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가는 녹색 바람 네코마루 선배 시리즈
구라치 준 지음, 김은모 옮김 / 검은숲 / 2017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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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이 세상에는 과작 성향의 작가들이 몇 있다. 작가적 신념, 스스로 납득할 수 있을 때까지 공부하고 써내느라 작품 수가 적은 경우가 이상적이지만 좀처럼 영감이 떠오르지 않아서, 혹은 그저 귀찮아서 과작이게 된 경우도 있다. 이 작가 구라치 준이 한 '냉장고가 빌 때까지 작품을 쓴다'는 말이 사실이라면 아주 전형적인 후자라 할 수 있겠다.

 우리나라에는 두 번째로 출간되는 구라치 준의 작품이다. 첫 번째 <별 내리는 산장의 살인>은 단순하지만 획기적인 트릭이 있어 가히 역대급의 재미가 폭발했던 기억이 난다. 이 정도면 과작일 만하다고 전율했던 기억도 난다. 그래서 이번 작품 <지나가는 녹색 바람>도 어떠한 의심도 없이 기대하며 읽게 됐다.


 작가의 유일했던 국내 출간작을 읽고서 쓴 포스팅을 다시 찾아보니 '작가의 냉장고를 털어서라도 빨리 다음 작품을 집필하게 만들고 싶다'고 했었는데 이번엔 생각이 약간 달라졌다. 이 작품은 네코마루 선배라는 작가가 주로 등장시키는 탐정이 등장하는 장편소설로 500쪽이 넘는다. 이렇게 외적인 부분만 보면 참 기대가 됐는데 내용은 아주 그렇지 못했다.

 일단 이 작품에서도 획기적인 트릭이 등장한다. 이런 종류의 트릭은 많이 보긴 했지만 제법 참신하게 풀어냈다. 어떻게 보면 참 작은 장난이라 할 법도 한데 그 작은 틈새 사이로 미스터리와 연쇄 살인이 비집고 들어왔으니 세상 일은 참 알 수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독자인 우리는 물론이고 작중 등장인물들, 특히 피해자들은 정말이지 꼼짝도 없이 희생당했으니 실로 비극이라 할 만하다.


 개인적으로 참 좋아하는 종류의 트릭인데 어딘가 쓰임새가 싱거웠다. 이런 종류의 트릭은 주제의식이나 교훈과 접목시키면 극도의 시너지 효과가 발생하는데 그 수준에 달하진 않았다. 감성적이고 시사하는 바가 퍽 있지만 뜬금없고 약간 과한 측면이 있었다. 이 트릭을 잘못됐다고 부정하는 것은 이 작품의 전부를 부정하는 것과 같으니 약간 주저되나 그럼에도 본질적으로 말하자면 반드시 필요했던 트릭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최선은 절대 아니고 차선이라 할 수 있겠다.

 탐정역을 맡은 네코마루 선배란 캐릭터도 애매했다. 무신경하니 막말을 일삼고 독특한 걸 넘어 도덕 관념도 부족해 보이지만 사건을 날카롭고 신속하게 해결한다. 아쉽게도 사건에 너무 늦게 개입해 비극을 미연에 방지 못했지만... 그런데 이런 탐정의 모습이 아주 인상적이진 않다. 다른 작품에서의 활약은 모르겠지만 이 작품에서 보인 모습인 그저 조금 별난 정도에 불과하다. 내가 너무 많은 걸 바라는 건가? 너무 기인도 아니고 아주 냉소적인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가가 형사처럼 사려가 깊어 보이지도 않으니 이 작품에서의 모습만으론 평가가 애매하기 그지없다.


 간단하지만 허를 찌르는 트릭 때문에 재독을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다소 감성적인 측면을 강조했던 작품치곤 크게 인상에 남는 작품은 아니었다. 단순히 추리소설적인 측면으로만 보면 분량에 비해 사건이 지나치게 단순하고 우연이 개입해 은근히 실망스럽고 그나마 작가가 공들였을 사에코의 시점은 막상 분량이 적어 알게 모르게 아쉬웠다. 작품은 지루한데 사에코의 감정선은 흥미진진한 구석이 있어 적재적소에 읽는 맛이 살아나는 효과가 있었다. 적은 분량은 작가가 노린 부분일 수 있지만 차라리 이 부분을 더욱 살렸으면 더 재밌지 않을까 싶었다.

 국내에 소개된 작품이 너무 적어 속단하긴 이른 만큼 작가의 다른 작품도 읽어보는 수밖에 없겠다. 이 작품은 그저 그랬지만 작가의 행보를 보니 굴직한 작품도 많이 남은 것 같다. 작가의 말마따나 냉장고가 너무 텅텅 비었나 보다. 아무튼 작가의 다른 작품이 출간된다면 이 작품을 골랐던 것처럼 일단은 큰 고민 않고 집어들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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