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구조 아닌 마르크스.
프랑스에서 일어난 68 운동은 과연 혁명이었는가. 어째서 재벌 철학과 함께했는가.
구조주의.
만개한 유럽 마르크스주의라고 불리던 기회주의이자, 수정주의 조류들도 식는다. 여태까지 부르주아라는 재벌로부터 전개한 민주주의가 우월하다고 선전하고, 또한 선동하고자 여러 논쟁들과 논의를 죄다 구조주의로 뒤바꾼다. 부르주아에게 공산주의도 실제로는 무산 계급 없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아류이다. 유럽 모든 학계에서는 이와 같은 관념 철학이라는 망령이란 바로 부르주아 지식인들, 재벌과 자본가를 위해 그리고 은밀하게 자본주의를 또한 옹호하고 결탁한 마르크스주의를 벗삼아서 말이다. 그러나 앞으로는 이전과 같이 힘 없는 중간 계급이라는 무산 혁명을 주도한다고 장담한다면 큰 오산이다. 제멋대로 해석하는 부르주아 재벌들에게 민주주의란 사회 구조와 체제를 따라 자본가를 고용하거나, 개량하고 개혁해서 변혁한다고 아직도 믿기 때문이다. 따라서 처음부터 마르크스와 소련에 대한 전방위적인 해석으로만 치장해서 부르주아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자본주의를 추상적으로만 안다. 물론 그들만이 쓰는 용어로 온갖 외국어를 뒤섞고 쉽게 풀이하지도 못한 채로 뒤얽히고, 슬쩍 바꾸고 고치기만 해서는 마르크스를 실천해서 꾸준하게 읽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의 노력이란 다름 아닌 머릿 속으로만 드러난 관념적인 헛수고일 뿐이라는 점이고, 또한 거짓말이라는 점을 이제는 알아야만 하겠다.
정신분석학.
심리학은 퇴보했다. 그리고 부르주아 가운데 학자들도 있다. 마르크스주의는 모든 학문 영역에서는 프로이트, 라캉으로부터 새롭지도 아니고, 유물론도 아니고, 아주 낡고 오래된 자본주의를 복잡하게 비꼬아서 비평으로 방관해서 해석하고 보존하는 부르주아 이론이다. 재벌 학자들이 말하는 마르크스주의란 훨씬 고전적이고, 자본주의로부터 고정된 체제나 사회 구조로 보거나 주관적으로 해석해서 파악한다. 그리고 정작 마르크스라는 주어를 빠진 채로 방관하는 객체와 똑같다. 그렇다고 꾸준하게 투쟁하지도 않기 때문에 그러한 안일한 태도로부터 부르주아 심리를 파악할 수 있다는 믿음이란 무산 혁명에 있어서는 방관에 불과하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되겠다. 아직도 프로이트, 라캉이라는 망령 속에서, 그리고 마르크스 유물론을 관념론으로 해석하고야 마는 어리석은 무리들도 이익 집단과 마찬가지로, 자본주의에서는 심리학마저 부르주아를 위해 기능한다.
후기주의 규탄.
여기서 후기주의란 포스트모더니즘과 같다. 그렇다면 왜 후기주의인가. 바로 부르주아 종말론을 지지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아직도 부르주아 간 전쟁이 일어나서 핵전쟁이 발발하면, 인류가 종말을 맞이한다는 전쟁 소설을 쓰고 있다. 그리고 상상하는 허구가 꼭 현실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는 전제 아래에서 전 인류 사회는 끝날거라 봤다. 그러나 그 역시 허구였다. 왜냐하면 재벌이라는 엄연한 부르주아지 계급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자본가들도 곧바로 프롤레타리아트 종말을 바라고 있기 때문이고, 또한 파시스트, 반공주의에서 똑같은 논리를 겉으로도 보여준다. 그들이 말하는 좌우익 평화란 노동자와 자본가들에 대한 화해이자 곧 융화였고. 자본주의에서 작동하는 기계적 사고란 바로 부르주아 사고의 일부이다. 그렇다면 왜 남한 사람들은 아직도 재벌 철학에 매달리는가. 바로 마르크스를 죽은 개로 취급하기 때문이다.
서유럽, 일본, 심지어 미국에서도, 수입된 마르크스주의는 기괴하게, 변형됐다. 바로 후기 마르크스주의 때문이다. 그리고 일부 국제주의라는 '흐름'에서도 그러한 전통들은 마르크스 저작들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계급적 관계를 잘 고찰해보지도 않는다. 일부는 식민지 영국관을 추종하거나 기반해서 마르크스주의 이론들을 그대로 수입했다. 그래서 우리는 마르크스주의라는 이론으부터가 아닌,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보다 철저하고, 꼼꼼한 검토와 국내 변증법으로 비판하고 종합한다. 따라서 무산 계급들은 언제나 먼저다. 그래서 정치경제학이라는 논의와도 무관할 수 없다. 필자도 주로 언급하고자 한다. 먼저 여러 논의를 제안하고자 한다. 수입된 기회주의 조류는 혁명이라 칭하는 수정주의, 교조주의, 심지어는 배외주의와도 같다. 따라서 맞서는 게 옳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