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방범 2 - 개정판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25
미야베 미유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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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포일러 : 거의 없음


 10년 만에 다시 읽는 것이 무색할 정도로 거의 모든 내용이 생생하게 기억 났던 작품. 언젠가 다시 읽으리라 생각했지만 막상 그때가 되니 너무 길고 고통스러울 내용에 다시금 주저하게 된 작품. 그러나, 10년 전에도 그랬듯 1500페이지에 육박하는 분량이 술술 넘어가 읽는 입장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성취감이 느껴졌던 작품이다. 장기 연재물답게 가끔 이야기를 질질 끄는 느낌도 받았지만 전체적으로 극강의 몰입도롤 선사하는 대작이다. 단연 미야베 미유키 최고의 작품이라 부르겠다.

 세월이 지나도 잊히지 않을 만큼 쇼킹한 내용이라 함부로 추천하기가 쉽지 않은 작품이긴 하다. 작가가 작정하고 써내려간 수위 높은 묘사도 상상력을 자극해 오싹했고 구역질을 유발하는 캐릭터도 적잖아 읽는 내내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회파 추리소설의 대가, 르포 소설의 대가답게 미야베 미유키는 현대 사회의 병폐라 부를 수 있을 만한 면면들을 성실히 추적한다. 그런 점에서 쇼킹한 범죄에만 주목하는 작품들과 결이 다르고, 격이 다른 작품이다. 만약 이 추적의 과정을 즐길 수 있는 독자가 아니라면 <모방범>은 전개가 느릿느릿하고 급결말인 작품으로 다가올 것이다.


 내 경우엔, 10년 전에 읽을 때는 전개 속도는 괜찮지만 결말이 급작스러운 감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지난 10년 간 '급결말이 아쉬운 만큼 분량이 더 길었으면 좋았을 작품'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다시 읽으니 그 결말이 최고의 결말이었구나 하고 인상이 바뀌었다. 왜 이 작품의 제목이 '모방범'인지 밝혀지는 대목이야말로 작가가 가장 강조하고픈 부분이었을 것이다. 그 점을 숙지하니 이 작품이 한층 대단하고 쾌감 있게 다가왔다.

 <모방범>은 총 3부로 구성된 장대한 소설이다. 1부는 발단부터 결말까지 의외성이 끊이지 않는, 그래서 남은 분량이 저렇게 많은데 이렇게 끝내도 되는지 괜한 걱정을 하게 만들었다. 2부에서는 범인이 왜 이런 짓을 시작했고 어쩌다 1부에서의 결말을 맞이했는지 과거사를 촘촘히 살펴본다. 과거를 다룬다고 하니 쉬어가는 코너라 생각될 테지만 어떻게 보면 가장 쇼킹하고 그래서 경계가 필요한 구간이다. 3부는 이야기의 본격적인 제2막으로 과연 사필귀정이 가능하긴 한 것인지 그 귀추가 주목돼 실로 조마조마하게 읽혔다. 중간중간 지루하게 읽히긴 하지만 상술했던 마지막 장면이 쾌감 한 보따리를 던져줘 스트레스가 끊이지 않던 작품의 분위기를 잠깐이나마 환기시켜준다. <모방범>이 특정 인물이 범죄를 모방하는 내용의 작품이라 여기고 접근한 독자라면 이 장면에서 빵 터질 것이다. 저렇게나 치밀한 범인이 고작 저 정도 일로 몰락하다니, 어떤 의미에선 섬뜩하기도 한 장면이다.


 개인적으로 2부가 유달리 흥미롭게 읽혔다. 누가 봐도 동정의 여지가 없는 쓰레기일 터인 범인의 시점에서 전개되는 이야기는 작가로서 부담이 따를 수밖에 없다. 너무 과도하게 동정심을 유발하려 했다간 역풍을 맞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범인의 사정이 딱한 부분도 있지만 그럼에도 자신이 복수해야 할 대상을 잘못 찾아 훗날 무고한 여성들을 납치해서 잔인하게 갖고 놀다 죽인 점은 도무지 정상 참작할 수 없잖은가. 그렇다 보니 2부를 읽는 내내 인물들의 감정선에 몰입하는 한편으로 적절히 거리를 두느라 애먹었다. 범인을 어떤 식으로든 미화를 해선 안 된다는 생각이 앞서다 보니, 눈물겨웠던 우정은 피해자들을 배려하지 못한 이기심으로, 수년에 걸쳐 당한 아동 학대는 결국 잘 지어진 변명거리로 비쳐졌다. 이건 정말이지 소설이니까 가능했던 접근이었다. 만약 현실에서 이런 사람을 만나거나 이렇게 범인을 동정하는 사람을 만난다면... 정말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

 그래서 3부도 2부에서처럼 마냥 범인을 동정할까 걱정이 됐는데, 그건 기우에 불과했다. 오히려 2부는 2부대로 놔두고 3부에서는 범인을 향한 미야베 미유키 나름대로의 처절한 조롱과 단죄가 기다리고 있었다. 2부에서 그토록 길게 범인의 과거를 들여다보고 3부에서도 그 작업을 소홀히 하지 않은 덕분에 그 단죄의 효과가 더욱 컸다. 처음부터 범인을 이해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던 사람에게 이 정도 단죄란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는 미야베 미유키처럼 범인을 이해하고 또 이해하려 노력한 사람만이 할 수 있을, 급소를 찌르는 일격이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욕을 하고 뭇매를 해도 자신이 누구도 흉내내지 못한 방식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고 미소를 지을 범인에게 어떻게 한 방을 먹일 수 있을까? 난 작가가 크게 한 방 먹이는 것에 성공했다고 본다.


 그 누구보다 범인을 동정적으로 바라본 작가였기에 그를 두고 이렇게 일갈하는 듯한 작가의 태도는 정말 속이 다 시원했다.

 '그래, 이해하려면 이해할 순 있겠지. 하지만 아무리 외면해봤자 너는 이 정도 비난에 흔들릴 정도로 유리멘탈의 소유자이며 자아도취에 빠져있던 관종이자 도무지 구제할 길 없는 쓰레기야. 딱 그뿐이라고.'

 도대체 이런 짓을 벌이는 범인의 심리는 뭘까? 단순히 미쳤기 때문이 아니라 그냥 재미로, 누구도 범접하지 못할 기념비적인 무언가를 자랑하고 싶을 뿐이란 것이 범인의 동기의 전부임을 작가는 성실하고 예리하게 살펴봤다. 이야기를 길게 펼친 것에 비해 참 심플한 동기였지만, 그 동기가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인간으로서 납득하기 버거운 것인 만큼 이런 긴 분량에 걸쳐 이해 가능하게끔 살펴본 작가의 끈기가 정말 대단하게 여겨졌다. 범죄와 악을 바라보는 각기 다른 입장의 사람들의 활약이나 이야기 전반에 녹아든 스릴과 오싹함도 발군이지만 이런 작가의 끈기야말로 이 작품에서 가장 손꼽을 만한 요소가 아닌가 싶다.


 지금도 신간이 활발하게 출간되고 있지만 미야베 미유키의 기세가 예전만 못한 것 같다. 한때 국내에 소개된 일본 추리소설 작가 중 히가시노 게이고와 함께 투탑이었는데 지금은 서열 정리라도 된 양 그 존재감이 묘하게 흐릿하다. 하지만 이 작품을 읽으니 역시 미야베 미유키는 미야베 미유키란 생각이 절로 들었다. 다시 읽으니 존경심이 절로 생긴다.

 <모방범>은 <화차>와 더불어 미야베 미유키의 대표작이자 내 개인적으로는 죽기 전에 한 번쯤 읽어봐야 될 역작이라 생각한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어마어마한 분량에도 불구하고 가독성이나 몰입도 등 외적인 요소도 강렬하기에 많은 독자들에게 있어 이 책을 완독하는 것은 여러모로 인상적이고 뿌듯한 경험으로 남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만큼 시대를 타지 않는 공감대와 흡입력이 있는 내용인 지라 - 가끔 90년대다운 옛스럽고 고리타분한 묘사와 장면도 있지만;; - 진입장벽이 높다는 걸 앎에도 추천하지 않고는 못 베기겠다. 이 포스팅을 스포일러 없이 쓰는 이유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이 글을 읽고 가급적 많은 사람이 도전해줬음 싶어서... 내 의도가 과연 얼마나 적중할지 궁금하다.

 

 

 인상 깊은 구절

 

진정한 악이란 이런 거야. 이유 따위는 없어. 그러므로 피해자는 자기가 왜 그런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하는지 모르는 거야. 원한, 애증, 돈, 그런 이유가 있다면 피해자도 납득을 할 수 있겠지. 자신을 위로하거나 범인을 미워하거나 사회를 원망할 때는 그 근거가 필요한 거야. 범인이 그 근거를 제시해주면 대처할 방법이라도 있지. 그러나 애당초 근거 같은 건 없었어. 그거야말로 완벽한 '악'이야. - 2권 190~191p


누군가를 향해 손을 내밀고 내가 곁에 있으니 괜찮다고 말을 거는 순간에, 그는 다른 사람이 기댈 수 있는 존재가 된다. 처음부터 듬직한 인간은 없다. 처음부터 힘있는 인간은 없다. 누구든 상대를 받아들일 결심을 하는 순간에 그런 인간이 될 수 있는 것이다. - 2권 343p


우리는 환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영토를 차지하기 위해 서로 싸우기도 하고 함께 개척하기도 하면서, 서로에게 서로의 시민이 됨으로써 살아갈 수 있다. 인간이 나약하다는 것은 바로 그런 뜻이라고 다케가미는 생각하고 있었다. - 2권 426p


살인이 잔혹한 것은, 살인이 피해자를 죽이는 데 그치지 않고 그 가족의 생활과 마음까지 서서히 죽여가기 때문이야. 하지만 그 가족을 죽이는 것은 살인자 본인이 아니라 그 가족들 자신의 마음이야. 정말 웃기는 이야기지만, 사실이 그래. - 3권 263p


진실이란 건 말이지, 네놈이 아무리 멀리까지 가서 버리고 오더라도 반드시 너한테 다시 돌아오게 되어 있어. - 480~48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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