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에서의 짧은 체류
스티븐 L. 펙 지음, 김항나 옮김 / 자음과모음 / 2026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
조로아스터교의 교리가 지배하는 지옥.
매일 아침 깔끔한 옷과 상상만하면 상상과 똑같이 제공되는 음식들. 죽어서 이 지옥에 떨어지던 순간이 아닌 젊음의 모습으로 죽지도, 늙지도 않는 곳.
자신의 삶이 적힌 책을 찾으면 이 지옥을 벗어날 수 있단다. #지옥에서의짧은체류 (#스티븐L펙 지음 #자음과모음 출판) 속 지옥의 설정이다.
⠀
이것이 지옥인가? 지옥과 천국을 다루던 드라마들을 떠올려보면 오히려 천국에 가깝다. 이런 쾌적하고 고통없는 곳이 정말 지옥이란 말인가?
⠀
하지만 무한에 가까운 유한을 자랑하는 책의 존재를 깨닫기 시작하는 순간, 이 고요한 곳은 진짜 지옥이 된다.
살아생전 온 우주에 존재하는 전자 수보다 비교할 수 없을만큼 거대한, 광년이라는 생물에게 허락되지 않은 시간 단위 앞에 거대한 수가 적혀있는 수만큼의 책을 뒤져야한다. 그 거대함 속에서 지옥인들의 하루하루, 하나하나는 의미를 잃는다.
‘도서관’의 1층을 찾기 위해 난간에서 뛰어내려도 의미없음은 마찬가지다. 사랑을 나눴던 사람을 다시만날 수 있을지, 내 이야기가 적힌 책을 찾을 수 있을지 기대감이 옅어진다. 기대감을 넘어 책을 찾는다는 목적마저 잊을만큼 의식이 흐려진다. 모든 기억들이 떠올리려하면 완벽하게 떠올릴 수 있는 지옥임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려는 의식이 흐려진다.
⠀
억겁의 억겁의 억겁의 억겁.
무수히 겹쳐지는 억겁과도 같은 시간 속에서 개체의 다양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점점 더 멀리 떨어져서 바라볼수록 차이는 보이지 않는 것 처럼.
⠀
<지옥에서의 짧은 체류>를 읽을 수록 주인공은 말이 줄어든다. 반복되는 일상에서 할 말이 없는 것이다.
몇 년, 몇 세기, 몇 광년이 뭉뚱그려 지나가는 별 내용없는 그 부분이 나는 더 크게, 무섭게 느껴졌다.
⠀
되는대로 그냥 흘려보냈던 나의 나날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 지옥처럼 무한에 가까운 나날들도 주어지지 않는다. 얼추 3만 일이 주어지는데 거의 절반을 지나오고 있는 이 시점에 나는 얼마나 많은 내용없는 하루하루들을 흘려보냈는가.
⠀
매일 눈뜨면 반복되는 하루.
그 모습은 책 속 지옥이나 우리가 살아가는 매일이나 다른 것이 없다. 이 둘을 다르게 만들 수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다양성, 그리고 특별함이다.
지옥에 존재하는 수많은 책들 중 내 삶은 커녕 별다른 뜻이 없는 무의미한 책이 대부분이다. 나의 하루하루들도 지옥으로 만들 수는 없다.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다기 보다는 보통의 일상에서 그래도 하나씩은 기억하고 기록하고 뜻깊게 여기는 것.
그것이 마지못해, 죽지못해 살아가는 지옥같은 우리 일상을 천국의 그것으로 올려보내는 방법일 것이다.
⠀
지옥도, 천국도 실제로는 별 차이없는 모습일지도 모른다. 그것을 구분 짓는 것은 그곳에서의 하루하루가 가지는 의미의 유무일지도 모른다는 소리다.
우리 삶의 하루가 누구에게는 지옥으로, 누구에게는 천국에서의 하루로 기억되는 것처럼.
⠀
똑같아 무의미해 보이는 무미건조한 하루에서 특별함을 발견하는 그런 의미있는 하루하루들을 살고싶어졌다.
⠀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미술적 인간 - 잘 알지 못해도 괜찮은 국내 미술관 여행
문하연 지음 / 동아엠앤비 / 2026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
어느 순간부터 국내 여행을 떠나면 그 지역에 있는 미술관 하나씩은 꼭 찾아간다. 작은 소도시들도 미술관은 꼭 하나씩 있어서 여행코스 짜기도 아주 좋은데 더 좋은 것은 미술관들이 대체적으로 건물고 이쁘고 주변 풍경도 무척이나 아름답다는 것이다. 그 자체로 아름다운 작품같은 미술관의 볕 잘드는 자리에 앉아있으면 경직되어 올라갔던 어깨가 낮은 한숨과 함께 힘이 풀려 자연스럽게 내려앉는다.
⠀
이런 숨겨진 보물들을 #미술적인간 (#문하연 지음 #동아엠앤비 출판)은 작가의 개인적 경험과 함께 다양하게 소개하고 있다. 미술관 뿐만 아니라 그 당시에 그곳에서 진행되었던 전시회들도 보여주는데 방문했던 곳은 익숙함에 반갑고, 낯선 곳은 보물을 발견한 마음에 기쁘다.
⠀
특히나 인상적인 것은 작가가 아버지를 모시고 떠난 여행에서 진짜 미술에 대해 생각해보는 장면이다.
작가의 전시회도 아닌 동호회의 전시회에서 아버지는 ‘고만고만‘한 그림에서 가슴먹먹함을 느끼며 한참을 그림앞에 머무른다. 그 그림 속 지난하고 가난한 세월을 살아왔던 아버지에게만 전해지는 특별함이 있었던 것이다.
⠀
미술을 전공하고, 다른 사람에게 강연하고. 물론 멋지지만 모든 미술을 좋아하게 된 계기에는 이런 가슴먹먹함과 뭔지모를 감동이 있었을 것이다. 명화한 별거아닌 것이다. 나도 유명전시회에 가서 가장(아직까지)기억에 남는 작품은 대표작품이 아니라 해설 가이드에도 담기지 않은 작품이었다. 홍매화를 그린 그림이었는데 보일듯말듯 바래진 매화의 붉은 꽃잎의 흔적이 유난히 내 마음 속에는 선명하다.
⠀
곳곳에 미술관이 있는 것은 그렇기 때문이 아닐까.
어렵게만 느껴지고 멀리 가야만 볼 수 있고, 격식을 차려야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보통 우리의 삶이 우리 일상과 조금 다른 언어로 담겨있는 것을 편안하게 볼 수 있는 것. 작품이 별로 인상적이지 않더라도 같이 같던 사람, 그곳의 경치, 날씨, 온도, 공기까지. 그런 것들을 마음에 담아 문득문득 떠오르고, 떠오르면 마실가듯 갈 수 있는 쉼터같은 곳이 하나즈음은 있길 바라는 마음.
⠀
다 똑같아 보아고 고만고만하다고 의미없는 것은 아니다.
박수근 화백의 “나더러 똑같은 소재만 그린다고 평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우리의 생활이 그런데 왜 그걸 모두 외면하려는 걸까.”라는 말이 유독 마음에 남는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
특별한 순간이 의미있는 것이 아니다. 평범하고 모두가 가지고 있는 보통의 순간들이 우리 삶 대부분을 이루고 있다. 우리 스스로가 보통의 것에 모두가 공감하고 울고 웃고. 그렇게 달래고 위안받는 그런 ‘미술적 인간’임을 깨달아야 한다. 그런 성숙한 태도가 우리 주변을 다르게 인식할 것이고 그로인해 똑같은 나 스스로의 삶도 특별하게 만들어줄 것이다.
미술도, 우리 삶도 특별해서 소중한 것이 아니다. 일상적인 것의 특별함을 깨달을 때 우리 삶이 본디 소중한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공감하는 성숙하고 행복한 삶을 살게 된다. 그런 깨달음과 성숙의 기회가 우리도 모르게 우리 곁에 미술관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곁에 있다.
⠀
<미술적 인간>을 지도삼아 멋진 공간을, 미술을, 예술같은 삶을 발견하는 여행을 떠나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은폐된 전쟁 - 미중 패권 경쟁이라는 허상이 가린 두 개의 내전
박홍서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미국과 중국.
나란히 놓을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두 나라간의 총없는 전쟁으로 지구 전세계의 경제가 요동친다.
‘세계 패권’을 위한 두 나라의 지난한 힘겨루기.
이 힘겨루기를 보면서 지치는 이유는 명확한 방향성이 없다는 것이다. 손바닥 뒤집듯 어제를 번복하고 오늘은 내일을 위해 또다시 뒤집힌다.

하지만 이것은 흔히 말하는 줄타기라고도 할 수 있는데, 이것이 가능하고 적어도 그 둘 사이에서는 효과가 있는 것 처럼 보이는 이유는 미국, 중국이 단순히 국가라는 하나의 큰 덩어리로 보는 국가 중심적 사고가 틀렸기 때문이다. 그들의 입장 표명과 행동은 ‘미국’의, ‘중국’의 한 마음 한 뜻이 아니다. 각 국내 통치권력의 철저한 이해관계가 반영되는 것이다. 트럼프가 ‘쇼’를 벌이는 이유도 중간선거를 위해서이고, 그것을 잘 알고 있는 중국이 첨단 기술에 제약을 거는 것이 아니라 미국 농산물 수입을 철저하게 규제하는 이유고 트럼프의 강렬한 코어 지지자가 농민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은폐된전쟁 (#박홍서 씀 #한겨레출판 출판)은 미중 패권 다툼이라는 현상에 가려진 두 개의 ‘내전’에 대해 말하는 책이다. 이 ‘내전’은 총과 칼을 들고 끝없는 유혈사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권력집단들의 힘겨루기를 말하는 것이다.

미우나 고우나 자본주의 시스템에 강력하게 연결되어 있는 두 나라의 파국처럼 보이는 분쟁도 결국 파멸할 수 없기에 대내적 결집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다.

어느 한쪽을 강력하게 편을 들어주길 바라는 두 나라. 그 사이에서 동맹국의 지위마저 흔들리고 있는 한국. 한국은 어떻게 해야할까.
실상은 허무하리만치 간단하다.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부단스럽기는 하지만 트럼프를 따라하는 것이다.
‘그때그때 말과 행동을 바꾸는 것’말이다.

이란과의 문제를 중국 사이의 협상에 가져와 협상 테이블에서 이란을 상대국으로, 미국과 중국을 하나의 덩어리에서 두 권력집단으로 만들어 서로가 상대국일때 서로를 향해 뱉어냈던 말을 다르게 해석하여 적용한다.
이란을 향한 세컨더리 보이콧에서도 중국의 주요은행들이 리스트에서 빠지는 결과가 바로 이런 말바꾸기에 의한 것이다.

비겁하지 않냐 생각할 수 있지만 결국 그 사이에서 우리가 살아남는 문제이다. 오히려 강력한 경제적 우위를 가지고 압박하는 열강들 사이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우리도 ‘한국’이라는 하나의 거대한 덩어리가 아니라 권력이라는 첨예한 작은 조각으로 나누어 그때그때 ‘적절하게’대응하는 것이다.

상대성 이론에서 가속도와 중력이 같은 결과값을 가져오는 것을 생각해보라. 덩치(중력)에서 부족하다면 빠르게 움직여(가속도) 비슷한 시공간왜곡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오히려 중력이 너무 크면 제때 정확하게 움직이는 것이 쉽지않다. 무게를 줄여 빠르게 움직이는 것이 오히려 유리한 경우도 있는 것이다.

국가만을 상대할 것이 아 니라 양국의 통치 권력과 자본, 단체, 개인 등 다양한 행위 자들과 전방위적으로 관계를 맺으며 외교적 해법을 모색 해야 한다.

갈수록 복잡해져 가는 국제 정세를 새로운 시각으로 조금더 빠르고 정확하게, 입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주는 새로운 길로 이끌어 주는 네비게이션같은 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이기적 유전자 (50주년 기념판)
리처드 도킨스 지음, 이한음 옮김 / 을유문화사 / 2026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급변하는 세계만큼 과학 분야도 급변한다.
진실, 심지어 진리처럼 여겨지던 것들도 더 이상 진실이 아닌 거짓으로, 한 시대를 풍미한 하나의 에피소드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새로운 진실로 여겨지는 무언가가 생기면 역사에만 남을 뿐 아무 의미도 없어지는 것이다.
⠀
그런 의미에서 #이기적유전자 (#리처드도킨스 씀 #을유문화사 출판)은 아주 놀랍다. 50년이라는 시간을, 그것도 끝없이 발전하고 있는 진화생물학 분야에서 많은 수정을 거치지 않고 거의 본모습 그대로 유지하고 있으며 수많은 뒷세대 연구들이 <이기적 유전자>가 여전히 옳음을 증명하고 있다.
⠀
많은 사람들이 50년 동안 <이기적 유전자>를 읽어 내용은 잘 알 것이라고 생각한다. 생명체를 주체로 DNA를 이해하는 시선을 뒤바꿨다. 길어야 수십 년이면 죽어 사라지는 개체는 그저 유전자를 이 세계에 남겨 불멸을 유지하게 해주는 ‘탈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개체에 이득이 되지 않는(어린 세대, 또는 기성 세대의 개체가 죽음을 맞이해야만 하는 상황) 경우가 발생한다. 그 개체의 죽음이 유전자의 전달에 더 유리하기 때문이다.
⠀
이런 수직적 구조의 유전자 전달만으로도 특별한데 리처드 도킨스는 밈(meme)이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사피엔스를 특별한 위치에 올려두었다. 멜로디, 생각, 관습 등 사피엔스의 모방을 통해 전달되는 ‘문화적 정보’가 진화를 유발한다는 밈 개념은 유전자의 수직적 전달뿐만 아니라 모방으로 인한 수평적 진화도 가능하게 했다.
⠀
이것은 생물학적 진화에 소요되는 시간보다 훨씬 적은 소요 시간 만에 폭발적인 진화를 이루어낸 사피엔스를 설명하기에 아주 적절하다.
⠀
50주년을 맞이하여 추가된 에필로그에서 AI로 인한 3차 진화의 가능성도 말한다.
본래의 과정을 이해하고 재구성하는 능력이 유전자적 진화 외에도 필요한 요소인데 이것을 빠르고 다양하게 해내는 것이 AI라며 이때까지와는 다른 현상이 발생할 것이라
예상하는 저자를 보면서 <이기적 유전자>는 끝없이 발전해 나갈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이 책도 유전자처럼 환경에 적응하고 생존하여 진화할 것이라고, 그렇게 불멸할 것이다.
⠀
담겨 있는 과학적 지식만으로도 훌륭한 책이지만 50주년 기념판을 읽으니 하나의 빅히스토리 서적으로 느껴졌다.
빅히스토리는 유구한 세월, 심지어 제대로 된 기록이 없는 시대부터 지금까지 전체를 기인해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고 논한다. 그것이 얼마나 설득력 있는지도 물론 중요하지만 더 그것이 의미 있는 것은 바로 새로운 가능성의 존재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
시간과 발견, 권위와 업적이 쌓이다 보면 단어 하나를 더하는 것도 쉽지 않아진다. 너무나 명징하다 보니 오히려 새로움이 허용되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어쩌면 본질에서부터 더 멀어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진실이지만 어느 순간 쓸모없는 것이 될지도 모르는 그것에 두 눈이 멀면 말이다.
⠀
<이기적 유전자>는 혁명적이라 여겨지는 하나의 가능성에서 시작해 지금까지 계속 새로운 가능성을 스스로 더해가고 있는 살아있는 예시이자 상징이다.
우리는 매일을 살아가지만 당장 1분 앞도 확신하지 못한다. 어떤 방향의 결과를 가져오는지 상관없이 걸어 나가는 매 발걸음마다 무한한 가능성이 존재한다.
이 책도 그렇지 않나.
전 세계 다양한 사람들에게 읽히면서 살아가고 어떤 새로운 가능성이 태동할지 아무도 예상할 수 없지만 그 가능성을 알려주기에 반드시 어떤 일은 벌어질 것이다.(지금 이 순간에도 벌어지고 있다.)
⠀
그 자체로 유전자이자, 탈 것인 생명체이지 않나.
겉부터 속까지. 참 한결같은 무언가이다.
⠀
얼마나 살아갈지,
얼마나 번져나갈지. 기대하게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날개 ㅣ 위픽 클래식
이상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6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상’이라는 사람을 떠올리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연관어는 천재다.
그렇기에 #날개 (#이상 씀 #위픽 출판)의 시작,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라는 물음에서 이미 나에게 <날개>는 소설과 에세이 그 사이 어디쯤의 글이 되었다.
⠀
이 책 속의 주인공은 아내와 단칸방에서 살아가지만 단칸방은 가벽으로 작은 방 두 개로 나뉘어 있고 아내와 동침하지 않으며 밥도 아내 방에서 먹지 않는다. 심지어 밖으로 나가려면 아내의 방을 통해 지나가야 한다.
⠀
이것은 세상으로부터 나를 지켜주는 든든한 바람막이처럼 느껴질 수도 있으나 세상으로 나가보려는 의지를 꺾는 무기력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돈을 벌고 생산적인 무언가는 꿈도 꾸지 않고 아내가 조금씩 쥐어주는 돈을 들고 밤거리를 헤맬 뿐이다.
⠀
이 와중에 아내는 무슨 일로 돈을 버는 것인지 궁금해진다. 손님이 낮에도 밤에도 아내 방을 찾아온다. 그리고 그들이 아내에게 돈을 주고 아내는 자신에게 돈을 준다.
손님 맞는 아내를 피해 자정까지 밖을 헤매야 한다.
그러다 싸늘한 날 비를 맞고 견디다 못해 자정 전에 손님이 있는 아내 방을 넘어 자신 방으로 간다. 심한 감기에 걸려 아내가 아스피린을 준 줄 알았지만 아내 방에서 발견된 약은 아스피린과 비슷하게 생긴 수면제 아달린이다.
⠀
왜 아내는 나에게 아달린을 주었을까. 확실하지도 않은 가정에서 ‘나’의 생각은 끝도 없이 번져나간다.
사실을 확인해 볼 수도 있었을 텐데, 무기력은 머릿속으로 생각만 이어나가게 한다. 워낙 대화가 없는 부부의 일상 때문에 오히려 혼자 망상하는 것이 더 자연스러울지도 모른다.
⠀
생각 없이, 생각할 필요 없이 그냥 모든 것에 신경 쓰지 않고 잠자듯 세상을 살아가는 것. 벌써부터 다가올 아침이 밉고 사라질 밤이 아쉬워 아무 생각 없이 티비, 또는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고 있는 현실의 나와 별반 차이가 없다. 무기력에 이어 무관심. 세상을 무의미하게, 화가 나고 답답한 마음이 드는 것도 세상에, 삶에 관심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건만 그런 마음도 들지 않는다.
⠀
이런저런 망상 중에 결국 그는 백화점 옥상에 다다른다. 처음으로 능동적으로 귀찮은 무언가를 행동한 ‘나’는 날개가 있었던 겨드랑이에 가려움을 느낀다. 그리고 바란다. 다시 한번 날개가 돋아나길, 그래서 하늘을 날길.
⠀
<날개>에서 ‘나’가 딱 한 번, 유일하게 자의로 무언가를 해본 것이다. 그는 실은 무언가를 열심히 해보았던 사람이었다. 그랬으니 날개가 있었겠지. 그 날개로 세상으로 날갯짓을 해보았겠지. 하지만 극도의 무기력과 무관심은 세상과의 차단이 아니라 세상을, 스스로를 외면했다.
외면한 것은 날갯짓을 하던 열정 가득한 나 자신이었다.
⠀
<날개>는 작가 이상의 모습을 투영했고, 책 속의 아내 ‘연심’은 이상의 아내 ‘금홍’의 본명이었다. 결혼하고 4개월 만에 혼자 도쿄로 향했다. 그곳에서 그는 폐결핵으로 만 26세에 사망했다.
⠀
이상은 아내와의 삶에서 무기력한 나날들을 보내다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날갯짓을 할 하늘로 도쿄를 선택한 것 같다. 하지만 이상이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적었듯이 하늘에 적응하기 쉽지 않았나 보다. 이런 그의 <날개> 속 ‘나’가 한 번만 더 날개가 돋아나기를, 한 번만 더 날아보자는 바람은 작가 이상이 스스로에게 되뇌는 마지막 불꽃이었을는지도 모르겠다.
⠀
짧은 글이지만, 무기력과 무관심, 대화 단절, 과도한 보호, 사회에 안착하기 쉽지 않음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 앞을 내다본 것은 아닐 텐데 말이다. 짧지만 애두르지 않고, 가상의 세상만으로 끝내지 않은 그의 이야기는 그래서 지금의 우리에게 90년의 세월을 지나 더 의미 있고 위안이 되어주는지도 모르겠다.
⠀
나도 날개가 돋아나기를, 아니 날개가 있어 치열하게 날았던 존재였음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오늘을, 그리고 내일을 살아갈 큰 힘이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