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형극장 문학과지성 시인선 190
강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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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음악을 두 가지 방식으로 들을 수 있다. 무한히 직시해야 하는 현실로 음악을 받아들일 수가 있고, 어젠가 저기 있을 종말을 암시하는 우울한 서주로 받아들일 수가 있다. 첫 번째처럼 음악을 현실에 구애받지 않은 새로운 차원의 질서로 여길 경우, 자연히 음악은 무한히 직시해야 하는 현실이다. 왜냐하면 이때 음악은 ‘지금 있음’으로서만 의미를 가질 뿐 미래를 암시하느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다. ‘황홀’을 생각해 보자.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등대로』에서 릴리가 황혼을 보면서 느끼는 황홀은 미래를 생각해서 느끼는 것도 아니고 과거를 생각해서 느끼는 것도 아니다. 황홀은 본래 오직 현실에 매몰되었을 때 느끼는 감정이다. 사람이 음악을 듣고 음악 이외에는 아무것도 안 듣게 될 때 사물 따위를 연상해서가 아니라, 음악 자체에 매몰되어 다른 것을 생각할 수 없게 될 때 그때 느끼는 감각이 ‘지금 있음’의 감각이다. 그러나 ‘지금 있음’의 감각은 세계에서 명백히 분리되어 있다. 이는 자아감이 충만한 상태와는 완전히 동떨어진 것으로 망아(忘我)의 상태에서 새로운 세계에 매순간 던져지는 것이다. ‘새로운 세계’라고 말하는 이유는 실상 음악으로 펼쳐진 세계가 현실 위에 부유하는 상투적인 세계일지라도 우리가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이 새롭게 느낀다는 점에서 ‘새롭다’는 말 이상의 언어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두 번째 방식, ‘저기 있음’은  ‘강정’의 시집 『처형극장』에서 살펴볼 수 있다. 강정이 음악에서 듣는 것은 음악의 ‘주제’와 ‘불안’(「프란츠 리스트」), “‘미래’란게 도대체 있기는 있을라마는”(「실종(失踪)」, ‘죽은 새들’(「기타리스트가 죽다」) 등이다. 강정은 ‘지금 있음’의 감각을 즐기지 않는다. 강정은 음악이 주는 ‘저기 있음’의 감각, 불안을 즐긴다. 불안이란 말은 애초에 저기 무언가가 있어서 어렴풋하게 보이지만 뚜렷이 보이지는 않는 데에서 오는 심리이다. 따라서 앞으로 말할 불안 모두 ‘저기 있음’의 감각으로 바꾸어 말할 수 있다. 하여튼 아무리 훌륭한 음악도 끝이 없을 수는 없기 때문에 강정은 음악에서 모종의 불안을 느낄 수밖에 없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떨림의 경치 속으로 나는 가두어진다 몇 개의 악절들이 여기/ 내 방안에 펄럭인다 불안하다 계란처럼 불거지는 주제, 왜 불안한가?”(「프란츠 리스트」) 그에게 음악은 주제를 찾을 수밖에 없게 하고 ‘떨림의 경치’속에 가두는 무엇이다. 살아간다는 것도 끝이 있을 것을 뻔히 알면서 매순간을 즐길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음악과 닮아 있다고 강정은 말한다. 음악이 조금 더 나은 점이라면 이미 익숙할 데로 익숙한 삶이 삶 이후를 연상시키지 않는 데에 반하여 음악은 종말 이후를 암시한다는 것에 있다. 이제 음악은 종말뿐만이 아니라 종말 이후를 상상하게 한다. “피투성이 다섯 손가락 끝에서/ 죽은 새들이 그 힘줄만으로/ 날아오르고/ 큼직한 죽음의 길 한끝으로/ 시커멓게 그을은 달이 떠오르고 있어요/ 살아서는 한번도 보지 못한/ 진짜 내 얼굴이 떠오르고 있어요” (「기타리스트가 죽다」) ‘피투성이 다섯 손가락’이란 두말 할 것 없이 기타를 치는 손가락을 말한다. 기타가 내는 소리-음악을 통해서 그는 죽음 이후에 있을 세계까지 가늠해본다.

강정은 음악을 ‘지금 있음’이 아니라 ‘저기 있음’으로 받아들여 음악 자체를 어떤 비유로 쓸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했다. 음악을 완전히 새로운 세계를 펼치는 영역으로가 아니라, 삶을 비유하고 삶과 교차하는 현실의 영역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지금 있음’의 차원에서 음악을 논한다면 음악은 도저히 무엇의 비유가 될 수 없지만, 음악을 이처럼 ‘저기 있음’의 차원으로 밀어놓고 ‘저기 있음’을 느끼는 나를 관찰하기 시작한다면 음악은 충만한 자아를 세계를 열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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