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화가 김홍도 - 붓으로 세상을 흔들다
이충렬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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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를 대표하는 화가, 왕의 총애를 받았던 어용화사이자 지금까지도 전해지고 있는 작품들을 통해 폭 넓게 사랑받고 있는 천재 화가 단원 김홍도. 널리 알려져 있는 그의 그림과는 상대적으로 그의 삶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던 부분이 많다. ‘간송 전형필’, ‘아, 김수환 추기경’ 등 실한 자료 조사와 대상을 생생하게 묘사하는 문학적 역량을 바탕으로 출간하는 작품마다 크게 사랑받고 있는 한국 문학계의 보기 드문 전기 작가 이충렬은 이번에도 기대했던 대로 화가 김홍도를 넘어 인간 김홍도를 그려내고 있다.

 

가난한 어촌마을에서 무반 출신의 중인으로 태어나 그림에 뜻을 품고, 스승 표암 강세황과 현재 심상정, 평생의 지기 이인문 등을 만나 도화서 화원이 되고, 세 번이나 어진을 그린 어용화사이자, 당대 손꼽히는 화가로 양반, 평민을 비롯한 다양한 계층의 사랑을 받았던 그의 60년의 삶은 실로 파란만장했다.

 

어용화사에 대한 공로로 엄격한 신분 사회 속에 중인이 오를 수 있는 최고 품계인 종6품의 벼슬을 세 번이나 제수 받고, 현감의 자리까지 오르지만 그는 관직을 불편해하면 도화서로 돌아가고 싶어했고, 평생 화가로서 살기를 원했다. 속화를 그리기위해 화구통을 메고 한양 저잣거리를 다니며, 강희언의 집에서 도화서 화원들과 함께 모여 주문받는 그림을 나눠 그리고, 백운동천에 집을 마련하고 자연을 벗 삼아 지인들과 시와 그림을 나누던 나날이 그에게는 가장 행복했던 시간이 아니었을까.

 

어용화사로서의 명예와 도화원의 뛰어난 화원, 양반들이 앞 다투어 작품을 주문하는 당대 유명한 화가였지만, 엄격한 신분 사회였던 조선에서 벼슬에 올라 오히려 견고한 신분 사회의 한계를 느끼고 그림에 매진했던 김홍도의 삶의 마지막은 화원을 그만두고, 아들의 월사금을 보낼 돈 조차 없을 정도로 궁핍하고 쓸쓸하게 끝났지만, 그의 그림은 긴 시간동안 남아 지금까지도 극찬을 받으며 사랑받고 있다. 가족, 스승, 명예, 소중한 많은 것들을 잃어가면서도 더욱 격조있고 단단해지는 그의 그림은 삶의 고단함 속에서도 끊임없이 성장하고 앞으로 나아갔던 김홍도의 힘을 느낄 수 있게 해준다. 

 

어떤 그림을 그리고 싶냐는 스승 심상정의 물음에 ‘사람의 마음과 통하는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대답한 그는 또 다른 스승 강세황과의 대화에서 깨달음을 얻고 사람의 삶을 담은 그림을 그리기 위해 삶의 냄새가 나는 ‘진경’ 속으로 들어가 백성의 삶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속화를 그린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씨름, 서당, 길쌈, 대장간 같은 <단원풍속도첩>에 수록된 작품들은 그 시대의 사람들이 일상을 인간미넘치게 그려내고 있다. 동시에 그는 왕의 총애를 받는 어용화사이자 도화원에서 가장 실력이 높은 이들이 모인 1방 화원으로서 송하맹호도, 해동명산도첩, 병진년화첩 등 수려하고 우아한 작품 역시 많이 남겼다. 

 

멋스럽고, 인간미넘치고, 때로는 사랑스러운 단원 김홍도의 그림 자체의 힘도 대단하지만 그의 파란만장했던 인생속 행복과 고뇌, 마지막까지 그 무엇보다 화가로서 살아가고자 했던 그의 삶의 궤적을 세심한 사료 조사를 통해 입체감과 생동감 넘치게 그려내준 덕분에 그의 작품을 한층 더 깊이 있게 볼 수 있게 되는 좋은 계기가 된 것 같다. 100점에 달하는 그림 도판에 눈이 즐겁고, 김홍도의 일생에 마음을 빼앗기게 만드는 매력 넘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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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머리가 정상이라면
야마시로 아사코 지음, 김은모 옮김 / 작가정신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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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러와 애절함. 참으로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조합이다. 하지만 잔혹함과 애절함, 인간의 어두운 면과 순수성, 씁쓸함과 사랑스러움의 공존이 이 작품의 가장 큰 매력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 야마시로 아사코는 여러 가지 얼굴을 가지고 있다. 공포, 미스터리 작가로 유명한 ‘오쓰이치’, 청춘 및 연애소설을 쓰는 ‘나카타 에이이치’라는 자그만치 세 명의 각기 다른 필명으로 여러 분야에서 활약하고 있다. 아직도 오쓰이치의 단편집 [ZOO]를 처음 읽었을 때 느꼈던 오싹했던 감각이 강렬하게 남아있다. 차갑고 섬뜩한 감성의 오쓰이치와 투명하고 애절한 야마시로 아사코. 과연 한 사람이 이렇게나 흑과 백의 다른 느낌으로 작품을 쓸 수 있다니 놀랍다라는 말 밖에 나오지 않는다.

 

이 책은 분명 호러의 세계이다. 짤막한 이야기들 속에는 유령도, 정체를 알 수 없는 미지의 존재도 등장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무엇보다 인간의 욕망이 가장 잔혹하다. 욕망과 탐욕으로, 때로는 무심함으로 타인의 세계를 파괴한다. 하지만 동시에 강인하게, 그리고 다정하게 그 상처를 치유하는 것 역시 사람이다. <무전기>, <내 머리가 정상이라면> 에서 보여주는 고통을 이겨나가는 인간의 모습은 애절하면서도 강하게 사람의 마음을 울린다.

 

제각기 다른 색깔을 보여주는 여덟 편의 이야기에는 모두 무언가의 상실을 담고 있다. 몽환적이면서도 애달프다. <머리 없는 닭, 밤을 헤매다>의 후코는 이모에게 소중한걸 다 빼앗긴다. <아이의 얼굴>의 과거 타인의 삶을 빼앗은 네 친구는 자신의 아이라는 존재를 빼앗긴다. 하지만 후코의 이모가 절대 빼앗을 수 없는 것은 있었다. 슬럼프로 가족을 잃은 <이불 속의 우주>의 작가는 자신만의 우주로 날아갈 수 있는 이불과 만나게 된다. 머리 없는 닭 교타로와 함께 후코를 찾아 쓸쓸한 어둠 속을 산책하는 소년의 뒷모습은 서글프지만 밤길을 별이 밝혀주는 별이 있고, 혼자가 아니기에 마냥 외롭게만 보이지 않는다.

 

“교타로”

나는 머리 없는 닭에게 말을 걸었다.

“어디로 갈 거니? 어디로 가면 돼?”

차가운 밤공기 속에 입김이 하얗게 피어올랐다. 가로등은 손에 꼽을 정도밖에 없다. 그래서 맑은 날은 하늘에 별이 총총하다. 나와 머리 없는 닭은 마치 별이 쏟아져 내릴 것 같은 하늘 아래를 가고 싶은 대로 나아간다. 아득히 넓고 쓸쓸한 세상이 시야 가득 펼쳐진다. 나는 머리 없는 닭과 함께 언제까지나 밤의 어둠 속을 헤맨다. (P71~72, 머리 없는 닭, 밤을 헤매다.)

 

우리는 모두 상실을 피할 수 없다. 그러나 상실은 끝이 아니다. 아주 작은 계기로도 내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말하는 작가의 메시지가 쓸쓸함과 비애가 감도는 이야기 속에서도 희망을 전달하고 있다. 지긋하게 전해오는 온기 넘치는 위로를 받은 것만 같은 시간이다.

 

각양각색의 인생이지만 하나같이 축복과 비애로 가득하다. 모든 필름이 별처럼 반짝여 내 가슴을 채웠다. 영상이 끝날 때마다 나는 운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죽은 자의 나라로 떠나는 사람에게 위로의 말을 건넨다.

 

아이들아, 잘 자요.

사람들아, 잘 자요.

잘 자요, 편안하게. (P256, 아이들아, 잘 자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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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를 알면 역사가 보인다 - 그림으로 보는 세계 신화 보물전
최희성 엮음 / 아이템비즈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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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가메시로부터 토르와 제우스에 이르는 신화 여행

어린 시절부터 자주 접해왔던 그리스-로마 신화, 최근 마블 영화로 어느새 친숙해진 북유럽 신화 이외에도 세계에는 무수한 신화가 존재한다. 요즘 신화에 관심이 많아 다양한 신화를 한꺼번에 다루는 개관서 같은 책을 찾고 있었던 차에 이 책이 눈에 띄었다.

책에서는 인류 최초의 문명이 시작된 메소포타미아를 시작으로 이집트, 페르시아, 인도, 중국, 일본, 헤브라이, 태국, 베크남, 필리핀, 몽골, 티벳, 그리스, 발트해, 슬라브, 켈트, 핀란드, 북유럽, 아프리카 줄루족, 도곤족, 폰족, 거인족, 마야, 잉카, 에스키모, 아메리카 인디언, 아스테카, 폴로네시아까지 30여개에 이르는 세계의 다양한 신화를 소개하고 있다.

워낙 다양한 나라의 신화를 다루다보니 주로 창조신화와 영웅신화, 유명한 신을 위주로 간단하게 소개하고 있지만, <그림으로 보는 세계 신화 보물전>이라는 부제답게 내용과 관련된 도판과 사진 등이 많이 수록되어 있고, 평소 접하기 어렵거나 전혀 알지 못했던 신화도 많아 보는 즐거움이 있다. 최초의 영웅 신화인 길가메시 신화나 켈트 신화의 영웅 쿠 훌린 이야기, 엑스칼리버와 원탁의 기사가 자동으로 떠오르는 아서 왕 신화 같은 영웅 신화는 흥미진진한 모험이 가득한 이야기 속으로 안내한다. 페르시아 창세 신화, 인도네시아의 하이누웰레 신화, 정령과 작은 신들이 가득한 슬라브 신화, 락 롱 꾸언과 어우꺼라는 베트남 건국 신화, 아프리카 요루바 신화 같이 신의 이름도, 내용도 생소한 여러 신화들은 신화의 세계가 얼마나 넓고 다양한지 보여준다.

제목처럼 신화를 통해 그 나라의 역사를 이해할 수 있다고까지 말할 순 없지만 신화 속을 들여다보면 자연조건이나 환경, 각각의 생존방식에 영향을 받은 것을 알 수 있다. 아프리카 신화는 자연친화적이고, 이누이트 신화는 수렵 생활이 많이 반영되어 있다. 노아의 방주이야기의 기원이 되는 수메르의 홍수 신화를 보면 인간의 힘으로 막을 수 없는 자연 재해를 고대인들이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조금 알 수 있을 것도 같다.

신화란 결국 인간이 만들어낸 이야기이다. 각 나라마다 독자적이고 독특한, 그러면서도 서로 영향을 받은 다양한 신화는, 신화가 만들어지던 시대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어떤 문화 속에서 생활했는지 자연스럽게 보여준다. 더불어 신화는 인간을 이해하기 위한 소재로도 훌륭하지만 이야기로서도 무척 매력적이다. 아쉽게도 이 책에는 너무 많은 문명의 신화를 다루고 있다보니 각 신화의 맛보기 같은 느낌을 받아서 오히려 신화에 대한 호기심이 더 커졌다. 본격적으로 신화를 좀 더 깊게 다루고 있는 책들을 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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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애의 도시 이야기 - 12가지 '도시적' 콘셉트 김진애의 도시 3부작 1
김진애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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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는 모쪼록 이야기가 되어야 한다” 

 

건축가 김진애의 도시 3부작의 첫째 권 <김진애의 도시이야기>는 12가지 콘셉트로 도시를 읽어나간다. 2003년과 2009년에 출간되었다가 이번에 새로 복간, 개정된 둘째 권 <도시의 숲에서 인간을 발견하라>와 셋째 권 <우리 도시 예찬>의 바탕이 되는 저자의 도시에 대한 주제의식에 대해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익명성, 권력과 권위, 기억과 기록,

알므르 예찬, 대비로 통찰, 스토리텔링, 코딩과 디코딩,

욕망과 탐욕, 부패에의 유혹, 현상과 구조,

돈과 표, 진화와 돌연변이>

 

그가 제시하고 있는 콘셉트를 통해 매일 접하기에 오히려 무심코 지나치는 도시의 다양한 면들이 눈에 들어온다. 평소 관심을 가지고 있던 주제도 있는가 하면 도시와 연관해서 생각해보지 않았던 주제도 있어, 좀 더 다양한 시각과 관점으로 도시의 사회적, 문화적 현상들을 생각해보게 만든다.

 

‘익명성’은 보통 도시의 부정적 요소로 보는 경우가 많다. 도시가 커질수록 익명성 역시 커진다. 하지만 저자는 “도시적 삶의 근본조건은 익명성이다.”라고 말한다. 도시라는 공간을 어떻게 만들고 활용하는냐에 따라서 익명성은 문제를 만들기도 하지만, 자유롭고 풍요로우며, 도시를 도시답게 만들기도 한다. 

공간이란 합의와 단합을 만들어내기도 하지만 또한 차별과 배척을 낳기도 하는 애증의 존재이다. 그것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장소 중에 하나가 도시일 것이다. 광장, 아파트 대단지 같은 주제들은 익명의 인들이 모여 만들어진 집단이 가진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잘 보여준다.

 

도시는 인간의 욕망이 강하게 드러나는 공간이기도 하다. 정치와 권력, 자본은 도시와 떨어뜨려 생각할 수 없는 주제다. 수많은 사람이 모여사는 도시는 그만큼 권력과 자본역시 집중된다. 그렇기에 그 권력이 어떻게 사용되느냐에 따라 부패하고 타락한 도시가 되느냐 안전하고 풍요로운 되느냐에 큰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도시의 힘은 권력의 부정적인 방향을 바꿀 수 있는 힘을 가지기도 한다.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의 응집은 거대한 힘을 만든다는 것을 우리는 최근에도 확인할 수 있었다.

 

도시는 항상 변화하는 살아있는 생물과도 같다. 특히 우리의 도시는 그 변화하는 속도가 무척 빠른 편이다. 마치 유행처럼 길과 건물이 만들어지고, 사라진다. 요즘은 복고(Retro)를 새롭게(New) 즐기는 뉴트로 열풍이 뜨겁게 불고 있다. 짧게 사라져버릴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우리의 도시가 너무 빠른 속도에 지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기도 하는 한편, 도시가 또 어떤 모습으로 변화할지 흥미롭기도 하다. 

 

나는 도시에 살고 있다. 큰 이변이 없는 한 앞으로도 아마도 오랜 시간 도시에서 살아갈 것이다. 매일을 살아가는 도시는 과연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가. 나는 이 공간을 어떻게 느끼고 있을까? 일상이 되었기에 너무나도 당연한 도시의 풍경들에 대해 이 책은 조금 다른 시점을 가지고 바라보게 해준다. 저자의 말처럼 이방인의 시각으로 도시를 바라보면 이상하고 부정적인 면 만큼이나 좋은 점들 역시 많이 눈에 들어온다. 아마도 나는 생각보다도 이 도시를 더 많이 사랑하고 있었나보다. 앞으로 또 도시는 나에게 어떤 공간으로 다가올지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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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영 ZERO 零 소설, 향
김사과 지음 / 작가정신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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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아먹히지 않으려면 부지런히 머리를 굴리고 몸을 움직여야 한다.

그게 전부예요, 여러분. (P55)

 

‘0’이 반복되는 제목만큼이나 인상적인 표지로 시선을 잡아끄는 <소설, 향> 시리즈의 첫 번째 이야기 <0 영 ZERO 零>는 얇지만 가볍지 않은, 서늘하면서도 강렬한 작품이다.

 

이야기의 시작. ‘나’는 평일 오전 도심의 한산한 스타벅스에서 성연우와 이별을 하고 있다. 4년 남짓의 시간 사귀는 동안 느껴왔던 고통을 토로하며 감정적인 모습으로 나를 비난하는 성연우와 달리 ‘나’는 마치 관객의 시선을 계산하며 자신을 돋보이기 위한 대본을 연기하고 있는 배우처럼 보인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식인(食人)하는 종족이다. 일단 그것을 인정해야 한다.

윤리와 감정에 앞서서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무슨 말인고하니, 세상은 먹고 먹히는 게임이라는 것이다.

내가 너를 잡아먹지 않으면, 네가 나를 통째로 집어삼킨다. 조심하고, 또 경계하라. (P46)

 

‘나’의 세계는 피가 튀지 않는 식인의 세계다.

플러스와 마이너스가 합쳐진 제로의 세계에서 잡아먹는 위치에 계속 존재하기 위해 알리스(‘나’의 영어이름이다.)는 끊임없이 먹이를 탐색하고 포착한 먹잇감을 선한 얼굴과 빈틈없는 모습으로 포장해 잡아채 망가뜨린 후 자비 없이 먹어치운다. 자신의 강의를 듣는 세영의 재능을 망가뜨리고, 아버지의 죽음 후 엄마의 세계를 부숴버린다. 주변의 행복을, 재능을 은밀하게 먹어치우며 그 속에서 태어나는 불행을 먹이로 하는 현대의 식인종 알리스. ‘나’에게는 가족이나 연인조차 잡아먹어야 하는 먹잇감에 불과하다.

 

알리스를 보고 있자면 마치 사회화된 사이코패스처럼 보인다. 하지만 또 한편 정말 ‘나’는 나와는 완전히 다른 존재인가 하는 의문도 든다. 정말 단 한번도 자신의 행복을 위해 타인의 불행을 눈감아 본적 없는 사람이 과연 존재할까? 알리스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서늘한 공포가 느껴지는 반면, 또 한편으로 완전하게 그를 부정할 수 없게 만든다.

 

사람은 누구나 각별한 타인의 불행을 바란다.

각별한 타인의 불행을 커튼 삼아 자신의 방에 짙게 드리워진 불행의 그림자를 가리고자 한다. (P120)

 

하지만 아무리 잡아먹히지 않으려고 부지런히 머리와 몸을 움직이는 성공한 식인종인 ‘나’ 역시 과거 다른 식인종의 먹잇감이었고, 완벽하게 포장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순결한 포식자의 모습 또한 엄마와 성연우에게 간파당한다. 먹고 먹히는 연쇄적인 순환의 세계는 또한 0의 세계이지 않을까.

 

세간의 소문과 달리 인생에 교훈 따위 없다는 것.

인생은 교훈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을 안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0. 제로.

없다.

아무것도 없다.

지금 내가 응시하는 이 텅 빈 허공처럼 완벽하게 깨끗하게 텅 비어 있다. (P187)

 

포식자를 자처하며 앞으로도 아무 문제없이 잘 살아갈 것이라고 자신하는 ‘나’의 세계는 무척이나 공허하게 느껴진다. 제목 속 <>을 사전에서 검색해보니 ‘없다’라는 의미 외에도 ‘떨어지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포식자에서 먹잇감으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 ‘나’는 끊임없이 ‘부지런히 머리를 굴리고 몸을 움직여야 한다.’ 치열하게 살아가는 지금의 시대와도 많이 닮아있는 모습에 마음 한 켠이 씁쓸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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