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매매, 상식의 블랙홀
신박진영 지음 / 봄알람 / 2020년 9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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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어디 가서 대놓고 말하고 다니진 않았지만 난 공창제를 찬성했고 그 이유에 대해 얘기할 때 항상 '필요악'이라는 단어를 자주 입에 담았다. 이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과연 성매매가 '필요'악인지에 대해 근본적인 의문과 마주해야 했으며, 끝까지 다 읽으니 설령 성매매가 없어지는 것이 영원히 불가능한 일이더라도 금지시키는 방향으로 일을 도모해야겠구나 하는 확신이 들었다. '남자는 짐승이고 성욕은 본능이니 성매매를 못 하게 하면 성범죄자가 된다는 말에 진정 분노하고 저항해야 하는 것은 누구인가.'라는 저자의 질문에 머릴 한 대 제대로 맞은 기분이었다. 

 타란티노의 영화 <바스터즈>에서 나오는 한스 란다 대령은 '인간이 자신의 양심의 가책을 덜어냈을 때 어느 정도로 유능해질 수 있는지 총통(히틀러)께 증명해왔다'고 말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우리가 성매매에 대해 논할 때 양심의 가책을 외면하거나 자유로워지는 분위기가 조성됐을 때 어느 정도로 막장으로 치닫는지를 절감할 수 있었다. 평생을 거의 성매매 피해 여성을 위한 삶에 매진했던 저자 신박진영 씨의 힘있고 확신에 찬 문체, 일목요연하고 핵심을 잘 드러낸 글은 내 가치관을 바뀌게 만드는 데 충분했다. 


 내가 공창제를 찬성했던 이유 중 필요악이라고 여겨서 말고도 종사자들이 '성노동자'로서 권리를 보장받으려면 공창제가 필수적이란 어림짐작도 한몫했다. 하지만 저자는 성매매는 노동이 될 수 없다고 단언한다. 뿐만 아니라 저자는 진정한 '성진국'이라 할 수 있는 네덜란드나 독일이 공창제를 했음에도 침해되는 성노동자의 권리나 여전히 만연한 성차별, 그리고 그만큼 투명하게 공창제가 시행되기엔 현실적인 여건이 부족하다는 사례도 든다. 현실적인 여건이란 여성의 몸을 착취하는 것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이 저열함을 가리키는 말일 터다. 공창제가 시행된들 정말 아무런 문제도 없이 유지될 리 만무하다. 이는 여성 징병제가 양성평등에 이바지할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도 반박할 수 있는 근거기도 하다. 여성은 약하니 남성이 아무렇게나 착취해도 되는 존재라는 인식에 변화가 없으면, 여자도 군대를 간들, 창녀가 성노동자로 호칭이 바뀐다 해도 젠더 문제가 일시에 해결될 수 없다. 한마디로 일의 순서가 뒤바뀌었다는 것이다. 

 반대로 저자가 롤모델로 가장 많이 언급한 나라는 스웨덴을 위시한 북유럽 국가들이다. 스티그 라르손의 '밀레니엄' 시리즈 2부인 <불을 가지고 노는 소녀>에서도 언급된 적이 있는데, 바로 성매매 여성이 아닌 성을 구입하는 남성만을 처벌하는 법이다. 그 소설이 집필된 당시엔 아직 그 법이 통과가 된 직후거나 이제 곧 시행될 예정이라고란 언급돼서 실제로 그 법이 어떤 성과를 거뒀는지 알 수 없었다. 개인적으로 귀추가 궁금했는데 저자의 말을 들어보니 좋은 효과를 낳았던 모양이다. 저자의 글을 읽으면서 놀라운 한편 참 부끄러웠다. 이런 대안이 있고, 또 알고 있었음에도 공창제를 필요악이란 이유로 찬성해왔다니... 


 스웨덴이 성을 구입하는 남성을 처벌하는 법을 제정할 당시 우리나라에서도 성매매 금지법이 발의 및 시행됐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 관련 업계 종사자들의 반발이 극심했으며 그들은 주로 성매매가 더욱 음지로 들어가 감시와 처벌이 어려워질 것이란 논리를 내세웠다. 나도 비슷한 생각을 가졌으나 한 가지 의문 때문에 말문이 막혔다. 그렇다면 그 전엔 음지에서 성매매가 전혀 이뤄지지 않았단 말인가? 이러한 의문이 들었음에도 나는 그렇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것 같다. 이 작가의 글을 읽으니 내가 얼마나 무지했고 관심이 적었으며 성매매 금지법이 우리나라 같은 성매매 공화국에서 통과됐다는 것이 실로 기적 같은 일이었음을 진작 알아보지 못했는지 그저 민망할 따름이었다. 

 자본주의의 원리로 인해 성매매가 어디까지 악독하게 여성들의 몸과 마음을 착취할 수 있는지 저자가 직접 조사해온 풍경들, 그리고 한국 남성의 절반 가량이 성매매 경험이 있고 관여했다는 주장은 솔직히 바로 받아들이기엔 아연실색한 내용 천지였다. 내가 성매매 경험이 없는 나머지 절반에 해당해서 그랬던 걸까? 나 또한 저자가 언급했던 '남성 혐오 조장하려고 하는 말이죠?' 란 말처럼 너무 비현실적인 통계라 아니냐며 따지고 싶었다. 성매매 업계의 막장스러움에 한 번도 눈길을 준 적도 없는 주제에 말이다. 


 책의 후반부엔 결국 어떤 이유에서건, 자의든 타의든 빚이 있든 뭐든 성매매 여성이 처한 상황은 당사자인 여성들이 해결할 일이라고 고개를 돌리는 사회의 분위기에 일침을 가한다. 진지하게 따지면 과연 당사자를 여성이나 포주에 한정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자칫 이러한 주장은 '설령 성매매의 유혹에 빠지지 않았던들 남자라면 절반 가까이 성매매 문제에 있어서 당사자'라는 극단적 주장을 낳거나 논리적 오류를 범할 수 있으나 저자의 논조는 그렇게 강경하지 않았다. 대신 성매매를 개인의 문제 내지는 비극으로 삼아선 안 된다는 걸 강조하고 강조하고 또 강조할 뿐이었다. 

 물론 성매매를 체제적 문제라 인식하고 변화를 꾀하기엔 근 100년 동안 남성 주도하여 이룩된 성매매 사업이 워낙에 번창하여 현실적으로 무척 쉽지 않은 일로 보인다. 때문에 개인의 문제로 여기거나 개인에게 손가락질하게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물며 성매매 방지법 자체가 기적으로 여겨질 만큼 이 책엔 역겹고도 절망적인 성매매의 뿌리 깊은 역사가 열거돼 감히 개선해볼 엄두가 생기긴커녕 방관으로도 벅차지 않은가 하고 나약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물론 저자라고 이 짧은 분량의 글로 많은 사람의 인식이 바뀌고 태도가 바뀌리라고 진심으로 기대하진 않을 것이다. 정말 잘 쓴 글이지만, 정말 잘 쓴 글만으로 세상이 바뀌기엔 이 세상이 결코 녹록지 않다. 지옥을 성큼성큼 들어가 성매매 피해 여성과 마주하는 일에 매진한 저자이니 '글로 세상을 바꾼다'는 순진한 감상을 안고서 글을 집필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이 글은 부제인 '상식의 블랙홀'이라는 말처럼 적어도 상식이 빨려들어가는 사태만은 막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다. 블랙홀 자체를 와해시키긴 힘들고 그 힘을 같이 내줄 사람을 불러모으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지만, 적어도 옆에서 빈정대거나 헛소리로 앞을 막아서는 사람을 줄이는 것이 저자가 이 책을 집필한 가장 큰 이유가 아닌지 생각해봤다. 나는 아마 저자가 행동할 때 빈정댄 사람이었을 텐데, 이젠 결코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내 가치관을 바꾼 것만으로도 이 책은 제 역할을 하지 않았나 싶다.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는지 모르겠지만, 난 아직 성매매를 심각한 문제로 여기기엔 가해자로도 피해자로도 피해자의 주변 사람으로도 경험한 적이 없기에 저자처럼 직접 행동하며 성매매를 반대할 일은 어지간해선 일어나지 않을 것 같다. 이런 말이 저자에겐 썩 달갑지 않게 들리겠지만, 이 책의 내용만 읽고서 행동으로 이어지기엔 아직 궁금한 점이 한가득인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이 책을 읽은 다음부터 성매매 여성이 등장하는 책을 연달아 읽게 됐다. 그런 책들을 연달아 읽는 것은 여러모로 쉬운 일은 아니지만 내 나름대로 궁금했던 부분들을 따로 떼서 사유할 시간을 가질 수 있어 그것만으로도 보람 있는 시간이었다. 그 책들에 대한 포스팅은 차차 올릴 것이다. 어느 책이나 마찬가지지만 이 책들이야말로 읽는 것보다 감상을 남기는 게 훨씬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한국 남성을 잠재적 범죄자로 일반화시키는 건 다른 무엇도 아닌 우리 사회가 만들고 재생산하는 이러한 통념이다. 남자는 짐승이고 성욕은 본능이니 성매매를 못 하게 하면 성범죄자가 된다는 말에 진정 분노하고 저항해야 하는 것은 누구인가. - 38p



거대 규모의 성매매 시장은 남성들에게 ‘돈만 있으면 너도 주인님이 될 수 있다‘는 망상을 심어준다. 그러나 대체 누구의 주인인가. 성 구매자는 섹스에서 소외된 시장의 노예일 뿐이다. - 123p



적절한 규제 없이 약자가 보호받는 시장이 역사상 존재는 했었는지 묻고 싶다. 모든 노동이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싸워온 역사가 아직 끝나지 않았고 노동자의 권리를 위한 수많은 법률이 있어도 사회적 약자들의 인권은 저절로 지켜지지 않음을 우리는 보아왔다. - 200p



성매매는 우리 사회의 어두운 계급 구조를 집약한 거대한 착취의 시장이다. 성별과 자본과 인맥으로 인간의 급을 나눠 위력을 행사하고 폭력을 정당화하는 산업이다. 이 폭력에서 자유로운 사회 구성원은 없다. - 24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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