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실격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3
다자이 오사무 지음, 김춘미 옮김 / 민음사 / 2004년 5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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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예전엔 특유의 암울한 문체에 질려 읽다 포기한 책이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전보다 견문이 넓어진 덕분인지, 아니면 이 작품의 주인공 요조와 공감대가 생긴 것인지 삼십대를 목전에 둔 이 시점에 읽으니 전에 없이 술술 읽혔다. 다자이 오사무의 자전적인 이야기이자 실제로 자살로 생을 마감한 작가의 정신 세계를 엿볼 수 있는 대표적인 작품이라 언젠기 읽어야지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결국 성공하게 돼 뿌듯하기 그지없다. 

 우연히 유튜브에서 민음사가 만든 다자이 오사무 영상을 봤는데 그 영상에서 '<호밀 밭의 파수꾼>, <데미안>과 함께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에서 판매량 top 5 안에 드는 작품'이라고 해 아무래도 관심이 갔다. 그리고 우연히 그날 독립 서점에 들렀는데, 그 서점에 이 작품이 놓인 걸 보고 충동적으로 구매에 이르렀다. 난 책을 가나다 순에 맞춰 매우 계획적으로 구매하는 만큼 이와 같은 충동적인 구매는 내게 매우 낯선 일이었다. 책을 다 읽으니 낯선 일도 해보고 볼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종종 충동적으로 책을 구매해봐야겠다. 


https://www.youtube.com/watch?v=TJtXyhcbpBE&list=PL65eoJV7XP3dn-u3A61z7oj8NTSE6VUdi&index=27

 
 이 영상이다. 관심이 있는 분은 보시길. 



 호불호가 꽤 갈릴 내용의 작품이지만 출간된 지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읽히는 비결은 무엇일까. 영상에선 인간의 나약함을 토대로 공감대를 형성했기 때문이라 해석하던데 나도 그 해석에 공감한다. 언젠가 방송에서 김영하 작가가 문학은 '나 혼자만 이상한 게 아니구나' 하고 위로를 해줄 때 위력을 발휘한다며 문학의 역할과 매력을 역설한 바 있다. 그러한 맥락에서 봤을 때 <인간 실격>은 제목이나 소재가 파격적이라 그렇지 진실로 '위로'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작품이 아닐 수 없었다. 이 말도 마찬가지로 영상에서도 나오는 말이지만, 다른 걸 떠나서 이 책의 판매량은 곧 주인공 요조의 고민과 좌절이 결코 요조처럼 소수의 몇몇 나약한 심성의 소유자만의 문제가 아님을 반증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자살은 당사자가 연약한 인간이란 반증이라고 경멸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인간 실격>은 그 경멸을 오히려 경멸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자신은 어떤 식으로든 사회에 녹아들 수 없고 겉돌다 도태되고 말 것이라는 불안감에서 비롯된 요조의 방황, 그리고 요조가 어쩌다 스스로에게 '인간 실격'이라 선고를 내리는지 그 과정을 쫓는 이 작품은 굳이 패전 직후의 일본 사회라는 배경을 연상하지 않아도 퍽 인상적으로 읽혔다. 개인적으로 공감했던 부분은 친구인 호리키에 대한 요조의 이중적인 감정과 호리키가 자신에게 꼰대적인 발언을 할 때 반발하면서도 상대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아 속으로만 삭히는 모습이었다. 특히 후자는 요조가 얼마나 유약한지 엿볼 수 있는 묘사임과 동시에 독자에게 '나만 저러는 게 아니구나' 라며 짙은 공감대를 선사하므로. 


 이 책을 읽으며 가장 인상 깊었던 구절이자 지인들에게 가장 호평을 들었던 구절은 바로 '그건 세상이 용납지 않아.' 라고 한 호리키의 말에 요조가 속으로 '세상이 아니라 네가 용납지 않는 거겠지.' 라고 답한 부분이다. 세상이란 잣대 뒤에 숨어 자신의 가치관을 강요하는 일은 내가 당하거나 반대로 내가 남들에게 하는 경우가 너무 비일비재한 나머지 그 행위의 졸렬함이 잊히는 것 같다. 속으로 말하긴 했어도 정말 촌철살인의 지적이 아닐 수 없는데, 덕분에 요조의 지나치다고도 싶은 방황의 나날, 여성 편력 등이 완벽하게 와 닿지 않음에도 어딘지 믿을 수 있는 화자로 여겨져 요조의 섬세하고 복잡한 심리를 견딜 수 있었던 것 같다. 

 ...이 문장은 책의 92페이지에, 결말까지 40페이지 남짓 남은 지점에서 나오기에 내가 이 문장을 두고 <인간 실격>의 암울한 문체를 견딜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앞뒤가 안 맞는 발언일지도 모르겠다. <인간 실격>의 암울한 문체는 첫 장에서부터, 정확히는 첫 번째 수기의 첫 문장 '부끄럼 많은 생애를 보냈습니다.' 서부터 작렬하기에 내가 위에서 한 말은 마치 '90페이지에 도달하고 나서야 비로소 보답을 받았다'는 고도의 비아냥 같다는 느낌도 든다. 말을 정정하자면, 내가 인상 깊었다는 저 구절은 하나의 예시일 뿐, 한없이 암울한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저 정도 촌철살인의 발언이 나올 것이라 기대하게 만들었다. 한마디로 개인적인 호불호를 초월한 채 믿음직한 작품으로 내 안에 스며들었다고 해야 정확한 표현이겠다. 여담이지만 음울한 작품이란 악명에 비해 가독성이 꽤 좋은 편인데 다자이 오사무가 비교적 행복했던 시절에 집필한 다른 작품들은 어떨는지 궁금증이 일었다. 


 작품의 진짜 암울한 장면은 후반부에 요조가 인간 실격이란 진단을 스스로 내리고 마는 장면일 텐데, 타인이 내리는 진단은 반발만 살 뿐이지만 직접적으로 '실격'이라는 표현을 써가며 스스로를 놓아버리는 것은 꽤 지독한 구석이 있었다. 사뭇 가벼운 어조로 '나 같은 놈은 죽어야 돼.' 하고 소리 내어 자책할 순 있어도 실격이라 말하는 것은 분명 도가 지나쳤다. 게다가 세상은 혀를 차긴 해도 정작 별 말 않는데 본인이 앞장 서서 완전히 모든 걸 포기하는 태도도 기이했다. 제아무리 본인이 자초한 비극이라 해도 이렇게까지 예민하게 굴며 자책할 필요가 있는지 물어보고 싶을 정도로 극단적이기 이를 데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작품이 제대로 반면교사용 소설로 읽혔다는 뜻은 아니다. 자책의 정도와 스스로 실격을 선고하는 결론이 거부감이 드는 것이지 요조의 자책 요인 중엔 내 지금의 고민과 닮은 지점이 많아 도저히 책의 내용이 남의 일처럼 다가오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세상이 나에게 실격을 선고하고자 서서히 벽을 좁히고 있는 듯한 답답함과 그걸 감지하면서도 크게 발버둥치지도 않은 지난날과 앞으로도 발버둥칠 여력이 좀처럼 생기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길함이, 그리고 눈앞의 행복이나 쾌락에 취하려는 현재 모습에 대한 자괴감... 내가 어찌 요조에게 공감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반대로 요조가 내면은 비록 망가졌을지언정 표면상으론 어느 정도 주체성을 갖고 살아간 적도 있어서 본받아야겠다는 생각도 했었다. 


 때문에 그가 답은 이미 정해졌다는 듯 자신은 역시 인간 실격이었다고 하는 게 불만이란 것이다. 어떤 사람이 말하길 그가 자신을 인간 실격이라 선고한 것이야말로 진짜 인간 실격이란 증거라는데 난 그 말이 잔인하긴 해도 일리 있는 말로 들렸다. 인간이냐 아니냐 합격인지 실격인지 여부를 세상이 내렸고 그 상황에 절망했다면 또 모를까,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 같이 자신은 인간 실격이라 주장하다가 진짜로 그 주장을 실천해버리는 것 같은 느낌도 들어 요조에 대한 공감이나 연민과는 별개로 최후의 순간엔 그와 거리가 생겼다. 

 어제 본 <벌거벗은 세계사>에서 조조의 명언이 소개됐다. '내가 세상을 저버릴지언정 세상이 나를 저버리게 두진 않겠다.'는 말인데 이 말은 삶을 대하는 조조의 주체성을 엿볼 수 있는 말로 해석된다. 반면 요조는 결과적으로 주체적인 삶과는 매우 거리가 멀면서도 그 주체적이지 못한 삶을 주체적으로 정하는 골때리는 행보를 보인다. 요조로 말할 것 같으면 '세상이 나를 저버리기 전에 내가 먼저 세상을 저버린다.' 였으니. 그런 점에서 비참함과 비겁함이 동시에 느껴지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나는, 내 인생은 조금씩 비참해지고 있는 건 자각이 되는데 거기에 더해 비겁해지고 있는 중인 건 아닐까? 나 역시 주체적으로 비참해지려는 비겁한 삶을 살고 있는 건 아닌지 반문해보게 됐다. 


 그렇다 보니 내게 과연 요조에게 공감이니 거리감이 생겼다느니 할 자격이 있는지 모르게 됐다. 어쩌면 동족 혐오일는지도. 



 p.s 진짜 여담이지만 표지의 그림이 왠지 모르겠는데 작품의 내용이랑 너무 잘 어울린다. 에곤 쉴레의 자화상이라니... 정작 에곤 쉴레는 자기애가 매우 강한 사람이었다는데 말이다. 

즉 저에게는 ‘인간이 목숨을 부지한다.‘‘라는 말의 의미가 그때껏 전혀 이해되지 않았다는 얘기가 될 것 같습니다. 제가 가진 행복이라는 개념과 이 세상 사람들의 행복이라는 개념이 전혀 다를지도 모른다는 불안. 그 불안 때문에 저는 밤이면 밤마다 전전하고 신음하고, 거의 발광할 뻔한 적도 있습니다. 저는 과연 행복한 걸까요? - 16p



인간의 삶에는 서로 속이면서 이상하게도 전혀 상처도 입지 않고 서로가 서로를 속이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하는 듯 정말이지 산뜻하고 깨끗하고 밝고 명랑한 불신이 충만한 것으로 느껴집니다. - 26p



그건 세상이 용납하지 않아.

세상이 아니야. 네가 용납하지 않는 거겠지. - 9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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