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은 한길사 대학생 서포터즈 자격으로 증정 받은 도서임을 미리 밝힙니다.
신형철이 지젝을 변용하여 "김애란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도대체 가능한가?"(<몰락의 에티카>(문학동네, 2008) 693쪽)라고 했을 때, 정치철학계 버전은 "한나 아렌트를 인용하지 않는 것은 도대체 가능한가?" 정도 일 테다. <인간의 조건> 28000회, <전체주의의 기원> 17000회,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11000회라는 피인용수가 말해주듯이 정치철학을 논하는 데 있어 아렌트는 뒤집고 가던, 업고 가던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사상가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아렌트를 처음 읽기 시작하는 독자는 그의 방대한 저작 중에서 무엇으로 시작하는 게 좋을지 항상 고민이다.
소위 아렌트 입문서라고 불리는 책이 한국에 여럿 있다. 좋다. <한나 아렌트>라는 영화도 있다. 좋다. 그러나 아렌트의 글을 직접 읽는 것보다 더 나은 아렌트 읽기는 없다. 그런 맥락에서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한길사, 2019)은 한나 아렌트의 서평과 강연문, 논문으로 이루어졌기에 완독의 부담이 없다. 총 15장으로 구성된 책은 각 장마다 하나의 인물을 아렌트가 평가, 소개하는 형식이다.(예외적으로 야스퍼스에게 두 장을 쓴다.) 자신이 관심 있는 인물만 집어서 발췌독을 하는 게 더 좋은 책이다.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을 읽으면서 개인적으로 고등학교 때 사르트르에 관심을 가지면서 읽은 <시대의 초상>(생각의 나무, 2009)이 떠올랐다. 땅따먹기 게임을 하듯 사르트르가 다룬 인물을 읽어가다 보면 어느덧 사르트르를 대충이나마 가늠하는 능력이 생긴다. 이후 사르트르의 강연을 묶은 두 권의 책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이학사, 2008) <지식인을 위한 변명>(이학사, 2007)으로 또 <문학이란 무엇인가>(민음사, 1998)를 연쇄적으로 읽으며 관심이 커졌다.
그러나 아렌트의 문장은 사르트르만큼이나 길고 복잡해 읽기가 쉽지 않다. 또한 짧은 지면에 눌러 담은 서평과 연설문, 논문은 역사적 맥락을 생략하는 경우가 많아 현재의 한국 상황에서 독서하기 쉽지 않다. 그래도 아렌트가 이 책을 묶어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로 발표한 이유를 찾아보자는 임무를 부여하고 읽어가다 보면 각각의 인물에게서 길어낸 공통의 가치를 발견하는 재미가 있다. 독자는 이렇게 질문해야 한다. 18세기 독일 작가인 레싱과 발터 벤야민, 야스퍼스와 교황 요한 23세, 누보르망의 대표 작가 나탈리 사로트와 하이데거는 어째서 하나의 책 안에서 언급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우리는 아렌트가 설명하는 '어두운 시대'의 의미를 먼저 살펴봐야 한다. 브레히트의 시 <후손들에게>에서 가져온 이 구절은 선명한 악과 절망, 증오와 분노의 시대 자체를 지목하는 게 아니라 그것을 은폐하고 기만하는 기존 체제와 공공의 발언에 가깝다. 아렌트가 공적인 대변자의 언어를 "빈말과 허튼소리", "은폐하는 언어"(60쪽)라고 강하게 비판하는 이유는 "현실적인 또는 진정한 것은 모두 공공영역에서 억누를 길 없이 터져 나오는 빈말의 압도적인 힘에 의해 구타당"(62)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이데거를 인용한 "공적인 것의 빛은 모든 것을 어둡게 한다"(62)는 문장은 공공영역의 발언이 오로지 발언 권력과 권위만 두르고 실질적인 문제의 핵심을 파고들지 않으며 오히려 덮어버리려 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어두운 시대'는 "극악무도한 행위 그 자체와 동일한 것은 아니다."(62쪽) 반대로 '어두운 시대'는 과도한 긍정, 획일, 동질과 계몽이라는 강력한 빛이다. 그러므로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이 가정하는 구도는 어둠과 빛의 대결이 아니라 빛과 빛의 대결이다. 아렌트가 언급하듯이 "가장 어두운 시대에도 밝은 빛은 ... 불확실하면서 깜박이는 약한 불빛이다."(63) 그건 반딧불과 같은 미광이다. 이 희미한 빛은 승리에 기뻐하기보다 승리의 완결성에 의문을 던지는 도전과 실패의 역사고 무력하게 사라질 것만 같은 연대의 가교이자 그럼에도 잔존하는 가능성이다.
아렌트가 1장에서 18세기 독일의 시인이자 비평가 레싱을 "인식의 효모"(73쪽)를 뿌리는 자로 소개하는 이유는 밑바닥에 눌어붙은 한 줌의 가능성을 레싱에게서 봤기 때문이다. 레싱은 하나의 세계관에 정박하지 않고 끊임없이 비판적으로 사유한다. 그는 기독교를 설득하는 사람은 의심하고 기독교를 깔아뭉개는 사람으로부터는 기독교를 방어하는 사람이다. 레싱의 사유는 유연하고 분방하다.
아렌트는 이동을 자유의 대표적 사례로 꼽으며 개인을 강하게 예속하는 18세기 독일에서 사유를 이동의 대체재로 정의한다. 그러나 레싱은 사유를 품은 채 고독과 칩거의 길로 향하지 않았으며 나아가 사유로 얻은 결과를 문제 해결이라는 벽으로 몰아 새우 지도 않았다. 만약 문제를 해결하더라도 사유를 중단할 이유로 삼지 않았고 사람들의 사유를 촉발시키는 데 사용해 끊임없는 대화를 이끌어냈다. 그런 점에서 아렌트는 레싱의 18세기와 비교했을 때 20세기가 더 나아졌다고 말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왜냐하면 20세기는 진정한 공적 공간이 상실되었기 때문이다. 공공영역의 사라짐이라는 20세기적 상황에서 아렌트는 어떤 희망을 찾을까?
이 질문 덕분에 아렌트 읽기는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일처럼 여겨진다. 그는 인간이 저지르는 비인간적인 폭력과 조각난 자유 앞에서도 멈추지 않고 전진해 '행위'라는 가장 인간적인 구원의 가능성을 탐구한다. 시인 레싱을 모델로 제시한 이유는 아렌트가 우리에게 "가장 넓은 의미의 '시작詩作'에 이르는 길을 끊임없이 준비하고 있"(93쪽)다고 기대를 부여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가장 넓은 의미의 시작이란 이 끔찍한 세계로부터 도피하거나 익명을 내세우고 정신적 망명을 시도하는 게 아니라 가장 정치적인 인간의 공공영역으로의 복귀다.
그렇다면 아렌트가 200년 전의 레싱을 소개한 이유는 무엇일까. 왜 아렌트는 지금 레싱이 꺼내놓는가. 2장에서 다루는 로자 룩셈부르크 역시 아렌트의 어머니와 남편 블뤼허가 강한 지지를 밝혔지만 아렌트가 직접 만난 적은 없다. 오직 그의 논문과 책, 소문으로 로자를 그릴 수 있었던 그가 왜 로자를 지목했을까. 심지어 로자를 소개하는 2장은 네틀의 로자 전기에 대한 서평이 아닌가. 스승이자 친구인 하이데거, 야스퍼스, 발터 벤야민과 브레히트만큼 레싱과 로자가 이 책에 포함되어야 할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아렌트는 명확히 설명하지는 않았으나 독자는 4, 5장을 장식하는 야스퍼스에게서 그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짐작할 수 있다.
야스퍼스는 과거의 철학자들을 시간적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불러와 "시간적 계기를 공간적 대체 개념으로 전환"(170쪽) 한다. 시간의 직선에서 멀고 가까운 개념을 지우고 철학 영역 위에서 모두 평면화 시켜 우리와 철학자의 관계를 "영역에 들어가 자유스럽게 선택하는 지점에 달려 있게"(171쪽) 한다. 이 영역은 정신의 영역이지만 동시에 공공영역이기도 하다. 야스퍼스에 의하면 철학과 정치는 모두 공공영역에 포함된다. 왜냐하면 철학자의 주장은 철학자의 활동 기저에 있는 사람들에게서 영향을 받아 탄생하기 때문이다.
야스퍼스가 주장하는 철학의 평면화는 그의 세계시민이론으로 이어진다. 야스퍼스에게 세계시민 실현은 단일 주권의 실현과 정반대에 있다. 단일 주권은 견제를 받지 않으며 정치적 논쟁의 기반인 다양성, 다원성도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야스퍼스는 전통과 민족의 가치가 생산되는 경계와 시민 자격 부여의 권위, 지역의 구속력을 인정하는 형식의 세계시민이론을 주장한다. 아렌트는 이를 "야스퍼스는 전통이 아니라 전통의 권위와 단절함으로써 철학에 참여했다."(178쪽)는 문장으로 요약한다. 사라진 권위는 곧 세계의 상대화를 의미한다. 그곳은 다양한 철학이 상호 결합, 각축, 경쟁, 사용되는 장이다. 요컨대 모든 철학 사상의 종합은 소통이다. 철학과 철학 사이의 고리, 사유와 사유 사이의 시냅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대화가 존재할 수 있는 곳을 야스퍼스는 세계시민의 실현으로 꿈꾼 것이다.
이 글에서는 레싱과 야스퍼스만 다뤘지만 다양한 성과 직업, 국적과 인생사가 교차하는 이 책에서 흥미롭지 않은 인물은 없다. 14명의 인물을 읽어가다 보면 그들과 아이히만을 비교해보고 싶어지기도 하고 종국에는 아렌트 본인의 생애도 궁금해질 책이다. 이들과 우정을 나누고 편지를 주고받으며 영향을 끼친 아렌트는 도대체 누구인가. 아렌트는 무슨 말을 했고 왜 했는가. 그렇게 다음 책을 읽다 보면 우리는 영원히 아렌트를 인용하지 않을 수 없는 사태에 이른다. 아, 한나 아렌트를 인용하지 않는 것은 도대체 가능한가?
- 번외로 책에서 오탈자로 확인되는 부분을 기록한다. 발췌독을 해서 책 전체의 오탈자는 확인하지 못했다. 오탈자도 읽기를 자주 방해했지만 편집 이전에 번역도 유려한 편은 아니라 읽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아렌트의 문장은 길어서 번역의 난도가 높은 편임에도 번역에 관심이 하나도 없으면서 한글날만 열심히 지키는 한국 땅에 아렌트의 저서가 하나라도 더 번역되어야 된다는 일념으로 번역해 주신 번역자 홍원표 선생에게 감사의 뜻을 전한다.
1. 115쪽 위에서 5번째 줄: "마르크주의자인지를" → "마르크스주의자인지를"('스'가 탈락했다.)
2. 115쪽 아래서 7번째 줄: "그녀가 어떠한 장황한 비판에도 관여하느냐고 결코 신경을 쓰지 않은 이유였다." → 어떠한이 들어갔기에 "그녀가 어떠한 장황한 비판에도 관여하지 않느라고 결코 신경을 쓰지 않은 이유였다."정도가 적절하다. 원문은 이러하다. "that was why [she] never bothered to engage in any lengthy critique." 겨우 학부생이 감히 번역을 해 보자면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어떤 장황한 비판에도 관여하려고 애쓰지 않았다."로 해석할 수 있다.
3. 130쪽 주석 15번: "고대 강국인 에피루스는 기원적 279년 로마군과 아드리아해 부근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이 어렵게 승리한 데서 유래한 말로" → "고대 강국인 에피루스가 기원전 279년 로마군과 아드리아해 부근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어렵게 승리한 데서 유래한 말로"
4. 468쪽 6번째 줄: "앙드레지드" → "앙드레 지드"로 띄어쓰기해야 한다.
5. 307쪽 마지막줄: "아버지는 아들이 대학교수 자격증을 획득하더라고 매달 보내고 있는 지원금을 늘릴 수도 없고" → "아버지는 아들이 대학교수 자격증을 획득하더라도"
6. 309쪽 주석 69번: "많은 사람들이 지적 자양물인 아버지 콤플렉스는" → "많은 사람들의 지적 자양물인 아버지 콤플렉스는"이다. 원문도 소유격이다. "the father complex which is the intellectual nourishment of many"
7. 329쪽 아래에서 8번재 줄: "솔렘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던 당시에 베냐민은 전통과의 소외가 아마도 자신의 유대인성에 기인한다고 여전히 믿었으며, 예루살렘으로 이주하려는 친구들뿐만 아니라 자신에게도 열린 복귀하는 길이 존재할 수 있다고 여전히 믿었다." → 이 문장에서 어색한 것은 "자신에게도 열린 복귀하는 길이 존재할 수 있다"는 구절이다. 원문은 이렇다. "In those days, encouraged by Scholem, he still believed that his own estrangement from tradition was probably due to his Jewishness and that there· might be a way back for him as there was for his friend, who was preparing to emigrate to Jerusalem." "열린"은 한국어 문장만 봐도 없어도 괜찮은 단어다. 형용사가 두 번 나와서 어색하기 때문이다. 원문에도 '열린'의 의미를 가진 단어를 찾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