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개의 잔 진구 시리즈 5
도진기 지음 / 시공사 / 2020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9.6


 전작 <모래바람>이 너무나 별로여서 다음 작품인 <세 개의 잔>도 크게 기대되지 않았다. 작가에 대한 애정만 아니었다면 이 작품을 펼칠 일은 없었으리라. 아니나 다를까 시작부터 오글거리는 의뢰(?)를 수락하는 진구의 모습이 그려져 요번에도 뇌절인가 하고 심드렁한 표정으로 페이지를 넘겼다.

 하지만 진구가 정말 밑도 끝도 없이 누명을 쓰고 일사천리로 유죄인 상황으로 몰리게 되자 나는 삽시간에 작품 속에 빠져들게 됐다. 주인공이 누명을 쓰는 이야기는 참담하게 읽히지만 이후에 어떻게 누명을 벗을 것인지, 또 어떻게 자신에게 누명을 씌운 상대에게 복수할지 그 귀추가 주목돼 순식간에 페이지를 넘기게 된다. 이야기의 동력은 초반부에 강력하게 설정해놓는 데엔 성공했으니, 이제 중요한 건 디테일일 것이다. 전직 판사인 작가에게 법의 틈새, 구치소의 특수한 환경 같은 디테일을 작품 속에 녹이기란 주머니에서 물건을 꺼내는 만큼 수월한 일이다. 실제로 판결을 내렸던 사건에서 영감이라도 얻었는지 - 하지만 예전에 읽은 작가 인터뷰에 따르면 절대로 그런 일은 하지 않는다고, 자신의 글은 100% 창작이라고 한다! - 진구에게 누명을 씌운 범죄 조직 목적이나 그들의 계획성은 아주 참신하진 않아도 치밀하기 그지없어 읽어내려갈수록 결말이 어떻게 지어질까 궁금해 흥분이 가시질 않았다.


 그런데 잊을 만하면 조직의 규모를 언급하며 진구를 협박하던 조직은 후반부에서 진구의 반격에 순식간에, 그리고 허무하게 무너진다. 엄청난 장기전을 예상한 것과 달리 승패의 여부는 조직이 먼저 선을 넘으면서 진구를 건드린 시점부터 이미 진구 쪽으로 기운 것이나 다름없어서 다소 싱거운 감이 없잖았다. 조직의 브레인인 연부의 예측불허한 면모가 오히려 결말의 긴장감을 약간 떨어뜨린 편인데, 그래도 전작에 비해선 특유의 마성을 제대로 선보여 도진기 작가의 천재 캐릭터들 진구, 고진, 이탁오에 버금가는 존재감을 과시한 건 인상적이었다.

 이 작품에선 진구와 연부말고 이탁오, 그리고 짧게나마 고진도 등장하는데 훗날 출간할 작품엔 이 넷이 모두 주연급 인물로 등장해 본격적으로 맞붙게 될까? 이 네 명은 이들 중 두세 명만 있어도 뒷세계에서 암약하는 조직을 묵사발을 내버릴 수 있는 두뇌를 소유하고 있는 자들인 지라 후속작이 몹시 궁금하다. <세 개의 잔>에서 정작 트릭보다 서사가 더욱 흥미로웠던 만큼 그 네 명의 캐미와 서로 속고 속이는 서사도 역시 기대된다. 마블 이후로 팀업 작품이 기다려지긴 정말 오랜만이다. 작가가 눈건강이 나빠졌다며 후기에 다음 작품 출간이 많이 늦어질 수 있다며 미리 양해를 구하던데, 얼마나 걸리든 상관없으니 제발 출간해주길 바란다. 좋은 후속작을 위해 기다림이 뭐 대수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