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를 엮다 : 상
미우라 시온 원작, 쿠모타 하루코 그림 / 미우(대원씨아이) / 2019년 9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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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 






 사전을 만드는 사람들의 이야기, 라고만 이 작품을 소개하면 솔직히 별로 재밌어 보이진 않을 것이다. 원작 소설가가 미우라 시온이며 원작이 일본서점대상을 수상했고 인기에 힘입어 실사 영화와 애니메이션으로도 만들어졌다는 얘기까지 들어도 사전 만드는 이야기가 그렇게 재밌을까 싶을 것이다. 내 경우엔 지금 이렇게 포스팅을 쓸 때도 사전을 꽤 많이 참고하는 터라 사전 자체가 익숙하지만, 어떤 사람에겐 어쩌면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잡지 않은 책이 사전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사전을 만드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재밌을 거란 생각이 들지 않을 수밖에. 내 나름대로 사전을 많이 본다고 한 나도 사전을 만드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이리 재밌을지 예상하지 못했으니까. 

 <배를 엮다>는 '대도해'라는 이름의 사전을 편찬하는 사람들의 13년 간의 여정을 그린 작품이다. 사전의 이름은 말의 바다를 나아가는 배이며 작품의 제목은 배라는 이름의 사전을 엮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의미하고 있다. 참고로 우리나라에 개봉된 영화의 제목은 '행복한 사전'이었는데, 그 제목도 아주 관련이 없는 제목이라 할 순 없지만 그래도 원제가 훨씬 낫다고 본다. 물론 '배를 엮다'라는 말이 일상적인 표현이 아니다 보니 이해는 하지만. 아무튼 넘쳐나는 말의 홍수 속에서, 또 내가 알고 있는 것 같은 단어여도 막상 사전적 정의를 말하라고 하면 입이 잘 벌리지 않는 언어의 어려움 속에서 묵묵히 시간을 다해 사전을 편찬하는 사람들의 고군분투가 이 작품의 주된 내용이다. 간혹 일할 사람이 부족해서, 또는 회사의 재정 문제 때문에 사전 제작 자체가 엎어질 위기에 처하지만 그때마다 잘 수습해 결국 사전 출간에 이르게 된다. 


 13년이라니, 객관적으로는 참 길고도 긴 시간이지만 원래 정성을 다한 책은 그만큼 시간이 드는 법이다. 대체로 소설도 따지고 보면 10년이 넘게 구상되고 집필된 작품이 아주 많다. 특히나 사전은 치우치지 않은 언어의 정확한 풀이를 살펴보는 책이므로 오히려 서두르지 않고 시간을 들이는 게 중요할 것이다. 이 책은 사전 만들기의 전문성, 언어를 어떻게 풀이해야 하며 사전엔 어떤 종이가 적합하며 어떤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한지 제법 디테일하게 소개된다. 요즘엔 사전을 인터넷 사전만 보거나 영어 사전만 보는데 작품을 읽다 보니 종이로 된 사전을 언제 한 번 읽어봐야지 하는 생각이 들게 됐다. 비단 이 작품 속 캐릭터들 못지않게 우리나라에서 사전을 만든 사람들도 적잖이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냈을 테니까. 이익을 위해서가 아닌 순전히 지식을 위해 만들어진 책이란 점에서 고매함이 느껴지기까지 한다. 

 난 이 작품을 영화로 먼저 접했고 원작 소설도 읽었고 만화로 세 번째로 접하게 됐다. 만화가 영화나 원작 소설과 다른 점이라면 인물의 감정 표현이나 묘사가 조금 더 발랄하고 적극적이며 알기 쉽다는 것이다. 이 점 덕분에 주인공 마지메와 카구야의 연애 이야기보다 만화에선 니시오카의 열등감이 더 흥미롭게 묘사됐다. 어떻게 보면 니시오카의 열등감이 작품 전체에 걸쳐 중요하기 그지없는 부분인 지라 만화의 연출이 실로 적합했다고 여겨졌다. 보통 마지메처럼 사교성 떨어지는 캐릭터가 주인공인 작품의 경우 그들의 성실함과 전문성을 높여주며 그와 다른 사교성 높은 사람들, 소위 말하는 인싸에 속하는 사람들을 두고 경박하다면서 홀대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이 작품에선 반대로 그렇게 홀대를 당하는 인싸가, 아니면 정말로 내실 없게 살거나 그렇게 산다고 푸념하는 인싸가 화려하지 않은 삶이어도 내실 있게 사는 마지메 같은 캐릭터에게 형용하기 힘든 열등감을 품는 대목이 - 그런 와중에도 둘 사이에 아주 바람직한 우정이 형성된다는 것도 - 신선하면서 정말 그럴 수도 있겠는데 싶어 굉장히 재밌게 읽었던 기억이 난다. 


 이 작품을 통해 사전을 만드는 이야기, 언어의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의 이야길 접할 수 있던 것도 좋지만, 그저 자기 일에 묵묵히 최선을 다하는 책임감과 끈기, 이른바 장인 정신의 가치란 것을 엿볼 수 있어 더욱 애정이 갔다. 캐릭터들이며 소재며 이래저래 사랑스러운 작품이지만 사전을 만드는 이야기라는 자칫 생소하고 지루할 수 있는 이야길 흥미롭고 감동적으로 풀어냈다는 점에서 고매함이 느껴지기까지 했다. 장인의 이야기란 대체로 그런 법인가? 작품의 결말을 생각하니 더욱 그렇게 느껴진다. 

 내심 이 만화를 읽기 전엔 과연 원작 소설의 내용이 만화로도 2차 창작될 만한 내용이었나 싶었지만 읽는 동안 만화가 더 편한 독자들에게도 <배를 엮다>의 내용을 전할 수 있으니 참 다행이라며 역시 괜히 만화로 나온 게 아니구나 하고 감탄하기도 했다. 애니메이션까지 볼 생각은 없지만 그래도 어느 장르로 치환되더라도 재밌게 받아들여진다는 점에서 정말 대단한 원작이 아닐 수 없다. 시간을 둔 다음에 소설이랑 영화도 다시 볼 생각이다. 내용이 가물가물해진 다음에 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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