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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롱뇽의 49재 - 2024 제171회 아쿠타가와상 수상작
아사히나 아키 지음, 최고은 옮김 / 시공사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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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공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자유롭게 작성한 글입니다)

내가 어릴때 까지만 해도 쌍둥이라는 존재는
참으로 희귀했다. 초등학교 시절 한 학년 위에
예쁘장한 일란성 쌍둥이가 살아서 재학시절 내내
(심지어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에도)어딜 가든 눈에
띄었고 관심의 대상이었다.
요즘은 왜 이렇게 됐지? 라고 생각할 정도로
주위에 쌍둥이가 제법 많아졌다.
(내 주위만 일수도 있다) 대부분 난자2개 정자2개가
수정되는 이란성 쌍둥이이긴하지만.
각설하고, 예전이나 쌍둥이가 제법 흔해진(것 같은)
요즘이나 신체의 일부가 붙어서 세상에 나오는
샴쌍둥이는 여전히 귀하고 세상의 관심사이다.
상체를 공유하거나 머리의 일부가 붙어있음에도
해맑게 웃고있던 사진들을 본적도 있고, TV에서도 본적이있다. 일부가 공유됨에도 세간의 주목을 받았고
간혹 분리수술을 진행하는 경우도 기사를 통해 읽어본적이 있었다.
시공사에서 출간한 #도롱뇽의49재 에서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든 것을 공유하는, 이른바
“완전 결합 쌍생아”라는(하나의 몸에 둘이 존재하는)
충격적이고도 신선한 자매 안과 슌이 주인공이다.
5살이 될때까지 ‘슌’의 존재를 몰랐다가 ‘안’이 인식한 뒤로 판사의 검사(?)까지 받아가서 같은 날짜, 같은 시간의 출생기록을 가진 진정한 쌍둥이가 된다.
쌍둥이도 유전력이 있는걸까.
자매의 아버지도 쌍둥이 출신이다
심지어 태아내 태아(형의 몸속에서 형의 영양분을
받아먹고 살아온, 형이 세상에 나오고 1년만에 발견되었다. 심지어 형의 몸안에는 장기 일부만 남은 또다른 형제도 발견되었다)
이 책은 안과 슌의 아버지를 1년동안 품어 키운
형의 장례식을 치루는 걸로 큰 사건이 시작된다.
(동생이 뱃속에서 영양분을 받아 자랄때부터 몸이
허약해 제법 많은 수술을 받으며 병약하게 지냈다)
하나의 몸, 당연히 하나의 심장을 가져 쌍둥이라면
동시에 죽는다고 생각해서인지, 특별한 친분이라고는
부족한 큰아버지의 죽음에 적잖이 충격을 받은 ‘안’은
죽음이라는 것에 침몰되다시피 몰두한다.
49재를 치르기위해 친가에 들러있으면서 큰아버지의
방대한 저서를 탐독하며 죽음이라는것을 다시 한번 곱씹으면서 ‘슌’은 어떠한 현상을 겪게 되는데...
이 책은 흥미진진하고 충분히 긴박하게 전개할 수 있는 충격적인 소재를 가지고 ‘죽음’이라는 단어에 깊게
가라앉는 모습을 보여준다.
어떤 큰 사건이 일어나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어떻게 되었다라는 시원한 결말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그런지 200페이지가 채 되지않는 분량임에도
읽기가 더뎠다.
제목이 왜 도롱뇽인지 이해하는데에도 절반의 분량을
읽어야했다.
어디까지 이야기를 해야 스포를 하지않는 것인지
적당한 선을 찾는것도 퍽 난감하다.
긴박감있게 여러사건이 속도감있게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사건에서 깨달은바를 깊숙하게
그것의 민낯까지 파고드는 전개를 보여주고 있어서
그런것이리라.
내가 한가지 이야기 할 수 있는게 있다면
도롱뇽은 서로의 꼬리를 물기위해 싸우는 특징을
가졌다는 것과,
무언가를 오롯이 ‘내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을
하나라도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상실감이 더해진
내용이라는 것이다.
아마 ‘슌’의 기분을 100%이해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것이라 확신한다.
이 책에서 나오는 ‘완전결합쌍생아’는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현재까지)케이스 이기 때문이다.
이과출신(심지어 생명공학)으로써
의사 출신 작가의 지식을 기반으로, 이과답지 않은
섬세한 문장으로 특이한 쌍둥이 케이스를 대하는
소설이라 참신했다.
비록 소설이라면 응당 사람들이 기대하는 그런
카타르시스를 유발하는 결말을 없지만
그래도 평소에는 잘 생각해 보지 못했던
‘공유’ 와 ‘죽음’ ‘인격’이라는 것들에 대해 곰곰히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바쁘다는 핑계로 평소에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해
보기가 워낙 힘든 세상이지않은가.
도롱뇽의49재를 읽는시간동안 자연스럽게
사색에 잠긴 시간을 가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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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시간의 알레고리 - 빛으로 그려진 영원의 시퀀스, 사랑으로 읽는 50개의 명화
원형준 지음 / 날리지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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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욘드날리지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자유롭게 작성한 글입니다)

세계, 여행, 비행기 같은 단어들을 배우고 활용할 수 있게 될 때부터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러나라들을 여행하고싶다라는 생각을 가졌을 것이다.
그러니 돈을 많이 벌어야지라고, 전 세계를 누비는 그런 일을 해야겠다라고 생각하고 미래의 직업을 구해야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꿈을 이룬 사람들도 분명 있을것이고.
나도 그런 꿈을 꾸던 사람 중 하나였다.
비록 돈벌이도, 직업도 자유롭게 이곳저곳을 떠날 수 있는 여건도 되지 못했고, 사실적인 이유로 해외여행 자체도 많이 다니지 못했다. 하지만 여행을 다녀오면 잘 다녀왔다고 돈 벌어서(모아서)또 가야지 라는 생각이 드는(심지어 본인은 ISFP, 대단한 집순이다)걸 보아하니 여전히 세계를 탐험하고 싶은가보다.
몇번의 해외여행을 하면서 그 귀한시간 와중에 꼭 하는 것이 있다면(P이지만 이것만은 미리 찾는다 나에겐 이것이 비행기, 숙소와 동급이다)바로 미술관(또는 전시회)를 들르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보기힘든 거장들의 명화를 운좋게 감상 할수도, 아니면 그 나라의 문화가 가득히 담긴 독특한 화풍을 구경할 수 있어서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것 만큼그 나라를 이해하는데에 도움이 된다.
하지만 그림이라는 것이 클래식보다 더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나만의 착각일 수도) 클래식은 그래도 인기있고 유명한 곡들은 들으면 왜 유명한지 왜 인기가 많은지 어느정도 짐작할 수 있는데 유명한 그림은 이게 왜 좋은 그림이고 인기가 많은지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경우가 제법있다.
그래서 클래식음악보다 미술이 좀 더 친근하게 접근하기가 어렵다고 생각되고, 결국 큐레이터나 도슨트같은 도움을 받는 것이 이해하기도 쉽고, 관람에 재미를 붙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원형준 교수의 사랑과 시간의 알레고리 책을 읽으면서 도슨트의 설명을 들으면서 작품을 감상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많은 전시회가 수많은 사람들로 인해 작품을 제대로 감상하기 힘들만큼 인파가 붐비지않나.
그런 전시회들은 인파가 붐벼 도슨트의 해설이 취소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런 유명 전시회 못지않은 50여점의 명화들을 삶,사랑,죽음,욕망이라는 감정에 따라, 빛, 자연, 그림자라는 주변 환경에 따라, 시간, 영원, 초월과 같은 초자연적인 것들에 따라 10개의 전시관으로 나누어서 이렇게나 꼼꼼하고 자세하고 자기의 일화까지 녹여낸 큐레이팅을 누구의 방해도 없이 몇번이고, 언제고 감상 할 수 있는 갓성비 전시회. 그게 바로 [사랑과 시간의 알레고리] 라고 말하고 싶다.
제목의 알레고리란, ‘무언가 다른것을 말하기’라는 그리스어 알레고리아에서 유례된 말로, 말하고자 하는 바를 그대로 드러내지 않고 다른 것에 빗대어 설명하는 방식을 말한단다(책을 읽기전에 검색해본 내용이다) 그래서 나는 이책은 사랑과 시간의 알레고리로 채워진 50점의 그림을 보여주며 인간은 오랜시간 동안 사랑과 시간에 대해서 깊이있게 다루었고 중요시했다는 것을 말하는 책일거라 지레짐작했다.
하지만 그것은 이 책의 일부분이었다.
‘사랑과 시간의 알레고리’라는 것은 이 책에 실려있는 아뇰로 브론치노의 동명의 그림이었다.
16세기의 그림이고 비너스와 큐피트의 나체가 아름답게 묘사되어있어서 표지로 사용하지는 못했으리라.
그리고 이 그림에 대한 설명 중 미술에서의 알레고리에 대한 개념이 소개된다.
도덕, 예술, 감정, 정치 등의 추상적인 개념을 구체적으로 나타내기 위해 의인화하여 표현하는 방식을 뜻한다고. 실제로 이 그림에는 당최 지식이 없으면 보이지도 않는 사랑, 아름다움, 쾌락, 기만, 허위, 질투, 시간, 질서가 알레고리로 나타내어져 있다.
이 그림으로 예나 지금이나, 그림은, 그리고 사랑에 관한 관심은 시공간을 초월한 모든 사람들의 문제이며, 또 그것의 이해가 결코 쉽지 않다는 말을 작가가 전하고 있는데, 아마도 이책으로 독자들에게 하고픈 말이었으리라. 작가는 먹고살만큼의 돈만 벌면 평생 즐겁게 공부할 수 있다고 말할정도로(지금도 지키고 있다)전공인 미술사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러니 어렵고 복잡하더라고 미술에 대한 관심을 응원하는 마음으로 이 두꺼운 책을 썼으리라.
이 책을 마감할때즈음에도 북아프리카에 가서 수많은 예술작품과 건축물을 감상하고 왔다고(맛있는 것도 맘껏 먹고 사진도 많이 남겼다며)자랑한다.
이 책을 끝맺는 글에 남겨놓았는데 이전의 글과는 뭐랄까 느껴지는 텐션(신남)이 확연히 다르다. (그래서 나는 진정 작가가 자랑하고 있는 것이라 확신한다. 부럽다 진심으로)
작가만큼 여러곳을 직접 돌아다니는 즐거움을 누릴 용기는 없으니 좋아하는 대가의 작품이 걸려있는 예약한 전시회나 보러가야겠다.(얼리버드로 티켓을 예매하며 좋아하는 나와 왠지 많이 다른 것 같다 작가는)
마침 예매한 전시회가 모네의 수련 연작 중 한점이 전시되는데 이 책의 두번째 전시관인 “빛과 자연의 교향곡”의 첫번째로 모네가 등장한다.
(팬심을 담아 내가 10개의 전시관 중 가장 애정하는 전시관이다 몇번이고 다시 책을 펼쳐 관람할 예정이다)
인상주의 ‘빛의 화가’ 라는 별명을 갖게 되기까지의 화풍의 변화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초기의 그림들부터 모네의 말년에 그려진 수련 시리즈 그림의 변화를 집어주며 그렇게 된 이유를 말해준다.
(궁금하면 사랑과 시간의 알레고리를 읽어보시라)
약간만 들려주자면,
“대상의 견고함이 사라져 사물이라기 보다는 빛이 모여있는 무언가처럼 보이게 된다.(p.69)"
수련 시리즈를 좋아하고 작품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공감할 만한 문구다. 나는 무릎을 탁쳤다. 이 책의 표현 중 나에게는 가장 시적이고 은유적이며 매력적인 것이다.
이전에 모네의 수련을 보러갔을 때 보다 약간의 지식,
그림이 변하게 된 과정과 이유, 무릎을 탁치게 만들었던 저 문구와 함께하니, 이번에 수련을 보러가면 또 다르게 보일 것이 분명하다.
이렇게, 사랑과 시간의 알레고리라는 전시회를 모두
관람하고 나오면, 또다른 전시화에 가고싶어진다.
이제 좀 더 잘 감상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이 들끓는다. 실제로 가서는 그 자신감이 사그라 들수도 있고, 역시! 더 재미져!라며 신이 날 수도 있다.
몇번이고 재결제를 하지않고도 보고픈 그림을 맘껏 볼수있게 해주는 것도 모자라, 자신감과, 또다른 기회로 나아갈 도전의식까지 챙겨주는 멋진 전시회이다.
물론 그 멋진 전시회의 제목은 사랑과 시간의 알레고리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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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만의 집
전경린 지음 / 다산책방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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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다산북스 에서 도서를 지원받아
자유롭게 작성한 글입니다]

#자기만의 집 이라는 제목이 무슨 뜻일까?
책을 펼치기 전에 무슨 말일지 곰곰히 생각해보았으나
잘 정리되지 않았다. 정확히는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라는게 더 옳은 표현일 것이다.
결국 하나의 생각으로 귀결하는 것을 포기하고 책을
펼쳤다. 2007년에 나온 책을 현재의 시각에 맞게 고친 개정판인 2025년의 [자기만의 집]은 제목마저 바뀌었단다. 원래의 제목은 [엄마의 집]이었다고.

결국 ‘엄마’가 ‘자기만’으로 바뀐 것인데...
책을 펼쳐보니,
30십대에 80년대 학번 60년대 생을 지칭하는
‘386세대’ 의 부모와, 저임금 노동착취에 시달렸어야 하는 ‘88만원 세대’의 딸 의 이야기였다.

부모는 5.18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이고
아빠는 20대에 가졌던 물질만능주위로 혐훼되어버린
사회를 극혐하고 비난하며 그 시스템에 맞춰 움직이는 것을 싫어한다. 그래서 흔히 말하는 ‘가장’으로서 가족 구성원들이 기대하는 안정적인 경제적 수입 등의 역할을 해내지 못하고 (직장을 여섯번 바꾸고, 모아왔던 돈들을 모두 날려먹는) 그 모습에 엄마는 실망하고 그렇게 둘은 헤어진다.

양육권을 포기한 아빠를 대신해 엄마를 따라 나선
주인공 ‘호은’이는 외가댁에 맡겨져서 가끔 엄마를 만나며 상실감에 젖은 어둡고, 시니컬한 사춘기와 성장기를 보낸다.
그러다 엄마가 하루 15시간씩 일하며 모은 돈으로 구입한 언제될지 모르는 재개발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십수년된 낡은 아파트로 들어가 엄마와 함께 살게 되지만, 새로운 사랑을 찾은 여자의 모습을 엄마에게서 본 호은은 또다른 상실감에 빠지며 적응하지 못하고 대학진학과 동시에 기숙사로 독립이라는 이름으로 탈출한다.

스물한살 어느날.
말도 없이 학교앞에 초록빛으로 빛나는 눈을 가진 중학생 여자아이 승주를 데리고 나타난 아빠는 엄마에게 데려다줘라 라는 말만 남기도 혼자 떠나버리고 당황스럽지만 방법이 없는 호은은 엄마집으로 향한다.
(초록빛으로 빛나는 눈을 보고 예전부터 아빠 옆에서 있어왔던 한 여자를 떠올린 호은은 그 여자애를 마냥 곱게 바라 볼 수만은 없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시간을 침범당한(심지어 모르는 여자애까지 하나 더)엄마는 애를 돌려보내기 위해 아빠를 찾아 나서고,
(아이러니 하게도 그 모습은 단란한 가정처럼 보인다.)
아빠 찾기에 실패한 세 여자는 그렇게 한집에서의 삶을 살아간다.

여러가지의 이야기들을 겪으면서
세 여자는 각자 응어리를 풀기도 하고, 함께 밥을 먹고 청소를 하고 나름의 시간들을 보내며 의도치 않는 성장들을 해나간다.

부모로서의 ‘엄마’와 이성간의 사랑에 생기를 찾는
여자로서의 ‘엄마’ 나의 선택없이 세상에 태어났을 뿐인데 모든 시련은 다 나만 짊어지고 있는 것 같은
두 딸(물론 부모도 다르고 성격, 대응도 다르지만)
이 세 여자의 생각, 말, 표정, 관계가 변해가는 것에서
수많은 의미와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책이다

작품이 끝난 뒤에 작가의 말을 읽어보니
IMF를 겪으면서 두드러진 변화 중 하나가 집을 가진 엄마들의 등장이라고.
그 전에는 가장인 남편의 이름으로 된 집에서 종속되어 살아가는 전업주부 엄마들이 대부분이었다며, 물론 집을 가지게 된 이유가 멋진 것들은 아니다. 미혼모라던가 이혼이라던가...

그래서 2007년의 제목은 [엄마의 집]이었던 것 같다.
이혼하고 딸과 살아가기 위해 마련한 집이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2024년 25년이 되면서 1인 가정이 늘어나고 하면서 작가가 의도한 ‘엄마의 집’은 조금 의미가 퇴색되어 버린게 아닌가 생각한 것 같다.
그래서 개정판은 ‘자기만의 집’으로 제목마저 바꾼게 아닌가란 생각을 했다.
누구의 시선도 신경쓰지않고 오롯이 자기로 있을 수 있는 그런 곳. 아직 어린 너가 우는 것은 너 때문이 아니라고 무조건 엄마 잘못이라며 사과하며 안아주는 엄마가 있는, 소속감을 안겨주는 따뜻한 나만의 집.
딸에게도 엄마에게도 그렇게 위안이 되고 의미가 깊은 ‘자기만의 집’인 것이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마냥 편하게 엮을수만은 없는
세 여자의 연대와 각자의 사랑과 삶이란 결국 모순되게도 문제를 안고 살아가는 것임을, 무릎을 탁 치게되는 주옥같은 문장으로 잘 풀어두었다.

책을 읽으면서 문장에 표시를 그렇게 많이 하는 편은 아닌데 이 책을 읽으면서는 제법 많은 문장에 표시를 해두었다. 문득 이 책을 꺼내 표시된 문장을 찾아 읽는 것 만으로도 흔들리던 삶이 단단하게 뿌리내릴 것이라 믿어의심치 않는다.
이 책을 읽으면서,
자식뿐만 아니라 부모도, 모두 성장해 나간다는 것과 그 성장의 원동력이 집에서 함께 살 부비며 살아가는 것이라는데에서 위안을 얻었다.
그리고 띠지부터 적혀져 있는 “생은 시어빠진 레몬 따위나 줄 뿐이지만, 나는 그것으로 레모네이드를 만들 것이다”라고 고뇌로 가득찬 삶을 포기하지않고 그 안에서 꿈을 꾸고 목표를 정해 단단하고 맑아지는 주인공 호은이 참으로 멋져보였다.
실제로도 내 나이 또래일거라 더 공감이 가기도 했고,
안타깝기도했고, 응원하기도 했다.

난 또 레모네이드도 얼마짜리 레모네이드인들 어떠랴 라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정말 크고 싱싱한 레몬을 눈앞에서 몇개나 짜서 만들어주는 만원에 육박하는 레모네이드부터, 이게 레모네이드인가? 싶을만큼 달기만 한 공장에서 찍어내는 레몬이 채 1퍼센트도 들어있지않은(나머지는 합성향으로 대신하는) 레모네이드도 있을것이다.

공장에서 찍어내는 레모네이드가 된들 실패한 것일까?
오히려 누군가에겐 달달한 레몬향만 첨가된 레모네이드가 입맛에 맞을 수도있고, 접근성이 용이해 많은 사람들에게 이용되고 손쉽게 레모네이드를 접할 수 있게 해줄 것인데 이게 잘못된 것일까?

꼭 남들이 보기에 비싸고 좋아보이는 고급 레모네이드일 필요는 없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내가 되고 싶은 레모네이드의 모습이어야겠지만

밝은 미래를 꿈꾸며 학업도 아르바이트도 엄마와의 관계에도 최선을 다하는 호은의 인생은 고급 레모네이드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생길 수 밖에 없지만 결국 호은이 도달한 레모네이드가 달달한 저렴한 그것이라도 나는 기꺼이, 기쁘게 박수치고 그간의 노고를 치하하고싶다. 함께 레모네이드를 마시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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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스를 멈추지 않을 거야 - 고전 속 퀴어 로맨스
숀 휴잇 지음, 루크 에드워드 홀 그림, 김하현 옮김 / 을유문화사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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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유문화사에서 책을 지원받아 작성된 서평입니다.

서평단에 신청을 할 때는 설마 되겠어? 싶었고
서평단에 당첨되었다는 안내와 책을 받아들었을때는
큰 문제가 되겠어? 라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키스를멈추지않을거야 를 다 읽고 책을 덮었
을때는 이전의 내가 문제였다라는 것을 깨달았고 반성했다. 이 책의 목적이 바로 이런 회개일까? 싶었다.

90년대 말 2000년대 초반에 유명한 연예인이 이른바
커밍아웃을 하면서 중세시대의 마녀사냥처럼 낙인찍히고 말과 시선으로 불태워졌다.
하지만 지금은 아주 왕성하게 활동을 해 나가고있고
그 덕에 퀴어라는 사랑의 형태는 사람들에게 익숙해지고 받아들여지고 소위 다양성의 존중이라는 가치하에 양지화 되었다.
일종의 잔다르크 같은, 가장 험한 곳에 가장 먼저 몸을
던진 열사같은 사람이었지않나 싶다.
물론 자기자신을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큰 용기였을 수도 있지만 그 사랑법으로 인해 같은 처지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고 구원받고 사랑받게 되었으니 퀴어애를 하고있던 하고있지 않던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준 것은 자명한 일이다.

나도 동성애, 퀴어라는 말을 처음 듣고 인지한 것은 이 연예인의 커밍아웃이었다. 그래서 낯선 개념과 아름다운 영상으로 보던 아름답고 선망의 대상이던 사랑의 모습과 달라서 많이 당황하고 거북함이 들었던 것이 온전한 사실이다.

이런 무지로 인해서 동성애라는 것이 없다가 최근에 생겨난, 일종의 돌연변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열심히 다니지도 않았던 종교에서 이성을 사랑하는 것이 정상이라고, 순리라고 말하고 있었고(지금 돌이켜 보면 성경이 쓰여진 그 시간대에도 동성간의 사랑이 있었으니 이런 교리들이 쓰여져 있던게 아닐까? 왜 이런 생각은 하지못했을까) 그렇게 알지못했던 새로운 것이 기존에 내가 알던 세상에 적합하지 않는다는 막연한 기시감만으로 동성애를 거부했던 것 같다.

이런 생각을 저자인 손 휴잇은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우리가 알고있는(한번이라도 얼핏 들어봤음직한) 오비디우스, 호메로스, 플루타르코스, 소크라테스 등의 기원전에 이미 현세에서도 진리가 믿어지고 전공으로까지 배우려고 하는 3000년전의 지식인들의 말과 글에서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담겨져있는 퀴어글들을 추려서 한권의 책으로 묶었다.

300페이지가 채 되지 못하는 책에 강렬한 색체와 터치감으로 그려놓은 그림들과 함께 수많은 고대의 이야기들을 보다보면 이 책이 동성애에 대한 책이라는 것을 잊어버리고만다. 그냥 고대 로마와 그리스 시대에서 낭만적이고 절절한 로맨스가 있었구나 라고 생각하다가 인용된 글을 보여주기전에 그 글들에 대한 짧은 해설이 닮긴 소개를 읽을 때만 아 지금 이 사랑이야기의 두 주인공이 동성이구나를 인식하곤 한다
물론 금방 이러한 것은 잊고 사랑이야기를 읽고있지만.

40여개가 넘는 수천년 전의 동성간의 사랑이야기를 읽으면서도 동성간의 사랑이야기라고 생각하지 못하는 것은, 그 글에서 동성의 주인공이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되어있어서 별다른 설명따위 당연히 없기 때문이다
그 시대가 문란해서 그랬을까?
물론 고대 로마에 대한 문란함에 대한 인식이 강하게 남아있긴 하지만, 이것도 엘리트라고 불리는 지식인들이 평가하고 남겨놓은 역사서 때문에 가지는 일종의 선입견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정말로 문란했다더라도 굳이 동성간의 사랑을 선택해야 할 이유는 굳이 없지 않을까?
매력적이고 마음통하는 매력적인 이성들은 어디에나 있었을테니 말이다.
작가는 #키스를멈추지않을거야 를 통해서 종교적인 이유와 같은 다양한 이유들을 통해 꾸준하게 역사에서 퀴어가 삭제되어 왔다라는 것을 지적하고있다. 그 삭제의 역사가 수천년을 이어져오고 있다고, 그러니 그 이전부터 보통의 사랑의 방식으로 동성애는 존재하고 있었다고,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니라고, 이상하다면 그것을 이상하게 느끼는 현재 우리들이며 이상하게 느끼게 만든 사회의 잘못이라 말하는 듯 하다. 실제로 동성간의 사랑을 하고있는 사람들이 우리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 불결함의 극치라고 여겨지는 에이즈도 결국에는 그들의 선택에 대해 그들이 짊어지는 것이니 말이다.

실제로 겪지않고 겪어본 것 처럼 겪어보지 못한 일들에 대해 섣부르게 판단하고 인식하게 하는 것.
이게 사회화라는 이름의 교육에 문제점이 아닐까싶다
특히나 보수적인 동양의 문화권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퀴어를 상징하는 문양이 무지개지않나.
무지개는 두개의 색뿐이 아니고 단순하게는 빨,주,노,초,파,남,보 일곱가지 색이나 들어가있어 다양성을 뜻한단다(물론 과학적으로는 그 색들 사이사이에 수많은 색들이 그라데이션 되어있다. 더 다채롭지않은가)
하지만 나는 다채로움에 주목한다기 보다는 그 다양한 모든색이 결국 빛이라는 하나의 모습이라는 것에 주목하고싶더. 눈에 보이지않는 빛이 프리즘을 통과해 각 파장의 에너지에 부합하는 색으로 보이지만. 결국 모두 빛이지 않나.

어떤 형태든. 결국 원류는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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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에 빚을 져서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54
예소연 지음 / 현대문학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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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지원
책을 덮으니 그제서야 마음에 휘몰아치던 번개폭풍이 진정되는 느낌이다. 끝없이 일렁이는 바다에서의 긴 항해를 끝내고 갓 육지에 발을 내딛었을 때 발바닥으로 전해지는 익숙하지 않은 간지러움이, 이제는 일렁이지 않는 단단한 육지에 아직 적응하지 못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무사히 육지에 발을 내딛었을때 처럼, 무사함에 대한 안도감과 감사함이 올라오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실종된(말이 되지않는 문장이긴 하지만 ‘실종한’도 괜찮을 표현일지도 모르는)친구 석이를 찾아나서는 동이(글을 전개하는 나)와 혜란이를 보면서 이번에는 동이에게 다음에는 혜란이에게 나를 투영하면서 보았다.

11년 전 4월16일 아침에 벌어진, 영화내용이었어도 끔찍했을 배의 침몰과 이태원참사를 이 책 세명의 등장인물과 비슷한 거리감으로 겪은 나는 솔직히 석이처럼 희생자들을 너무나 안타까워하지도 않았다.
동이처럼 엄마의 죽음을 겪은 것도 아닌데도 나와는
관계없는 일이라는 마음이 솔직한 심정이었던 것 같다
솔직히 내 양력생일 아침에 벌어진 일이라 매년 생일이 되면 마음이 좋지않아서 ‘하필’이라는 생각도 해봤다
그리고 구할 수 있었는데 구하지 않았다는 것에 선장을 욕하고, 출처가 확실하지않은 인터넷 속의 카더라통신으로 음모론에 동조하고 이러더라 저러더라를 주변사람들과 이야기했었다.

마치 소설 속 동이와 혜란이 처럼...
그렇게 느껴져서 그랬는지 나는 실종되기전에 혜란이 결혼식 청첩장을 주러 나온 자리에서 이태원참사에 너무나 마음을 아파하며 울분을 토하는 석이를 차마 나무래지못했다. 현실이었으면 꼭 오늘 같이 좋은날에 그래야하나, 눈치챙겨라 같은 말을 했을 것이다 나는 분명.
하지만 그 말을 하지못했다
무슨 차이였을까.

아마 #영혼에빚을져서 를 읽으면서 조금 더 나와 관련있는 일이 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평소에 살면서 나의 아픔과 타인의 아픔을 비교하지 말라고, 심지어 같은 종류의 아픔이더라도 사람마다 느끼는 아픔의 강도도 다를 수 있다고 그렇게 믿고 행하며 살아왔는데 개인 대 개인을 벗어나는 일에는 한번도 이러한 원칙이나 관념을 가져야겠다는 마음(또는 시도)를 한번도 해보지 않았다는 사실이 이 책을 읽으면서 크게 다가왔다. 이런게 나뿐만일까? 그랬으면 다행이다 싶은데 이렇게 책으로 나올 정도면 제법 많은 사람들이 이러고 있는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어 또 입맛이 썼다.
어떠한 일로 느끼는 고통이나 안타까움, 슬픔과 같은 감정은 그 일의 객관적인 크고 작음이 아니라 얼마나 그 감정을 느끼는 ‘나’와의 거리가 가깝냐 머냐로 결정된다는 것을 다시한번 깨달았다.
단 한명의 죽음이지만 ‘엄마’를 잃은 슬픔이 수백명이지만 나와는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의 참사보다 비교 할 수 없는 만큼 크고 아프게 느껴지는건 어찌보면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비슷한 일들임에도 나와의 거리로 인해 발생되는 이 이중성을, 등장인물들이 봉사활동을 하러갔던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벌어졌던 독재로 인한 대학살과 꺼삑섬 압사사건을 이야기하면서 “그거랑 이거는 다르지”라고 무심코 헛웃음이 들이켜진듯한 투로 말을 뱉는 석이를 통해 또 한번 보여준다.
상대적으로 더 먼 일이 생기면 기존에 거리감이 있던 일은 조금 더 내 쪽으로 들어와 나의 일이 된다.
이 얼마나 간단하게 재단되는 가치인가

하지만 그래도 아무리 나와의 상대적 거리감이 멀어도
누군가에겐 당사자의, 주변의 일 일수도있고 자기일처럼 마음아파하고 괴로워하고 아무 도움도 되어주지 못해 죄책감마저 들어하는 석이같은 사람들이 있다라는 것도 나는 안다. 아니 막연히 알고만 있었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내가 당연하다 여기는 다른 일처럼 이러한 마음을 가지려 애쓰고 이해하고 잊지않으려 하며, 이러한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않도록 주의해야하는 의무가 있다라는 것을 알게(깨닫게)되었다.

이제 그것을 실천으로 옮길 차례이다
이렇게 다른 사람들에게 비참한 일들을 통해 내가 좀 더 나은 방향으로 성숙해져 가는 것.
이게 예소연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영원에 빚을 진다라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까지 오니 그런 의문이 든다.
실종된 것은 석이 일까, 다른 사람들의 아픔에 시선과 관심. 애도하는 마음일까.
그렇다면 이 글은 새드엔딩일까. 해피엔딩일까.

#영원에빚을져서 를 읽으면서 오랜만에 본 표현이 있었다. ‘톧아보다’였다. 틈이 있는 곳 마다 모조리 더듬어 뒤지면서 찾다 라는 뜻의 말이다. 책속의 ‘나’인 동이가 스스로를 톧아보았는데 조금만 더 확장하면 나 아닌 너를, 나와 너가 아닌 다른 이들을 톧아볼 수 있게 되는게 바람직한 모습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거창한가 싶지만 톧아보다 라는 표현의 어감이 투박하고 소박한 듯 느껴져 오히려 이런 생각을 하는데
부담을 줄여주었다.

이 글을 서평단모집으로 작성하는 글이지만 서평이라는 거창한 글도 아니고 글의 모든 내용을 담은 것도 아니다. 하고픈 말을 하게하는 묘한 힘이 실린 소설임은
분명하지만 그 모든 것을 글로 풀어낼 재주는 나는 없다. 이 글을 읽고 끌려서 책을 읽어주면 좋겠지만, 대체 무슨 소리야라며 답답함에 울분을 터트리며 이 책을 찾아읽는 것도 나에게는 성공이다.

다른 의미로 (여러의미로)
난 이 글을 읽는 분들에게, 영원에, 빚을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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