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지 않습니다 - 최지은 기자의 페미니스트로 다시 만난 세계
최지은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7년 9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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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대중 문화 웹 매거진의 최지은 기자가 한국 엔터테인먼트가 여성을 어떻게 다루고 묘사했는지 살펴본 페미니스트 책. 방송계에 대한 통찰은 <프로불편러 일기>를 쓴 위근우 기자보다 전문적이었고 저자 본인이 관철하려는 페미니즘의 실체를 논리 정연하게 풀어냈다는 점에서 여타 페미니즘 책보다 술술 읽혔다. 지금도 기억나는 인상적인 표현으로 '1주일의 독일 여행 동안 알아들을 수 없는 외국어에 지겨워져 한시라도 빨리 모국어로 된 TV 프로그램을 시청할 수 있는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었는데 막상 한국에 돌아오니 때론 알아들을 수 있는 것만으로 고통인 말들도 있다.'는 것을 꼽을 수 있는데 이 말은 '여성은 한국 예능을 웃으며 볼 수 있을까?' 라는 글의 서두를 장식했다. 우리가 일상 속에서 얼마나 편향된 여성관에 노출됐는지 단번에 강조한 말이라 쓴웃음이 안 나올 수가 없었다.

 이 책이 출간된 즉시 읽었더라면 좋았겠지만 어쩌다 보니 늦게 읽게 돼 본의 아니게 작가가 책에서 다루는 이슈들이 지금 내 기준에선 약간 식상하게 다가왔다. 전에도 비슷하게 얘기한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우리나라 페미니즘 책의 경우 가급적 최신의 책을 읽는 게 정말 중요하단 걸 다시 한 번 깨달을 수 있었다. 이 말도 지금 몇 번째 하는 건지 모르겠다. 아무튼 이 부분은 당연히 작가의 불찰이 아닌 전적으로 내 실수라고 할 수 있는데, <82년생 김지영>이나 강남역 살인사건, 화장실 몰카 범죄 등의 이슈는 이미 여타 책에서 접해왔고 내 스스로도 어느 정도 재구성을 거쳤던 지라 책의 초반부는 상대적으로 더디게 읽혔다.


 책은 '갱년기 농담' 이후부터 탄력적으로 읽히기 시작했다. 저자 본인의 경험을 통해 중년 여성의 갱년기를 웃음거리로 삼는 예능의 관례가 얼마나 문제인지 비판하는 것을 시작으로 책에는 우리가 지금껏 무심코 웃어 넘겼던, 정확히는 내가 웃어 넘겼던 장면을 조목조목 짚어낸다. 저자는 <아는 형님>을 비롯해 <복면가왕>, <냉장고를 부탁해>, <미운 우리 새끼> 등 화제성 높고 내가 자주 챙겨 보기까지 하는 프로그램을 다뤘는데 평소에 내가 챙겨 보는 TV 프로그램이 결코 많지 않다는 걸 생각해보면 대부분의 독자들에게 익숙하고 생각해볼 수 있게 만드는 이슈를 저자가 잘 선정하지 않았나 싶다. 무엇보다 책에서 언급한 사례들이 아직도 우리나라 방송계에서 현재진행형인 문제가 수두룩한 만큼 저자의 논리를 전개함에 있어 이보다 좋은 예시는 없는 것 같다.

 저자만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책에서 지적한 예능 프로그램의 편향된 여성관에 대해선 거의 빠짐없이 공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지적하는 분야가 드라마나 영화로 넘어가게 되자 중립성이 흔들리는 것 같은 느낌을 몇 차례 받게 됐다. 주 전공은 아니지만 나도 엄연히 시나리오 작법을 공부하고 실제로 학교 과제로나마 써본 적도 있는 사람이기 때문인지 저자가 예능과 마찬가지로 앞뒤 맥락을 배제하고 드라마의 특정 장면을 걸고 넘어지는 부분들이 트집처럼 느껴졌다. 내 지론은 이렇다. 꼭 옳은 소리만 하는 캐릭터나 장면이 현저히 적더라도 보는 사람 입장에서 반면교사로 여기고 넘길 수 있다는 게 픽션이 예능과 구분되는 가장 큰 특징이라고. 때문에 저자가 열거하는 드라마와 영화의 장면들은 독자 입장에서 아무래도 어느 정도는 거르며 읽을 수밖에 없었는데... 물론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는 드라마/영화 속 클리셰를 지적하는 것의 바람직한 취지까지 부정하겠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저자가 저서에서 방송통신심의위원들이 모두 남자란 것에 문제를 제기한 것처럼 이 책의 저자도 여성 저자 한 사람밖에 없는 터라 성별과 세대를 완벽히 아우르는 글에 이르진 못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이런 아쉬움은 비단 이 책만이 아니라 내가 지금까지 읽은 모든 페미니즘 도서에 해당되는 아쉬움이다. 여성 저자는 물론 남성 저자도 마찬가지다. 두 명 이상의 저자가 참여한 공동 저서도 이런 아쉬움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데, 왜냐하면 내가 읽은 공동 저서들은 저자들이 전부 여성이었기 때문이다. 페미니즘이 정말로 세상의 절반을 지지하되 나머지 절반을 외면하자는 견해가 아니라면 슬슬 남녀 저자가 모두 참여한 공동 저서도 나와야 할 때가 아닐까? 작년에 읽은 일본 에세이 <설거지 누가 할래>는 동거남과 결혼에 이르는 과정에서 느낀 저자가 설거지를 시작으로 상대와 어떻게 대립이 심화됐고 또 어떻게 타협했는지를 다루고 있는데 인상적인 부분은 저자의 입장만 역설하다 끝내는 게 아니라 반드시 파트의 마지막 부분에 상대편인 남자의 입장인 '그의 주장'을 넣음으로써 공정함을 연출했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중요한 건 두 남녀의 상황이 공정해졌다는 게 아니라 그렇게 여기게끔 연출한 것에 있다. 이는 큰 차이가 있다.

 성비가 어떻건 간에 사람과 사람이 어우러져 사는 이상 세상이 완벽하게 평등하고 공정하게 흘러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때문에 어떤 갈등이 터졌을 때 한쪽의 말만 듣는 건 위험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말하는 당사자는 당연히 본인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얘기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갈등이 타협점을 못 찾고 평생선을 달리는 걸 과연 어느 한쪽의 절대적으로 일방적인 잘못이라 여기는 것도 위험천만하다 생각하는데 내 개인적으론 유명하든 유명하지 않든 대부분의 페미니즘의 도서들이 이 위험천만함의 기로에서 아슬아슬하게 발을 걸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언제나 받곤 했다. 이번에 읽은 <괜찮지 않습니다>의 경우엔 메갈리아의 '위용'을 은근하게 편의에 맞춰 저평가하는 듯한 낌새가 보여 역시 단일 작가가 쓰는 페미니즘 책은 맹신하고 읽으면 안 된다는 걸 체감할 수 있었다.


 논리의 예시들이 TV에서 쉽게 접할 수 있어 접근성이 낮았던 것, 우리가 원해서 그릇된 여성관의 컨텐츠가 소비되는지 제작자들이 무비판적으로 그릇된 여성관의 콘텐츠를 답습하고 있는지 그 선후 관계를 궁금하게 만든 것, 유난히 여성 연예인에게 요구하는 잣대가 많다는 걸 아주 객관적이고 호소력 있게 설명해 우리 스스로를 반성하게 유도한 것 등 근래 페미니즘 책 중 가장 개성적이고 전문적이며 주제의식 또한 짙었지만 늘 그렇듯 저자의 모든 논리에 완벽하게 감화될 수는 없었다. 난 지금도 이 책에 남자 저자가 공동 저자로 참여했더라면 최지은 기자가 열거한 일부 예시와 반대되는 예시 역시 적잖이 다뤄졌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서로 다른 맥락의 두 입장의 주장에서 분명 공통적이고 공정한 의견을 취합시켜 많은 독자를 감화시킬 만한 방향성이 제시됐으리라 본다. 적어도 지금보다 균형감을 갖추게 되리란 건 확실할 듯하다.

 어떤 책이건 독자가 작가한테 완벽하게 감화되지 못했다는 건 아주 당연한 일일 것이다. 결국 저자와 나도 전혀 다른 사람이고 생각에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는데 왜 페미니즘 책을 포스팅할 때는 저자의 말에 다 동의하기 힘들었다는 말을 하기가 그렇게 눈치가 보이는지 모르겠다. 내가 괜히 혼자 눈치를 보는 거라면 좋으련만 아무래도 뒤가 불안하다. 엉, 이 말도 왠지 눈치가 보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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