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권으로 읽는 스페인 근현대사 - 우리에게 낯설지만 결코 낯설지 않은 스페인 이야기
서희석 지음, 이은해 감수 / 을유문화사 / 2018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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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5월에 스페인과 포르투갈에 가게 돼서 요새 관련된 책이나 영화를 찾아 보는 중이다. 이전에도 관심이 많은 나라들이라 정기적으로 관련 책을 찾아 읽었지만 이렇게 비행기표를 예약하고 진짜로 가게 된다는 기대를 안고 있는 와중에 읽으니 내용들이 전에 없이 술술 들어온다. 여담이지만 스페인어 교제도 샀다. 현지에서 최소한의 의사소통은 해야 하니까...

 나는 원래 '한 권으로 읽는~' 이란 제목을 별로 좋아하지도 않고 신뢰하지도 않는다. 한 권 안에 하고 싶은 말을 욱여넣으면 내용이 풍성해지긴커녕 빈약해진다. 그래서 지금까지 잘 읽지 않았는데, 이 책의 경우 스페인 근현대사만을 다루는 듯해 솔깃했다. 실제로 목차를 보니 펠리페 2세부터 살펴봐 정확히는 근현대사보다 좀 더 전의 역사부터 포함된다 할 수 있는데 아무튼 결과적으로 제법 디테일하고 고증이 탄탄한 책이어서 흥미롭게 읽었다. 적어도 진짜 근현대사 파트 전까지는.


 애석하게도 18세기 후반부터 20세기 프랑코 독재까진 거의 단순 사실 나열이라 다소 지루하게 읽혔다. 반면에 펠리페 2세를 비롯한 스페인 왕가의 이야기는 의외로 굉장히 재밌었다. 수도원을 지을 때의 노동자들과 임금 문제로 갈등을 겪는 것이나 바르셀로나와 네덜란드를 제압하고자 스페인이 혈세를 낭비하며 용병들을 고용했는데 정작 그 용병들이 또 상황을 악화시키는 에피소드, 게다가 중간중간 왕가의 스캔들까지 다루니 역사보다 대서사시를 읽는 느낌까지 들었다. 이렇게 사진도 거의 없고 그나마도 흑백인데 그럼에도 빠져들며 읽는 역사 이야기가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이건 내용도 내용이지만 작가의 필력 덕분이라 해야겠다.

 그나저나 스페인 역사를 대서사시라고 한다면 굉장히 비극적인 대서사시라 할 수 있겠다. 한때는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존재감을 과시했지만 너무 많은 식민지를 관리하고 반란을 제압하는 것에 너무 많은 수고가 들어 결국 자국 사정도 망쳐버리는 본말전도의 모습이 처음엔 쌤통이다가도 나중엔 정말 처절하게 비쳐졌다. 이 시기를 다룬 부분이 유독 흥미로웠던 이유는 바로 스페인 자국에서 자기네들이 왜 이 지경이 됐는지 면밀히 분석하고 해석하면서 다양한 사유를 낳았기에 가능했던 것인지 모른다. 스페인 현지에서 유학하고 현재도 살고 있다는 저자는 그 다양한 사유들 중에 흥미롭고 의미 있는 해석을 잘 모아 이 책에서 소개해 상대적으로 팩트 위주인 근현대사보다 오히려 어느 정도의 성찰과 교훈이 담긴 중세가 더 흡입력 있었다.


 이 책의 서문에서 스페인 역사가 우리에게 낯설지만 낯설지만은 않을 것이라 강조한다. 식민지를 엄청나게 거느린 나라와 중국과 일본에게 짓밟힌 우리나라의 역사와 닮은 구석이 있을까 싶었지만 저자가 공언한 대로 제법 닮은 구석이 있었다. 특히 나폴레옹에 의해 스페인의 왕가나 구체제가 결정타를 맞은 부분이 그러했다. 무능한 지도자와 비선실세가 나라 말아먹은 꼴이나 - 그런데 재밌는 건 스페인에서 무능하기로는 둘째 가라면 서러운 두 왕이 있었는데 이때 궁정화가가 무려 벨라스케스와 고야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원. - 다른 유럽 나라가 종교부터 시작해 근대적인 가치관을 확립해나가고 있을 때 스페인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뒤늦게 부랴부랴 쫓아가다 경험 부족으로 결국 내전이 터지고 30몇 년 독재자의 압제를 겪기도 하는 것에서 동질감을 느끼지 않을 독자는 적을 것이다.

 아까 스페인이 본말전도의 길을 걷는 걸 보고 쌤통이라고 말했지만 이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스페인이 남미나 네덜란드, 까딸루냐와 바스크 지방에 한 짓은 정말 악랄했지만 그렇다고 스페인 모든 국민이 겪는 고통을 인과응보로 여기는 건 내키지 않는다. 이 책을 통해 스페인에서 양심 있고 생각 있는 지식인이 많았지만 그때마다 그들의 의지가 좌절됐는가를 엿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인과응보라는 말은 잘못 내뱉으면 정말 폭력적으로 들리는데 이 경우가 딱 그렇다.


 그렇다 보니 한 나라를 단순히 나쁜 나라, 멍청한 나라, 게으른 나라라고 선입견을 가진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어떻게 보면 그런 선입견을 조장하는 분위기가 우리 주변에서 만연한 걸 넘어 당연시되기도 하지만 그래도 방심하지 않고 경각심을 가지면서 살아야 할 듯하다. 좀 거창한 말이긴 했지만, 하나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건 이 책처럼 역사를 이야기하는 책을 읽다 보면 단순히 역사를 공부하는 것을 넘어서 그 이상의 깨달음을 늘 얻곤 한다는 것이다. 이래서 사람들이 역사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역사를 공부하는 것이겠지. 이걸 인식한 것만으로도 정말 좋은 공부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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