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체의 뱀
미치오 슈스케 지음, 김은모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12년 1월
평점 :
절판


7.7 






 내가 이 작품을 10년 전에 읽었을 땐 주인공이 나와 연령대가 비슷했고 또 아직까지 감수성이 살아있을 때라 좋은 인상이 남았던 것 같다. 그러니까 다시 읽자고 책장에 남겨뒀겠지. 지금은 복잡한 인과 관계가 얽혀서 매사에 자기 탓을 하는 등장인물들과 지지부진한 전개 때문에 상당히 더디게 읽혔는데, 그럼에도 제목의 '구체의 뱀'에 대한 저자 미치오 슈스케의 해석은 여전히 인상적이었다. <어린 왕자>에 나오는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 그림을 저런 식으로 해석할 사람은 이 세상에 미치오 슈스케 한 명밖에 없을 것이다. 그만큼 신선한 시각이었다. 

 물론 누군가가 그 해석 하나 맛보자고 이 책을 펼치려고 하면 약간 고심해볼 것을 미리 말해두고 싶다. 미치오 슈스케라는 이름이 주는 재기발랄한 추리소설의 묘미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대신 그 작가 특유의 음울한 분위기는 그 어떤 작품보다, 대표작 <해바라기가 피지 않는 여름>을 상회할 정도로 그득한데 작품 전개가 지루하고 지지부진한 것에 비해 인물들이나 세계관의 음울한 감정선은 충분한 분량을 들여 표현하고 있다는 점을 숙지한다면 이 책을 펼쳐도 무방할 듯하다. 문제는 표현에 공을 들이다 못해 넘치는 감이 있어 주인공의 선택이 이해가 되다가도 답답해 끝맛이 텁텁할 수도 있으리란 것이다. 


 소설의 집필 연도나 소설 속 배경이 90년대 초라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논란의 여지가 있는 전개가 많이 펼쳐지는 편이다. 간략히 열거하자면 관음, 무단 침입, 그리고 협박으로 전제된 관계다. 현실에선 이보다 더한 일이 버젓이 일어나고 작중에서도 인물들의 심리 상태를 근거로 들며 개연성 있게 묘사하지만 어느 것 하나 불편하지 않은 것이 없다. 난 이러한 불편한 이야길 주인공의 가정 환경과 살고 있는 시대상이 결합된 골때리는 일련의 사건들로 이해하고 읽었는데, 결말부에 이르러선 주인공의 행동이 너무 감정적이고 자기비하적이고 조금 무책임하기도 해 '아, 이 이야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불편함 일색인 작품이구나' 하며 고개를 절레절레할 수밖에 없었다. 

 허나 결말에선 인상이 적잖이 달라졌다. 처음엔 결말이 전형적인 '사족'이라 생각했는데, 어떻게 보면 제목의 의미를 드러내는 아주 중요한 반전이 담긴 내용이 아닐 수 없어 다 읽고서 혀를 내둘러야 했다. 특히 사건의 전말을 확실하진 않아도 찰나에 거의 간파한 주인공이 그 이후에 취한 태도는 지금 나이의 내가 봐도 감동적인 데가 있어 제법 여운이 남았다. 타인의 거짓말을 단순히 거짓을 말했다는 사실에 무게를 두지 않고 거짓말을 한 이유에 주목하며 기꺼이 그에 응하는 주인공의 모습도 그렇고 자꾸만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사건의 이면 덕분에 불쾌함이 극심해지지 않게 배려한 작가에게도 뜻밖에 호감이 갔다. 작품 초반에 받은 인상을 생각하면 이것도 참 반전이라면 반전이라고 할 수 있겠다. 


 청춘과 성장을 주제로 한 일본 소설을 한때 즐기며 읽었지만 지금의 내겐 다소 호불호가 갈리는 듯하다. 이 작품도 그렇고 다른 작품도 예전에 좋게 읽은 기억을 안고 다시 읽으면 실망하는 경우가 많았다. <구체의 뱀>도 그럴 줄 알았고 거의 그대로 맞아 떨어질 뻔했지만 작가의 감수성과 신선한 해석이 요번에도 내 가슴에 와 닿았고 마지막 주인공의 행동은 오히려 10년 전보다 더 공감이 가 역시 다시 읽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엔 미치오 슈스케 최고의 작품이라 여기기도 했으나 지금은 그 정도까진 아니어도 무시 못할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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