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의 증명
도진기 지음 / 비채 / 2017년 5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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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도진기 작가의 시리즈물이 아닌 단편집은 처음 읽어본다. 몇몇 단편은 엔솔로지나 잡지에서 읽어본 적 있는 작품이라 반가웠다. 고정 주인공이 등장하지 않는 단편을 쓸 때 그 소설가의 역량을 가늠할 수 있는 법인데 역시 이 작가는 내실이 있는 작가였다. 모든 작품이 다 내 취향은 아니었고 - 어떤 작품은 작가의 <정신자살>을 연상시켰다... - 일부는 식상하기도 했지만 현직 판사라는 경력을 살린 - 지금은 전직 판사이자 현직 변호사 - 부분은 흠잡을 구석이 하나 없었다. 내 주제에 무슨 흠을 잡느냐 싶겠지만, 전문성을 살린다고 소설이 무조건 재밌는 법도 아니라서 전문성과 재미를 잘 조율한 작가의 솜씨가 더욱 주목해야 마땅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악마의 증명'


 표제작. 작가의 이름을 처음 알린 작품이라 한다. 그야말로 판사이기에 쓸 수 있는 법의 허점을 파고든 작품이다. 법의 허점을 이용한 범인이나 그 범인을 제대로 물먹이는 호연정 검사나 보통내기들이 아니다. 호연정 검사가 몇 수 앞을 내다보는 게 비현실적이라 느껴졌지만 법에 통달한 사람이라면 범인의 속임수 같은 건 훤히 보이겠지. 호연정 검사의 활약도 활약이지만 범인의 독백도 역시 인상적이었다. 담백하게 자아도취를 하고 있는 꼴을 보노라니 역겨워서 치가 떨렸다.



 '정글의 꿈'


 미안한 얘기지만 하나도 놀랍지 않은 반전이었다. 다만 기시 유스케의 <천사의 속삭임>의 엔딩 장면과 유사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는 건 언급하고 싶다. 표절이라는 건 아니고, 이 작가의 통념적이지 않은 가치관 같은 걸 엿볼 수 있던 걸 짚고 넘어가기 위해. 이를테면 기존의 윤리나 법 같은 게 모든 사람들에게 행복을 줄 수 없다는 것이 느껴져서 말이다. 참 냉소적이야, 이 작가도.



 '선택'


 한국추리작가협회상 신인상을 수상한 작품. 이 작품 속 사건의 전말이 정말 뜻밖이었는데 개인적으로 내 취향이기도 했다. 스포일러라 이 이상 뭐라 말은 못하겠지만 뜻밖의 따뜻한 이야기에 '피가 튀기지 않는 추리소설'이란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이 말은 읽은 사람만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여담이지만 <한국추리소설 걸작선>에 실린 작품인데 이 작품이 다른 작품보다 월등히 재밌었다. 그리고 그 점은 이 소설집에서도 변하지 않는다.



 '구석의 노인'


 바로 전에 읽은 작가의 장편소설 <악마는 법정에 서지 않는다>가 연상되던 작품. 추리소설 잡지 엘릭시르에 실렸을 때 읽은 작품으로 전형적인 안락의자 탐정물에 속한다. 구석의 노인이란 캐릭터성은 좀 미묘하지만 사건의 미스터리를 꿰뚫는 최적의 개연성을 지닌 인물로는 적격이었다. 사건의 개연성은 애매하다만...



 '시간의 뫼비우스'


 작가의 자전적인 성격이 강한 작품이다. 초반엔 좀 지루했지만 설정 자체는 한 번쯤 생각해본 것이라서 뒤로 갈수록 흥미진진하게 읽혔다. 어떤 식으로든 개입할 수 없는 정해진 인생을 100번은 넘게 반복해서 산 남자가 자기 삶을 통제할 수 있게 됐을 때 취한 선택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그 남자의 고통과 마지막 장면에서 보여준 환희가 무척 대비돼 잠시 인생에 대해서도 생각에 잠기기도 했다. 강렬한 몰입감과 여운이 인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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