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부메의 여름 백귀야행(교고쿠도) 시리즈
쿄고쿠 나츠히코 지음 / 손안의책 / 2004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8.7 






 흔히 재밌지만 어려운 책을 읽고 나면 두 번째 읽었을 땐 더 이해가 잘 되겠지 하고 착각하기 마련이다. <광골의 꿈>을 읽고 문득 다시 읽고 싶어져 펼쳐든 <우부메의 여름>은 교고쿠 나츠히코의 작품 중 진입 장벽이 가장 낮다고 평가를 받지만, 어디까지나 '그나마' 낮을 뿐이지 실질적으로 이 책으로 작가의 문학 세계관을 처음 접할 독자들 입장에선 여지없이 극악의 난이도로 다가오고도 남을 작품이다. 

 고백하자면 오히려 두 번째 읽은 지금이 조금 더 힘겹게 읽힌 것도 같다. 이해하려고 눈을 부릅뜨고 읽어 내려가니 난해한 어휘와 전개에 내가 지금 무얼 읽고 있고 이 얘길 얘네는 왜 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근본적인 의문이 피어올랐다. 실상 사건을 둘러싼 인물들의 장광설을 걷어내면 사건의 이면은 비교적 쉽게 정리할 수 있는 편인데, 작가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이상하고도 기이한 이야기라 생각했는지 독자들이 납득을 할 수 있게끔 최대한 멍석을 깔다 보니 그 유명한 장광설이 탄생하지 않았나 싶다. 덕분에 나름대로 흥미로운 지식이 입력되긴 했지만 그 많은 내용이 사건 해결이나 진상 규명에 100% 도움이 됐는지 모르겠고 어느 순간부터 궤변으로 들리는 데다가 작가의 자기 만족적인 성향도 느껴져 뒷내용을 기억하는 나로선 갈수록 흥미가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정작 중요한 내용은 후반에 너무 주입식으로 풀어내 혼란스러움에 익숙해질 틈도 없이 이야기가 결말이 난 것도 문제지만, 이조차도 이야기의 화자인 세키구치의 정신 상태에 비하면 가벼운 문제에 불과하다. 


 교고쿠도의 장광설도 지겨웠지만 세키구치의 우울한 정신 세계는 그야말로 답답해 두 번째 읽는 것임에도 감당하기 힘들었다. 내용을 기억하고 있기에 내성이 생겼으리라 여겼는데 정말 큰 착각이었다. 사건의 이면이 속속 드러날 때마다 세키구치의 울증에 연민이 들기는커녕 이 녀석이 좀 더 제대로 처신했더라면 책이 반 이상은 짧아졌을 것이고, 아니 애당초 사건이 발생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고 원망했다. 책의 분량이 긴 건 그렇다 쳐도 이 비극을 유발함에 있어서 비중은 적어도 빼놓을 수 없는 역할을 했으니까... 정신과와 더불어 안과에도 제발 가줘라 하고 소리 내어 말하는 대신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한숨을 토해내는 것에 그쳤다. 그래, 이만하면 책의 내적인 발암 요소지, 외적인 발암 요소는 아니니. 

 외적인 발암 요소, 즉 이야기의 전개도 다시 읽으니 불만이었다. 추리 과정이나 결론에 접근하는 방식은 너무나 초월적으로 이뤄지지만 이 작품은 딱 추리소설의 전형과도 같은 전개를 보인다. 후반부에 사건의 이면을 몰아서 파헤치는 것이 딱 전형적이다. 아무튼 궁금증을 실컷 부풀렸다가 터뜨리는 연출은 흥미로운데 문제는 교고쿠도의 추리를 통해 드러나는 구온지 가문의 온갖 막장스런 행보는 그것만으로 소설 대여섯 편을 뚝딱 지을 수 있을 만큼 흥미롭고 다종다양한 소재와 드라마가 즐비해서 이 요소들을 작품 전반부부터 차근차근 풀어내지 않고 교고쿠도와 세키구치의 대화로 소비한 작가의 선택이 못내 불만이었다. 물론 그 장광설에 공을 들인 작가의 박학다식함과 집념, 또 이 시리즈만의 독보적인 분위기는 인정하지만, 구온지 가문에 내려진 '저주'와 그 영향으로 인해 자매가 겪은 불상사 등 단지 짧게 설명하는 것만으로 넘어가기엔 흥미로운 부분들이 많지 않았는가. 


 내가 최근 들어 정보를 습득하고 머릴 싸매는 서사보다 자연스럽게 스며들고 사유하는 이야기 쪽으로 취향이 변해서 그런가, 처음 읽었을 때 파격적이고 흥미롭다 여긴 이 작품이 지금의 내겐 그저 TMI가 최정점인 곤란한 작품으로 다가왔다. 물론 여전히 작품의 분위기나 주제의식은 내 취향이지만 장광설은 더욱 버겁게 읽혔다. 다시 읽으면 나도 그동안 내공이 쌓였으니 눈에 쏙쏙 들어올 줄 알았는데, 내 스스로를 너무 과신한 모양이다. 아니면 내가 내공이 덜 쌓인 건지, 혹은 그냥 작품 자체가 어려운 것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단지 이 작품에 열광한 독자분들이 사실은 대단히 인내심이 뛰어난 분들인 건지... 이 작품의 비극적인 드라마보다 그런 외적인 요소를 더 궁금해하며 책장을 덮었던 것 같다. 

원래 이 세상에는 있어야 할 것만 존재하고, 일어나야 할 일만 일어나는 거야. 우리들이 알고 있는 아주 작은 상식이니 경험이니 하는 것의 범주에서 우주의 모든 것을 이해했다고 착각하고 있기 때문에, 조금만 상식에 벗어난 일이나 경험한 적이 없는 사건을 만나면 모두 입을 모아 저것 참 이상하다는 둥, 그것 참 기이하다는 둥 하면서 법석을 떨게 되는 것이지. 자신들의 내력도 성립과정도 생각한 적 없는 사람들이, 세상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나? - 23p



종교란, 다시 말해서 뇌가 마음을 지배하기 위해 만들어낸 신역이라는 궤변이니까. - 32~33P



우리들의 생은 복잡해짐으로써 보장되는 것과 같으니까 - 175p



생물은 아이를 낳기 위해 사는 셈이로군. 그리고 그 아이도 아이를 낳기 위해 태어난 것이고. 하지만 그렇다면 씨를 보존하는 것 자체에 의미가 있고, 살아 있는 것 자체에는 의미가 없다는 뜻이 되네. 생물이란 대체 뭔가?

아무것도 아니야. 의미 따윈 없네. 그런 거야. 아니 그런 것이었네. - 332p



당신이 한 짓은 잘못되었어요.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자애로 가득한 어머니의 이해와 포용력, 그리고 낡은 인습을 끊어낼 용기와 근대성이었습니다. - 57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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