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일각에서는 입시 제도에 대한 비판은 많다. 그리고 의무 교육으로 해당하는 초중고를 꼭 나와야만 시험을 치를 수 있고, 대학을 나오려면 시험을 쳐야만 한다는 전제가 늘 붙는다. 검정 고시를 제외한 오래된 편견, 야간 자율 학습이라는 학생들에게 강요하던 남아 있는 시험들도, 매우 낡은  방식으로 학생들을 가르치려 들었다. 성적에서 멀리 벗어났거나, 진로를 찾지 못한 학생들을 두고는 방황한다고 판단하거나, 자신의 의견을 표할 줄 몰라서, 태도가 불순하다는 단 하나로, 교육은 훈육으로 제어해왔다. 그리고 사실을 감추고, 은폐하는 교육을 배웠으므로, 체제에 대한 비판을 제시하지도 못한 채로 교육 운동은 까막눈을 고치는 운동으로만, 고작 계몽으로만 늘 끝나고는 만다.   


사교육 시장에서도, 자본가들은 선생을 겸해서 학생들에게 자본만이 옳다는 생각을 가르치고, 학생들에 대한 차별과 편견을 조장하는 발언들도 자주 가시화됐다. 교육 제도란 늘 정권의 하수인이었고, 소수 선생들만 늘 발언을 했고, 또 요구했다. 대학교에 들어가도, 차기 교수로 임용되고자, 연구 경쟁, 연구 비리, 성폭행 등 학교는 더 이상 배우는 곳이 아니었고, 가르침을 배울 수 있는 곳도 아니다. 교수들은 교재를 가지고, 학생들에게 배움을 나누고자 하지만, 그러한 교재들도, 모두 자본주의라는 제도로부터 낡은 수업들과 취업에 대한 상담과 의사를 묻고자, 단지 '형식적인' 수업이었으므로, 아무리 토론이라는 '선진적인' 수업 방식이라고 하더라도, 학생들은 대학교를 4년제 도서관으로 나오고, 졸업을 위한 이수 과정으로도, 과도한 외국어, 쓸모 없는 논문들에 대한 자격을 부여하고는, 체제로부터 기여할 수 있는 '인재'들을 한데 모아, '융합'해서 뒤섞는다. 


국가는 의무 교육을 행하지만, 이면에는 자본가들로부터 답습한 착취라는 차별을 배우고, 계급을 보지도 못하고, 오직 안전한 사회에 대한 경제적인 울타리만 존재한다고 보거나, 아무도 혁명에 대한 실천을 말하지도 않고, 마르크스를 무용하다고만 말한 까닭은 무엇이던가. 바로 자본주의 아래로부터 수행된 교육 때문이다. 그리고 즐거운 보람이나 하나 없는, 노동이라는 대가로부터 생존만이 남은 취직이라는 '의무 교육'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가난한 프롤레타리아트마저, '형식적인' 시험 대상으로만 다룬다.    


군대. 


군부심이란, 군대를 다녀오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또 다른 차별이다. 그리고 심화된 계급으로 차별하는 법을 배운다. 그곳에서는 모든 것이 은폐된다. 사실도, 진실도, 진리마저도, 전역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그리고 오랫동안 군생활을 복무했다는 이유라는 건, 단지 애국심만을 위해 국가로부터 봉사한다는 낡은 '봉건적인' 계급이란 말도, 군대에서는 여러 폭행과 협박을 당하고, 총과 칼로, 제국주의로부터 국가에 종사한다. 여러 경찰들도 학살과 시위를 진압하고자 입막음하고, 시위자를 향해서는 적이라고 부른다. 정치적인 자본가들은 말한다. 군대가 있어 튼튼하다고. 그러나 제국 간 전쟁에서도 죽으면 남의 새끼들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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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주아 큰 자본가라는 아버지, 프티부르주아 작은 소시민이라는 어머니. 


자본주의 논리이므로. 거꾸로도 같다. 자산을 가지고 있는 소시민들은, 부르주아지를 지지할 수 있다. 대체로는 자녀들에게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적절한 환경, 장기적인 경제 전망을 고려해서 판단한다. 훗날 법적으로는 상속세를 부과하기도 한다. 자본가들은 '로펌'을 가졌고, 전문 변호인단들로 구성한다. 큰 이혼이나 파혼이 아닌 이상으로는, 법적인 다툼들이라는 여러 소문이라는 '스캔들', 작은 소문이라는, '가쉽'거리를 짧게 다루는 건 바로 언론들이다. 여기서 주류나, 비주류 언론이라는 매체로는 구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전체 언론들은 바로 상당한 자본을 이미 소유하고 있고 또, 내부 경쟁이라는 심화된 양상으로도 수익을 창출하고자, 광고를 위해 자극적인 보도를 해왔기 때문이다. 


존 리드를 읽어 본 독자라면, 러시아 혁명을 취재한 인물이 다름 아닌, 미국인이었다는 점에서, 받아들이기 힘들어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세계적으로도, 러시아 혁명은, 외부 기사를 쓰는 언론인들에게도, 큰 흥미를 보였기 때문이다. 대단한 일이었고, 러시아에서 전 인민들은 모두, 혁명을 위해 헌신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바로 <세계를 뒤흔든 열흘>을 쓴 바로 현장 보도였기 때문이다. 레닌도 존 리드를 알았고, 미국인이었음에도, 그를 존중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미국인이지만, 단지 사회주의를 지지했기 때문이 아니라, 미국이 아닌, 여러 국가들로부터 일어날 수 있는 혁명을 취재했고, 또한 러시아 혁명을 지지했기 때문이다. 비슷한 사례지만, 결 다른 언론인도 있다. 바로 에드거 스노우다. 그는 마오를 취재했고, <중국의 붉은 별>이라는 기사를 작성했다. 그러나 <중국의 붉은 별>은 홍위병에 대한 우호적인 시각을 보이거나, 스탈린주의라는 지도 아래에서 마오주의를 지지하는 흔적들도 자주 보인다. 그래서 해당 저서는 마오주의에 대한 비판 없이 교조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위험도 같이 보인다. 존 리드, 에드거 스노우는 모두 미국인들이다. 그러나 사회주의를 지지했다. 그리고 존 리드는 정확하게 말하자면, 사회민주주의도 지지했다. 트로츠키는 멕시코로 갔지만, 미국인들과 자주 서신이나 연락을 교환했고, 스탈린 첩자에게 암살 당하기 전까지도, 미국에서도 혁명은 일어날 수 있다고 봤다. 단지 내전이라는 양상이 아니라, 트로츠키는 프롤레타리아트라는 뿌리를 여러 인종들로부터 봤기 때문이다. 그리고 소수 민족에 대한 탄압을 역사로도 다룰 줄 알았다. 트로츠키 이론들에 대한 비판들은 뒤로 하더라도, 혁명에 대한 전망으로는 앞서 갔다고 말할 수 있다. 영국 이전에도 미국은 바로 혁명 국가로 일어날 수 있는 큰 전망을 가진 곳이었다. 그러나 곧 자본가들이 몰려든 제국주의를 완성한 국가라는 걸 증명했다.

   

한국은 미국과 많은 관계를 맺어왔고, 또 서구식을 일부 받아들이더라도, 자국 뿌리를 잃고자 하지 않았다. 뼈 아픈 분단이라는 역사를 가진, 스탈린주의 대 자본주의라는 사상 대립으로부터도, 미국은 자본가들만의 국가를 만들고자 탄압도 했다. 그리고 소수 민족들을 제거하고, 식민지를 건설한 드넓은 대륙으로 걸친 유럽인들을 모방한 국가이기도 했다. 인종 우월주의가 만들어진 국가들도 다름 아닌 '건강한' 서구인들로부터 왕성한 활동지이자, 활력소였기 때문에, 링컨의 노예들은 아직도 계급 투쟁이라는 역사를 되풀이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시민들은 때로는 계층으로는 중간층, 계급으로는 중간 계급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러나 배부른 자본가들은 자신들의 자녀들에게 상속할 재산과 유산을 남기고자 하듯이, 소시민들은 배부른 자본가들로부터, 세월이 가기 전에도, 남길 재산과 유산을 먼저 걱정한다. 그들의 자녀들은 가난과 배고픔을 모른다. 그리고 교육받지 못한 채로 전쟁을 지지한다. 부모는 그들 모두에게 말한다. 너희들은 다음에도 커서, 똑같은 사람으로 말할 것이냐고. 그러나 이윽고 자녀들은 한때는 프롤레타리아트였던 부모에게 배운다. 도대체 똑같이 크고, 똑같은 교육을 받아서, 몸만 자랐느냐고.     


신성 가족. 


마르크스와 엥겔스도 다같이 말했던 신성 가족에서 말하고자 한 본모습이란 바로 그들을 그려낸다. 그래서 엥겔스와 구상을 두고는 다투기도 했다. 덕분에 신성 가족은 자본가에서 지배가로 부상하기까지 부르주아지에 대한 모습을 잘 보여주고 쓴 저작이다. <신성 가족>은 때로 현대로는 '재벌'에 대한 사실을 파악하고자, 산업화된 구조로부터 자본주의가 매우 종교적이라는 사실을 강조했다. 말 그래도 이윤과 축적으로부터 보여진 그들을 잘 다루기 때문이다. 언론에서도 다루는 큰 법과 소송들도 마찬가지로, 우리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연류된 큰 인물들과 조연들을 무대로 이끌고, 또 이루기 때문이다. 


매우 '화목한' 미국식 안방 극장인 셈이다. 그리고 노동 가족들의 잔인한 희생으로 곁들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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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을 살짝 정리했다. 내게도 여유 있는 자금이 있더라면, 아마 조용하게 방에서 안빈낙도를 즐겼겠다. 그러나 그러한 여유란 좀 더 가진 사람들에게 누리는 혜택과도 같다. 정리를 하다가, 힘들어서 <자본론>을 읽었다. 다시 읽어보니, 마르크스는 틀린 말을 하지 않았다. 여러 경제학자들은 자본주의는 오랫동안, 계속할 수 있는 동력이라는 운동하는 힘으로 작동하고, 또 발전한다고 봤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그러한 자본주의 운동마저 여러 한계를 보인다고 지적한다. 


대체로는 국내에서는 공황 이론을 전개하거나, 또 많이 다뤘다. 왜냐하면 우리나라는 내적인 경제 법칙보다는 외부 자본들로부터 많이 의존해왔기 때문에, 국내 총 생산량으로는 해외와 비교해봐도 택도 없기 때문이다. 또한 공황 이론에서는 노동 생산량만이 아닌 무역으로부터 거래할 수 있는 장기적인 경제 호황기를 내세우기도 했으므로, 실제로는 경제적인 안정기로 돌입하고 있다는 경제학자들의 지적들도 많다. 


그러나 한 가지, 덧붙이고 싶다. 노동력이 실제로 줄어들고 있는데도, 과연 그러한 진단들도 옳을까. 아무리 마르크스주의 진영에서도 서로 정치관은 달랐어도 하나는 통일된 의견으로 모아졌던 것 같다. 특히 만델, 그로스만도 마찬가지로 그러한 자본을 소유한 사람들도 겉으로는 많아도, 지출이나 부채들도 상당하다는 지적들을 해왔다. 정치경제학파는 해외 시장으로부터, 은행들은 비교적 규모 면에서도 넓고, 안전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스미스, 리카도, 케인스도 빼먹은 사실이 있으니, 바로 자본은 파산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자국 생산량에 비해 수입 의존도가 매우 높은 국가들일수록, 외세 의존도도 매우 크다. 혁명 국가로는 반비례하지만, 우리는 이론이 아니라, 실천을 다루므로, 실제로 노동자들에게 온 타격이 매우 컸다는 해석이기도 하다. 그리고 국내 기업인 '현대'에서도 임금 문제로 투쟁한 사건도 있었다. 


더는 읽을 수 없는 미련이라는 쇠사슬이라는 짐도 풀고, 이제는 더욱 새롭게 증명하겠다.  

파산하는 자본 앞에서도, 더 나은 삶과 '일용할 양식'을 감사가 아니라 요구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오늘도 '노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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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핵을 기념하는 촛불이 아니라 시체를 불태울 횃불이 더 필요하다고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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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가 끝났다. 투표를 마치고 돌아오는 미국 사람들은 서로 다른 입장에서 환호하고, 

또 아쉬워했다. 미국에서는 당선된 새로운 지배인을 두고는 전쟁을 종식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국기를 휘날린다. 어느 미국인들은 자택 앞에 국기를 붙여 놓기도 

했다. 선거를 마치더라도, 저 '찬란한' 미국 국기는 늘 휘날리기 때문이다. 


미국 노동자들도, 한 사람으로 투표한다. 그러나 결과가 말해주듯, 말이란 그저 겉으로 나타나는 온갖 포장된 언어일 뿐이라는 걸 지배자들은 잘 보여준다. 선거는 끝났어도,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잊는다. 왜냐하면, 자본가들을 매수하고, 여러 투자 은행들로부터 끌어모은 자본금으로 선거회를 꾸려 나갔다. 자본가들은 자신들에게 유리한 투자자라는 지배자를 두고 노동 계급을 더욱 휘어잡고자 한다. 


2017년 국내 연설에서도 그랬다. 지배자는 국내 국회로부터 들어와 연설했을 때도, 한국 경제는 미국이 뒷받침한다는 사실을 강조했고, 한국인들은 번지르르한 말에 또 속을 수밖에는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단지 부유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거를 하면서도 워낙 많은 선전과 선동들도 그들의 민주주의라는 부르주아지를 위한 선거임을 잊는다. 그러나 미국에서 일부 사회주의 운동가들은 비판을 뒤로하고, 할 수 없는 선택을 치르기도 했다. 국내로는 벌써 겪은 상황이었고, 유독 폭도들은 선거에 반발할 때면 백악관을 점거하기도 했다. 때로는 폭동이란 분개한 결과에서 자국인들은 무너지는 국가라는 두려움 속에서도 지내야만 했다. 


자본가들 아래에서 노동 계급들은 선거에서도 매우 취약하다. 그리고 여러 매수한 자본가와 계약에서 누구를 지지할지는 뻔했다. 아무리 가치 있는 말을 하더라도, 노동 계급들에게는 노동 현실이라는 차선을 택한다. 그리고 선택에 앞서 자본금이 있는 사람을 택하기 때문이다. 바로 자본주의 경제이기 때문에, 선거란 선거인단, 선거구와는 무관하게 움직일 수 있었고, 또 트러스트와 로비라는 미국에서는 거대한 기업가들로부터 좌지우지되고 있다는 사실을 매우 잘 보여준 투표 결과였을 뿐이다. 


그러나 그들로부터 안전망을 확보한 일부 노동 계급들로는 투쟁이 끝났다고 단언 할지라도, 매우 극소수인 무산 계급들로는 선거에서 투표란 더 이상 전략이나 전술이 아닌, 혁명에 대한 선택이라는 작은 뒷걸음으로 보일 뿐이라는 점으로는 다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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