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보니 스페인어였습니다
하현 지음 / 빌리버튼 / 2019년 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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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내가 이 책을 읽기로 결심한 이유는 최근 독학하고 있는 스페인어에 대한 에세이 같았기 때문이다. 내가 이 책을 사서 읽기로 결심한 이유는 저자가 서문에서 '배움이란 무릇 숭고해야 한다고, 세상은 지금껏 나를 그렇게 가르쳤지만. 아니, 왜 꼭 그래야 하지?' 라고 말한 것이 퍽 공감됐기 때문이다. 내가 이 책을 괜히 읽었다고 후회한 이유는 저자가 자신의 가벼운 배움의 의지에 너무 당당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이 책을 괜히 사서 읽었다고 후회한 이유는 입으로 불면 활자가 반절 이상 날아가버릴 만큼 가볍기 짝이 없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스페인어보단 스페인어를 배우는 일상에 초점이 가있긴 했지만 기실 저자의 일상 기록 정도로 받아들이고 읽으면 부담 없이 읽히고 제법 유익한 점이 없는 것도 아니라 전반적으로 가독성은 괜찮았다. 스페인어의 다양한 관용구나 배울 때 어려운 부분은 그래도 저자가 학원을 다니며 배운 보람이 있게 구체적인 예시를 들어가며 소개하기에 언어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부분이지 않을까 싶었다. 가령, 스페인어는 내가 아는 한 알파벳으로 이뤄진 언어 중 정말 적혀있는 대로 읽기만 하면 될 정도로 발음 체계가 명확해 진입장벽이 낮아 보였지만, 단어의 성별 구분이 매우 엄격해 마치 한자로 넘어가면서부터 급격히 난이도 상승하는 일본어처럼 첫인상에선 예상되지 않는 심오함이 가득한 언어라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단어의 성별 구분이야 제2외국어가 프랑스어였던 내게 아주 생소한 개념은 아니었지만, 주어의 성별에 따라 동사와 조사의 형태마저 바뀌는 게 꼭 남아공의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이나 이슬람의 남녀 구분보다 엄격하게 느껴져 역시 이 세상에 쉬운 언어란 없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밖에도 스페인어 공부의 여러 자잘한 고충이 묘사되지만, 실질적으로 '스페인어는 첫인상에 비해 결코 쉽지 않은 언어다' 라는 걸 제외하면 이 책을 읽고서 남는 게 딱히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 부분은 일기의 형식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에세이집에서 흔히 느껴지는 단점으로, 가볍게 읽혀서 부담이 없다는 장점을 없애버리고도 남는 터라 스페인어가 첫인상과 많이 다른 어려운 언어임을 저자가 알려줬듯이, 굉장히 매력적인 책이리라 예상하게 만든 프롤로그와 달리 끝맛은 그닥 좋지 않은 책으로 기억에 남게 됐다. 그도 그럴 것이 저자가 배움에 대한 호기심은 있어도 의지가 박약한 편이고 그에 대한 자기합리화도 심한 편이라 나도 모르게 '이럴 거면 언어 공부는 자제해야지' 하고 속으로 쓴소릴 하게 됐다. 

 너무 신랄한 말이긴 하지만 수록된 에세이들의 질적 수준이 그리 고르지 않고 그나마 괜찮게 읽은 것도 깊이가 기대보다 떨어지기에 어쩔 수가 없다. 뭐, 가볍고 부담없는 글을 쓰는 것도 능력이라고 진심으로 생각하며 또 나 역시 배움이 엄청나게 숭고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기에 기본적으로 작가의 글을 따라가는 데 큰 지장은 없었다. 하지만 각각의 글의 연결고리가 의외로 허술해 갈수록 흡입력이 떨어졌고 개중엔 스페인어와 전혀 상관없다고 여겨지는 내용의 글까지 있어 탄식이 나오기도 했다. 너무나 뜬금없는 나머지 그 글의 자체적인 완성도를 논하는 게 무의미할 지경이었다. 이를테면 저자는 자신이 통학하는 홍대 근처가 어느날 달리 보였다는 취지로 낙태죄 폐지와 '검은 시위'에 대한 글을 썼는데, 난 아직도 그 글이 왜 수록됐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번지수를 잘못 찾은 글이기도 하고 편집 과정에서 이 글이 살아남았다는 것은 작가나 편집자나 그 나물에 그 밥인 것 같아 이 책에 대한 신뢰가 급격히 떨어지게 됐다. 아직 책은 150페이지 더 남았는데. 


 거기서부터 기대를 떨어뜨린 덕분인지 저자가 자신의 스페인 공부를 흐지부지하게 끝내게 됐더라는 내용의 글이 별 감흥 없이 읽힌 건 불행 중 다행이란 생각도 든다. 자꾸 얘기하지만 배움이 꼭 숭고할 필요는 없다는 저자의 말에 공감했다. 왜냐하면 나는 배움이란 숭고함 이전에 즐거움이 우선돼야 한다고 평소부터 생각해왔기 때문인데 정작 저자는 숭고하지만 않을 뿐만 아니라 스페인어 공부에 엄청난 즐거움을 느끼지도 못하는 듯해 읽는 나도 마찬가지로 별로 즐겁게 읽히지 않았다. 

 물론 순수하게 즐거워야지만 배움이 성립되는 것은 아니다. 자격증 취득 및 스페인으로 유학이나 여행을 하기 위한 실용적인 목적을 위해서 스페인어를 공부하는 것도 훌륭한 동기일 텐데 문제는 저자는 어느 동기도 갖고 있지 않고 기왕 기회가 있으니 배워본다, 정 안 되면 글감으로 다루면 되니까 하고 어느 순간부터 의무적으로 수강에 임하는 우를 범했다는 것이다. 꼭 숭고하지 않더라도 명확한 목적이 있었더라면 책의 무게감이 확 달라졌을 텐데, 저자는 자신의 의지박약을 인정하면서도 그대로 발전없는 채로 시간을 보내 글도 흐지부지 끝내버린다. 


 '이럴 거면 애당초 배우지 말지' 라고 속으로 많이 생각했지만 그 말로 내 감상을 정리하지 않겠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야심차게 뭘 배우기 시작했다가 그렇게 흐지부지하게 끝내버리기 일쑤잖은가. 나도 그렇고... 그리고 저자는 적어도 이런 흐지부지한 에피소드로 책 한 권을 완결냈으니 소정의 성과는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의 내용에 공감이 가는 사람들도 - 특히 스페인어의 문법에 질려 포기한 사람들 - 적잖을 것이다. 그런 측면에선 의미가 있는 책이었다. 아, 나만 이런 게 아니구나 하고 읽을 수 있는 책, 비꼬는 말이 아니라 이런 위로를 주는 책은 정말 필요하다 생각한다. 나쁘게 말하면 반면교사 삼기 딱 좋은 책이지만 그렇게 말하고 싶은 사람은 그렇게 말하라지. 

 허나 한 사람의 독자로서 얘기하건대 저자가 사람으로서가 아닌 작가로선 영 정이 가지 않았다. 이제야 독학으로 스페인어 어휘를 익히고 있는 내가 이런 말하긴 그렇지만 저자는 책의 제목에 넣은 '스페인어'라는 소재에 대한 전문성을 살리기보단 저자 자신의 감상을 적어내는 것에 주력했다. 작가가 자신의 주관을 글에 녹여내는 것은 중요하지만 비문학적인 요소, 스페인어의 역사나 스페인어를 모국어로 쓰는 사람들 등 다각도에서 접근했더라면 적어도 스페인어를 배우면서 생각난 자신의 과거를 풀어내기만 했던 것보다 훨씬 풍요로운 내용의 책이 됐을 것이다. 


 나라고 꼭 책의 내용이 풍요롭지 않았다고 깎아내리고 싶진 않으나 결정적으로 저자가 자신의 글을 치밀하고 진지한 자세로 임한 것 같지 않아, 말 그대로 배움이 숭고할 필요는 없다며 자신의 글에도 숭고함을 불어넣지 않은 듯해 독자로서 아쉬움이 남을 수밖에 없었다. 제목에 스페인어란 단어가 들어갔다는 이유 하나로 읽은 주제에 너무 혼자 실망하고 폭언을 하는 것 같아 조금 찔리지만, 책의 제목처럼 정말 어쩌다 보니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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