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일간의 남미 일주
최민석 지음 / 해냄 / 2020년 8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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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제목 그대로 소설가 최민석의 40일간의 남미 일주를 그린 이 여행 에세이는 지금 같은 시국엔 부러움을 넘어 질투를 유발할 뿐이었다. 글감을 위해 여행을 떠날 수도 있던 지난날의 낭만적인 분위기가 한껏 풍겨 잠깐이나마 지금 시국의 분위기를 잊을 수 있었다. 한 가지 아쉬웠던 게 있다면 이 책에 수록된 글들은 코로나 한참 이전에 작성됐지만, 책 자체는 한창 코로나가 터지고 난 뒤란 것인데, 이 두 시기의 극명한 차이를 작가가 강조하며 지난날을 그리워하거나 추억하는 어조가 들어갔으면 어땠을까 싶다. 보아하니 여행을 꽤 좋아하는 작가인 것 같은데, 김영하 작가의 <여행의 이유>를 읽었을 때도 느낀 거지만 이런 여행을 좋아하는 작가들이 코로나로 인해 여행을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시국을 어떻게 여길는지 참으로 궁금하다. 

 작가가 후기에서 밝히듯 사실 이 책은 '일주'라고 부르기엔 남미를 수박 겉 핥기 수준으로 다녀온 감이 없잖다. 40일이 길다면 길다고 할 수 있지만 가는 데만 이틀 가까이 걸리는 남미인 데다 거리가 거리인 지라 두 번 가기 힘든 만큼 40일은 고작 40일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겠다. 작가는 위트 있게 사전에 있는 여러 해석을 뒤지고 뒤져서 비록 자신이 40일밖에 다녀오지 않았지만 이동한 동선이나 비행기로 그 위를 날아간 동선을 합치면 일단 일주는 했다면서 여행의 마무리로 인한 아쉬움을 달래는 듯했다. 특히 여행 막바지에 이렇게나 일이 꼬일 수 있을까 싶을 만큼 대환장 파티가 펼쳐졌는데 이를 유쾌하게 받아들이며 정신 승리하는 작가의 마음가짐이 참으로 부러웠다. 


 보통 해외 여행은 돈이 많이 들어가는 만큼 기껏 멀리 갔는데 일정이 잘 풀리지 않거나 막상 갔는데 기대에 못 미치면 소위 말하는 가성비가 떨어진단 생각에 내가 괜히 시간과 돈을 들여 이 고생을 하면서 왔나 하고 한껏 비관주의에 빠져들기 마련이다. 여행지에 대한 기대가 크면 클수록, 이 여행을 위해 잠시 거리를 둔 현실의 고달픔이 더욱 고달플수록 여행의 힘듦을 선뜻 받아들이기 힘들어진다. 어쩌면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부러웠던 건 작가 스스로 말하길 본인이 안 풀리는 작가라지만 어쨌든 등단하고 일거리가 끊이지 않는 작가라는 것, 무려 40일간 남미의 여섯 나라를 방문한 것보다 여행지에서 작가가 보인 대범한 모습인지 모르겠다. 내가 사는 동안 남미 중 어느 곳이라도 방문해볼 수 있을까 싶지만, 만약 간다면 이 작가처럼 설렁설렁 다닐 수 있을까? 나라면 배탈이 난 시점에서 여행 중에 이 무슨 추태냐며 자괴감에 빠졌을 것이다. 

 멕시코, 콜롬비아, 페루, 칠레, 아르헨티나, 브라질 총 여섯 나라 중 개인적으로 나도 언젠가 가보고 싶다고 생각한 곳은 페루의 리마와 쿠스코, 그리고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였다. 작가의 묘사에 따르면 리마는 해안 절벽 끄트머리에 세워진 기이한 도시고, 쿠스코는 남미의 스페인 식민지였던 국가 중 유일하게 스페인이 정복하지 못한 최후의 요새라 원주민이 많이 사는 이색적인 도시고,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스페인어로 '좋은 분위기'인 것처럼 탱고와 낭만이 넘치는 도시인 것 같아 직접 방문해보고 싶어졌다. 누가 소설가 아니랄까봐 여행기치고 사진이 많지 않았는데, 거기에 한 술 더 떠서 유명 관광지가 아닌 숙소와 일반적인 카페나 바, 심지어 거리나 택시에서 보고 들은 에피소드를 주로 썼기에 여행지로서의 피상적인 모습이 아닌 실제로 사람이 사는 공간임을 엿볼 수 있어 어딘지 새롭게 읽혔다. 


 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너무 전형적이지 않은 전개로 여행기가 진행되다 보니 눈길을 확 잡아끄는 맛이 없고, 대부분 숙소에서의 황당한 에피소드나 배탈이 나 약국을 들락거린 에피소드인 지라 실질적인 여행 정보를 얻기엔 부족함이 있는 여행기였다. 간간이 그 나라의 역사나 상식, 그 나라를 배경으로 한 영화에 대해 설명하지만 그것도 체계적이고 주기적으로 나오는 게 아닌 터라 전반적으로 가독성이 뒤로 갈수록 떨어지는 편이었다. 대체로 글에 설명이 너무 많으면 가독성이 떨어지는 법이지만 설명이 너무 적어도 가독성이 떨어지긴 마찬가지란 건 간만에 느꼈다. 작가의 다른 여행기 <베를린 일기>는 어떠려나? 

 기대가 큰 탓이었는지 생각보다 남미의 이모저모보단 작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가 더 잘 기억에 남았던, 나름대로 독특하다면 독특했던 여행기였다. 어쨌든 작가의 다른 책도 읽어보고 싶어졌다. 여행기나 소설도 궁금해졌다. 작가는 스스로 잘 안 풀리는 작가라고 했지만 이렇게 긴 여행을 갈 수 있을 정도면 벌이가 그렇게 시원찮은 건 아닌 것 같다. 글을 써서 여행 경비를 마련하고, 게다가 다음 글감을 얻으라면서 본의 아니게 여행을 권할 만한 편집자가 붙을 정도니 자조하듯 말한 것에 비해 번듯하고 능력이 출중한 작가가 아닐까 싶다. 뭐, 다른 책도 직접 읽어봐야 알 일일 테지만 말이다. 

왜 이런 작가들이 변기를 전시했던 마르셀 뒤샹 이름의 ‘ㅁ‘자만큼도 안 알려졌을까.

슬프지만, 뉴욕 태생이 아니기 때문이다. 런던 출신이 아니고, 파리 출신이 아니고, 미국인이 아니고, 유럽인이 아니고, 멕시코인으로 태어나 여전히 멕시코인으로서 멕시코에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한국에서 소설가로 살아가는 나로서는 제1세계로만 편중된 예술 시장의 관심을 한탄할 수도 있다. 하지만, 현대 미술관에서의 경험은 오히려 더 겸손해져야 한다는 것을 내게 때리듯 알려줬다. 이처럼 훌륭한 예술가들도 알려지지 않았는데, 나는 이들에 훨씬 못 미치지 않는가. - 49~50p



선생님. 오늘도 정신 승리 하신 거예요?

믿기 어려우시겠지만, 오늘은 진심입니다. 이런 자세로 지내면 어디에서도 지낼 만할 것 같아서요.

정신 승리 맞네요. - 298p



실은, 이게 지난 10년간 내가 작가로서 해온 것이다. 항상 수평선을 향해 간다고 여기고 한 발씩 내디뎠는데, 언제나 제자리였다. 수평선 부근에는 만나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 햇빛을 즐기며 여유롭게 ‘물 위에 떠 있는 삶‘을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 관념에서 헤어나와 주변을 보니, 정작 파도에 맞서서 앞으로 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남녀노소 모두가 파도의 힘 탓에 제 몸이 백사장까지 떠밀려 오는 걸 즐기고 있었다. - 390~39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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