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번역의 역사
래리 스톤 지음, 홍병룡 옮김 / 포이에마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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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학을 전공하면서 성경과 그리스 비극을 모른다는 것은 비극이다. 그리스 비극의 경우 천천히 <소포크레스 비극 전집>을 완독하고 임철규의 해설서를 붙잡고 있다. 이제는 성경 쪽이 약한 것 같아서 성경을 읽어보려다가 조금 옆으로 새어 나가 성경 번역사를 읽어보고자 <성경 번역의 역사>를 집었다. 나는 정보량이 많은 책을 좋아한다. 그러다 보니 주로 읽는 글의 형식이 극단적이다. 주석이 많은 논문과 고전이거나 반대로 여백이 많은(그러나 독서에 동원해야 되는 정보가 논문보다 훨씬 풍성한) 시집이다. 그러나 이 책은 그 사이에서 다소 애매한 위치에 있다. 물론 이 책 단독의 결점이라기 보다 '가볍게 수많은'을 추구하는 입문서의 특징이다.

<성경 번역의 역사>라고 번역된 책의 원제는 <성경책 이야기 The Story of the Bible>다. 10개의 조각난 챕터 안에 수천 년의 번역사를 풀어놓다 보니 싱거운 책이 돼버렸다. 하고픈 이야기는 많은데 체계적이지 않다. 조금만 더 솔직해지자면 내용보다는 양장본의 고급진 만듦새와 각종 성경 사진으로 승부하는 책이다. 책에 딸려온 여러 사본의 실물 크기 자료는 왜 이 가격(25,000원)이 책정되었는지 말해준다. 오래 소장하면서 두고두고 성경 번역의 역사를 꼼꼼히 읽으려고 했는데 개괄하는 책이어서 당황했다.

그러나 이는 나의 독서 목적이 달라서 생긴 문제다. 저자는 나름 최대한 열심히 독자를 책에 묶어두려고 노력한다. 중립적인 서술에서 벗어난 경우도 종종 있지만, 객관적인 서술 위주다.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성경에 관한 가장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한다. 바로 원본이 없다는 것이다. 소위 근본도 없는(!) 책이 바로 성경이었다. 그러나 성경이 수 천 년 넘게 생존한 이유는 바로 그 근본 없음 때문이다.

로마 황제와 총독들이 다스리던 중동에서 초기 기독교는 믿으면 죽는 종교였다. 로마는 종교에 관용적이었다. "정복한 지역의 신들을 로마의 만신전에 합병시키곤 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중략) 일차적인 충성심을 로마 황제에게 바치지 않았"(78쪽)다. 따라서 이 불온하기 그지없는 성경은 색출되면 파괴되던 책이었다. 정치적 위험을 감수하면서 믿음을 고수하던 "그리스도인들은 기독교적 가르침의 내용만 생각했지 그 텍스트의 어구상의 정확성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58쪽) 당장 급한 건 책을 살리는 일이었다. 사본은 사본으로 전승되었다. 근본 없음의 다른 이름은 유연함이다.

그래서 히브리어로 쓰인 구약은 유대인이 히브리어보다 그리스어, 아람어, 시리아어를 더 많이 쓰면서 번역되기 시작한다. 구약 번역판 중 가장 중요한 것은 BC 3세기에 시작돼 2세기에 걸쳐 그리스어로 번역된 70인 역이다. 1947년 히브리어로 적힌 사해 사본이 발견되기 전까지 구약 사본 중 가장 중요했고 지금도 그 권위가 인정되어 그리스 정교회에서는 2300년째 70인 역을 사용한다.

70인 역 다음으로 중요한 사본은 5세기 초, 성경 전체를 라틴어로 옮긴 벌게이트 사본이다. 382년 교황 다마수스는 그의 비서이자 언어학자인 제롬에게 이 일을 맡겼다. 제롬은 70인 역을 참조하되 히브리어 원문에서 번역했다. 벌게이트 사본이 만들어진 이유는 성경이 여러 언어와 형태로 유포되던 4세기경 여러 번 필사가 이루어지면서 변형된 번역과 문체, 질을 통합하기 위해서다. 벌게이트가 만들어진 이유를 보면 성경 사본이 얼마나 많았는지 말해준다. 그런가 하면 125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존 라일랜즈 파피루스는 요한복음 18장의 몇 절을 담고 있는데, 이 사본의 존재는 복음서가 집필된 소아시아에서 멀리 떨어진 이집트에서도 신약이 읽혔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성경은 꽤 인기가 많았다.

이처럼 성경은 적극적으로 번역되고 복사되고 유포되는 책이었다. 다소 과도한 상상일 수 있지만 95개조 반박문을 쓴 루터가 출교당한 후 독일어로 성경을 번역하지 않았다면 과연 가능했을까 싶다. "비텐베르크에 있던 한 인쇄소는 불과 50년 만에 루터의 번역판을 거의 10만 부나 인쇄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중략) 루터의 성경 번역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그리하여 곧 성경이 프랑스어, 네덜란드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덴마크어, 노르웨이어, 스웨덴어, 아이슬란드어, 헝가리어, 보헤미아어, 폴란드어, 러시아어, 그리고 근대 그리스어 등으로 번역되었다."(135쪽)

독일의 가장 평범한 사람들 손에 성경이 쥐어지고 프로테스탄트가 강력한 세력으로 등장하자 가톨릭은 앞서 언급한 라틴어 번역의 벌게이트를 원본이라고 주장한다. 이 주장에 대해 프로트스탄트는 가톨릭의 많은 번역본이 라틴어 벌게이트를 원문으로 옮긴 것이지만 자신의 번역본은 그리스어와 히브리어에서 옮긴 것이라 원문에 더 가깝다고 반박한다. 이 주장과 반박은 각각의 입장을 말해준다. 가톨릭은 궁극적으로 성서에 권위를 부여하는 주체인 교회를 높인 셈이고 프로테스탄트는 반대로 교회에 권위를 부여하는 성서에 우위에 두었다. 프로테스탄트는 오직 성서만이 믿음의 근거였다.

이제 이 책을 덮고 다시 성경을 본다. 조그마한 감정의 흔들림이라도 있을 줄 알았는데 부지런하게 가지런해지는 모습이 아직도 어색하다. 아마 성경 내용만큼이나 책으로서 성경의 번역사도 경이로울 것이다. 다만 이 책이 그 경이를 세련되게 전달하지 못했다. 저자는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번역이 이렇게 중요하다는 걸 전혀 엉뚱한 곳에서 알게 된 독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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