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겁관 초연속 살인 사건 - 마녀는 X와 죽기로 했다
미나미 아소부 지음, 이연승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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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소설을 읽을 때 나는 범인을 맞히는 것보다 작가가 어떻게 나를 속였는지를 확인하는 순간이 더 짜릿하다. 그래서 저택, 밀실, 연쇄살인에 타임루프까지 붙은 <<영겁관 초연속 살인 사건>>의 결말이 궁금했다. 대체 몇 번이나 회귀해야 진실에 닿을 수 있을까.

“내 눈을 끝까지 바라봐 줘.”
소설은 이 문장으로 시작된다.

몰락한 귀족 가문의 장남 히스클리프는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3년 만에 영겁관으로 돌아온다. 열다섯 살에 이곳을 떠난 뒤 한 번도 돌아오지 않았던 집이다. 하지만 도착했을 때 어머니는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장례와 유언장 공개를 위해 저택에 머물게 된 히스클리프 앞에는 눈먼 여동생 코델리아와 숙부, 사촌, 집사장과 하녀, 목사, 어머니의 친구, 사립 탐정, 그리고 동반의 마녀 릴리까지 열한 명의 사람들이 모인다.

절벽 위에 세워진 영겁관에는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가문의 시조가 속세를 떠나고 싶었던 마음이 담겨 있다. ‘이 눈물은 영겁토록 마르지 않으리라’라는 의미를 가진 저택의 이름조차 복선이었을까.

여기에 3년 전 아버지의 죽음을 타살이라고 의심하는 사립 탐정 자이로 다이스까지 나타난다. 과거의 죽음과 현재의 장례, 그리고 어머니가 남긴 유언장이 한 공간에서 얽히기 시작한다.

영겁관은 폭풍우로 외부와 완전히 단절되며, 클로즈드 서클 조건이 완성된다. 여동생 코델리아가 밀실에서 살해되고, 릴리까지 죽음을 맞는 살인 사건.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여기까지만 보면 전형적인 고립된 저택 미스터리처럼 보인다. 하지만, 릴리에게는 죽으면 하루 전으로 돌아가는 ‘회귀’와 마지막으로 눈이 마주친 사람을 함께 데려가는 ‘동반’이라는 저주가 있다. 이 저주로 릴리의 죽음은 사건의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사건의 시작이 된다.

릴리가 죽고 히스클리프와 함께 하루 전으로 돌아가면 같은 사건을 다시 겪지만 결과는 조금씩 달라진다. 어젯밤 죽었어야 할 코디가 살아 있고, 누군가의 선택이 바뀌면 죽는 사람도 달라진다. 범인처럼 보였던 사람이 피해자가 되기도 한다. 이미 지나간 하루를 다시 살아가며 타임라인의 변화와 새로운 단서를 따라가다 보니 결말이 궁금해서 멈출 수가 없게 된다.

회귀할 때마다 새로운 상황이 펼쳐지니 같은 사건도 전혀 다르게 읽힌다. 처음에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말과 행동이 다른 세계관에서는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오고, 초반에 스쳐 지나간 작은 단서가 뒤에서 연결될 땐 흥미진진하다.
'오, 그래서 그랬구나.’

나도 히스클리프처럼 몇 번이나 범인을 추측하고 가설을 세웠다. 그런데 사건이 반복될수록 진실에 가까워지는 것 같으면서도 오히려 더 복잡해진다. 한쪽에서 퍼즐을 맞추면 다른 쪽에서 새로운 조각이 나타나는 느낌이라 마지막까지 긴장을 놓을 수 없었다.

사건의 증거와 증언을 수집하며 범인을 추리하는 미스터리를 좋아한다면 이 작품을 추천한다. 같은 사건을 여러 번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는 경험은 색다른 재미를 선사할 것이다.

“내 눈을 끝까지 바라봐 줘.”
혹시 릴리는 아직도 어제를 살고 있지는 않을까. 이미 끝난 작품이지만, 괜한 상상력을 펼쳐본다.



>> 이 서평은 블루홀식스(@blueholesix) 서평단 자격으로 책을 지원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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갇힌 소녀
브렌다 데이비스 지음, 유영일 옮김 / 올리브나무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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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가 정한 기준 하나가 한 사람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1939년 영국의 열일곱 살 노라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사이에서 아이를 갖는다. 당시 미혼모를 바라보던 사회의 시선은 냉혹했고, 노라는 ‘정신결함법’에 따라 정신병원에 수용된다. 가족과 자유를 잃고 사회에서 격리된 것이다. 이후 노라에게 펼쳐지는 시간은 상상하기조차 힘든 세월이었다.

책을 읽으면서 가장 먼저 생긴 감정은 분노였다. 한 사람을 이렇게 오랫동안 가둘 수 있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주변 사람들이 그것을 문제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사실이 더 답답했다. 부모라면 딸을 지켜주는 것이 맞지 않은가. 국가가 만든 제도라면 그 안에서 고통받는 사람은 없어야 했다.

하지만 노라의 삶에는 자신에게 가해지는 부당함마저 현실의 일부라고 받아들이며 사는 또 다른 불합리함도 존재했다. 오랜 시간 통제된 생활을 하다 보니 밖으로 나갈 방법을 찾는 것보다 그 안에서 살아남는 법을 배우게 된다. 노라가 ‘길들여진 토끼’처럼 행동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모두가 당연하다고 받아들이면 그 안에 갇힌 사람은 자신의 상황이 잘못됐다는 말조차 꺼내기 어려워진다는 것이 섬뜩했다.

노라에게 변화가 찾아오는 과정에서는 정신과 의사 자넷의 존재가 크게 다가왔다. 자넷은 노라를 환자로만 바라보지 않고 한 사람의 이야기부터 들으려 했다. 오랫동안 제대로 들어주는 사람이 없었던 노라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있는 상대가 생긴다는 것은 큰 변화였다.

사람들에겐 때로 내가 예상하지 못한 모습으로 기회가 찾아오는 것 같다. 노라에겐 자넷과의 만남이 그랬다. 사람들은 대부분 나와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거나 괜히 마음을 다칠까 봐 벽부터 세우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게 밀어내기만 한다면 그 안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아볼 기회조차 놓칠 수 있지 않을까.

‘어떻게 사람이 사람에게 이럴 수 있지?’

초반에는 노라가 겪는 일들을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힘들었다. 하지만 후반에 44년이 넘는 시간을 빼앗겼는데도 노라가 자신의 삶을 다시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벅찼다. 타인이 그녀의 삶을 흔들 수 있어도, 그녀가 누구인지는 흔들 수 없었다.

브렌다 데이비스는 정신과 전문의이자 영적 치유자로 오랫동안 상처받은 사람들을 만나왔으며, 78세에 처음 장편소설을 발표했다. 저자의 글은 감정을 크게 끌어올리기보다 인물이 지나온 시간을 따라가게 해서 오히려 그 안의 외로움과 아픔을 느끼게끔 만들었다.

이 소설은 오랜 세월 마음을 닫고 살아야 했던 노라와, 노라를 만나 자신의 삶까지 돌아보게 되는 자넷의 이야기가 함께 그려진다. 누군가의 삶에 손을 내미는 일이 상대에게만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니라는 점도 흥미로웠다.

노라가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고, 잃어버렸던 삶을 조금씩 다시 받아들이는 과정이 극적으로 표현되지 않아 좋았다. 오랜 시간 굳게 닫혀 있던 마음이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을 만나고, 그동안 품고 있던 감정들을 하나씩 마주하면서 변해갔다. 결국 마음의 상처는 스스로가 풀어가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오랜 시간 자신의 삶을 빼앗겼던 노라가 다시 사람을 믿고 자신의 삶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따라가다 보니, 상처받은 사람이 다시 마음을 열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한지도 생각하게 됐다. 노라와 자넷의 이야기가 서로 다른 방향에서 시작해 맞물려가는 구성이 좋았고, 두 사람의 만남이 각각의 삶에 어떤 변화를 가져오는지도 인상 깊었다.

시대의 억압 속에서 한 사람의 삶이 어떻게 흔들렸는지, 그 사람이 어떻게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는지 궁금한 독자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특히 상처와 치유, 사람 사이의 만남을 중심으로 천천히 이야기가 깊어지는 노라와 자넷의 이야기가 궁금하신 분께도 일독을 권한다.



>> 이 서평은 올리브나무(@olive.tree.books)서평단 자격으로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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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조향사 - 영상화 기획 소설
현영강 / 잇스토리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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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수를 뿌리고 지옥으로 들어갔다.

<<조향사>>라는 제목을 보자마자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소설 "향수"가 떠올랐다. 향을 소재로 어떤 미스터리한 사건이 벌어질까 상상하면서 책을 펼쳤다. 첫 문장부터 분위기는 예상보다 훨씬 강렬했다.

번아웃에 빠진 기자 서정화에게 수상한 제보 메일이 도착한다. 환락가 ‘모름지기’에 사람의 정신을 무너뜨리는 이상한 향이 퍼지고 있다는 내용이다. 약도 주사도 아닌데 사람들은 이 향을 맡고 이성을 잃거나 쓰러진다. 그런데 기존 검사에서는 마약 성분이 발견되지 않는다.

정화는 제보를 따라가다 오래전 친구 이다정을 떠올린다. 누구보다 가까웠던 친구다. 하지만 열아홉 살 마지막 여행을 끝으로 두 사람은 멀어졌다. 정화가 다정이 그곳에 있다는 직감 하나로 모름지기의 안쪽으로 들어가면서 이야기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 소설은 아무 정보없이 읽어보시길 바란다. 뒤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 읽는 것보다, 정화가 다정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하나씩 드러나는 이야기를 직접 따라가는 편이 훨씬 재미있기 때문이다. 짧은 소설이라 도입부만 읽어도 금세 사건 안으로 끌려 들어가게 될 것이다.

<<조향사>>는 짧은 문장이 이어지면서 이야기를 빠르게 밀어붙인다. 마치 머릿속에 떠오른 장면을 잊기 전에 빠르게 기록한 것처럼 묘사가 군더더기 없이 스케치되어 있다. 장면 하나를 오래 설명하기보다 필요한 순간에 툭툭 보여주니 읽는 속도도 자연스럽게 빨라진다.

그런데 이 책에서 내가 더 궁금했던 것은 사건의 범인보다 제목이었다. 왜 하필 ‘조향사’일까.

처음에는 단순히 특별한 향을 만드는 사람을 뜻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야기를 따라갈수록 "조향"이라는 말이 사람의 욕망과 관계에도 연결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향은 여러 재료를 섞어 하나의 냄새를 만든다. 사람의 감정도 비슷하지 않을까. 선의와 동정, 사랑과 집착, 자존심과 열등감 같은 감정이 뒤섞이면서 처음과는 다른 감정이 싹트지 않던가.

정화와 다정의 관계도 그랬다. 정화에게는 좋은 마음이었던 일이 다정에게는 다른 의미였을 수도 있었다. 이 장면이 오래 남는다. 내가 겪어봤던 감정 변화, 어쩌면 누군가가 나로 인해 경험했을 이 상황에 마음이 남는다.

책을 덮고 나서도 ‘저자는 왜 이 이야기를 조향사라고 이름 붙였을까’, ‘사람의 욕망을 조향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라는 질문이 남았다. 사건의 진실보다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며 고민했던 것 같다.

향수는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지만 잔향은 한동안 남는다. 사람 사이에 있었던 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사건은 끝나도 감정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조향사>>가 남긴 것도 바로 그런 잔향이었다.

빠른 전개의 범죄 스릴러를 좋아하는 독자에게 추천한다. 특히 "향수"처럼 후각을 독특한 소재로 활용한 작품에 관심이 있거나, 인간의 욕망과 관계를 다루는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제목에 담긴 의미를 직접 찾아가는 재미를 느껴보시길 바란다.



>> 이 서평은 저자 현영강(@swimmist7)으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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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어 윌버 문구점
샐리 페이지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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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나미야 잡화점이 있다면 영국에는 디어 윌버 문구점이 있다.”

책을 고를 때 이런 문구를 만나면 그냥 지나치기 어렵다.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을 재미있게 읽었던 터라 이 한 문장이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대체 어떤 문구점이기에 나미야 잡화점과 비교될까. 어떤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오고, 그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상상하며 책장을 넘겼다.

주인공 조는 서른여덟 살에 6년 동안 만난 연인과 헤어지고 직장까지 잃는다. 돌아갈 집도,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도 막막한 상황에서 치매로 요양하게 된 삼촌을 대신해 런던의 오래된 문구점을 맡게 된다. 어린 시절의 기억이 남아 있는 공간이지만, 다시 찾은 조에게 문구점은 마음을 숨길 수 있는 작은 피난처나 마찬가지였다.

조는 이곳에서 어떻게 다시 자신의 삶을 찾아가게 될까. 그리고 문구점을 드나드는 사람들은 왜 하나둘 조의 곁에 머물게 되는 걸까. 궁금한 점이 하나 둘 생기면서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게 되는 도입부였다.

조는 그동안 연인이 원하는 사람이 되려고 애쓰면서 살았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신경쓰지 않았다. 그런데 문구점에서는 좋아하는 문구를 직접 고르고, 가게에 필요한 물건을 채우면서 아주 작은 선택부터 자신의 마음을 따라가기 시작한다. 이 메시지는 많은 자기계발서나 철학서에서도 등장한다. 하지만, 이야기를 통해서 전달되는 힘은 독자들 자신의 생각과 경험을 끄집어내 깊은 공감을 이끌어냈다.

뿐만 아니라, 손글씨를 다루는 장면 역시 기억에 남는다. 글씨를 잘 쓰려면 서두르지 말고 손에 힘을 빼야 한다는 조의 말이 나오는데, 이는 빨리 가려고 애쓰지 말고 다른 사람의 기대에 맞추느라 잔뜩 힘주고 살지 말라는 의미로 읽힌다.
소설 곳곳에 현대인이라면 느꼈을 중압감을 내려놓게 하는 문장과 장면이 등장하는 게 좋았다.

또한 저마다 말하지 못한 사연을 가진 사람들이 이곳에서 만나 서로의 마음을 조금씩 열어가는 설정도 좋았다. 특히 조와 루스, 맬컴이 가까워지는 과정이 기억에 남는다. 서로의 문제를 해결해주려고 서두르지 않고, 상대가 자신의 이야기를 꺼낼 때까지 기다려준다.

그래서 이 소설을 읽으며 우정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좋은 친구는 내가 다시 내 삶을 살아갈 때까지 조용히 옆을 지켜주는 사람이 아닐까. 조와 친구들이 서로에게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나는 어떤 친구였을까, 하고 되돌아보는 순간이기도 했다.

책을 다 읽고 나니, 문구점의 모습이 기억나기 보단, 조와 친구들이 서로에게 건넨 기다림과 응원, 그리고 조가 다시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선택하기 시작했던 순간들이 기억에 남는다. 나도 너무 서두르고 있지는 않은지 잠시 손에 힘을 빼고 주변을 둘러보며 긴장을 덜어내는 시간이었다.

<<디어 윌버 문구점>>은 연애와 일, 인간관계에서 길을 잃은 조가 문구점을 통해 자신의 취향과 사람들과의 관계를 다시 찾아가는 작품이다.
그래서 지금의 삶이 마음대로 풀리지 않아 잠시 멈춰 있는 사람, 오랫동안 다른 사람의 기대에 맞춰 살아온 사람, 따뜻한 우정이 담긴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특히 추천하고 싶다. 나미야 잡화점 같은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에게도 추천한다.



>> 이 서평은 요조앤(@yozo_anne) 서평단 자격으로 다산책방 (@dasanchaekbang)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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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은 물방울 모양
데라치 하루나 지음, 김지연 옮김 / 문예춘추사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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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초등학교 동창들을 대학생이 되어 다시 만났다. 처음에는 몇 명 안 되는 모임이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무리가 커졌다 작아지기를 반복했다. 서로에게 의지가 되기도 했고, 때로는 실망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런 시간을 지나면서 오히려 더 끈끈해졌다.

그렇게 남은 친구가 일곱 명이다. 그중 둘은 결혼했고, 나머지 다섯 명도 각자의 가정을 꾸렸다. 각자의 자리에서 맡은 일을 하느라 십여 년 동안 얼굴 한 번 보지 못하고 지낸 친구도 있다. 그래도 살다 힘들 때, 지쳤을 때, 웃음이 필요할 때 몇 년 만에 연락해도 어제 만난 사람처럼 반가운 친구들이 있다.

<<기억은 물방울 모양>>은 그런 친구들과의 시간을 떠올리게 하는 소설이었다.

다카미네, 나가세, 시즈쿠, 모리는 중학교 3학년 때 만난 친구들이다. 45세가 된 지금은 자주 만나 어울리지 않는다. 각자의 삶을 살아가느라 함께하는 시간도 많지 않다. 그런데도 오랜 시간 쌓인 기억과 관계는 여전히 이어졌다.

다카미네는 보석 리폼 회사를 운영하고, 나가세는 그곳에서 주얼리 디자이너로 일한다. 시즈쿠는 공방에서 보석을 다루고, 모리는 같은 빌딩의 인쇄소에서 일한다. 소설 초반에는 겉으로 보면 서로 다른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무슨 관계인지 궁금증이 일었다.

그러던 중 다카미네 빌딩의 철수와 함께 주얼리 다카미네가 문을 닫게 된다. 오랫동안 그곳에서 일해온 나가세에게도 큰 변화가 찾아온다. 이야기는 현재에서 과거로, 다시 더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네 사람이 처음 만난 순간부터 어떤 시간을 지나왔고, 서로에게 어떤 존재가 되어갔는지를 천천히 보여준다.

처음에는 네 사람의 이야기가 조금씩 따로 흘러가는 듯했다. 하지만 이들이 살아온 시간을 따라가다 보니 각자의 사연도 마음에 남았지만, 각각의 우정의 모습이 다른 것도 인상깊었다.
성격도 다르고 살아가는 모습도 다른 네 사람이 긴 세월 동안 조금씩 서로의 삶에 자리를 만들어가는 모습이 좋았다.

특히 다카미네가 기억에서 사라진 보석을 새로운 형태로 다시 만들어 손에서 손으로 이어지게 하고 싶다는 마음이 저자의 마음이 아닐까 싶었다. 보석은 모습이 달라져도 그 안에 담긴 시간과 마음은 영원히 남는다는 것에 비유한 메시지가 마음에 와닿았다.

사람의 인연도 비슷하지 않을까.

친구도 늘 같은 모습으로 곁에 있는 것은 아니다. 자주 만나던 시절이 지나고 각자의 가정과 일이 생기면 자연스럽게 거리가 생긴다. 그래도 힘든 날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있고, 오랜만에 연락해도 금세 예전으로 돌아간 듯 편안한 사람이 있다. 나에게는 그 일곱 명의 친구가 그런 사람들이다.

"물을 수놓다"에서 세대를 넘나들며 다양한 사람들의 삶을 따뜻하게 그렸던 데라치 하루나는 이번에도 거창한 사건보다 평범한 사람들의 시간을 따라간다. 각자에게 힘든 일이 있고 선택해야 할 순간도 있지만, 이야기는 과하게 감정을 몰아붙이지 않는다. 그래서 오히려 네 사람의 이야기를 공감하며 읽을 수 있었다.

곧 50이라는 나이를 바라보면서 내 친구들과의 인연도 어느새 30년에 가까워졌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아이들도 자라고 각자의 자리에서 묵묵히 살아온 시간만큼 조금씩 여유도 생겼다. 언젠가 다시 일곱 명이 한자리에 모여 예전 이야기를 하며 웃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영원을 뜻한다는 물방울 모양처럼 기억도 한곳에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흘러가고, 모이고, 다른 모습으로 이어진다. <<기억은 물방울 모양>>을 읽고 나니 오래 만나지 못한 친구에게 괜히 연락 한 번 해보고 싶어졌다. 아마 그 친구도 몇 년의 시간을 건너뛰고 어제 만난 사람처럼 반겨주겠지?

오래된 친구를 떠올리며 잔잔한 이야기를 읽고 싶은 사람에게 추천하고 싶다. 오랜 시간 이어온 우정이 어떻게 달라지고 깊어지는지, 각자의 자리에서 살아가는 친구들이 서로에게 어떤 의미가 될 수 있는지 천천히 만나볼 수 있는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큰 사건이나 빠른 전개보다 평범한 사람들의 삶과 관계에서 따뜻한 감정을 느끼는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도 권하고 싶다.


>> 이 서평은 문예춘추사(@moonchusa)으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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