꾸준하게 말하지만 <국가와 혁명>을 읽어본 사람들이라면 뜻에 대해서도 숙고해 볼 필요는 있다고 본다. 모든 저작을 곱씹어 볼 때도, 우리는 <국가와 혁명>은 꼭 읽어봐야 할 저작이라고 자신 있게 말해본다. 마찬가지로 <프랑스 내전>에서도 언급했던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에 대한 물음이란 곧 코뮌에 대한 질문과도 일치하기 때문이다. 바로 앞서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민주주의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던졌다. 그리고 다음 질문이란 민주주의를 정의 내리지도 못하고, 추상적으로만 아는 민주주의 수호가 도대체 무슨 소용인가라는 점이다. 그렇다. 여기서 추상이라고 한다면 대중들은 민주주의에 대해 관념적으로만 뭉뚱그렸거나, 또는 엉뚱하게도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그리고 간접적인 대의 민주주의를 직접 민주주의와 

뒤섞어 놓고는 알아서 혼동하기도 한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트 민주주의는 곧 직접 참가를 바라는 민주주의를 요구한다. 그리고 지식인 계급만이 아니라, 인민 모두에 대한 참가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 더 많은 사람들을 포괄할 수 있고, 소수 지식인들로부터 사고됐던 민주 요구를 옮겨와 대중 모두에게도 집중할 수 있는 민주 제도를 구비하고자 더욱 노력해왔다. 그러나 여기서 대중 요구에만 머물지도 않는다. 그들은 '시민'이라 말하지만 우리는 아직도 투쟁하므로, 우리는 더 이상 한 나라 속에만 갇힌 국민도 아닌 여러 나라 속 인민이자 또한 더 많은, 더 나은 요구를 해오고 있기 때문이다. 


여태까지 우리는 추상적인 사상에서만 머물 수도 없었다. 그리고 맹동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언제든 요구한다. 또한 혁명으로부터 늘 배운다. 우리는 노동 계급을 만나고 어울려서 학습한다. 무엇을. 바로 계급 투쟁을 배운다. 그리고 혁명 이론을 학습하고, 곧 학습으로만 머물지도 않고 언제든 조직할 줄 안다. 놓치기 쉽지만 직접 민주주의란 전 세계 국민들도 인민 참가를 전제로 한다. 그리고 단지 민주주의를 더욱 집중한다고 해서 나라를 포기한다는 협소하거나, 좁은 의미도 아니다. 오히려 더욱 폭 넓다고 본다. 그렇다고 우리는 무산 운동이라는 대의를 저버리지도 않고자 노력한다. 기존 부르주아 의회 정치에 가담했던 외국인과 장애인들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모두 아무런 포부를 내세우지도, 거부하고 싶어도 어쩔 수 없는 체제로부터 순종을 보노라면 처참하다고는 말할 수 있다. 덕분에 추진하던 포괄적인 차별금지법 제정도 미뤄졌다. 여러 요구들도 담길 수 있는 대표하는 법안이었다.


이번 집회에서는 개인으로 왔지만, 조직을 꾸리고자 하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그리고 각자 방식대로, 나름대로 조직에 대한 염원이라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프롤레타리아트는 어떤 조직을 바라는가. 단지 미약한 자생적인 조직을 말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군중에서 모여진 대중들도 바로 질서 잡힌 조직도 아닌 언제든 탈퇴는 손 쉽고, 강제도 없는 강령 조직이자 곧 낡고 오래된 관료에 대한 불만에서부터 터져나오고 있다고 본다. 전쟁이라는 얼룩진 폭력에 몰두하느라 놓치기 쉬운 점이란 바로 프롤레타리아트들은 실천으로 말하고 싶어한다. 그리고 더욱 많은 사람들은 부르주아지가 일으키고자 한 범죄들로부터도 곧 효율적일 줄 알았던 낡은 전쟁에 대한 경제적 손실을 목도하고 있다. 어쩌면 쉬운 말일지도 모르지만, 돈만이 아니라 재물마저 축적하는 부르주아 일당들로부터 잔존하는 체제를 무너뜨리고 혁명으로 보답하고자 노력하는 참된 사람들로는 다음으로 말해주는 말도 곰곰이는 곱씹어본다.


'노동 계급에게는 더 이상 국가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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