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영 ZERO 零 소설, 향
김사과 지음 / 작가정신 / 2019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잡아먹히지 않으려면 부지런히 머리를 굴리고 몸을 움직여야 한다.

그게 전부예요, 여러분. (P55)

 

‘0’이 반복되는 제목만큼이나 인상적인 표지로 시선을 잡아끄는 <소설, 향> 시리즈의 첫 번째 이야기 <0 영 ZERO 零>는 얇지만 가볍지 않은, 서늘하면서도 강렬한 작품이다.

 

이야기의 시작. ‘나’는 평일 오전 도심의 한산한 스타벅스에서 성연우와 이별을 하고 있다. 4년 남짓의 시간 사귀는 동안 느껴왔던 고통을 토로하며 감정적인 모습으로 나를 비난하는 성연우와 달리 ‘나’는 마치 관객의 시선을 계산하며 자신을 돋보이기 위한 대본을 연기하고 있는 배우처럼 보인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식인(食人)하는 종족이다. 일단 그것을 인정해야 한다.

윤리와 감정에 앞서서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무슨 말인고하니, 세상은 먹고 먹히는 게임이라는 것이다.

내가 너를 잡아먹지 않으면, 네가 나를 통째로 집어삼킨다. 조심하고, 또 경계하라. (P46)

 

‘나’의 세계는 피가 튀지 않는 식인의 세계다.

플러스와 마이너스가 합쳐진 제로의 세계에서 잡아먹는 위치에 계속 존재하기 위해 알리스(‘나’의 영어이름이다.)는 끊임없이 먹이를 탐색하고 포착한 먹잇감을 선한 얼굴과 빈틈없는 모습으로 포장해 잡아채 망가뜨린 후 자비 없이 먹어치운다. 자신의 강의를 듣는 세영의 재능을 망가뜨리고, 아버지의 죽음 후 엄마의 세계를 부숴버린다. 주변의 행복을, 재능을 은밀하게 먹어치우며 그 속에서 태어나는 불행을 먹이로 하는 현대의 식인종 알리스. ‘나’에게는 가족이나 연인조차 잡아먹어야 하는 먹잇감에 불과하다.

 

알리스를 보고 있자면 마치 사회화된 사이코패스처럼 보인다. 하지만 또 한편 정말 ‘나’는 나와는 완전히 다른 존재인가 하는 의문도 든다. 정말 단 한번도 자신의 행복을 위해 타인의 불행을 눈감아 본적 없는 사람이 과연 존재할까? 알리스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서늘한 공포가 느껴지는 반면, 또 한편으로 완전하게 그를 부정할 수 없게 만든다.

 

사람은 누구나 각별한 타인의 불행을 바란다.

각별한 타인의 불행을 커튼 삼아 자신의 방에 짙게 드리워진 불행의 그림자를 가리고자 한다. (P120)

 

하지만 아무리 잡아먹히지 않으려고 부지런히 머리와 몸을 움직이는 성공한 식인종인 ‘나’ 역시 과거 다른 식인종의 먹잇감이었고, 완벽하게 포장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순결한 포식자의 모습 또한 엄마와 성연우에게 간파당한다. 먹고 먹히는 연쇄적인 순환의 세계는 또한 0의 세계이지 않을까.

 

세간의 소문과 달리 인생에 교훈 따위 없다는 것.

인생은 교훈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을 안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0. 제로.

없다.

아무것도 없다.

지금 내가 응시하는 이 텅 빈 허공처럼 완벽하게 깨끗하게 텅 비어 있다. (P187)

 

포식자를 자처하며 앞으로도 아무 문제없이 잘 살아갈 것이라고 자신하는 ‘나’의 세계는 무척이나 공허하게 느껴진다. 제목 속 <>을 사전에서 검색해보니 ‘없다’라는 의미 외에도 ‘떨어지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포식자에서 먹잇감으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 ‘나’는 끊임없이 ‘부지런히 머리를 굴리고 몸을 움직여야 한다.’ 치열하게 살아가는 지금의 시대와도 많이 닮아있는 모습에 마음 한 켠이 씁쓸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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