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수 사용 설명서
전석순 지음 / 민음사 / 2011년 7월
평점 :
품절


8.7






 <철수 사용 설명서>는 젊은 청춘인 주인공 철수의 신세를 고장이 잦은 가전제품으로 대치시킨 소설이다. 흡사 매뉴얼 같은 문체를 구사하는데 철수의 인생과 미래를 성실하게 대변해준다는 점에서 일종의 변호문이라고 볼 수도 있다. 독특하면서 알기 쉬운 비유로 가득찬 한 편의 시처럼 읽히기도 하는 이 소설은 5년 전에 군대를 갓 전역한 내게 있어 여러모로 긍정적으로 읽혔다. 세월이 흘러 다시 읽으니 전에는 감탄하며 읽었던 부분들이 지금은 식상하고 공허하게 다가왔다. 현재 내가 처한 상황이 좀 별로라서, 5년 전과는 달리 미래에 대한 희망이 옅어진 상태라 이 작품이 별 감흥이 없게 읽힌 것 같다.

 매뉴얼을 연상시키는 이 작품의 문체와 개성에 대해 먼저 말하자면, 일단 처음 읽었을 땐 신선했던 특징이 두 번째 접할 때는 딱 중언부언 그 이상도 아니었다. 객관적으로 흥미롭고 인상적인 묘사긴 했지만 다시 읽을 때도 똑같은 효력을 발휘하진 못했다. 철수의 오작동에 대한 변호를 위해 '세탁기한테 왜 탈수가 안 되냐고 따지는 격'이라는 식의 변호가 번번이 들어가 금방 지겨워졌다. <82년생 김지영>의 김지영과 비슷하게 이 작품의 주인공 철수도 대다수의 독자들의 공감을 살 만한 행보를 보이긴 하지만 그 공감대에서 한 걸음 물러서서 바라보면 독자들로 하여금 결정적으로 '자기 일'로 동일시하게끔 만들어주는 서사는 부실한 편이라 그 점이 아쉬웠다. 과거에도 그렇고 지금도 이 작품이 시처럼 읽혔는데 그 이유가 바로 이런 아쉬움 때문인 듯하다. 상황에 대한 묘사는 있을지언정 물이 흐르는 듯한 서사가 부족했다. 이러니 몰입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지겹고 어떻고를 떠나 매뉴얼에 빙자해 철수의 삶을 이야기하는 작가의 저의는 높이 살 만했다. 모든 사람한테 획일적인 잣대를 들이대느라 사람들의 다양한 가능성이 미처 발현되지 못한다는 작가의 웅변은 무척 감동적인 데가 있었다. 특히 우리나라에는 한 개인을 연령대에 따라 이때는 이래야 하고, 요때는 요래야 하고, 저때는 저래야 하는 무언의 압박을 가하는 분위기가 팽배하단 걸 떠올리면 철수를 가전제품에 비유한 건 너무나 적절했다. 너무나 보편적인 이름을 가진 철수가 그 이름에 걸맞는 보편성을 갖추긴커녕 오히려 그 기준에 못 미치는 모습을 보이자 부모를 비롯한 누나, 선생, 그녀들, 군대 조교와 회사 면접관들이 한숨을 쉬면서 철수를 오작동 투성이의 물건 취급하는 묘사는 적절하면 적절했지 결코 과한 비유가 아니었다.

 소설은 철수가 자신의 사용 설명서를 일단락 짓고 누군가 이 사용 설명서를 토대로 자신을 올바로 사용해주길 고대하다가, 문득 그 설명서를 자신이 제일 먼저 읽어야 함을 깨닫는다는, 다소 초현실적인 장면으로 얼렁뚱땅 결말이 맺어진다. 조금 넘겨 짚자면 작가의 자전적인 작품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한없이 따뜻한 장면이었다. 하지만 따뜻하다고 해서 얼렁뚱땅 결말이 지어졌다는 불만이 모조리 상쇄되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지금의 나에게는 이 결말이 공허하게 들렸다. 비록 소설이란 게 구체적인 해답을 제시하지 않아도 되긴 하나 후반부에 '주의하기' 파트에서 철수가 누가 어떻게 바라봐도 정상으로는 보이지 않는 오작동을 일으켰던 장면을 상기해보면 - 예를 들면 느닷없이 컵을 바닥에 던지는 장면 - 단순히 자신의 사용 설명서를 완성해서 그걸 자신부터 먼저 읽기로 하자는 깨닫는다고 결말이 맺어진다는 것은 너무 막연하게 희망적이지 않은가 싶었다.


 이 작품이 10년 전에 집필된 소설이고 그 10년 사이에 우리나라 청춘들이 처한 환경이 얼마나 더 비관적이게 됐는지 가늠해보면 위와 같은 희망적인 결말이 지금의 독자에게도 와 닿을 수 있을까. 솔직히 말해 철수와 같은 나이대에 이른 내 입장에선 사뭇 비관적으로 여겨진다. 내가 이런 대답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사회의 쓴맛을 많이 맛보며 살아온 편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스스로 작성한 사용 설명서를 읽는다는 것이 고작 자기 위안에 불과할 수도 있는 가능성을 모르진 않다.

 분명 청춘의 우울함을 가감없이 묘파한 날카로운 작품임에도, 결말이 상대적으로 무른 편이라서 도리어 공허함만 커졌다. 어쩌면 다른 무엇도 아닌 청춘과 취업을 중심 소재로 다룬 만큼 유독 희망적인 결말에 반감이 들었는지도 모른다. 결국 문체나 묘사의 호불호가 갈리는 것과 상관없이 결말에 이르러선 보편적인 허무함이 남을 수 있다고 하면 말이 너무 심한 걸까? 다른 건 몰라도 지금 내 시점에선 미래가 희망적이지 않고 막막함이 드리워진 터라 이 작품이 이전처럼 마냥 위로가 되지 않았다. 이는 작품의 문체가 식상하게 읽힌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참으로 씁쓸한 변화가 아닐 수 없다.



https://blog.naver.com/jimesking/220384388731

 이 포스팅은 내가 이 작품을 처음 읽었을 때 쓴 것이다. 두 글의 온도차가 너무 다르다...

사용 설명서가 완성되어 갈수록 철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걸 읽고서도 엄마와 아버지, 누나가 철수를 선택했을까. 그녀들이나 친구들, 또 면접관들은 어땠을까. 이걸 읽고도 철수를 사용할 생각이 들었을까. 혹시 사용 설명서가 없는 제품이었기 때문에 철수를 선택하고 사용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리고 철수는, 과연 철수는, 철수를 선택했을까. - 147p




주의 사항은 점점 늘어 갔지만 사용자는 여전히 읽지 않았고 제품의 오작동도 더욱 잦아졌다. 사용 설명서는 좀 더 많은 주의 사항으로 몸을 불릴 테지만, 사용자는 그럴수록 읽는 게 더 귀찮았을지도 모른다. 읽지 않아도 다 알 것 같으니까. 사실 그게 그거니까. 그리고 그게 그거 아닌 제품이 시중에 유통될 리도 없으니까. - 202p




철수는 조금 더 자 두려고 눈을 감다가 문득 깨닫는다. 철수 사용 설명서를 쓸 수 있는 사람도, 그걸 가장 먼저 읽어야 할 사람도 결국은 한 사람이란 것을. - 22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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