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세 사망법안, 가결
가키야 미우 지음, 김난주 옮김 / 왼쪽주머니 / 2018년 10월
평점 :
절판


9.5






 스포일러 : 결말에 대해 언급했음


 작년에 읽은 <노후자금이 없습니다>에서 오쿠다 히데오의 소설을 처음 접했을 때의 전율을 선사해준 가키야 미우의 다른 작품을 읽어봤다. 제목과 설정 덕에 작가 작품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이지 않을까 싶은데 - 일각에선 일본판 <82년생 김지영>이라고도 하더라. 일리가 있는 얘기다. - 막상 읽어보니 기대에 비해 SF적으로 풀어나가지 않아 의외였다. 아니, 무엇을 숨기랴. 솔직히 말하면 처음엔 대단히 실망했다. 모든 사람이 예외없이 70세가 되면 사망해야 한다는 사상 초유의 법률을 두고 고부 갈등이니 세대 차이에 대해서만 얘기한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굉장히 상상을 자극하고 할 얘기도 많은 소재인데 너무 작가 본인의 장기에만 치중하는 듯한 전개가 아닌가 싶었는데 나중에 보니 오히려 이게 더 정답이고 그래서 더 신선하게 다가왔다. 시어머니와 남편, 딸의 비중이 적지 않나 하는 아쉬움은 어쩔 수 없지만.

 70세 사망법안이 가결되기까지 2년이 남았다는 설정은 색다른 긴장감을 자아낸다. 개인적으로 이 작품처럼 국가적 규모의 공익을 위해 사람 목숨 빼앗는 일까지 손을 대는 극단적이고 반인륜적인 법률 및 사상을 다루는 작품을 꽤 좋아하는데 당장 생각나는 건 소설 <백년법>, <살인출산>과 만화 <이키가미>, 그리고 타노스가 등장했던 '어벤져스' 3, 4편이다. 이 작품들에선 70세 사망법안조차 귀엽게 보일 정도로 충격적인 '인구 조절' 계획을 묘사하는데 흔히 이런 작품은 이미 이런 계획이 사회에 깊숙이 녹아들어 모든 사람이 세뇌를 당한 상황과 반대로 그 계획이 기존 사회의 관념과 충돌해 갈등을 피할 수 없는 상황으로 나뉘는 것 같다. <70세 사망법안, 가결>의 경우엔 일단은 후자에 속한다고 할 수 있는데 기존 사회의 관념과 충돌을 보인다고 말하기엔 사람들의 동요가 너무 적어 묘하게 몰입이 되지 않았다. 이 부분은 지금 생각해도 작가의 SF적 상상력이 빈약하단 반증이다. 작중 다카라다 집안의 양상이 우리 현실을 마주보게 하고 그 집안 문제가 보편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문제들이 아니었다면 아마 이 작품을 완독하지 못했을 것이다. 게다가 작가가 오쿠다 히데오에 버금가는 가독성 좋은 문체나 캐릭터 설정을 갖추지 못했다면 더더욱 힘들었을 듯하다.


 보통 이런 종류의 작품은 한 가족의 이야기만 그리기 보단 여러 가족이나 집단, 다양한 계층의 사람을 주목하면서 군상극의 모습을 보이기 마련인데 작가는 우리 시대의 갈등 양상을 대표할 만한 가족에 집중함으로써 효율을 극대화시켰다. 처음엔 소재가 충격적인 것에 비해 시시한 주제의식과 전개라 생각했지만 이야기의 주역인 도요코가 시어머니 병 수발에 지치다 폭발한 다음 가출에 이르는 과정의 개연성과 몰입도가 보통이 아닌 터라 초반의 불만은 잠시 잊을 수 있었다. 특히 남편이란 작자의 행태 때문에 읽는 내가 다 살의가 솟았던 것과 도요코처럼 체념하거나 아예 포기해버리는 사람들에 대한 작가의 통찰력이 빛을 발한 게 인상적이었다. 나처럼 제3자가 보면 저렇게 불합리하고 엇나간 관계도 없는데 그런 관계를 날 때부터 이어온 당사자들에게 있어선 다들 자신이 당면한 문제에 허덕이는 게 당연하다는 생각에서다. 명문대를 졸업해놓고 취업이 불발돼 히키코모리가 되기 직전인 아들이나 쉽사리 가출을 결심하지 못하는 도요코가 답답하면서도 한편으로 이해가 갔던 게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70세 사망법안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겠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도대체 무슨 일을 겪으면 나라가 '70세가 되는 모든 국민을 안락사시키자, 그러면 연금을 비롯한 모든 사회 문제가 일시에 해결되니까.' 라고 말을 하겠는가? 그런데 이 모든 결정은 하루이틀 논의된 게 아니라 몇 번의 결정적인 사건이 있었기에 설득력을 얻은 것일 텐데 그 사건의 예로 바로 다카라다 가족을 들 수 있을 것 같다. 그야말로 그림으로 그린 듯한 곧 불행해질 가족의 모습이었으니까. 이들의 모습에 집약적인 사회 병폐, 세대 갈등 가부장적 사고와 취업난 등은 작중에서 70세 사망법안이 가결되는 핵심적인 이유였으니까.


 이 밑엔 스포일러 있음


 알고 보니 70세 사망법안은 국민들로 하여금 노후가 없어지는 삶에 대해 생각해보게 만든 일종의 쇼였음이 밝혀진다. 개인적으로 너무 도박인 것 같아 현실성도 떨어지고 이후 정부가 취할 방침이란 것도 너무 희망적이라 어째 의심스러웠지만 어느 정도 그럴싸한 계획이고 또 실제로 다카라다 가족한테 일어난 변화가 너무 바람직해서 작품의 소재가 전에 없이 신선하게 느껴졌다. 작가의 성격이 원래 그런지 <노후자금이 없습니다> 때처럼 상당한 해피엔딩이 아닐 수 없었는데 그 작품과 마찬가지로 과정에 있어서 누군가 인내하고 희생해서 일어난 결과가 아니라 저마다 결점이 있던 인물들이 그 결점을 고침으로써 진정한 가족으로 거듭나리란 전망을 품게 해 진정 좋은 해피엔딩이었다고 본다.

 70세 사망법안이라는 정부 차원의 극단적인 개입 덕분이긴 하지만 어쨌든 스스로 변화하는 용기를 낸 것은 그들 다카라다 가족 구성원 스스로의 몫이었던 것, 그리고 기대완 사뭇 달랐지만 한 가족에 집중해 작가 본인의 장기를 살리면서도 SF적인 구색을 갖추고 신선한 해석을 가미한 것이 엄청난 반전 매력으로 다가왔다. 왜 항상 인구 조절을 다룬 SF는 비장하고 비참한 결말이어야 하는가,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다' 라고 다들 말하지만 정말 그러한가 하는 질문에 대한 작가의 답변이 정말 멋졌다. 제목이 주는 막장스런 인상과는 달리 여러 의미에서 힐링이 되는 작품이 아닐 수 없었는데, 개중 장르적 글쓰기에 대한 내 고정관념을 깨부쉈다는 측면에서 적잖은 충격적이었다. 아직 이 작가의 작품을 두 권밖엔 못 읽었는데 다른 작품들도 기대된다. 이 작품을 제외하면 다들 제목이 비슷비슷해서 별로 관심이 안 갔는데, 이거 아무래도 괜한 선입견은 버려야겠다.

우리 세대는 죽을 때까지 일하지 않으면 먹고살기도 힘들다고. 그러니까 아빠도 죽을 때까지 일해요. - 35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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