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 내리는 산장의 살인
구라치 준 지음, 김은모 옮김 / 검은숲 / 2011년 11월
평점 :
절판


9.3 







 실로 전형적인 추리소설인 것 같으면서도 깜찍한 트릭을 선사하는 구라치 준의 장편소설을 오랜만에 다시 읽었다. 작품의 트릭도 트릭이지만 역자의 후기도 기억에 남았는데, '냉장고가 빌 때까지 일을 하지 않는 작가'라니까 역자가 '냉장고가 어서 비길 바라며' 라고 후기를 남긴 게 일품이었다. 10년 전에 이 소설을 다 읽고서 포스팅을 남길 당시 나도 그에 지지 않고자 '작가의 냉장고를 내가 털어서라도 글을 쓰게 하고 싶다'고 농을 던진 게 기억이 나는데, 이후 국내에 출간된 작가의 다른 작품을 읽어보고 역시 <별 내리는 산장의 살인>이 흔치 않은 수작임을 느낄 수 있었고 10년 만에 다시 읽은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이번엔 냉장고를 털어야겠다는 생각까진 안 들었지만. 

 아무래도 반전의 놀라움이나 트릭의 참신함 - 적어도 내 기준에선 지금 읽어도 참신하고 기발했다. - 등의 추리소설적인 요소를 제외하면 교훈이나 이야기 연출 방식이 두 번째 읽을 때도 재밌기엔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기에 지난 번보다 점수를 박하게 줄 수밖에 없었다. 몇몇 캐릭터들이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로 골때린다는 걸 제외하면 이야기에 몰입할 만한 매력적인 요소도 조금 부족하고 각 장마다 앞에 첨부되는 작가의 '거짓말은 하지 않는' 멘트만이 그나마 궁금증을 자아내 작가가 바랐던 대로 완독할 수 있지 않았나 싶다. 물론 단지 아이디어만으로 승부를 보는 작품은 결코 아니거니와 독자의 관심도가 떨어질 만한 논리적인 추리도 게을리 하지 않는 등 추리소설의 소임을 다하는 만큼 요번에도 머리 굴리며 읽는 재미는 여전했다. 책 첫장에는 이 작품에 대한 검은숲 출판사의 자체적인 평가가 실렸는데 그 내용을 살펴보면 '논리정연함'이 5점 만점에 6점을 부여했는데 그 점수가 과대평가로 여겨지지 않는다. 적어도 90년대에 집필된 소설이란 점을 감안하면 특정 과학 기술에 대한 묘사도 나쁘지 않았다고 본다. 


 구라치 준의 작품은 이후에도 <지나가는 녹색 바람>, <두부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혀 죽은 사건>이 국내에 출간됐는데 모두 <별 내리는 산장의 살인>에 미치지 못했다. 엄연히 이 작가가 제1회 본격미스터리대상을 수상한 작가인 만큼 수상작인 <항아리 속의 천국>이란 작품이 출간되길 기다렸지만 10년 동안 애먼 작품만 출간됐다. 본격미스터리대상 수상작들이 우리나라에서 꽤나 반응이 좋았던 걸 생각하면 - 대표적으로 히가시노 게이고의 <용의자X의 헌신>, 우타노 쇼고의 <벚꽂 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와 <밀실살인게인2.0>을 꼽을 수 있겠다. - 아직까지 출간이 안 된 게 이상한데... 뭔가 사정이 있겠지만 아무튼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긴 해도 기대할 수밖에 없다. 이후 몇 번 실망하긴 했어도 <별 내리는 산장의 살인>은 구라치 준이라는 이름을 기대하게 만들어주는 작품이었으니까 말이다. 

 트릭이나 캐릭터, 클로즈드 써클을 제외한다면 작품을 풍성하게 만드는 작가의 잡지식과 작가가 자극을 준 쓰즈키 미치오의 <일흔다섯 마리의 까마귀>, 그리고 사회생활할 때 욱하면 진짜 큰코 다칠 수 있다는 교훈 아닌 교훈도 꽤나 기억에 남는다. 이 작품에서 쓸데없이 방대했던 UFO에 대한 어떤 캐릭터의 연설은 그 부분만 따로 떼서 읽으면 되게 흥미로웠고, 이 작품에 어느 정도 아이디어를 제공했다는 <일흔다섯 마리의 까마귀>는 왠지 출간 가능성이 극히 적어보여 더 궁금하고, 주인공 스기시타가 감정 조절을 못해서 좌천당하면서 무슨 꼴을 당하느냐가 작중에서 꽤 깊이 있게 다뤄진 만큼 한 번 더 언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아까 이 작품이 교훈을 주는 이야기로선 한계가 있다는 식으로 얘기했지만 적어도 '욱하지 말자, ㅈ되기 싫으면.' 이란 누구나 알지만 실천하기 힘든 교훈을 이 작품이 꽤나 잘 다뤘다는 건 부정하기 힘들다. 스기시타가 그나마 운이 좋은 편이었지,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그대로 지옥에 꼼짝없이 빠지고도 남았을 테니... 정말이지 교훈이라면 이만한 교훈도 없을 듯하다. 


 두서 없이 여러 좋았던 요소를 나열했지만, 끝으로 이 소설이 그래도 결국 기본이 탄탄했기에 뒷맛이 아주 좋았음을 강조하도록 하겠다. 아무리 기발한 트릭과 소재가 있어도 기본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이 작품의 경우 트릭은 기발해도 소재는 극히 평범했지만 막연하게 기대를 주는 방식과 더불어 교과서적이면서 확실하게 재미를 보장하는 동시에 허점이 없는 만듦새를 선보여 후반부의 몇몇 뜬금없는 전개나 설정이 대단히 극적으로 비춰져 전반적으로 만족하며 책장을 덮게 됐다. 

 워낙에 깔끔하게 마무리를 지어 허전한 감도 있지만, 나는 왠지 모르겠으나 한 편으로 확실하게 끝을 맺는 추리소설이 오히려 더 만족스러운 경우가 많았고 이 작품이 그에 정확히 부합해 왜 내가 이 작품을 두 번 읽기로 10년 전에 생각했었는지 이해가 됐다. 간혹 다시 읽으면 왜 다시 읽기로 했었는지 납득이 안 가는 경우도 있는데 이 작품은 그렇지 않아 아주 반가웠다. 



 p.s 인상 깊은 구절은 다시 읽어도 가슴에 찔리는 명언이다. '실현되지 못한 타인의 꿈은 처음부터 없던 것이나 마찬가지'라니, 부정하고 싶지만 부정할 수 없다. 

게다가 실현되지 못한 타인의 꿈은 처음부터 없던 것이나 마찬가지니까요. - 46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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