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타를 위하여 1
하가 글.그림 / 발해 / 2015년 5월
평점 :
품절


9.7






 만화 중에서 개인적으로 이 작품처럼 짧게 완결이 나는 작품을 선호한다. 만화는 길어지는 만큼 늘어져서 읽는 입장에서 감질맛이 나고 또 여간 뛰어난 작가가 아니고서야 꼭 한두 군데는 빈틈을 보이며 흐지부지 완결되는 것 같아서 말이다. 반면 장기 연재를 안중에 두지 않고 작가 스스로 생각한 분량 안에서 끝내는 작품은 길이를 막론하고 그만큼 깔끔하고 여운이 짙을 가능성이 높다. 소설도 단편을 쓰기가 의외로 쉽지 않은 것처럼 만화도 한두 권 안에 끝나게끔 분량을 잡는 게 쉽지 않아 보이는데 그 쉽지 않은 걸 해내는 작품이 많진 않아도 꼭 있다.

 <시타를 위하여>가 단행본으로 나온다고 했을 때 반색한 독자 중 한 명임에도 이렇게 책장을 넘기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별다른 이유는 없고 가급적 시간을 두고 기억이 가물해질 때에 읽고 싶었던 것뿐인데 덕분에, 어쩌면 계획대로 새로 읽는 기분으로 읽을 수 있어서 좋았다. 한없이 슬프고 아름다운 이야기라는 인상만 있었는데 이번에 다시 읽으니 상대적으로 무거운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는 유머러스하고 사랑스러운 장면도 많았고 주인공과 시타 말고도 람록처럼 매력적인 캐릭터가 있는 등 다시 읽는 재미가 쏠쏠했다.


 한편으론 단행본으로 옮기면서 사라지거나 혹은 기대했던 부분이 덜 충족된 건 약간 불만이었는데, 이를테면 매 화마다 '작가의 말'로써 인용되던 시구나 격언들이 통째로 생략된 게 그랬다. 연재 때 접한 글들이 각 화의 특징적인 감정선을 잘 요약하고 되새겨볼 만한 내용이었기에, 또 그 글 자체만으로도 꽤 괜찮은 것도 있었기에 - 박준의 시 '꾀병'이 기억난다. - 작가의 감각이나 수준을 알 수 있을 정도였는데 그런 요소가 사라졌다는 것에 아쉬움을 금할 수 없었다.

 또 단행본임에도 정말로 작품의 본편만 수록된 건 의외였는데 작가의 소감이라거나 후기, 비하인드 스토리 같은 것이 전무해서 단행본을 수집했다는 것 이상의 만족도는 딱히 없었던 것도 걸렸다. 엽서가 부록됐다거나 이야기의 외전이 수록된 것도 좋지만 쿠마리 같이 흔치 않은 소재를 어떻게 작품에 녹이게 됐는지 같은 내용이 없어 개인적으로 아쉬웠다. 연재 당시에 작가가 후기로써 밝힌 내용이었을까 싶었지만 만약 그렇다 하더라도 단행본에 실어주면 좀 어떤가 싶어서... 내가 너무 많은 걸 바랐나?


 작품의 핵심 소재인 쿠마리는 지금 봐도 이색적이고 생각할 거리를 안겨준다. 이 세상 모든 문화와 종교는 존중을 받아야겠지만 그 안에 불합리하고 비인도적인 희생이 뒤따른다면 태도를 달리 해야한다는 것이 내 지론이다. 그런 의미에서 여자아이를 여신으로서 떠받들다가 생채기가 나거나 혹은 생리라도 하면 더럽혀졌다며 뒤도 안 돌아보고 바로 내쫓는 건 전근대적인 것을 넘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폭력적이다. 지금은 이런 실정이 많이 나아져서 여자아이가 쿠마리에서 물러날 때를 대비해 일반적인 교육이나 세상 물정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고 하니 다행이지만 실제로 이 작품에서처럼 쿠마리에서 쫓겨나 비명횡사하거나 매춘부로 전락한 여성들이 있었단 걸 생각하니 내가 다 거북해졌다.

 시간과 운명까지 거스르는 사랑 이야기라고 요약하면 의외로 특별하게 여겨지지 않지만 원래 로맨스는 서사의 특이함보다 감정 묘사의 진지함에 주목하는 장르다. 그런데 그런 걸 감안하더라도 결코 식상하게 느껴지지 않았고 오히려 우리나라 사람에게 생소한 네팔의 문화를 적극 활용해 대단히 인상 깊게 그려낸 작품이었다. 연재 만화치고 분량이 짧은 것마저 강렬하고 여운도 있어 욕심 부리지 않은 적절한 마무리란 생각이 들었다. 듣기론 웹툰 공모전에 출품한 작품이라 원래 이 정도 분량이 전부였다곤 하지만 욕심을 부려 장기 연재까진 아니더라도 이보단 더 분량을 늘였을 법도 한데 작가가 신인임에도 장인 정신이 있지 않았냐며 감탄스러웠다.


 작가의 작품은 <시타를 위하여>말고도 네이버에서 연재한 <공주는 잠 못 이루고>와 다른 곳에서 연재한 <킹스메이커>가 있는데 전자는 연재 당시에 봤고 후자는 아직 보지 못했다. 그런데 하필 그 작품이 BL이라서... 퀴어 영화는 봤어도 BL은 한 번도 읽지 않아서 고민이 좀 되지만 시간이 지나면 결국 보게 될 것 같다. 데뷔작을 이렇게 잘 그렸는데 신작은 더 잘 그리지 않았겠어...?

심장이 뛰면, 피가 온 몸을 돌고, 몸 밖으로 새 버리면, 그건 무서운 게 아니라, 그저 아프고 슬픈 거예요. - 1권 1화




어떻게든 내일은 오고, 살고 싶어지는 이유는 새로 생겨요.

움츠러들고 있기에는 세상이 너무 기막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 2권 1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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