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텝
찬호께이.미스터 펫 지음, 강초아 옮김 / 알마 / 2016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9.8


 8월에 대만에 가는 김에 대만 소설가가 쓴 소설을 읽고 싶어졌는데 문득 이 소설이 떠올라 다시 읽었다. 이 작품은 홍콩 추리소설가 찬호께이와 대만 추리소설가 미스터 펫이 공동집필한 SF 소설집으로 처음 접하신 분들은 제목의 의미며 작가들의 국적이나 장르까지도 도대체 무슨 내용일는지 짐작되지 않을 것이다. 심지어 중화권 작가들이 쓴 글임에도 작중 배경은 미국과 일본이라 더욱 정체불명의 작품이라 여겨질 수 있겠다.

 <S.T.E.P.>엔 SF적 상상력을 두 추리소설가가 추리소설다운 집요함으로 풀어낸 소설들이 수록됐다. 총 4편의 중장편이 수록됐으며 두 작가가 두 편씩 담당했는데 두 작가 다 전공이 컴퓨터 쪽이라 원래부터 SF 소설을 집필하던 사람들이 아니었나 싶을 만큼 소재 다루는 데 능숙하고 심지어 고증이 탄탄하단 느낌마저 든다. 생각이 이상으로 각잡고 집필해 중반부에 컴퓨터 인공지능의 원리를 기술하는 대목은 나 같은 문과생에겐 약간 버겁기도 했다. 하지만 이내 인공지능 시스템이 고도로 발달함에 따라 벌어질 윤리적 딜레마와 미스터리한 사건들, 그리고 치명적 오류까지 그려내는 등 심도 있고 입체적인 이야기가 펼쳐져 끝까지 몰입도와 만족감이 증폭됐다.


 대다수의 독자들이나 이 책의 추천사를 쓴 사람들도 그렇고 나 역시도 미스터 펫보다 찬호께이의 작품에 더 눈길이 갔다. 찬호께이가 묘사하는 미국이 배경으로써 그럴싸하게 다가왔고 실제로 이 작가가 다루는 작중 사건이 이 세계관에서 굉장히 중요한 사건이었던 것에 비해 미스터 펫이 묘사한 일본은 작가의 필명처럼 좋게 말해 이색적이었지만 나쁘게 말하면 작위적으로 읽혔고 다루는 사건도 이야기의 본론에서 벗어난 별난 형식의 서사인 경우가 많아 어느 순간부터 정이 가지 않았다. 가상 세계에서 시뮬레이션을 돌려 미래를 예측하는 사보타주 시스템을 다룬 본작에서 미스터 펫 작가가 선보인 이야기는 그 나름대로 의미 있고 재치 넘치는 편이었지만 솔직히 주인공 두 캐릭터의 매력이나 캐미가 아니었다면 지금보다 박한 평가를 내렸을 듯하다.

 반대로 찬호께이는 SF 스릴러의 진수를 보여주는데 초반엔 SF인 것을 강조하지 않은 채 자연스럽게 몰입을 시키다가 이 모든 것이 시스템의 맹점과 기계에 의존한 인간이 범하는 오류로 인해 터무니 없는 비극이 발생할 수 있음을 시사하는 등 SF다운 주제의식을 강렬하게 어필하는 것에 성공한다. 시뮬레이션, 인공지능, 평행세계, 다중우주 같은 설정은 요즘 세상에서 더 이상 새로울 것 없는 소재지만 추리소설의 대가만이 구사할 수 있는 서사적 디테일을 자신이 대학생 때 전공한 컴퓨터 공학에 접목시키니 금상첨화, 여호첨익이 따로 없었다. 이보다 설득력 있고 진중한 SF 스릴러는 흔치 않은데 6년 전에 읽었을 때나 지금 다시 읽었을 때나 똑같이 감탄했다.


 책의 제목은 각 수록작의 알파벳 앞글자를 엮은 것이기도 하지만 작중에서 다른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미래에선 인간과 기계가 이인삼각으로 걸음을 떼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겠느냐는 말이 나오는데 이 문장에서 작품의 제목이 비롯됐다고 생각된다. 이 주제의식도 사실 뻔하지만 표현이 너무 절묘하고 속된 말로 아다리가 맞아 이야기 전체가 강렬하게 가슴에 박힌다. 늘 느끼지만 난 이렇게 재치 넘치는 제목에 약하다. 뭐가 먼저였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STEP이란 단어를 성사시키려고 각 작품의 제목 첫 글자에 해당 알파벳을 넣으려고 머릴 굴리는 작가들의 모습을 상상하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온다.

 찬호께이의 작품은 참 많이 읽었는데 호러나 청춘소설보다 형사를 주인공으로 내세우거나 컴퓨터 기술을 극한으로 다룬 SF 장르에 훨씬 재능이 많은 것 같다. 국내에 출간된 작품 중에 읽지 않은 건 동화추리소설 <마술피리> 뿐인데 그 작품은 어떨는지 기대되면서도 살짝 걱정이다. 실망하면 어쩌지?

 미스터 펫은 아직 이 책에서밖에 접하지 못했는데 국내에서 두 권이 더 출간됐다. 두 작품 다 왠지 내 취향일 것 같지 않지만 한 권 골라 도전해볼 생각이다. 찬호께이만큼은 아니지만 재기발랄한 아이디어를 갖고 있는 듯해 공동집필이 아닌 단독집필에서 그 아이디어가 어떻게 빛을 발할 것인지 궁금하다. 어쩌면 단독집필한 작품이 훨씬 좋을 수도 있지.


각 수록작별 한줄 감상 (스포일러 포함)


'사보타주' - 나는 추리소설을 다 읽고 난 뒤에 항상 '이게 현실이 아니라 다행이다' 란 말을 하는데 이 말을 추리소설 등장인물을 통해 들어보긴 처음인 것 같다.

'T&E' - 모든 것이 다 좋은 작품이었는데, 이게 결국 정사가 아니란 게 아쉽다. 열린 결말을 감당하지 못해 그런 노선으로 변경한 건가?

'E PLURIBUS UNUM' - 반성과 복기 없는 추리는 안 하느니만도 못하다. 아니, 가장 위험한 짓이다.

'PRPCESS SYNCHRONIZATION' - 읽을 땐 재밌었는데 일주일 지나니까 무슨 내용이었는지 기억이 안 난다. 기억을 인위적으로 심을 수 있다면 반대로 빼는 것도 가능한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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