전반에도 결코 적용할 수 없다. 그리고 이 속담에는 대조적으로 상비군을 수립해서 전쟁에 대비한다는 필요를 덜 제기하지만, “평화를 바란다면 전쟁에 대비하라는 이 속담의 반전에는 상비군을 투입하는 방법으로 평화를 보호한다는 건 전쟁을 매우 높게 유발할 정도다! 우리 시대에도 침략적인 경제와 정치적인 제국주의 사례에서도 상비군은 실제로도 전쟁을 준비하는 적합한 형태다.

 

 

 

그러나 민족들의 평화에는 국제 프롤레타리아트의 관계를 지나서, 인류의 문화적 관계에 부합하는 건 사실이지만, 모든 평화를 방해하는 자본주의적 기질들의 총합이자 본질에 해당하는 군국주의와의 투쟁에는 민족들 간의 불화를 부른다는 건 사실이다. 요컨대, 세계 대전을 심각하게 위협할 수 있는 건 프롤레타리아가 임금에 대한 자랑스러운 문화적 투쟁이며, 프롤레타리아는 자신들의 생명적인 관계이기도 한 임금을 위해서도 투쟁해야하며, 여타의 어느 계급들도 프롤레타리아의 임금에 대해선 큰 흥미를 두지 않으며 투쟁을 벌이는 건 프롤레타리아만큼 중요한 선의적인 몽상가들 중에서 그 규칙들을 입증하고자 한다.

 

군국주의는 자국의 평화를 방해하고 평범한 사람들에게 짐승으로 굴 뿐만이 아니라 무거운 경제적 부담을 심어주는 걸로는 모자라서 세금과 관세들의 의무적인 수단들에서 가해서 압박을 주고, 뵈르만(Woermanns), 피셔(Fischers), 폰 티펠스키스(von Tippelskirchs), 포드비엘스키스(Podbielskis) 회사 등에서 부정부패로 인해, 이미 계급적인 분리에서 오는 충분한 고통을 평범한 사람들이 겪는데도 사회적 계급들로 분열할 뿐만이 아니라, 군사적인 학대와 군사 정의로 인해서, 특히 모든 전진들의 정도에 강력하고 유력하게 제동을 걸면서 국내의 평화를 방해하고자 한다. 인류의 발전이 필수적이라고 보는 사람들에게, 군국주의의 존재는 그런 발전을 평화롭고 한결같이 이루는데 가장 큰 장애물이며, 그 사람에게 야생에 놓인 군국주의는 자본주의의 우상들을 위한 피에 붉은 황혼들과 마찬가지로 필요로 존재한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난제.

 

군국주의를 폐지하거나 성취할 수 있는 한으로 약화하는 건 해방을 위한 정치적 투쟁에서 생명이 걸린 문제다. 군국주의는 전투의 방법과 형태를 훼손하고, 그러므로 결정적으로 정치적 투쟁에도 영향을 미친다. 비무장한 사람들, 프롤레타리아 위에서 고도로 발전한 기술과 건조한 전략의 결과로, 군대의 엄청난 규모, 지역적으로 불리하게 계급적으로 분리한 결과,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지 가운데 경제력 관계의 결과로, 특히 전자에 불리한 관계의 결과로 군국주의는 군사적 우월들로 생존의 문제로 더욱 치닫고 있다. 이런 근거들만으로도 다가올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이전의 어느 혁명들보다도 성취하기가 훨씬 더 어려울 것이다. 부르주아 혁명에서 주된 혁명적 부르주아지는 좁은 의미에서 혁명이 발생하기 오래 전부터 경제적인 권력에 대한 주도권을 쥐고 있었고 부르주아지들에게 경제적으로 복종하는 대규모 계급이 있었으며 정치적 영향력 아래에서 부르주아지들은 군국주의를 화로에서 밤을 고르는 고양이 발로 사용한다는 걸, 부르주아지는 먼저 봉건 제도의 낡은 잡동사니들을 부수고 지스러기 더미로 내던지기 전에 먼저 한도 내에서 매수하는 반면에, 프롤레타리아는 굶주리고 알몸을 드러낸 재산의 도움으로 부르주아지들이 축적한 걸 정복해야한다는 걸 명심하는게 중요하다.

 


1. 매우 흥미롭지만 군사적 처벌에 대한 규정”(Regulations as to military punishments)을 참조하라

 

2. 군 복무 제도에서 병역의 의무를 기피한 탈영병들은 특히 먼 지역으로 안내한다. 프랑스는 명예로운 첫 20년 동안에 식민지 군대만으로 15,000명에 달하는 독일 탈영병들이 그들의 목숨을 잃어가는 동안에 비온빌(Vionville)의 살벌한 전투에서는 16,000명의 사망하고 부상을 입었다. - 다쿠미그 (Dacumig), 371쪽 등 참조.

 

3. 1885418일자 만테펠(Manteuffel)의 명령서에는 학대에는 부상을 입히고 명예를 파괴하고자 하며, 부하들을 학대하는 장교는 자신의 피를 흘리며 타락하므로 그 장교에게 충성과 용맹은 따를 수 없다. 한 마디로, 상관들은 상급자로 대장부터 중위까지 부하를 대하는 그대로 부하들은 따른다.”는 간파하는 내용을 드러냈다.

 

4. 그들은 여기서 고도로 심각한 상태”, "정교한 고문", "야만적이고 퇴보한 폭력적인 방관들"에 대해 좀처럼 신뢰할 수 없고”, 그런 장교들에게 훈련에서도 관리 체계를 거의 했어야한다고 밝혔다. 189528, 보르베르트(Vorwaerts)189026일 자로 이 사례에서도 적용하는 제국 법령을 지휘하는 장군들에게 발표했다. 1885418일 예나(Jena)와 만테펠(Manteuffel) 이후로 샤른호르스트-나이제나우(Scharnhorst-Gneisenau)의 법령과 마이닝엔(Meiningen)의 세습한 왕자의 법령에는 이외의 문제를 가져왔다.

 

5. 이를테면, 석면으로 된 실로 덮힌 철사가 끔찍한 부분을 했던 참혹한 그나이제나우 함선에서 발생한 유켄브로트(Eueckenbrodt)의 화재 사례를 참조해보자. 군인 고문관들에게 군사 교육자라는 별명으로 신랄하게 풍자했다. - 보르베르트(Vorwaerts), 1906925.

 

6. 190346일자 프랑크푸르터 차이퉁((Frankfurter Zeitung), 190434일부터 8일 까지의 제국의회 토론, 특히 베벨(Bebel), 레데부르(Ledebour), 뮐러 마이닝겐(Mueller Meiningen) 의원의 190356, 13, 14, 21일자 보르바르트 연설도 참조하라. 또한, 1903429일 발행된 육군 관보에 재게한 내각 명령은, 병사들의 고충을 제기하는 건 병사들의 의무가 아니라 권리임을 강조한다.

 

또한 1903529일 군사 주간지에 따르면 세습한 왕자는 내던지고 퇴역할 의무가 있다는 사실이 가장 고통스러운 감각을 부른다고 했다. 무슨 말이 필요한가?

 

7. 이외에도 프린츠 아렌베르그(Prinz Arenberg)와 아렌베르그 왕자”, 15쪽에 있으며, 그리고 다음, “군인을 학대하는 귀족에 대해서 이어진다.

 

8. 1891227, 카프리비는 병사 학대와 연관해서 교육받은 부사관은 잔인한 장교보다 우리에게 더 가치가 있다전자에는 비록 분개하더라도 자신의 기질에 휩쓸리는 일이 드물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납치할 수도 없고 교육받은 부사관들은 어디서 구할텐가?

 

9. 이를테면 1906128일 자 브란덴부르크 자이퉁(Brandenburger Zeitung)을 참조하라.

 

10. 독일은 주요한 강에 의해서 형성한 이 군사 분계선을 인정하지 않았다. 본문에서. 병사들의 학대의 영역에선 적어도, 독일의 협조와 화합은 실현했다.

 

11. 도미그(Dauemig), 370쪽 및 기타 출처를 참조.

 

12. 1906-7년 상비군 614,362, 1905-6년 해군, 40,672.

 

13. 독일 남서부 아프리카에서 싸우는 병사 한 사람 당으로 독일 제국은 연간 9,500 마르크(475파운드)를 지불했다.

 

14. 이를테면 프랑스에서는 1905년에 1,101,260,000 프랑(44,050,400파운드)을 지불했다. 1870년 이후로 프랑스는 거의 4천만 프랑(100,000,000파운드)을 군사적 목적으로 (식민지를 제외하고!) 군사 목적으로 지출했다.

 

15. 그러나 미국에서도 전쟁 및 해군의 부처에서만 총합 720,000,000달러의 예산 중 240,000,000 달러나 단독적으로 먹어치웠다.

 

16. 코니그스베르거 볼크스차이퉁(Koenigsberger Volkszeitung)의 한 편집자는 1906년 가을에 수확 기간 동안에 휴가 부여에 관한 법령에 수준 높은 비판을 감행해서 이 부대를 명예훼손했다는 혐의로 1906년 가을에 무거운 벌금을 부과했다.

 

17. 1906113일에 보르베르트(Vorwaerts)에서 이 부대를 지휘하던 장군의 답장을 참조하라.

 

18. 1903130일에 시작한 파업은 21일에 승리로 끝났습니다, 이미 1903310일에 파업 금지법을 의회 회의실에 상정했다. 46일에 총파업을 선언했고, 49일에는 파업 금지법은 표결에 부쳐졌다, 결국 413일 총파업은 좌절하고 마무리했다.

 

19. “병사들의 소책자”(The Manuel du Soldat), p. 9. 참조.

 

20. “병사들의 소책자”, p. 8. 참조.

 

21. “사회주의 운동”(Mouvement Socialiste), 5월에서 6, 1906

 

22. 한 예시로, 새로운 시간들(the temps Nouveaux), 19051216일 안코나, 타우리사노(Ancona, Taurisano) 항목 참조.

 

23. “그들의 조국”(Leur patrie), p. 99.

 

24. 이런 관계는 재크(Jaeckh’s)의 국제적”(International)”, p. 69에서 이어지며 참조.

 

25. 1905사회주의 운동” 1905, 91일에서 15일과 관계를 참조.

 

26. 세부적인 설명으로는 사회주의 운동”, 155호와 156, “사회주의자”(Vie Socialiste), 첫 해년, 15-18호를 참조. 190510-11월 샤를롱(Châlons)에서 열린 국민의회는 사회주의 분파의 의회 조사 심의요청을 거부하고 리모주(Limoges)와 콘스탄틴(Konstantin)의 보고서를 첨부한 포괄적인 결의안을 처리했다.

 

27. 템즈 누보(the temps Nouveaux), 19051216.

 

28. 오래 전에 파업 중인 군대(L' armeée aux grèves)라는 소책자는 큰 파급력이 일어났다.

 

29. 장 조레스가 창간한 1904인류”(Humanite), 1906109.

 

30. 좀바르트의 왜 미국에는 사회주의가 없는가”(Warum gibt es in den Vereinigten Staaten Keinen Sozialismus?) p.129 참조

 

31. 힐퀴트((Hillquitt), “미국 사회주의의 역사”, p. 211 참조. 주로 북미와 관련해서 여기에 사용했다.

 

32. 1890626일 시카고 무정부주의자들을 사면했던 바로 그 앳겔드(Atgeld).

 

33. 위와 관련해서 힐퀴트, 같은 책 p. 190쪽과 p. 209쪽 및 p. 236, 306쪽 이하 참조.

 

34. P. 314

 

35. P. 53

 

36. 1899519, 독일 황제는 그와 대기하던 대표단에게 만일 이 운동이 사회민주주의 과격파들을 배반한다고 인식하고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사람들을 불법 저항으로 선동한다면, 나는 가차 없이 엄격하게 개입할 것이며 내가 가진 권력을 사용하고자 할 것이다 그 권력은 위대하다고 언급했다. 프라이지니게 차이퉁(Freisinnige Zeitung)에 따르면 그는 당국에 대한 저항을 조금이라도 보인다면 모두 격추할 것이라고 추가적으로 언급했다.

 

37. 19069월 란다우(Landau)-카이저슬란턴(Kaiserslantern)에서 발생한 사건을 참조.

 

38. 1906128일자 사회민주주의지”(Sozialdemokratische) 21, 이와 관련해서 세자르(César) 목사에게 이름난 군사회의 덩컨(dunken) 난투극”.

 

39. 1906121일자 라이프치히 볼크자이퉁(Leipziger Volkszeitung)에 실린 작센( Saxony) 주 저격병과 소총병 군사회의 항소를 참조.

 

40. 이 범주로는 1903년 제국 의회 선거 기간 동안에 사회 민주당에서 선거인 목록들을 돕고자 선거인 목록 복사본들을 전시해서 관리하고 촉구한 슈판다우(Spandau)의 가게 주인들에 대한 군사적 불매 운동도 포함한다. 숙박시설 주인들은 전시된 명단을 강제로 철거했었다. 제국의회 회상록, 618, 1905-1907 참조.

 

41. 또한 190512월에 유긴들리히르 아르바이터(Jugindlicher Arbeiter)의 기록에 따르면 16세 소년 조한 후박(Johann Hubac)의 총격 사건을 참조.

 

42. 팔츠(Palatinate) 주에서 루드비히스하펜(Ludwigshaven)1887년 선거 전 일요일에 군대에 의해 사실상으로 점령했고, 사회민주당원들의 정신적인 존재들만이 소총이 난사하는 걸 막을 수 있었다. “만하임(Mannheim) 당 대회에 대한 각서(Memorandum to the Party Conference at Mannheim)”, 1906p.9 에서 이어진다. 18891212일 자 호헨로헤 회고록(Hohenlohe Memoirs)에 기록한 독일 황제의 기록 중에는 베를린 시의회에서 사회민주당이 다수당이 되면 사회민주당은 시민들을 약탈할 것이고, 황제는 궁전은 열리고 약탈을 하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제서야 시민들은 황제에게 용서를 애원하며 청할거라고진술한 대목은 이와 관련해 흥미롭다.

 

43. 이는 특히 1890년 메이데이 기념일 첫날에 적용했는데, “군사당의 군사적 선동자였던 1893914, “호헤니체 회고록에는 골 때리고 증오하는 사회민주당과의 피흘린 합의를 기회로 삼은데 만족했을 것이다. “소르게셔 브리프웨셀”(Sorgescher Briefwechsel) “소르게 통신”(The Sorge Correspondence), p. 334p. 337를 참조.

 

44. 1903년 실레지아(Silesia)의 상부에 로라후에트(Laurahuette)와 자브르체(Zabrze)에서 일어난 선거적 폭동을 참조.

 

45. 1906. 190643일 자 라이프치히 볼크자이퉁(Leipziger Volkszeitung)에서 공표한 1906121일자 재발포 명령서 참조.

  

46. 각주 이전에 색슨(Saxon)에서 재발포 명령서도 참조.

 

47. 알다시피, 함부르크 신문(Hamburger Nachrichten)은 이 계획을 18923월에 한 번 더 폭로했다.

 

48. 사회민주주의 선거자를 위한 핸드북(the Handbook for Social-Democracy Electors), 1903 참조. 독일 주 의회 선거인을 위한 핸드북(Handbook for Landtag Electors) 1903, 과 무엇보다도, 함부르크 신문(Hamburger Nachrichten), 크로이츠차이퉁(Kreuzzeitung), 도이체차이퉁(Deutsche Tageszeitung), 전단지로 발행한 선거인 안내서들은 19061213일 독일 제국의회 해산과 관련해서 이 사례에서 불리한 선거 결과를 대비해서 연관했다.

 

49. 19055, 독일 제국의회에서 순종적인 융커 콘 올덴부르크 야누샤우(Oldenburg Januschau)가 호소한 프로이센 무력에 대한 호소와 코니츠(Konitz)에서 열린 농민 연합”(Union of Agrarians) 지방 회의에서 영향력 있는 사설 고문단들의 모든 사건들에 대한 진심 어린 지지가 있었다.

 

50. 베를린 일간지(The Berliner Tageblatt)는 이 떠오른 사람에 대해 이렇게 묘사했다. “헬무트 폰 몰트케(Helmut von Moltke)는 단호한 반동주의자로 평판이 높으며, 군인 특유의 정직하고 즐거운 성질로 단련했으며 심지어 심령술을 배운다는 소문도 있었다. 그는 학설적인 사람이라는 의미에서가 아니지만 침착한 담력에 홀려있고, 소총을 쏘고 칼로 베는 정치에 종사할 준비를 마치고 적극적인 행동을 취하는 사람이다. 선동자들이 간절하게 원했던 성격들이 그 사람의 주위에 있다!”

 

51. 비극에서 풍자적인 요소도 부족해선 안 된다는 의미에서 1904년 튀링겐(Thuringia)에서 힐드부르하우젠(Hildburghausen)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공연한 희극을 언급하겠다.

 

기술 전문 학교의 학생들은 소란스러운 젊은 부르주아들에게 충분하게 관대하지 못했기 때문에 경찰들에게도 분노했다. 어느 날 밤에, “지나치게 들 떠 있던학생들은 경찰서를 습격했고, 유혈 사태는 없었지만 보병 중대가 출동해서 격퇴할 수밖에 없었다. 마이닝엔(Meiningen) 주 법원에서 일어난 이 사건의 속편도 상기해 볼 만 하다.

 

52. 이와 관련해서 작센 군사회 연합”(Union of the Military Societies of Saxony) 회장의 해명이 1906121일 자 라이프치히 알게마이네 차이퉁(Leipziger Volkszeitung)에 실렸다.

 

53. 또한 크로이츠차이퉁(Kreuzzeitung) 1906, 600호에 실린 폰 제플린(von Zeppelin) 소장의 기사를 참조.

 

54. 1906125일자 라이니쉬 베스트팔렌 차이퉁(Rheinisch Westfaelische Zeitung)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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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적 군국주의

 

서문

 

군국주의에서 특수한 자본가란 없다. 게다가, 적절하고 필수적인 자본주의적인 체제가 최종적인 모든 계급사회의 체제에선 적합하고 필수적이다. 자본주의는 다른 계급사회의 체제와 마찬가지로 군국주의를 위한 군국주의를 특수한 종류로 개발한다.1) 군국주의의 본질은 사회제도의 종류에 따른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끝나거나 분산의 합일이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를 수 있으며 개별적으로 끝난다. 이것은 군사조직을 비출 뿐만 아니라 군국주의에 따른 다른 결과에서도 군국주의가 임무를 수행할 때도 분명해진다.

 

일반적으로 군복무에 기반한 군대는 자본주의적 발전 단계에서 가장 적합하다. 비록 국민들로 구성된 군대이지만 인민군은 아니고 국민들에 대항하는 군대이거나 더욱 더 목적을 염두해두고 형성되며 주로 상비군이나 민병대로 나타난다.

 

상비군은 자본주의에서 단독적으로 특수한 특징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2) 가장 발전하고 심지어는 일반적인 형태이기도 하다. 이것은 나중에 언급하겠다.

 

해외의 적에 맞서는군국주의, 해군주의와 식민지적 군국주의. 전쟁의 가능성과 군비축소.

 

사회에서 자본주의적 질서의 군대들만이 아니라 다른 계급사회의 체제에서도 이중의 목적을 돕는다. 우선적으로 해외를 타격할 필연적인 국가기관이며 외부로부터의 위험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간단하게 군대는 필연적으로 국제적인 문제에 사용하거나 군사적 용어로 외부의 적에 맞선다.”

 

근래의 발전에서 이러한 군대의 수단은 폐지하지 않는다. 타당하게 자본주의적 전쟁이라는 몰트케의 말을 빌리자면 신의 세계가 명령한 근거”3)이기 때문이다. 확실히 유럽은 전쟁의 원인을 처분하려는 경향이 있다. 유럽에서 전쟁이 발생할 원인이 점차 덜해질 것임에도 불구하고 알자스 로랭의 열망으로 조직된 프랑스의 삼인방인 클레망소, 알자스 로랭, 피카르트는 동부유럽의 문제에 있는 범이슬람주의에도 불구하고 현재 러시아의 혁명에서 일어나고 있는 혁명에도 불구하고 반면에 문명화된 국가를 추구하려는 상업적이고 정치적인 목표가 확장될 수 있는 결과4)를 발생할 큰 위험을 얻는다. 이러한 마찰의 원인은 첫째로 동부 유럽의 문제와 범이슬람주의의 결정에서 내려진다. 세계정책 특히 식민지 정책의 결과로 부엘로는 독일의회의 보류 없이 19061114일에 승인된 5개의 세계정책5)은 같은 시기에 일어날 무수한 물리적 충돌6)이 일어날 가능성을 내포한다. 해군주의와 식민지적 군국주의라는 두 가지의 다른 종류의 군국주의를 선두에서 강하게 주장했다. 우리 독일인들은 발전의 두 가지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다.

 

 

해군주의, 또는 해군적인 군국주의와 군국주의의 쌍둥이 형제이다. 상륙할 수 있는 모든 역겹고 악의적인 특성이 이 후자에 있다. 현재의 군국주의보다 더 높은 수준의 세계전쟁에 대한 국제적인 위험의 원인할 뿐만 아니라 결과이기도 하다.

 

경건한 사람들과 기만자들이 우리를 설득하려고 할 때 이를테면 독일과 영국 사이의 긴장7)은 그저 언쟁, 적의적인 신문기자들의 선동, 외교적인 공연에서 나쁜 음악가들의 자랑 연설 때문에 오히려 우리가 더 잘 안다. 우리는 세계시장에서 영국과 독일이 언제나 경제적으로 발전한 필연적인 긴장관계인 무제한적인 자본주의적 발전과 국제적인 경쟁이라는 직접적인 결과라는 것을 안다. 쿠바를 둘러싼 스페인과 미국의 전쟁, 이탈리아의 아비시니아 전쟁, 영국의 트란스발 전쟁, 청일전쟁, 중국 강대국들의 모험, 러일전쟁은 특수한 조건과 정세가 다양하지만 공통적으론 팽창전쟁이라는 특징을 소유하한다. 티베트에서 러시아 백인의 페르시아와 아프카니스탄의 긴장관계를 1906년의 미국과 일본의 불일치와 마침내 1906128일의8) 프랑스와 스페인의 협정으로부터 장엄한 기록의 모로코에서 일어난 물리적 충돌과 함께 우리는 자본주의적 정책의 팽창과 식민지 정책이 세계평화의 조직이라는 무수한 함정을 둔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다. 전선에선 대부분 다양한 손을 거쳐가며 함정은 매우 쉽고 예측할 수 없는 폭발을 일으킨다.9) 세계를 분할하려는 분명한 시기가 오며 식민지적 소유의 모든 가능성들은 독점화를 진행할 것이다. 국가 사이의 식민지적 경쟁의 예선은 제한적이지만 카르텔과 트러스트 간의 자본가들 사이에서 사적 경쟁으로 성취될 수 있으며 우리는 인내를 가져야한다. 중국의 경제적이고 민족적인 자각은 단독적으로 먼 미래로 연기될 것이다.

 

군비축소로 계획된 모든 혐의들은 멍청하고, 빈말이고, 거짓된 시도일 뿐이며 이들은 헤이그 소동의 명예로운 작가로 황제의 도장을 얻을 것이다.

 

최근들어서 허황된 군비축소의 혐의들은 영국의 터무니없는 방식으로 터져나왔다. 할데인 전쟁 장관은 이 의도된 혐의의 옹호자였고 군대의 축소에 대한 그의 반대를 노골적으로 전달했으며 군국주의의 선동가로 입증되었다.10) 같은 시기에 백인 프랑스의 군사적 협정은 수면 위로 올렸고 같은 시간대에 두 번째 스웨덴에서 평화회담이 준비되어 해군을 증가시켰다. 미국11)과 일본은 전쟁예산을 늘렸다. 프랑스의 클레망소 부처에선 강한 육군과 해군의 필요성을 강조했고 28천만 12백만 달러(10,400,000 파운드)를 부담할 것을 요구했다.12) 함부르크의 나크리히테는 군사적인 군비확충이 국가의 신뢰로 오직 구원될 수 있음을 독일의 계급지배에 대한 국가적 정신의 진수였다. 그리고 독일의 국민들은 정부에 호의적이었다 게다가 전쟁비용의 증가를 요구했다.13) 이후에 자유당들조차도 열렬하게 지지했다.14) 이것으로부터 우리는 헤이그 법정의 중재원이던 데스트루넬 드 콩스탕이 언급한 순진한 말을 측정할 수 있다.15) 최근 기사에 따르면 군비확충의 제한에는 정치적 몽상가에게 군비축소를 위한 여름을 지내기 위해 단 한 마리의 제비도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그를 위한 제비들은 차고넘쳤다. 상당히 흥미로우며 이와는 대조적으로 노골적으로 무자비한 열강들과 회담에 참가했다. 두 번째 회담의 의제로 거론된 유용한 제안을 철회하고 군비축소의 문제에 대항했다.

 

군사적 영역에서 자본주의의 세 번째 분파인 식민지의 군국주의에 한 마디하겠다. 식민지 군대는 즉 상비된 식민지 군사들은 아마도 식민지의 민병대가 아니라 독일의 남서아프리카에서

계획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 민병대와는 전적으로 다르다. 대부분은 자주적인 영국의 식민지이며 영국을 위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며 다른 문명화된 국가에서도 중요성은 증가한다. 영국의 식민지 군대의 경우에는 식민지 국가의 적으로 억압하는 일을 수행하거나 식민지의 출신인지를 확인해서 감시하거나 이를테면 점령된 식민지의 외부적 적인 러시아에 맞서는 군대이다. 식민지를 소유한 여타의 국가에선 특히 미국과 독일에선16) 대부분 16세기에 독점적이었고 식민지 군대와 주요한 과업을 수비적인 파견대”, “외국인 군단”17)이라는 명칭 아래에 불행한 원주민을 농노와 자본주의의 노예로 이용했다. 그들이 조국을 방어하기를 바랄 때 대외의 정복자들과 착취자들은 무자비하게 쏴죽이고, 칼로 토막내거나 굶겨 죽이는 것은 군대의 의무였다. 식민지 군대는 유럽인구18)의 찌꺼기들과 연관해서 자본주의적 국가 중에서도 가장 야만적이고 가히 끔찍할 정도로 도구로만 취급했다. 열대적 광기를 타고나 열성적으로 저지르지 않은 범죄가 거의 없을 정도다.19) 워먼스, 포트비엘스키스, 레스트, 웰란스, 피터스, 아렌버그의 회사들. 독일에 관한 증거이자 목격했다. 우리는 식민지의 정책을 인식하는 결실을 얻었다.20) 식민지 정책은 기독교와 문명을 전파하기 위해 가려지거나 국가적 명예를 옹호하기 위해 식민지와 자본가의 이익과 관계하고 낙원을 동경하면서 착취하고 기만했다. 무방비한 살인과 강간은 소유물을 불태우고 재산을 강탈하고 털었으며21) 따라서 기독교와 문명에 조롱과 수치를 데려왔다. 인도와 통킹, 콩고, 독일령의 남서부 아프리카, 필리핀에선 피자로와 코르테즈의 주역들도 퇴색하게 했을 정도다.

 

프롤레타리아와 전쟁.

 

해외에서 적에 대항하는 군국주의의 기능을 국가기능이라 할 때 자본주의에서 지배되거나 학대받는 민족의 의지와 복지에 일치하는 이해관계를 의미하진 않는다. 전 세계의 프롤레타리아 계급에겐 이 정책에서 요구할만한 이점이 없다. 사실은 해외의 적들과 대항한 군국주의를 필요로하는 이익관계에 대해 대부분을 투쟁하고 반대한다. 이 정책은 직간접적으로 자본주의에서 착취계급의 이익관계에 복무한다. 난폭하거나 혼란스러운 생산적인 세계와 무분별하고 살인적인 자본주의 경쟁을 많거나 저개발민족을 향해 모든 문명의 의무를 굴복하거나 짓밟으며많거나 적게는 포장하려는 재주의 방식으로 애쓴다. 현실적으론 전쟁의 복잡한 문제를 상기해보면 제정신이 아닌 위험에서 우리 문화의 전반적인 구조를 구해낼 수 없다는 것에 이른다.

 

프롤레타리아는 마찬가지로 우리의 날인 산업적 호황을 대단히 환영한다. 하지만 평화로운 경제적 호황은 무장된 손이 없으며 군국주의와 해군주의가 없고 우리의 주먹과 삼지창도 없으며 식민지에서 경제정책의 야만성도 없이 합리적인 기반 위에서 국가를 수행하고 국제협약에 따라 의무와 문화적 관계가 조화를 이룬다면 말이다.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우리의 세계정책이 자국의 지배계급에게 닥친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곤경을 폭력의 수단으로 광범위한 규모의 혼동스럽고 어설프게 승리하려는 정책이라는 것을 안다. 한마디로 보나파르트주의자의 정책은

기만을 시도하고 방황으로 안내한다.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노동자의 적들이 온건한 쇼비니즘의 불에다가 스프를 조리하며 옹호한다는 것과 이미 1887년에 비스마르크가 일으킨 부도덕한 전쟁의 공포는 적절하게 가장 위험한 반동적인 이익관계를 증가시켰다. 최근에 공개된22) 고위 인사들의 작은 계획에는 승리한 군대가 자국으로 귀환하는 후에소란스럽고 애국적인 분위기에 있는 동안 독일국민들에게 독일의회의 선거권을 박탈하려는 목적을 안다.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이 정책으로 경제적 호황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고 특히 식민지의 정칙에서 모든 이익을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세습적 적인 자본주의에서 고용계급의 주머니로만 흘러간다는 것을 알고 있다.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지배계급의 임금노동자들에게 무거운 생의 희생을 강요한다는 것을 안다.23) 장애인들을 위한 비참한 생활보조금과 보상하기 위한 소유물과 참전용사의 자금을 도우며, 나뒹구는 장기기관과 전쟁이 치러진 후에 차여진 모든 것들. 프롤레타리아는 모든 전쟁에서 야만적이고 비열한 전쟁에 참가하려는 사람들에게 만연하고 문화가 수년 간 후퇴한다는 것을 안다.24)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싸우는 조국이 조국이 아니며 모든 국가에서 오직 하나의 진정한 적인 억압하고 착취한 자본주의 계급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안다. 모든 국익관계가 오직 국제적인 공동의 이해관계에 우선한다는 것을 안다.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전쟁에 고용될 정도로 자신의 형제와 동지들과 투쟁을 이끌 것이며 따라서 소유한 이익관계와 반하여 투쟁할 것이다. 계급의식을 가진 프롤레타리아는 군대의 국제적 위험과 전체적인 자본주의의 팽창정책에는 극도로 무관심하지만 왜 그런지 분명하게 적대적인 입장을 가지면서 왜 그러한지 분명하게 안다. 투쟁하는 것도 중요한 임무이다. 군국주의의 치아와 손톱인 계급과 이 과제를 더욱 인식하게 된다. 이것은 국제회의에서 보여준다. 프랑코 독일전쟁이 발발했을 때 독일과 프랑스 사회주의자 사이에서 우애의 징후들과 쿠바전쟁이 발발했을 때 스페인과 미국의 사회주의 사이의 우애의 징후들, 1904년 동아시아 전쟁이 발발했을 때 러시아와 일본 사회주의들 사이의 우애의 징후들. 1905년의 스웨덴 사회민주당이 스웨덴-노르웨이의 전쟁에서 총파업을 선언하기로 결정했고, 독일사회민주당이 870루피의 전쟁공제에 대해 취한 의회적인 태도는 모로코에서 증명되었다. 또한 러시아의 개입을 향한 프롤레타리아 계급의식을 가진 사람들의 태도에서도 증명되었다.

 

자국의 적에 맞서는 군국주의의 성격과 과업.

 

군국주의는 외로부터의 적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일 뿐만 아니라 계급모순이 더욱 확실해지고

다가오며 프롤레타리아의 계급의식이 성장함에 따라 군국주의에서 외부형태와 내부성격은 더욱 분명해진다.25) 이 과업은 사회의 지배적인 질서를 유지한다. 군국주의의 임무는 자본주의와 해방을 위한 계급투쟁의 반동을 지지한다. 군국주의는 여기서 계급투쟁의 단순한 도구로 분명해지고 지배계급의 손에 쥐어진 도구로 분명해진다. 군국주의는 필연적으로 계급의식의 발전을 지연한다. 치안과 정의로운 법정, 학교, 교회 함께 조력하면서 무엇보다도 소수를 위한 안전을 위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다수인 사람들의 계몽된 의지, 국가의 지배와 착취에서의 해방을 방해한다.

 

우리는 보다 덜도 더도 아닌 어느 것도 원하지 않는 현대의 군국주의와 맞선다. 살해자 적과 압제자의 앞잡이가 되는 무기의 순환에 정면으로 사회조직에서 나이에 따른 계급을 구분하려는 모든 인위적인 수단에서 노동자에게 감히 사람 대 사람으로 맞서서 강요에 대한 도전으로 맞선다. 동지, 친구, 부모, 형제, 자매와 아이들에게 그들이 소유한 과거와 미래를 어두운 먹구름을 끼게하는 강요에서 현대의 군국주의는 민주적이며 전제적이기를 원한다. 계몽적이고 기계적인 동시에 민족주의적이면서 국가에 적대적이기를 원한다. 군국주의는 민족주의와 심지어는 그 종교와도 맞선다.26) 직접적으로 독일을 예로 들자면 폴란드27), 알자스, 덴마크의 군국주의에 고용된 비-프롤레타리아 계급 가운데 맞선다.28) 물리적 충돌로 다수가 변화하기에 적합한 현상29)이라는 것을 잊어선 안 된다.

 

여러 가지 형태를 취할 수 있는 프로이센 독일의 군국주의는 자라서 기이한 꽃이 되었다.

독일에서 절반은 전제주의자 봉건적인 관료주의의 조건으로 프로이센 독일의 군국주의는

자본주의적 군국주의의 모든 종류에서 나쁘고 위험한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군국주의의

모범적인 모델은 현재 상태, 형태에서 군국주의의 체계성과 효과들이다.

 

비스마르크의 말을 빌리자면 아마 누구도 프로이센의 중위를 흉내낼 수 없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누구도 독일의 군국주의를 흉내낼 수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국가 내에서 국가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국가를 넘어선 국가가 된 프로이센 군국주의를 흉내낼 수 없었다.

 

 

참조

 

1. 베른슈타인이 190565일 사회주의자 지에서 현재의 군국주의 제도는 단지 상속한 유산일 뿐 그저 봉건적인 군주제에 가깝다고 말한 것은 틀렸다.

 

2. 러시아를 보라, 특수한 상황은 국내의 상황이 없어지지 않았으며 결과적으로 돕는 상황이 생겼다. 이를테면 고용된 군대들은 상비군들과 일반적인 군복무와 다른 형태로 기초한다. 15세기 이탈리아의 도시들에는 민병대가 있었다.

 

3. 188012월에 블론츨리에게 보낸 잘 알려진 편지에서 그는 영구적 평화는 꿈이며 기분 좋은 것은 아니라고 했으며 전쟁은 운명적 세계의 지시를 전달한다고 했다. 전쟁은 숭고한 남성의 가치를 수면 위로 올렸으며 즉, 용기와 금욕, 한 사람의 의무에 대한 충실함과 한 사람의 생애서 위험에 따른 희생을 준비하게 했다. 세상에 전쟁이 없이는 유물론은 고여버렸다. 몇 주전에 몰티케는 다음과 같이 썼다. “각 전쟁은 국가적 재앙이다.” (전집, pp.193.200) 1841년에 아우스버그의 알레그메의 차이퉁지에선 우리는 자주 일반적인 유럽의 평화에 대한 견해를 지지했고 매우 조롱했다.

 

4. 휴블러의 표에 따르면 세계 수출 무역의 총 가치는 189175,224만 파운드 (361,200만 파운드)에서 1905109,000만 파운드 (5450만 파운드)로 증가했다.

 

5. “오늘날 우리의 입장을 복잡하고 어렵게 만드는 것은 우리의 해외의 목적과 이익관계이라고 말했다.

 

6. 이 주제에 대한 몰트케의 견해는 매우 까다로웠다. 그에 의하면 내각전쟁은 과거의 일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는 정당 지도자들을 전쟁의 위험하고 범죄적인 도발자로 간주한다. 당 지도부와 증권거래소! 확실하지만 때때로 그는 통찰력이 있다.

 

7. “1910년의 침략이라는 제목의 영국 국수주의의 기이한 출현이 특징이다.

8. 1906년 모로코 분쟁의 결과로 프랑스는 동부 국경의 확보를 위해 1억 파운드 (500만 파운드) 이상을 지출했다.

 

9. 190612월 초 예산위원회의 토론을 보라. 함부르크의 해운 이익을 대변하는 부관인 셈러가 하메손의 방법으로 페르난도 포를 포획하려는 계획에 대해 논의했다. 그러나 그 계획은 결코 충분히 설명하지 않았다.

 

10. 19061129일 크뢰즈자이퉁(Kreuzzeitung)"보편적인 군복무는 영국인들에게 전쟁의 심각성을 더 잘 이해하도록 교육시킬 것"이라는 이유로 후회하는 보편적 군복무를 당분간 반대한다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사실, 독일에서, Kreuzzeitung의 기사들의 희망에 따라, 전쟁과 평화에 대한 결정은 사람들에게 있는 동안, 사람들에게 생명과 재산의 희생을 강요하는 것이 보편적인 군복무의 유일한 목적입니다. 전쟁의 심각성을 가장 덜 느끼는 사람들의 손 그들은 심지어 외국에 있는 민주주의를 볼 때 민주주의를 감상할 줄도 안다.

 

11. 루스벨트가 1906124일에 보낸 지시를 보라.

 

12. 주로 모로코 분쟁에 의해 정당화된다.

 

13. 해군은 2,450만 파운드 (1,250,000 파운드), 육군은 5,100만 파운드 (2,500,000 파운드), 이자는 700만 파운드 (350,000 파운드)이며, 1906-7년 예산 대비 약 8,300만 파운드 (4,140,000 파운드)가 증가했습니다! 무제한적인 해군 군비의 향후 전망은 19061221일 라이히스보텐에서 영감을 받은 기사를 통해 알 수 있다. 게다가 막대한 식민지 전쟁 지출(중국 원정, 454백만 파운드(245십만 파운드), 동아프리카는 2백만 달러(10만 파운드)가 증가했다. 19061213, 지출 비준 요구는 이제 갈등과 국가 해체를 야기했다.

 

14. 이를테면 19061027일의 베를린 타페블라트를 보라. 특히 19061213일 아블라스에 의해 도입된 의심스러운 법안과 1907125일 자유당의 선거 전쟁 외침이 있었다.

 

15. 1906101일 라 리뷰 "실제로 달성한 결과"는 다음과 같다. 레뷰의 편집자가 언급한 군축운동은 그의 깊은 비밀로 남아있다.

 

16. 190610Dernburg"Memorial"에 따르면, 그의 식민지 지출은 대차대조표에 그 사실을 은폐하려는 모든 시도에도 불구하고 압도적으로 군사적 성격을 띤다.

 

17. 19001212일 이후, 프랑스는 정규적인 식민지 군대를 가지고 있으며, 가장 끔찍한 실험들이 이루어지고 있다: 1906127일 햄버거 특파원 (621), 페이지 30에 주목하라. 독일에서 그들은 그러한 군대를 소집하기 위해 바쁘다. 그들은 그 방향으로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

 

18. 비데 페로즈, "인도차이나의 프랑스와 일본"; 파민, "" 식민지"; E. 은둔의 "페트리오티즘과 식민지화"; Daumig's 슐라크토퍼 데 밀리타리스무스, 노이 자이트, 99/00, 페이지 365;

19. “아프리카의 전투” p. 369. 1906123일 독일 제국의 로렌 부대표를 위한 추가 사항이다.

 

20. 징계제도는 또한 특히 심각한 형태의 잔혹성을 드러낸다. 프랑스 외인부대 및 바타일롱 다프리크 대미그 L.C.를 보라.

 

21. 이 위선적이고 부끄러운 망토는 이제 벗어났다, 모든 것들과 함께. 희망할 만한 냉소주의. 월간지 다이에 지비(G.B. 독일 코오롱엔 (190610): "우리는 식민지에 있는 사람들의 기독교인을 만들고 싶지 않습니다. 그들은 단지 우리를 위해 일하도록 되어 있을 뿐입니다. 인간성에 대한 이 어리석은 수군거림은 그야말로 우스꽝스럽다. 독일인의 감정은 피터스 같은 사람을 빼앗아갔다. 또한 하인리히 하르테르는 19061221"사절단의 의무는 있는 그대로의 조건에 적응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것은 중앙당과 정부 사이의 식민지 정책에 관한 논쟁의 핵심을 형성하고 있으며, 이것만으로도 상인 더른부르크가 (가톨릭) 센터가 소위 세컨더리 정부에 대한 맹렬한 공격을 이해할 수 있다. 여기서도, 신성한 "알렉산더스의 대답"은 외국에도 적합하다. 크뢰즈자이퉁 (929, 1906)은 미국에 다음과 같이 설교한다: "인디언의 모든 부족의 몰살은 너무 비인간적이고 비기독교적이어서 어떤 상황에서도 정당성을 찾을 수 없다. "존재하느냐 마느냐"의 경우, 이웃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사람은 식민지가 기독교인들을 소유한다는 개념에 따라 "전체 부족들을 절멸"할 수도 있다.

 

21. 1128일 독일 국가 회의에서 기억에 남는 토론을 참조. 1906124, “농양이 완화되었다.

 

22. 1906113일 햄버거 나크리히텐을 참조.

 

23. 전쟁에서 인간의 삶의 손실 1799-1904에서(떨어져 러일 전쟁에서)에 대해 15수백만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했다.

 

24. 몰트케(Moltke), 페이지 9, 각주 *, 그리고 완전한 작품들, 288장에서는 전쟁이 도덕성과 효율의 수준을 높이고, 특히 도덕적인 에너지를 유발하도록 되어 있다.

 

25. 내부 질서를 강화해야 하는 과제는 자본주의뿐만 아니라 계급 사회의 모든 시스템에서 군국주의의 몫으로 떨어진다.

 

26. 190612월 분쟁 동안 문화를 위한 프랑스의 투쟁 참조.

 

27. 1903Upper Silesia에서 일어난 선거 폭동 참조.

 

28. 푸흐스뮬을 참조.

 

29. 자세한 내용은 자세한 내용은 챕터 V, 파트 vide에 나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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