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로테스크
기리노 나쓰오 지음, 윤성원 옮김 / 문학사상사 / 2005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9.3







 우린 흔히 남자와 여자 사이엔 신체 말고도 또 다른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성격에 국한해서 말할 것 같으면 남자는 폭력적이고 여자는 상냥하다는 것, 보통 우린 폭력성 역시 성별의 구분에 따라 정도가 달라진다는 이미지를 별로 의심없이 공유한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오랜만에 기리노 나쓰오의 소설을 읽은 나는 간만에 여자의 하드함을 맛봤다.

 기리노 나쓰오의 작품을 오랜만에 집었다 보니 너무 긴장 않고 가볍게 펼쳐든 것 같다. 제목이 무려 그로테스크인데. 일반 명사 하나로만 이뤄져 있는 제목은 조심해야 한다. 이 작품의 경우엔 정말이지 그로테스크의 정수를 보여주니까 말이다. 기리노 나쓰오는 내가 아는 여성 작가 중 가장 하드한 작가인데 이건 그 중에서도, 작가의 대표작인 <아웃>보다 하드했다.


 하드하면 그냥 하드한 것이지, 여자의 하드함은 또 무엇이냐고 생각할 사람도 있을 것 같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건 작중에서의 모든 강렬한 묘사는 분명 여자가 아니면 쓰기 힘들다는 것이다. 가족에서부터 시작해 학교, 직장으로 환경이 변해가면서 발전하고 변해가는 인물들의 심리 묘사는 하나같이 폭력적이고 읽는 이로 하여금 짙은 스트레스를 느끼게 한다. 작가의 스타일이 성별에 구애될 리 없다고 생각한 사람은 한 번 이 작품을 읽어보길 권한다. 놀랍게도 엄청나게 하드하지만 틀림없이 여자가 아니면 쓸 수 없으리란 확신을 갖고야 말 것이다.

 낮에는 대기업에 출근하지만 밤에는 매춘을 해 일본 전국을 놀라게 했던 '도쿄전력 여사원 매춘 살인사건'을 기리노 나쓰오만의 예리함으로 묘파해낸 이 작품은 어중간한 각오로 읽을 만한 소설은 아니었다. 주요 인물 전부가 제정신이 박혔다곤 볼 수 없으며 특히 주된 화자인 '나'가 신뢰할 수 없는 화자이기 때문에 소설이 전체적으로 의심에 의심을 거듭하며 읽어나갈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매스꺼운 내용에 매스꺼운 진행으로 이루어진 작품이지만 신기하게도 다음이 너무나도 잘 읽힌다. 사건의 인과나 향후 전개가 비교적 명확하고 여기서 더 어떻게 전개해나감에 따라 사건이 해결된다거나 반전될 기미는 없어보이지만 독자들의 궁금증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어쩌다 이 모양 이 꼴로 망가졌단 말인가?


 괴물 같이 아름다운 여동생에게 악의를 품는 '나'와 그런 언니의 질투와 더불어 주변의 환심과 남자들의 성욕까지 한 몸에 받았던 첫 번째 피해자 유리코, 이지메를 공부로 극복하는 '나'의 동급생 미쓰루와 아버지의 세뇌에 의해 노력하는 삶에 집중하느라 현실 인지 능력은 결여된 비웃음 어린 삶을 사는 또 다른 '나'의 동급생이자 두 번째 피해자 가즈에. 소설은 거기에 유리코와 가즈에를 살해한 중국인 불법 체류자 장제중의 사연까지 꽤나 폭넓은 심리 묘사를 선보인다. 이중 다섯 번째 인물인 장제중의 회한은 좀 쌩뚱맞았는데 개별적인 스토리의 완성도를 논하기에 앞서 중국이라는 배경이 뜬금없는 데다 - 작가의 취향인 듯. 누가 하드보일드 작가 아니랄까봐. - 과거 이야기도 다른 등장인물에 비해 다소 동떨어진 상처를 얘기하고 있는 터라 옥의 티가 아니었나 싶다. 에필로그에 해당하는 '나'의 결말과 마찬가지로.

 이 작품의 음습하고 첨예한 인물 심리 묘사의 대단함에 대해선 아무리 떠들어봤자 직접 읽기 전엔 실감도 제대로 안 날 것 같아 찬사는 이쯤 해두고, 대신 바로 윗문단에서처럼 아쉬운 점을 들고 글을 마치면 될 것 같다. 이 작품의 결말은 사족은 아니지만 막장이라 뒷맛이 크게 찝찝했다. 사실 처음부터 거북했어도 다음이 궁금해 계속 읽어나갔지만 이러다간 결말이 제대로 된 꼴로 날 리가 없겠다는 짐작이 들긴 했다. 문체도 꼭 '나'가 뭔 일 저질러서 진술하는 듯한 투라서 더욱 그렇게 예상됐다. 더구나 매춘에 상처를 받기는 커녕 오히려 매춘을 일탈이자 모험이라는 둥 마치 쾌락처럼 여기는 캐릭터가 적어도 둘 씩이나 있어서 익숙해진다 싶다가도 얼굴이 많이 일그러졌다.


 소설이 절대적인 선이나 희망만을 얘기해야 된다는 법도 없고 오히려 우리가 일반적이라고 생각하고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가치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특정 인물의 개성에 기대 다양한 가치관에 대해 얘기하는 게 오히려 더 의미있고 재밌다고 생각해 그런 소설을 찾아 읽는 편이었다. 어떻게 보면 기리노 나쓰오의 소설도 그런 이유에서 찾아 읽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소설의 결말은 그런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 나에게 감당할 수 없는 당혹스러움과 찝찝함을 안겨줬다. 설마 이 정도일 줄은.........

 기리노 나쓰오가 쓴 작품이고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best 10' 랭킹에도 올라가 추리소설이나 범죄소설일 것 같지만 실상 전개 양상이나 관점은 전혀 다르다. 외모, 가정, 부모, 성격 등 각기 선천적으로나 혹은 후천적으로도 다른 환경에 처한 여성들이 어떻게 망가지고 설령 환경이 달라도 어떻게 같은 비극을 맞이하는가에 대해 묘파하는 소설이다. 묘파는 소설의 표지에 적힌 출판사의 코멘트에 들어간 단어인데 그렇게 어울릴 수 없다. 이 작품은 여자의 어두운 면을 남김없이 밝혀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힘들지만 한편으론 대단히 인상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여자로서는 남자라는 우군밖에 만들 수 없는 것일까? - 488p




어째서 여자만 이 세상에서 제대로 살아나갈 수 없는지 모르겠어.

간단해. 망상을 가질 수 없으니까. - 554p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