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의 수수께끼 - 개정판 마빈 해리스 문화인류학 3부작 1
마빈 해리스 지음, 박종렬 옮김 / 한길사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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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학 혹은 문화 번역

마빈 해리스『문화의 수수께끼』(한길사, 2018)를 읽고

 

<기생충>에서 이선균이 맡은 동익과 조여정이 분한 연교의 아들 다송은 지하실에서 올라온 귀신을 본다. 그러나 그 귀신은 귀신이 아니라 근세다. 왜 다송은 근세를 귀신으로 볼 수밖에 없었나. 다송은 한 번도 근세와 같은 존재를 마주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폭풍우에도 텐트를 치고 여행자처럼 잘 수 있는 다송의 세계 내에서 근세는 파악할 수 없는 존재이기에 이 모순을 전유하기 위한 방안으로 귀신이 동원된다. 이때 <기생충>은 다송의 상상을 푸닥거리하는 내용에 불과하다. 다송의 생일에 일어난 여러 겹의 살인(의 동기들) 역시 이름 없는 귀신의 존재처럼 불문(그 사건은 묻지 마 살인으로 정의된다)에 부쳐지고 새로운 가족이 매끔하게 들어찬다.

이토록 쉽게 무지가 신비나 경악으로 해소되는 영역이 바로 문화다. 그러나 "아주 기이해 보이는 신앙이나 관행도 면밀히 검토해보면 평범하고 진부하며 '통속적'이라고까지 할 수 있는 상황, 욕구, 활동 등에 근거를 두고 있다."(31) 마빈 해리스는 모든 문화 양식을 사회적 활동과 물질세계로 환원해서 최대한 객관과 과학의 근사치에 다다른 인류학을 제시한다. 그는 "꿈꾸는 자들이 자기들의 꿈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는다"(33)는 한계를 가정하며 의지를 북돋는다.

『소, 돼지, 전쟁, 그리고 마녀: 문화의 수수께끼』라는 원제에 따라 그가 선택한 첫 번째 주제는 인도의 암소 숭배다. 굶주려 죽어가는 와중에도 암소를 죽이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먼저 암소가 모든 생산을 가능케 하는 일종의 공장이기 때문이다. 건강한 수소를 낳는 암소는 늙고 병든 수소를 대체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수단이다. "수소가 별안간 병들면 가난한 농부는 자기 농토까지 잃게 될 위험에 처"(42)하기 때문이다. 또한 정기적 몬순이 찾아오지 않아 겪는 가뭄과 굶주림마다 소를 잡아먹으면(혹은 팔면) 당장의 고통에서 벗어날지라도 비가 온 후 토지를 경작할 어떤 생산 체제도 갖지 못한다. 그러므로 소 도살 금기는 순간을 만족시킬 욕구와 장기적 관점 중에서 후자를 택한 결과다. 결국 암소 숭배는 "복잡하고 정교한 물질과 문화의 질서에서 적극적인 능력을 개발해, 낭비나 나태가 들어설 여지가 전혀 없는 저 에너지 생태계"를 완성하는 핵심으로 밝혀진다. "서구 '전문가'"(49)들이 소를 살리기 위해 굶어 죽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우육을 사치품으로 생각하지 못했던 자들의 감각을 증명한다.

이후 등장하는 돼지숭배와 돼지 혐오, 화물 숭배, 전쟁, 포틀래치와 마녀사냥, 전투적 예수가 평화의 화신으로 희석된 이유 등을 설명하면서 마빈 해리스는 물질에 근거를 둔 자신의 입장과 태도를 견고하게 다진다. 1975년 발간되고 1982년 한국에서 번역되었기에 현대 인류학과 많은 차이가 있겠지만(또 학술서가 아니라 대중을 위해 쉽게 풀어 쓴 일종의 인문서이기에) 문화를 이해하고 논하는 데 있어 과학적 접근법을 채택한 것에 작은 의미를 두는 데 그쳐야 하는 게 아쉽다. 다만 그의 유물론적 관점은 책 전체에 걸쳐 꾸준히 신비주의와 정신 운운하는 자들을 비판하기 위한 일종의 무기처럼 쓰인다. 마지막 장 전체를 의식 혁명과 자연스러운 삶을 주장하는 반문화와 제3의 의식을 비판하며 끝내는 것은 그런 관점에서 당연한 결론이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문장을 기록한다. "반문화 관점에 선 인류학에서 원시인들의 의식은 빛과 힘을 갖고 있으나 전기료를 지불해본 적이 없는 무당들의 의식으로 요약할 수 있다."(315)

<옥자><설국열차>는 물론이고 <기생충>에서도 모스 부호를 받아 번역하는 마지막 장면을 통해 봉준호는 자신의 필모그래피를 ()번역사로 만든다. 그는 폭력의 원인을 소통 부재로 인식한다. 동익과 다송은 상호 소통 가능한 무전기로 서로의 존재를 끊임없이 확인하는 한편 근세의 모스 부호는 고장 난 전등이고 근세는 귀신에 불과하다. 귀신은 소통 능력이 부재한 자에게 등장한다. 봉준호가 계급 차와 폭력을 이러한 영화적 상징으로 해결하려 하듯이 카프카는 「변신」이나 「굴」을 통해 동물의 감각을 호흡해보고 싶었다. 마빈 해리스도 그들과 같은 맥락에 있다. 비물질과 마법으로 가득 찬 식민주의와 계몽주의의 폭력을 환기하고 당대성과 역사성을 끌어와 수수께끼를 타파함으로써 문화를 이해하기 때문이다.

p.s

이 책을 읽고 생각난 책이 있다. 케네스 E. 베일리의 『중동의 눈으로 본 예수 - 고대 중동의 삶, 역사, 문화를 통해 본 복음서』 (새물결플러스, 2016). 베일리는 자신이 중동에 40년 이상 거주하면서 중동의 맥락으로 예수를 읽어낸다. 1장 예수 탄생만 읽어봤지만 상당한 내공과 연구 자료 인용이 인상적이었다. 여기서 그는 예수가 태어난 마굿간을 집어본다. 베일리는 예수가 태어난 마구간은 방이 없어서 머물 수밖에 없었던 누추하고 더러운 곳이 아니라 당시 중동의 집 구조 상 집의 내부에 있으며 가장 깨끗하고 좋은 공간이다. 따라서 예수는 집주인의 호의와 초청 속에 축복과 함께 탄생했다. 『문화의 수수께끼』를 읽고 예수가 궁금해진다면 또 다량의 학술적 근거를 확보하고 싶다면 읽어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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