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 이야기 이야기의 낮과 밤 1
알베르 카뮈 외 지음, 이재경 외 옮김 / 유선사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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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 장면은 인물들의 사건과 서사. 그 상황의 감정을 적절하게 묘사해 주기도 하면서 그런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마중물이 되기도 한다.
처음 문학을 읽을 때 인물들의 대사와 서술되는 감정을 따라가는 것도 벅차 배경까지 눈에 담지는 못했다.

조금 인물들이 서있는 배경을 상상할 수 있게 되었을때 #정원이야기 (#유선사 출판)를 만났다.
버지니아 울프, 알베르 카뮈, 라이너 마리아 릴케, 나쓰메 소세키, 마르셀 프루스트 같은 대문호들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정원들이 모여있는 책이다.
등장인물이 직접 열과성을 다해 가꾸었거나 모두가 이용할 수 있는 공용 정원이거나 가족들이 가든파티를 여는 자랑스러운 장소로 여기저기에 등장하는 정원은 단순히 배경이 아니라 각자의 거리감으로 인물들과 관계 맺는다.

어느 누구도 드나들 수 있는모두의 정원, 자기가 가꾸지 않았더라도 가족과 함께 사는 집 앞에 다른 사람을 초대해도 부끄럽지 않을만큼 관리되고 있는 정원, 인물이 애정을 가지고 직접 관리하고 있는 정원. 각자의 거리감으로 정원을 누비고 식물을 바라보면서 그 곳에서 누군가를 만나고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고민한다.

계획적이든, 우연히든 수많은 식물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받는 것은 어딘가 익숙한 모습이다.
많은 사람들과 관계 맺고 함께 사는 우리의 모습과 닮았다. 키 큰 식물들이 그 아래에 자리잡고 자라나고 있는 새싹들에게 가야할 햇빛을 막아서 자라게 하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가 주고받는 관계도 유익한 것만은 아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이렇게 유익하고 유쾌하지 못한 관계 속에서 이야기는 더 잘 피어난다.

푸르는 녹음과 형형색색의 꽃들을 바라보는 것은 그렇게 떠오른 아픔들이 덜 아프길 바라는 작가의 안배일까.

겨울이 되어도, 정원에 식물들이 모두 죽은 것 같아도 다시 봄이 될 때 싹을 틔우기 위해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그 무한함이 적잖은 위안을 준다.

정원이 가지는 물리적 거리에 대해서도 생각해봤다.
우리가 쉬는 보금자리와 전쟁을 치뤄야하는 바깥 세상 그 사이의 경계에 정원이 있다. 세상으로 완전히 나가기 전 숨을 고를 수 있는 휴식의 공간이자 보호를 받으며 세상을 배울 수 있는 조금 더 열린 보금자리이기도 하다.
세상에 속하면서도 속하지 않은 정원에서 세상에서 벌어진 일을 듣고 보고 생각하면서도 거리를 두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세상과 동떨어지지 않으면서도 휩쓸려가지않는 완충지대. 그래서 우리는 정원의 벤치에 앉아 집이 아니라 세상쪽을 바라보는 것일 수도 있겠다. 적당한 거리감은 바라볼 용기를 주니까.

책을 덮고 쨍한 날이지만 논밭과 메타세콰이어가 펼쳐져있는 집근처 모두의 정원을 가보았다.
외부활동을 자제하라는 안내문자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오손도손 모여 찬찬히 자신들만의 속도로 산책을 하고 있었다. 쨍하지만 우거진 메타세콰이어가 산책로를 그늘지게 해주고, 산책로 밖 식물들은 빛을 받아 각자의 색으로 형형색색 빛나고 있다. 땀은 흐르지만 모두의 표정은 밝다. 정원이란 그런 곳이다.
수고로움을 기꺼이 마다하지 않고 행하는 곳.
나가기 싫을 때 나갈 수 있는 곳.
그래서 좀 더 뚫린 생각을 할 수 있는 곳.
생각을 정리하기도, 저 멀리까지 자라고있는 초록식물들 아래에 나쁜 생각들을 묻어둘 수 있는 곳.
그래. 다시한번이라 다짐할 수 있는 곳.

소란스럽지 않지만 사계절, 각자의 속도로 무한히 계속 되고 있는 소우주. 그곳에서 내 세상에서 다시 한걸음 걸을 수 있게 마음을 가볍게 하면서도 두 발이 굳건히 땅을 딛고 있다는 중력을 기분좋게 느낀다.

모두 그런 나만의 정원 하나씩 마음에 품기를.
간절히 바라게 되는 그런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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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리안 사이코
버지니아 페이토 지음, 배지은 옮김 / 현대문학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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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성설. 선악설. 아직까지 의견이 분분한 주제다.
인간은 타락하는 것일까 착한 척 하는 것일까.

#빅토리안사이코 (#버지니아페이토 지음 #현대문학 출판)을 읽는 동안 계속 생각했지만 그 답을 끝내 찾지 못했다. 사이코패스로 태어나 악마를 지니고 있다는 이유로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주인공 위니프레드 노티는 파운즈 가문의 가정교사로 들어간다. 목적은 단 하나. 크리스마스에 이 집의 모든 사람을 죽이겠다. 왜 노티는 이 집안읕 선택한 것일까.

피와 죽음, 어둠으로 가득한 노티의 내면과 현실은 구분이 잘 되지 않는다. 독자들에게 직접 ‘속았지? 현실이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고.’라며 조롱할 정도로 노티의 내면과 현실은 마구잡이로 뒤섞여있다.
그래서 얇은 분량임에도 흐름을 따라가기 쉽지않은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것이 작가의 의도였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마지막 장을 덮으며 들었다.

솔직히 우리 모두 마음 속에 악마가 산다.
훔치고 싶을 때도 있고, 미칠 듯이 화가나서 누군가를 때리고 싶고 죽이고 싶은 경우도 있다. 다만 실행하지 않을 뿐이다. 그러면 안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면 안된다. 이것은 본능에서 기인된 것일까 아니면 학습된 사회화의 결과일까.

끝내 답을 내리지 못하는 이 질문 때문에 마음이 복잡하다. 이런 복잡함을 읽는 동안 끊임없이 유도해 내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이 아닐까.
게다가 절대로 실천할 수 없는 노티의 행보를 보며 쾌감이 드는 순간들도 있으니 더 미칠 노릇이다.
이런 사이코패스의 무분별한 살인 행각에 대리만족 비슷한 쾌감이라니. 살인 뿐인 불쾌한 이야기를 끝까지 읽을 수 있었던 이유가 이 만족감때문이었다.

이런 만족감. 이런 것들을 가끔 충족시켜줘야 우리가 조금 더 제대로 살아갈 수 있다고 전제한다면 위에서 말했던 선성설, 선악설의 답이 얼추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빅토리아 시대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들도 악이 성장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사회적 규범, 특히 노예보다도 못했던 여성에 대한 규범과 그 규범으로 인해 말도안되는 처벌이 강행되었던 그 사회에서 과연 올바른 여성은 존재할 수 있었을까.

규범으로 나아가면 지금 우리 시대의 모습도 저절로 생각해보게 된다. 성민감성이 역사상 가장 높은 시대이면서 그렇기에 무분별한 성차별, 성혐오가 발생하기도 하는 지금의 시대에서 과연 노티같은 사람이 나오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는가. 과연 지금이 모든 면에서 빅토리아 시대보다 더 나은 시대인가 물어보게 된다.

사회가, 타인이, 가족이. 여러 문제들로 괴로워하는 사람들을 악의 구렁텅이에 빠지지 않게 구해줄 수 있을 것이다. 피의 크리스마스를 끝까지 보고나서 찾아오는 ‘현타’.그 현타의 이유와 여러 방면에서의 문제에 대해 수많은 물음표가 남는,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유쾌한 교보재같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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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썸머 에디션)
이디스 워튼 지음, 민지현 옮김 / 머묾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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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봄 내내 굳건히 뿌리내리는데에만 집중하던 온갖 것들이 꽃과 열매를 맺으면서 비로소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계절. 물리적 성장이 비로소 존재적 성장으로 이어지는 이 계절은 봄만큼 생명력이 넘침과 동시에 강렬하다. 뜨겁다. 태동한다.

#여름 (#이디스워튼 지음 #머묾 출판)의 채리티의 시기도 여름을 맞이했다. 모든 것이 변하지 않고 그대로이길 바라는 듯한 노스도머의 생활에 환멸을 느낀다.
심지어 자신보다 수십살은 더 많은, 자신을 ‘산’에서 데려온 대리인 로열은 아름답게 성장한 채리티에게 사랑한다며 청혼한다. 이런 노스도머를 떠나 모든 것이 활기차고 아름다운 더 넓은 곳으로 떠날 수 있기를 꿈꾼다. 그런 채리티 앞에 나타난 루시어스. 그에게 사로잡힌 그녀는 그의 곁에 있는 미래를 꿈꾼다.

하지만 원하는 것을 손에 넣을 수 있다는 것이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무언가를 해야한다는 것과 같다고 여기지 못하던 시절의 인물인 채리티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렇지 않은 척이다. 결국 그렇게 최적의 시기를 놓치고서야 채리티는 다른 사람의 시선을 신경쓰지 않고 행동한다.

그렇게 스스로를 내던진 불같은 사랑은 해피엔딩이 아니다. 돌아오겠다던 루시어스는 끝내 돌아오지 않고 거침없던 사랑의 결실이 채리티 안에 자리잡는다.

노스도머 사람들의 시선이 두러웠던 채리티는 자신의 기원과도 같은 ’산‘으로 향한다.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았지만 본능적으로 자신을 낳아준 엄마를 찾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산‘에서 맞이한 엄마는 세상을 떠나기 직전이었고, 결국 처음 마주한 엄마는 교감없이 세상을 떠난다.

정말로 세상에서 혼자라 된 채리티.
그런 채리티를 찾아온 것은 다름아닌 로열씨다.
채리티를 데려가기 위해 산을 올랐던 것이 산을 오른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로열은 그렇게 또 채리티를 데려가기 위해 산을 올랐다.
결국 채리티의 여름은 여름밤의 꿈처럼, 채리티의 인생이 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피하고자 했던 것이 현재 최선이자 유일한 방법이 되었다.

<여름>을 읽는동인 채리티의 모든 마음에 동의하기는 쉽지않았다. 물론 몸과 정신 나이의 차이가 있는 사춘기라고 하지만 안하무인인 부분이 분명 있다. 하지만 완벽하지 않기에, 그럼에도 나아가기에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이 채리티는 책 속 그 누구보다 뜨겁고 열정적으로 나아간다. 지금 시대의 우리 시선에서 분명 더 능동적인 선택이 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채리티의 시절에는 그런 것이 전혀 불가능한 시절이었다.
채리티의 선택이 아쉬운 것이 아닌 시대를 아쉬워해야 한다. 태어난 장소와 신분, 성별에 얽매여 순수하게 갈망하는 것이 죄이던 시절. 지금 우리 시대에 채리티가 살았다면 분명 당차게 걸어나갔을 것이다.
그런 믿음이 당연하다 생각될 만큼 채리티는 글 속에서 활활 타오르고 있다. 이것이 젊음의 생명력이구나를 절감한다. 이디스 워튼이 세계 대전 속에서 숱한 죽음과 절망을 경험하고 있던 시기에 <여름>을 써낸 것은 그 시간, 그 장소에서는 다시는 없을 것 처럼 보이는 젊음, 그러한 젊음이기에 가능한 순수한 욕망, 여름처럼 들끓는 열정에 대한 갈망 때문이 아닐까.

인간은 실패하면서 나아간다.
실패하면 삶이 끝난다고 생각하지만 삶이라는 연장선 위 하나의 점일 뿐이다. 그럼에도 살아내야 하는 내일이었던 오늘이 밝아오는 것. 그것이 삶이다.
그런 삶에서 미끄러져 낙오되지 않게 디딤돌을 까는 것.
그것이 실패하는 것이다.

의미없는 것은 없다. ‘나중에’도 없다.
‘나중’은 결국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또 다른 순간이다.
그러기에 실패하더라도 그 순간, 선택해야한다.

물론 선택에 결과도 책임도 따르지만.
일곱빛깔이 합쳐져 하나의 무지개가 되듯. 그 순간, 그 선택, 그 결과, 그 책임. 모든 것이 삶이다.

기꺼이 선택할 자유, 욕망할 자유.
그것에 대해 그 어떤 작품보다 솔직하다.

뜨거워 제대로 바라보지도 못하는 태양 속에서
열정이라는 또 다른 찬란한 뜨거움을 발견하게 해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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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빛이 내리는 시간
브루나 단타스 로바토 지음, 김보람 옮김 / 다산책방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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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세상이 이전과는 다르게 확 커지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않다. 그런 일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있다면 바로 자식이 생기는 것이 아닐까. 스스로도 마음에 들지않고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하는 나라는 존재를 이토록 갈망하고 전적으로 의지하고 신뢰하는 존재가 또 있을까.
심지어 열달을 제 몸의 일부로 살았던 기억을 가진 엄마라면 그 아이가 딸이라면 그러한 감동과 애정은 더 하지않을까.

<푸른 빛이 내리는 시간>은 꼭 함께 있어야만 하냐며 가족을 떠난 아버지의 빈자리를 가진 딸과 엄마의 이야기다. 더 넓은 세상을 배우고 그곳에서 살아가기 위해 미국 유학길에 오른 딸. 혼자 있을 엄마를 걱정하며 (거의)매일 영상통화를 하지만 엄마의 허전함은 쉽게 채울 수 없다. 의지하면 엄마의 엄마도 근래에 돌아가셨고, 삶의 이유와도 같았던 딸이 떠난 빈집은 너무나 넓고 고요하다.
자신이 목소리를 여전히 낼 수 있는 존재인지 긴장하면서 소리를 내기도 한다. 그렇게 엄마는 이 큰 집이 쪼그라들어 자신을 가득 껴안아 주길 바란다. 외롭고, 뉴스에서 나오는 온갖 나쁜 사건에 딸이 휩쓸릴까 전전긍긍하며 마음에 병이 생긴다. 그렇게 약해지는 엄마를 보며 모든 것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가야하는 순간이 올지도 모른다며 그 순간을 대비하는 딸이지만 닭장같은 숙소에서 살아도 이 넓은 세상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자신의 미래도 (당연히)쉽게 놓지 못한다.

그렇게 시간은 계속 흐른다.
시간이 약이라는 말이 사실일까. 비로소 엄마는 혼자있는 자신을 받아들이고 챙기기 시작한다. 연못같던 자신의 좁은 세상을 혼자라서 비로소 누릴 수 있게 된 자유를 가지고 너른 바다로 산책을 나간다. 그곳에서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딸을 떠올리고 바다를 만끽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비로소 웃을 수 있게 되었다. 비로소 마음을 누르던 말못할 묵직한 무언가를 내려놓을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또 몇 년이 지나, 엄마는 딸이 사는 뉴욕으로 스무시간 가까이 걸려 마침내 도착했다. 딸과 함께하는 일주일의 시간동안, 딸과 엄마는 다시한번 서로와 일치된다. 모든 것이 낯설었던 엄마는 이 낯선 곳에서 자기 딸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에 익숙해졌고, 뉴욕의 것이 최고라고만 생각했던 딸은 엄마와 함께 했던 고향의 것들이 자신들에게 최고임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관광을 여기저기 다니는 것이 아닌 딸의 일상에, 삶에 엄마가 고스란히 녹아들어갔던 일주일의 시간. 그 시간은 엄마의 연못같았던 삶을 바다같은 삶으로 바꿔주었다. 특별한 줄 잊고있었던 딸의 삶도 다시한번 바다가 되었다.

엄마와 딸로 존재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교집합을 발견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엄마의 삶, 딸의 삶 전혀 다른 두개가 그냥 합쳐지는 것이다. 겹쳐지는 것이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더해져 두배가 된 세상 그 모든 것이 소중하고 의미있는 것이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불어넣어 한쪽을 부풀린 삶.
다시 돌아가도 분명 그렇게 할 것이지만 힘찬 날갯짓으로 자식이 떠나고 남은 둥지를 보면 겁이나고 의미를 잃는다. 비워낸만큼 더 좋은, 자신에게 꼭 맞는 것으로 채울 수 있게 되었다. 더 좋은 것을 찾아내고 삶에 더해가는 과정은 또 다른 세상을 가진 딸과 함께 하게 될 것이다.

나이가 들면서 아기가 되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가능성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나 부담스럽지 않다면 그것도 괜찮다. 엄마와 딸, 부모와 자식의 역할교대. 확실한(대부분)것은 자식이 남는 장사라는 거다.

두 세계가 온전히 합해지고, 비로소 내 세계가 되어야 보이고, 느끼기 시작하는 것들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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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냐 존재냐
에리히 프롬 지음, 차경아 옮김 / 까치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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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할까.
정답은 존재하지 않지만 방향은 분명 존재한다.
거창하게 생각될지도 모르겠지만 심지어 단순하다.
조금이라도 ‘나아지는’쪽으로 살면 된다.
그럼 나아진다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살림살이가 좀 나아지는 것일까?

#소유나존재냐 (#에리히프롬 씀 #까치 출판)에서는 우리의 생활방식을 소유(소유적 실존)와 존재(존재적 실존)로 나눠서 비교하고 있다.

소유하는 삶은 말 그대로 물질적인 것들을 탐하는 것도 포함된다. 물질적인 것으로 대표되는 소유는 가지면 행복하나 그 행복은 아주 잠시이고, 그 가지고 싶다는 욕망 자체도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아닌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 의해 주입된 기호일 수 있다. 이러한 소유적 실존은 살아가면서 계속 스스로를 갉아먹는다. 자신이라는 존재가 잠점 커지기는 커녕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된다.

반면 존재하는 삶은 이런 물질적인 것들에 얽매이지 않는다. 사라지고 낡아버리는 물질이 아니라 시간이 지날수록 쌓이고 불어나고 단단해지는 사랑, 사랑을 기반으로 한 나눔, 창조, 경험을 중요시 여기는 삶이다.

물질과 비물질로도 구분될 수 있을 것 같지만 그것보다는 얼마나 더 자유로워지는가, ‘나‘뿐만이 아닌 ’우리‘를 주어로 삼을 수 있는가. 그것이 포인트이다.

기술과 경제가 발전해서 많은 돈을 벌어도 진심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하나 곁에 있기 쉽지않는 요즘 세상이. 소유를 좇아야할지, 존재를 좇아야할지 선택의 필요성은 물론 어느정도의 도움을 주는 것 같다.

물론 경제적, 물질적인 것도 중요하다. 가져보지 못한 사람에게 내려놓으라 하는 것은 와닿지 않는 말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최종적인 목표가 되지 말라는 것이 존재적 실존이라고 여기면 어떨까.

적당히 소유하면서 그것이 주는 안정감을 기반으로 주위를 둘러보고 정신적으로 더 건강하게 살아보려하는 타인은 물론 나까지 사랑하는 삶.
그것이 살아가는 매 순간 충만하게 느껴지게 할 것이다.
그 충만함은 자신이 진정 하고파하는 나아가고 싶어하는 길을 알려줄 것이고 그 길을 걸어가는 스스로는 진정한 자유로움을 만끽할 것이다.

세상이 바뀌면 그 세상에 살아가는 우리도 바뀔 것이다.
세상이 바뀌려면 제도적 장치도 마련되어야 하지만 그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의 변화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세상을 탓하는 것보다
나부터 조금씩 바꿔나간다면, 그렇게 주위 사람에게 긍정적인 영향력을 준다면 그 사람도 그 사람의 주변사람에게 또 영향력을 줄 것이고 그렇게 세상은 조금씩 바뀌기 시작할 것이다.

책상 앞에서 머리를 쓰게 한 책이 결국에는 책상에서 일어나 움직이게 한다. 다른 사람을 올바른 시선으로 바라보고 싶게 한다.

비로소 우리를 출발점에 서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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