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할 땐, 책 - 떠나기 전, 언제나처럼 그곳의 책을 읽는다
김남희 지음 / 수오서재 / 2019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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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내 모든 여행은 배낭에 넣어갈 책을 고르는 일로 시작한다" 라는 문장만으로 읽을 수밖에 없던 책이다. 총 25권의 책과 그와 관련된 여행 이야길 풀어낸 이 책은 읽는 동안 정작 본문의 내용에 감탄한 적보다 내 지난 여행들을 추억한 적이 더 많았던 것 같다. 작가에게 미안한 얘기지만 일부 에세이를 제외하곤 대체로 전달하고자 하는 바가 장황하거나 혹은 소개되고 있는 책을 내가 읽질 않은 탓인지 잘 와 닿지 않았다. 물론 내가 읽었던 책이라고 이 작가가 아주 맛깔나게 소개해줬다는 뜻은 아니다. 개인적으로 <리스본행 야간열차>와 <페르세폴리스>, <카탈로니아 찬가>, <파타고니아 특급 열차>, 그리고 에필로그에서 소개된 <80일간의 세계일주>에 대해 작가가 풀어낸 감상이 기억에 남는다. <페르세폴리스> 빼고 아직 접해보지 못한 책들인데 언젠가 읽어볼 생각이다. 그 책들을 읽고 이 에세이들만 따로 읽어도 좋고. 

 이 책을 읽으면서 작가의 독서량보단 이 작가가 직접 가본 여행지들에 더 감탄했다. 보통 이란이나 부탄, 몽골, 아마존 같은 곳들은 가보고 싶다고 생각해볼 순 있어도 실제로 행동에 옮기기란 결코 쉽지 않다. 그것도 여자 혼자 몸으로. 아니나 다를까 여성이란 이유로 모종의 신변 위협을 느낀 경우도 있었던 모양이지만 그보단 에세이엔 여행지와 책과의 연결 고리나 복합적인 감상에 대한 기록이 우선으로 적혀있었다. 나도 여행을 좋아하지만 정말 대단한 역마살이 아닐 수 없다. 책을 읽었다고 그 배경에 직접 가보고 싶은 마음이야 잘 알지만... 솔직히 말해 시국이 시국이라 그런지 걱정보다 부러움이 훨씬 앞섰다. 역시 여행은 의지로 하여금 시간을 만들어서 가는 것이다. 


 내가 지금껏 갔던 여행 중 책과 관련된 여행은 어떤 것이 있었는지 떠올려봤다. <도련님>의 마츠야마, <신참자>의 도쿄, <레몬>의 하코다테, <침묵>의 나가사키, <말레이 철도의 비밀>의 말레이시아, 그리고 '해리 홀레' 시리즈의 노르웨이... 되돌아보니 나도 적잖은 성지순례를 실천해냈다는 성취감이 느껴졌다. 정말 하나같이 소중한 여행들이었다. 물론 이것만으론 부족하다. 가령 <내 이름은 망고>의 캄보디아나 <박쥐>의 호주, '밀레니엄' 시리즈의 스웨덴, '에를렌뒤르' 시리즈의 아이슬란드, <과테말라의 염소들>의 과테말라, <차일드44>와 <모스크바의 신사>의 모스크바, <13.7>의 홍콩, <남쪽으로 튀어!>의 이리오모테섬, <푸른 불꽃>의 가마쿠라, <보틀넥>의 가나자와, 그리고 이사카 코타로 대부분의 작품의 무대인 센다이는 내 버킷 리스트에 있는 여행지들이다. 특히 스웨덴은 코로나가 아니었으면 작년 3월에 여행갈 뻔했기에, 홍콩은 코로나가 아니더라도 다른 국제적인 상황 때문에 가기 힘들어져 더욱 아쉽다. 언젠가 갈 수 있는 날이 오긴 올는지... 

 여행할 때만큼 책이 잘 읽히는 경우도 없는 것 같다. 그렇기에 여행 가방을 쌀 때 가장 고심하는 것은 단연 책이다. 재미의 여부나 두께도 중요하지만 그래도 가급적 여행지와 어울릴 만한 책을 들고 가려고 한다. 꼭 그 여행지가 배경인 소설일 필요는 없다. 내가 나가사키에 갈 때 나가사키가 고향인 요시다 슈이치의 책을 들고 간 것처럼, 삿포로 여행을 갈 때 <맥주별장의 모험>을 들고 간 것처럼 어떤 식으로든 관련이 있는 책을 가져가려고 한다. 여행까지 가서 무슨 책이냐 싶겠지만 여행과 마찬가지로 독서도 의지로 하여금 시간을 만들어서 하는 것이다. 카페나 느리게 가는 기차, 잠들기 전 숙소에서 얼마든지 짬을 내 읽을 수 있다. 그리고 여행지의 지명이 책 속에서 언급되기라도 하면 어마어마한 반가움을 느끼는 동시에 내가 소설의 등장인물이라도 된 듯한 잘 설명하기 힘든 고양감에 휩싸이게 된다. 


 사람들은 성지순례를 위해 책의 배경 속 도시로 여행가는 것이라 생각한다. 맞는 말이다. 내 스스로 엄청난 팬임을 자처하는 작품일수록 실제 배경을 내 두 발로 걷는 것만큼 쾌감 넘치는 일도 없으니까. 그런데 성지순례란 대체 무엇일까? 단지 그 장소를 걷는 일로만 여기는 건 약간 부족한 설명인 듯하다. 내가 봤을 때 성지순례란 책 속의 배경으로 내가 실제로 걸어가는 것, 어떻게 보면 책과 나를 동일시하는 일이다. 한편으론 책 속의 무대가 실존하는 장소란 걸 확인하려는 궁금증을 충족하기 위해서도 크다. 실제 장소를 거닐다 보면 작품의 분위기가 온몸으로 스며들 때도 있고 기대한 것과 너무 달라 어리둥절할 때도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실망한 적이란 거의 없다. 오히려 현실은 이렇구나 하면서 나만의 좋은 추억으로 남았으므로 결과적으로 나쁜 여행이라 느낀 여행은 없었다. 

 반대로 그 여행지가 너무 감명 깊은 나머지 관련 책을 더 찾아보는 경우도 있었다. 히로시마나 뉴욕이 그랬다. 여행은 걸어서 읽는 책이고 책은 눈으로 하는 여행이랬나? 내 입장에선 더할 나위 없이 잘 맞아떨어지는 말이다. 여행과 책, 도저히 한쪽을 따로 놓고 생각하기 힘들다. 당장 이 책 <여행할 땐, 책>만 하더라도 읽으면서 리스본이나 모스크바, 바르셀로나, 아이슬란드 같은 곳이 더욱 가고 싶어졌다. 여행 다큐멘터리를 봐도 여행 욕구가 샘솟지만 글로 샘솟게 되는 여행 욕구는 정말 남다는 구석이 있다. 내가 머릿속으로 구성한 여행지에 대한 인상을 직접 경험하고 주변에 떠들고 싶어서일까? 어쩌면 나는 단지 부러워서 성지순례를 하고 싶어하는지도 모르겠다. 


 ......글을 쓰다 보니 누가 누굴 보고 장황하다느니 잘 와 닿지 않는다느니 할 자격이 내게 있을까 하고 반성하지 않을 수 없다. 비교하려니 쑥스럽지만 책과 여행을 연결 지어서 글을 쓰려니 필요 이상으로 감상에 젖게 돼 참으로 쉽지 않다는 걸 방금 확실히 깨달았다. 이 글을 쓰기 전까진 이런 생각이 안 들었지만 여행과 책에 대한 에세이를 25편 쓴 작가를 존경하게 됐다. 최소 25번은 넘게 여행한 작가의 인생은 더더욱 존경하게 됐고. 지금은 시국 때문에 국내 한정이긴 하지만 어쨌든 과연 나도 이 작가에 필적할 만큼 여행으로 점철된 삶을, 여행에 살고 여행에 죽는 인생을 살 수 있을까? 쉽지 않겠지만 감히 그 인생 못지않게 살아내고 싶단 생각밖엔 들지 않는다. 내 안의 여행 욕구를 이보다 적나라하게 확인할 수 있던 독서는 또 없었던 것 같다. 

 작가 이름을 검색해보니 코로나 시국 이후에 나온 책도 있던데, 그 책도 읽어보고 싶어졌다. 과연 그 작가는 이 시국에 어떤 감상을 할지 궁금하기 그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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