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자 문지 스펙트럼
토마스 베른하르트 지음, 김현성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0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소설집 <모자>(문학과지성사, 2020)를 읽었다. 독서가 그리 재미있지는 않았다. 단편 소설 선집인데 같은 계열 속에 다른 항으로 배치된 이야기 속에서 무기력, 자연의 공포, 대화 불가능성이 계속 감겨 나와서 지겨웠다. 끝에 작은 반전이 있지만 반전이 유의미하게 제시된다기 보다 지독하게 반복되는 이 이야기를 어떻게 한번이라도 쾌적하게 만들까 고민하다 들어간 것처럼 어색했다. 그래도 몇 가지 소설의 단상을 적어보자.

<두 명의 교사>는 새로 부임한 교사와 계속 학교에 근무하던 '나'의 산책으로 시작한다. 신임 교사는 자신의 이야기를 도저히 들려주지 않고는 참을 수 없다는 고백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터저나오는 고백의 아슬함에 비해 본격적인 이야기는 한참 후에 등장하며 두 교사의 '대화 없음' 혹은 '(대화의 반대말로서) 언급'이 이어진다. 소재와 발화는 있되 소통은 없었던 그들의 '언급'은 주로 날씨의 변화, 책, 음식, 오솔길이었고 이런 언급들은 진정한 되려 "대화 욕구를 파괴한다." 그들은 "대화를 피해야하는 사람들이다." 어떻게든 시작하려한 대화는 자꾸 "다시 언급에 불과한 것이 되어버렸다."

사실상 이 단편의 메인 테마는 그 이야기의 내용이 아니라 이야기의 무기력이다. 신임 교사는 몇 주간의 불면 끝에 잠들었다 짐승 때문에 다시 깨서 그것을 죽였다는 이야기를 하지만 그 훨씬 많은 비중이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가, 혹은 가능하더라도 언급으로 무화되는 게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차지한다. 그 공포는 불면으로부터의 해방을 방해한 짐승을 비롯해 "이기적"이고 "광포"하고 "갑작스"러운 자연에 기반한다. 그 이유는 모든 대화를 언급으로 환원하는 힘이 자연의 날씨, 오솔길과 음식에 있기 때문이다. 수면을 방해한 짐승을 죽이는 것은 발화를 시작했고 진정한 대화를 원하는 자신의 의지를 방해하는 존재에 대한 공포의 반작용으로 읽힌다.

그런데 정작 그 대화가 시작되었을 때, '나'는 다른 생각을 한다. 신임 교사의 대화보다 산책로의 방향에 더 신경을 쓰고 그 방향 선택에 대해 "과감하게 왼쪽으로 가지 못한다"거나 "갑자기 왼쪽으로 갈 용가가 그에겐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곧 "그는 나보다 마음이 약하"다고 생각한다. 대화가 성립했다고 생각했을 때 역시 그들은 만날 수 없다. 오로지 반대 항(자연, 수면을 방해한 짐승)을 제거할 때, 그러한 폭력의 순간만이 대화의 전부가 되 버렸다.

그러므로 이 단편의 끝에 신임 교사가 자신의 불면과 짐승 죽이는 이야기와 함께 "벌써 새로운 재앙의 징후를 감지"했다며 용서를 구하는 이유는 '나'를 향한 살인 충동을 예상했기 때문이 아닐까. <프랑스 대사관 문정관>에서 '나'는 식사가 시작되기 직전 숲속으로 사라진 숙부를 걱정한다. 살인이나 실종처럼 끔찍한 범죄 피해의 가능성을 점치며 밥을 먹는데 식사 시작 30분만에 돌아온 숙부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어떤 젊은이를 만나 정치, 문화, 산림경영햑과 예술에 상당한 내공을 소유한 그 젊은이와의 대화가 얼마나 즐거웠는지, 그러나 그의 이름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런데 그 젊은 이는 며칠 후(이 단편은 일기 형식이라 날짜가 있다.) 총에 맞아 죽은 채 발견되었다.

토마스 베른하르트는 소설(집) 전반에 말라가는 대화의 진정성과 부풀어 오르는 혐오의 폭발을 대비시킨다. 그는 한번도 대화가 성공하리라 예상하지 않는다. <야우레크> 역시 외삼촌과 한 마디도 말을 섞지 못한 '나'의 이야기다. 외삼촌은 '나'를 철저히 무시한다. 도시의 과잉에서 벗어나 시골의 한적함을 누리려했던 그의 삶은 외삼촌의 채석장 사무직으로 일하면서 무기력으로 우회한다. "외삼촌에게 다가가는 것조차 내게는 이미 불가능하다." '나'는 외삼촌의 무관심을 어머니의 죽음과 연관시키니다. 예전에 어머니를 외롭게 해 자살을 유도한 것처럼 '나'를 고립시키는 전략이 아닌가 의심한다.

그래서 '나'는 외삼촌의 속셈에 넘어가지 않기 위해 종종 채석장에 찾아오는 코미디언을 따라가며 퇴근 후 시간을 소소하게 보낸다. 그럼에도 "나는 사실 가장 절망한 사람이어야 하고", "극심한 절망에 빠져야 한다."면서 어머니의 죽음을 잊지 못하는 마음을 드러낸다. 하지만 주입식 절망은 이제 "절망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 자체가 우스꽝스"러운 상황에 닿았고 "살기위해서는 사람들과 어울려야 한다"는 생각에 압도되어 직원들에게 웃긴 말을 해준다. 소설의 말미에 무려 세 번이나 반복되는 "나는 코미디언이 아니다"는 말은 코미디언이 된 '나'의 현실 부정으로 해석된다. 즉, 고립된 '나'는 웃음거리로만 겨우 존재한다. "우스운 이야기를 하는 것 보다 더 괴로운 일은 없다"는 '나'의 외침은 누구에게도 뻗어가지 못한다. '나'가 편지를 쓰되 그 대상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나'는 비극과 희극을 오가는 순환선에 올라탄 코미디언이라는 하나의 항, 숫자('나'는 채석장에서 회계사로 일한다), 배우에 불과하다.

<야우레크>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모든 사람이 모든 것에 대해 모두를 비난한다"는 문장은 따라서, 겨우 절망하지 않기를 희망하는 '소확행'적 인간이 자기 기술(self-description)적인 공간을 만들다 타버린 피드백-루핑(feedback-looping)의 과열로 보인다. 정지돈은 소설 <은뢰>에서 자기 기술에 관해 이렇게 설명한다.

나는 나지만 내가 아닌 나와 내가 아니지만 나인 나로 나눠져 등장할 것이다. 이것은 내가 모든 서술에서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하는 행동이었고, 우리의 모든 인식은 구성된 것이며 객체와 주체는 분리되지 않고 우리는 끊임없이 순환하는 피드백 속에 있다는 사실은 인간 행위의 가장 기본이 되는 틀이라고 나는 평소 생각했기에(모든 것은 모든 것에 대한 모든 것이다!)

정지돈 <은뢰>

정리하자면 토마스 베른하르트는 하나의 닫힌 비극론을 펼친다. 그건 비극이기 때문이 아니라 닫혔기 때문이다. 대화는 자연이 잡아먹고, 자연은 공포의 반작용으로서 폭력이 구속하는 상황은 서로 꼬리를 문다. "모든 사람이 모든 것에 대해 모두를 비난"하고 코미디는 비극으로 수렴하고 비극은 코미디로 다시 흘러들어 삶을 지속하는 생존의 기술이 된다. 그런데 생존 방법 역시 일종의 비극이디어 세계는 순환을 되풀이 할 것이다. 서로를 물로 늘어지는 이 과정은 영원히 원심분리되지 않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