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의 화장법
아멜리 노통브 지음, 성귀수 옮김 / 문학세계사 / 2013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9.8






스포일러 있음



 다소 난해한 제목의 이 작품은 10년 전에 처음 읽었을 때건 지금이건 여전히 강렬한 작품이었다. 분량은 짧고 두 사람의 대화로만 전개되는 단순하지만 짜임새 있는 전개에다가 골때리는 언행이 거듭되는 통에 작품 자체의 수위가 꽤 높음에도 빠르게 읽어내려갔다. 프랑스 소설 - 엄밀히 말해 벨기에 국적의 작가가 썼지만 불어로 집필됐고 프랑스 소설 특유의 정신 나간 작풍을 그대로 담고 있으니 프랑스 소설이라 해둔다. - 은 예술성이라 명명되는 돌I적 특성 때문에 진입 장벽이 높은 편인데 이 정도면 입문으로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물론 작중 수위는 여느 프랑스 소설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으니 진입 장벽 어쩌니 하는 말은 어디까지나 가독성을 두고서 하는 말이다.

 작중 충격적인 반전은 어떻게 보면 인위적이지 않은가 하는 생각도 들 정도였다. 제롬 앙귀스트와 텍스토르 텍셀이 실은 해리성 정체 장애를 앓는 동일한 인물이란 설정은 아주 충격적이었다. 자기 아내를 죽여놓고도 눈치도 못 채고 살다가 그 사실을 너무나 불쾌하고 느닷없이 알게 된 제롬의 정신 상태를 읽고 있자니 내 머릿속도 엉망이 되는 것만 같았다. 글쎄, 차라리 제롬이 영원히 자기 내면의 적인 텍셀을 모른 채 살아가는 게 비극일지, 아니면 텍셀이 정체를 드러낸 것이 비극일지 확신이 서질 않아서 여러모로 고통스러웠다. 다분히 픽션답다고 치부하고 싶지만, 자기한테 가장 치명적인 적은 바로 나 자신이란 말을 생각하니 우리에게 있어 내면의 적이란 어쩌면 텍셀처럼 존재조차 의식하지 못하는 게 아닌지 걱정이 됐다.


 일일이 읊기도 쉽지 않지만, 떠올리는 것만으로 메스꺼워져 텍셀의 개같은 논리는 굳이 언급하지 않기로 하겠다. 내심 이런 개같은 소리나 나불거리는 인물을 처치하는 이야기를 바랐던 나의 기대는 보기 좋게 배신당했는데, 이 정도면 가히 최고 수준의 배신이라고 봐도 좋겠다. 프랑스 소설을 읽으면서 통쾌한 마무리를 원한 내가 순진했지. 아무튼 제롬과 텍셀이 동일한 인물이라는 건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텍셀의 진정한 정체가 밝혀진 뒤부턴 몇 페이지 안 남은 소설이 지루해진 감이 있었지만 한편으론 제롬의 무너져내리는 머릿속이 잘 묘사돼 쉽게 읽히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텍셀은 초반에 공헌한 대로 승리를 거뒀고 압권은 그가 죽으면서 신나게 연호한 단어가 바로 '자유'란 것이었다. 그 자유의 결과는 제롬의 자살이란 걸 생각하면 진짜 섬뜩한 단어가 아닐 수 없다.

 이 소설은 황당하면 황당한 그대로, 역겨우면 역겨운 그대로, 섬뜩하면 섬뜩한 그 자체로 두는 게 제일 좋은 것 같은데... 작가가 소설을 쓴 바를 내 나름대로 생각하다 보면 어째 느낌이 좀 깨는 것 같기 때문이다. 누구나 의식하건 못하건 내면의 적과 동침을 하는데 그러한 존재를 외면하고 지내면 엄청난 재앙으로 돌아온다는 게 아닌가 하는 상대적으로 상투적인 결론에 도달하니 원. 제목에 들어간 '화장법'이란 단어가 제롬의 현란하고 역겨운 변명을 가리킬 텐데 이런 화장법은 결과적으로 제롬과 텍셀을 더욱 극명하게 분리시켜 제롬이 분노를 감당하지 못해 텍셀을 죽여 자살에 이르는 결과를 낳고 만다. 텍셀이 제롬 앞에 나올 수 있던 게 순전히 출장을 가는 날짜가 아내의 기일이었던 것, 비행기가 원인 불명의 이유로 연착된 것뿐이란 건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하는데, 더불어 너무 가혹한 나머지 인위적이라는 생각도 들었는데 작가는 이를 두고 비극이란 예상치 못한 사소한 계기로 발생한다는 것을 의도한 것일까 문득 궁금해졌다. 참, 잔인한 작가다. 글솜씨만큼이나 발상도 잔인해.


 아멜리 노통브의 소설은 한동안 접하질 않았는데 오랜만에 이 작품을 다시 읽으니까 내가 왜 그랬을까 싶다. 국내에 출간된 책도 많고 대체로 분량도 이 책만큼 짧으니 부담 갖지 말고 읽어봐야겠다. 대부분의 책이 <적의 화장법>에 뒤지지 않는다면 더 바랄 게 없겠는데.

인생이란 원래 그 자체를 정신나간 짓으로 만들어버리는 이런저런 불쾌한 일들로 가득한 법이지요. 무슨 형이상학적인 문제들보다 오히려 하찮은 난관들이 부조리를 훨씬 더 불거져 보이게 만드는 겁니다. - 1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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