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여덟의 여름
미쓰하라 유리 지음, 이수미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8년 9월
평점 :
절판


9.6 






 미쓰하라 유리의 숨은 걸작 추리소설 단편집을 오랜만에 다시 읽었다. 표제작인 '열여덟의 여름'은 일본추리작가협회상 단편 부문에서 수상한 작품이고 일본에서 단편 드라마로도 만들어졌다고 한다. 작가는 후기에서 '얌전한 자식이 연달아 규모 있는 대회에서 주목을 받는 느낌'이라고 말했지만 다른 수록작과 비교하면 이 작품은 비교적 얌전하지 않은 편에 속한다. '자그마한 기적'과 '형의 순정'은 독자에 따라선 추리소설로 보기에 시시하다고 여길 수 있을 정도로 소소한 이야기니까. 마지막 수록작인 '이노센트 데이즈'는 작가가 공인할 정도로 어두운 이야기였고 표제작은 일본식 성장물에 추리소설적 요소가 몇 숟갈 첨가한 수작이다. 

 전체적으로 수록작들의 완성도가 높고 고른 단편집이다. 추리소설로나 일반 순수 문학으로나 나무랄 데 없기에 일본에서 '다음 작품이 궁금한 작가' 1위에 선정됐다는 게 결코 과한 평가로 여겨지지 않는다. 정작 작가가 작품 활동을 그리 활발하게 하지 못한 편이고 국내에도 이 작품밖에 출간되지 않아 아쉽지만... 



 '열여덟의 여름' 


 일본식 청춘물, 성장물의 전형이자 정수를 보여주는 작품. 매력적인 캐릭터들과 결말의 쌉싸름하고 아련한 느낌이 일품이다. 드라마로도 나왔다지만 딱히 보고 싶지 않은 이유는 괜히 어설프게 만들었을까봐 실망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보통 드라마로 나왔다고 하면 찾아볼까 생각하게 되는데 이런 기분은 처음이다. 그만큼 분위기나 캐릭터들의 매력이 인상적이었다는 얘기다. 

 그리고 엄연히 일본추리작가협회상을 수상한 만큼 장르적인 재미도 얕볼 수 없는 작품이다. 저 상이 이름에 비해 그다지 추리소설답지 않은 작품이 수상한 경우가 허다하긴 하지만 이 작품은 이만하면 추리소설의 요소를 잘 충족하지 않았나 싶다. 반전이 비교적 쉽게 유추가 가능하나 복선과 개연성이 탄탄했고 막판에 어떤 비극적인 전개가 펼쳐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순간적으로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연출도 기대 이상이었다. 그야말로 일본 추리소설계의 숨은 명작 단편이라 해도 손색이 없을 듯하다. 



 '자그마한 기적' 


 첫 번째 수록작이 호불호가 정말 없는 수작이라면 '자그마한 기적'은 잠시 쉬어가는 느낌의 작품이다. 화자가 초반에 과연 자신이 겪은 일을 기적이라 불러도 되는가 하고 말했는데, 확실히 기적이라기엔 유난을 떠는 감이 있지만, 또 작품의 반전이 쉽게 유추 가능하고 복선도 미흡한 편이지만 듣기만 해도 마음 따뜻해지는 이야기인 터라 그 이상 어깃장 놓고 싶은 마음이 사라진다. 다른 건 몰라도 자식이 있음에도 재혼을 하려는 사람이 읽기에 가장 좋은 작품이지 않을까 싶다. 

 실로 감성 충만해지는 작품이었는데 이런 감상과는 별개로 역자에겐 번역하기 가장 까다로운 작품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읽는 입장에선 실감난 사투리들이 흥미를 돋우지만, 어디서 읽은 건데 사투리 번역이 의외로 까다롭다고 하니 사투리 비중이 아주 많은 이 작품도 적잖이 까다로웠으리라 본다. 아님 말고. 



 '형의 순정' 


 작가 공인 가장 마음에 드는 캐릭터가 등장하는 소설로 이 작품을 가장 좋아하는 독자들도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앞의 두 작품에 비해 난이도가 있는 반전이 나오지만 사실 그보다 중요한 건 그 반전을 알고 난 직후에 어떤 캐릭터가 취한 태도다. 무엇보다 그 캐릭터의 태도에 깊은 감명을 받은 화자의 따뜻한 마음씨까지 전해져 개인적으로 직전 수록작인 '자그마한 기적'보다 더 감성이 충만해졌다. 이야기의 규모에서 차이가 크지만 반전이 드러나는 부분 다음부턴 로베르토 베니니 감독의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를 연상시키는 측면도 있어 더욱 기억에 남는다. 

 아, 이렇게 얘기하고 보니까 그 영화도 갑자기 다시 보고 싶어지는군. 이 소설도 그렇고 그 영화도 그렇고 따뜻한 작품은 주기적으로 챙겨보고 싶다. 



 '이노센트 데이즈' 


 제목과 달리 정말 살 떨릴 정도로 악한 인간들의 모습을 다루는 작품이다. 과연 악한 인간들이 득시글거리는 세상에서 순진하게, 혹은 순수하게 사는 것이 맞는 태도일까? 그리고 순수한 것과 순진하다는 말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처음엔 주변 모든 캐릭터들에게 순진한 인물로 취급받는 주인공이 종래에는 순수한 인물로 격상된 느낌이었는데, 순진하다는 말에 세상물정에 어두움을 비꼬는 뉘앙스가 있다면 순수하다는 말엔 그런 뉘앙스가 적다는 걸 생각하면 주인공의 한결 같은 올곧음은 더욱 빛나 보인다. 

 책의 수록작들 중 가장 추리소설 같은 작품이었고 짧은 분량 속에 인물들이 많이 등장하고 인과 관계도 복잡해 처음엔 바로 파악이 힘들고 설상가상 인물들의 이름이 그 이름이 그 이름 같을 정도로 헷갈려 안 그래도 어두운 내용인 데다가 독해력도 요구돼 그리 읽기 쉬운 작품은 아니다. 하지만 다 읽고 난 뒤의 뿌듯함이 가장 큰 작품이고 무엇보다 작품의 주제의식을 얘기할 때 '희망'을 빼놓을 수 없어 더욱 뿌듯함이 배가된다. 작가가 히로시마 출신이라 그런지 원폭 이후에도 끈질기게 자란 협죽도란 꽃을 아주 비중있게 다뤄 주인공의 순수함이 더욱 진솔하게 다가오지 않았나 싶다. 


 특히 협죽도는 그 자체로는 인간에게 치명적인 독성이 있는 꽃이지만 그 독성은 관점만 바꾸면 끈질김과 희망으로 인간의 시야 안에서 재해석될 수 있는 것처럼 우리네 삶의 부정적인 요소들도 관점만 달리하면 정반대의 의미를 가질 수 있지 않은가 하고 생각해볼 수 있단 점에서 정말 마음 따뜻해지는 작품이었다. 물론 상투적인 말이긴 하나 그 상투적인 말을 얼마나 진솔하고 와 닿게 전달하느냐는 또 전혀 다른 문제인데, 그 문제를 멋들어지게 극복한 '이노센트 데이즈'는 유독 완성도가 높고 고른 이 단편집의 대미를 장식하기에 아주 어울리는 작품이자 순서 배치란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이 책의 수록작들의 내용을 다시 곱씹으니 작가의 다른 작품이 더 읽고 싶어졌다. 언젠가 출간되리라고 희망을 가져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