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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타의 매'의 작가 대실 해밋의 작품집이 나왔다. 대실 해밋은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의 효시이자 미스터리 문학 최초로 문학성을 추구한 중간문학의 신기원이기도 하다. 하드보일드란 '비정, 냉혹'이란 뜻의 문학적 개념으로서 작가의 감성적, 도덕적 판단을 전면적으로 거부한 자연주의적 사실 묘사를 가리키는 말이다.

보잘것없는 한 늙은 어부의 평범한 고기잡이 행위를 운명에 맞서는 인간 영혼의 위대한 투쟁으로 승화시킨 헤밍웨이의 문학적 필살기가 바로 하드보일드이다. 섣부른 감정의 개입 없이 다큐처럼 간결하고 묵직하게 그려낸 한 노인의 조용한 투쟁이 역설적으로 그 어떤 흥분된 절규로도 전달할 수 없는 무게를 지닌 인간 영혼의 참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세상에 다시 없는 아름답고 순수한 사랑의 이야기인 황순원의 '소나기'를 다시 한 번 읽어보라. 놀랍게도 거기에는 그 어떤 미묘한 내면의 떨림도 고조된 감정의 토로도 없다. "소년은 그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건너편의 소녀를 쳐다보았다."처럼 단지 아주 짧고 건조한 행동과 사건의 묘사만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작가가 말하지 않은 모든 영혼의 울림과 감정의 떨림은 독자의 내면에서부터 독자 스스로에 의해 생성되는 것이다. 즉 작품의 절반은 독자가 쓰게 되는 것이다. '소나기'가 주는 무한한 감동의 요체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가장 비극적인 사건의 현장과 참을 수 없는 인간의 탐욕과 나약을 지극히 건조한 카메라의 눈으로 묘사한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이 빛나는 문학적 성취를 달성한 이유 역시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작가에 의해 말해지지 않은 불안하고 흔들리는 인간의 내면은 독자 스스로에 의해 그려지게 된다. 이것은 루팡이나 홈즈가 보여주는 현란한 요설과는 분명히 구별되는 것이다. 독자는 이제 작가나 탐정의 가르침에 의해 깨달음을 얻게 되는 초등학생과도 같은 수동적 존재에서 벗어나, 스스로 작품의 완성에 참여하고 스스로 인간의 실존적 내면을 읽어내는 성숙한 어른과 같은 능동적 존재로 발전하게 되는 것이다. 더욱이 해밋의 작품들은 미국 역사상 가장 드라라틱한 시대였던 금주법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생각만 해도 흥분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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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체, 류츠신, 단숨

 

이제 중국문학은 한국의 문화시장에서 일본문학에 버금가는 확고한 영토를 확보했다. 일본문학이 자아와 내면, 그리고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과 삶의 허무를 그린다면 중국문학은 사회와 현실, 그리고 존재의 참을 수 없는 무거움과 삶의 치열함을 그린다. 일본문학이 감각과 감성의 문학이라면 중국문학은 감정과 감동의 문학이다. 일본문학이 하오와 황혼의 문학이라면 중국문학은 정오와 한밤의 문학이다. 그 점에서 일본문학이 청년과 여성의 문학이고 중국문학은 중년과 남성의 문학이다. 비 오고 눈 오는 날에는 물론 일본문학을 읽어야 하지만 소나기가 오고 눈보라가 치는 날에는 중국문학을 읽어야 한다. 이토록 다르면서도 동시에 아름다운 두 영토가 있다는 것은 문화계의 탐사자에게는 참으로 축복이 아닐 수 없다.
류츠신의 '삼체'를 읽어야 하는 이유는 중국문학으로서는, 우리에게 최초로 소개되는 장르문학(SF문학)이기 때문이다. 물론 불안감도 있다. 어떤 나라의 장르문학이 높은 수준에 이르기 위해서는, 일정한 수준을 지닌 장르적 현실과 일정한 연륜을 지닌 장르문학사가 있어야 한다. 중국은 과연 높은 수준의 SF문학을 잉태할 만한 과학적 현실과 SF문학사를 지녔는가. 금시초문이라는 사람도 있겠지만 사실 중국은 과학기술의 강국이거나 아니라면 적어도 강국의 자질 정도는 충분히 지녔다. 이미 오래 전에 인공위성과 수소폭탄을 만든 나라인 것이다. 기술수준을 문제삼는다면 그것은 사실 자질의 문제라기보다는 전근대적인 사회현실의 문제일 것이다. 중국의 SF문학사에 대해서는 잘 모르니 할 말은 없다. 하지만 이미 과학기술의 자질을 지닌 이상 SF문학사는 없어도 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왜냐하면 중국은 이미 무협이라는 가장 위대한 장르문학의 역사 하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현실세계에 버금가는 가상현실을 구축한 서구의 판타지 세계조차도 중국의 무협세계만큼 확고한 가상현실을 구축하지는 못했다. 그렇다면, 그 정도 수준의 과학기술적 자질과 장르적 상상력이 만나서 이루어낸 중국의 SF문학 역시, 그 가능성 정도는 믿어보아도 될 것이다. 거기다가 물리학은 물론 중국고금의 역사와 세계철학사까지 담겨있다니 그것만 건져도 본전은 뽑지 않겠는가.

 

아멜리아는 자살하지 않았다, 킴벌리 맥크레이트, 복폴리오


미국의 상류층, 하면 일단 화려한 귀족성과 천박한 속물성과 두 가지 이미지가 떠오른다. 그것은 주로 영화가 만들어준 이미지이다. 아니라면 영화적 차원에 육박하는 상업적 성격을 지닌 대중문학일 것이다. 거기에 무슨 현실이 있고 영혼이 있겠는가, 만에 하나 그런 것이 있다 하더라도 그런 상품들이 어떻게 현실과 영혼을 그릴 수 있겠는가. 이러한 이중의 의구심 때문에 제대로 된 독자가 미국의 상류층을 그린 문화상품을 구매하는 일을 흔치 않을 것이다. 기껏해야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나 '쇼퍼홀릭' 따위를 사놓기만 해놓고 읽지는 않은 정도일 것이다.
'아멜리아는 자살하지 않았다.'는 브루클린의 명문 사립학교에서 벌어지는 잔혹극을 그린 소설이다. 상류층, 학원, 틴에이저에다 미스터리까지, 자극적인 대중문학의 요소를 고루 갖춘 작품이다. 따라서 우리의 의혹은 더욱 깊어진다. 기껏해야, 그런 대로 흥미로웠지만 결국은 아깝게 느껴지는 세 시간 정도를 선사할 확률이 크다. 무심코 개그콘서트나 무한도전에 날려버린 세 시간처럼 말이다. 하지만 뉴욕타임스나 퍼블리셔스 위클리 같은 전문미디어의 주목을 받았다는 점에 잠깐 마음이 흔들린다. 물론 이러한 주목이란 대개, 매체에 실린 상업적 광고일 확률이 높지만. 하지만 뭐든 한 번은 경험해보는 것이 좋다. 그 결론이 예상처럼 허무로 끝난다 해도, 허무하다는 결론을 얻은 것 역시 하나의 성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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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가장 권위있는 문학상이 바로 나오키상과 아쿠다가와상이다. 나는 나오키상을 매우 신뢰하는데 논리적 이유와 경험적 이유가 있다. 경험적 이유는 물론 매우 단순하다. 나오키상 수상작을 읽고 단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다. 정말로 단 한 번도. 논리적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우선 이 상은 대중문학과 신진작가에만 주어진다. 그리고 철저히 작품대상이다. 그리고 심사기관이 공정하다. (우리나라의 문학상은 대부분 순수문학 대상이며 작품보다는 작가에게 주어지는 상이다. 수상작은 대부분 수상시기와 운때가 맞아떨어진 상징적인 존재일 뿐이다) 이제 누구라도 이해할 것이다. 나오키상 수상작을 읽고 후회할 수가 없는 이유를. 대중문학이니 일단 기본적인 재미를 보장한다. 신인은 보통 유치하거나 혁명적이다. 공정한 심사라면 유치한 작품을 뽑을 리 없으니 혁명적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다 때려치우고 철저히 신인작가 대상, 작품 대상의 상이니 작가의 명성 또는 위대한 전작의 후광효과나 착시효과가 있을 수도 없다. 나는 정말로 우리나라에도 이러한 조건을 지닌 상이 제정되기를 바란다. 그러면 정말로 작가와 문단과 대중에 공히 도움이 되는 역사적인 상이 나타날 수 있을 것이다.
'누구'는 밴드나 극단을 그만두고 취업활동에 나선 젊은이들의 SNS 세계를 그리고 있다. 밴드를 나와 취업이라니, 꿈에서 현실로 내몰린 청춘의 비애? 하지만 SNS 세계라는 말에서 나는 직감했다. 이 작가는 신세계를 열었다는 것을. 청춘은 이제 꿈과 현실의 틈바구니에서 욕망과 현실의 틈바구니로 자리를 옮긴 것일 뿐이다. 꿈은 욕망이라는 최악의 저질 유사품으로 변질되었고 그것은 정말로 비참한 것이다. 꿈은 그래도 선이고 가치이고 자아이고 따라서 긍지이고 그래서 실패하더라도 성숙이 있다. 하지만 욕망은 그저 허세이고 질투이고 가식이고 자존심일 뿐이고 그래서 순간의 쾌감이 있을 뿐 성공하든 실패하든 자아의 상실과 관계의 상처만이 남을 뿐이다. 그리고 그 극명한 표지가 바로 SNS세계이다. 단 한 시간이라도 SNS 때문에 지나치게 즐거웠거나 지나치게 불안했던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꼭 읽어야할 작품이다. 재미를 위해서가 아니라 SNS라는 지옥에서 자신의 삶을 구해내기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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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지노상, 앤드류 밀러, 문학세계사


- 레지노상은 파리를 무대로 펼쳐지는 또 하나의 '페스트'이다. 실존주의는 말한다. 인간은 아무런 의미도 목적도 없이, 그저 휙 하고 던져진 존재일 뿐이라고. 그렇다면 인간은, 지금 내가 책상을 닦고 있는, 이 걸레보다도 못한 존재가 아닌가. 적어도 걸레는 더러운 것을 닦아낸다는 의미 하나는 단단히 지니고 있는 것이니까. 그래서 인간은 '의미'를 추구한다. 존재의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것은, 부니 지위니 하는, 타자에 의해 주어진 의미에 머물게 된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겨우 걸레와 비슷한 존재가 되었을 뿐이다. 걸레의 의미 역시, 타자에 의해 주어진 것이니까.

'페스트'의 의사 류는 인간이 걸레 이상의 존재가 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감동적으로 보여준다. 그 누구에게도 보아달라고 할 필요가 없는, 오로지 자신에 의해 창조되고, 자신에 의해 증명되고, 자신에 의해 완성될 '의미'를 향한 혼신의 투신. 그것의 다른 이름을 우리는 '순수(pure)'(이 책의 원제)라고 불러도 되겠다. 파리의 레지노상처럼 죽음과 어둠만이 존재하는 추악한 수라의 세상에서, 우리는 무엇으로 존재의 빛나는 의미를 증명할 수 있을까.

 

 

모래 그릇, 마쓰모토 세이초, 문학동네

 

- 마쓰모토 세이초는 일본의 추리문학을 세이초 이전과 세이초 이후로 갈라놓은 작가이다. 하위문학, 장르문학이었던 추리소설을 정통문학, 순문학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소위 사회파 추리, 지적 추리로 불리는 새로운 장르의 탄생이다. 세이초를 모르는 독자들을 위해 한두 가지 귀뜸을 하자면, 우선 이 작가는 놀랍게도 아쿠다가와상 수상자이다. 아다시피 아쿠다가와상은 일본 순문학 분야에서 최고의 권위를 자랑한다. 또한 이 작가는 1976년 이후 일본 독서여론조사에서 10년간이나 '좋아하는 작가' 1위를 차지한 국민작가이다. 깊이와 넓이, 재미와 의식을 함께 갖추지 않고서는 국민작가가 될 수 없다. 그리고 이 작품의 출판사는 문학동네이다. 책읽기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대중성과 예술성을 겸비한 작품을 내놓는 이 출판사의 성향을 잘 안다.
그의 작품에는 문학과 예술, 역사와 철학이 나타난다. 하여 지적 추리이다. 그의 작품에는 사회와 현실, 인간성의 심연이 나타난다. 하여 사회파 추리이다. 오늘날의 일본 추리장르를 지배하고 있는 히가시노 게이고와 미야베 미유키는 모두 '세이초의 아이들'이라 불린다. '13계단'을 읽느라 밤을 세워본 독자라면 이 소설을 읽고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엔더의 게임, 올슨 스콧 카드, 루비박스

 

- 이제 장르문학은 깊이를 추구할 수밖에 없다. 이제 독자들은 살인범이 누구인지 벌써 다 알고 있다. 어거지 반전은 차라리 비극이다. 낯익은 게임의 규칙으로 손쉽게 긴장과 흥미의 동조화를 유발하면서도, 깊이와 울림까지 겸비한 새로운 장르소설은, 그래서 반갑고도 감동적이다. 엔더의 게임은 장르문학의 최고 권위인 휴고상(독자 선정)과 네뷸러상(전문가 선정)에 빛나는, 기본적인 영양가가 보증된 SF 성장소설이다. 성장이란 무엇인가. 자신이 살아갈 현실의 추악함과 그 현실에서 살아갈 자신의 왜소함을 깨닫는 것이다. 쉽게 말해 꿈은 깨어지고 사랑은 배신당하고 세상은 잔인하고 자신은 보잘것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성장이란 가혹한 것이며 하여 성장의 결과는 많은 경우 절망과 도피, 또는 증오와 타락과 같은 퇴행으로 이어진다. 물론 인간에게는, 이러한 퇴행으로 빠지지 않고 그 추악한 세상과 그 보잘것없는 자신에게, 자기만의 가치를 부여해야 하는 2차 성장의 의무가 주어져 있다. 이것이 바로 그 많은 성장소설이 씌어져야 했던 이유인 것이다.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풍요롭고 자유롭다는 점에서 역설적으로 기성세대보다 훨씬 불행하다. 고통스런 어린 시절의 경험도 없고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전이시키는 능력도 부족하다. 한마디로 무균상태의 판타지 세계에서 백신 한 번 맞아본 적이 살아왔다는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 돌연 피투성이의 현실에 내동댕이쳐질 때, 그것은 파국일 뿐 2차 성장으로 나아갈 가능성이 희박하다. 이 작품은 두 가지 측면에서 오늘날의 성장소설이 나아가야 할 가능성 하나를 보여주고 있다. 하나는 SF 형식의 성장이야기라는 것. '아버지 때는..' 따위의 고려적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판타지 속에서 자란 요정들에게는 판타지 형식의 성장이야기가 오히려 실감으로 다가올 것이다. 또 하나는 천재의 성장이야기라는 것. 천재는 좀처럼 성장하지 못한다. 성장의 중요요소인 '자신의 보잘것없음'에 해당사항 없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고귀한 인간으로 간주하는 철완의 자아들에게, 참으로 적절한 형식이라 할 수 있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민음사


- 3년만에 출간된 하루키의 소설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 치열한 문학적 열정이건 경박한 문화적 패션이건, 어쨌든 하루키는 하나의 현상(신드롬)이기 때문이다. 정말로 중요하건 아니면 거품이건간에 전문가라면 어쨌든 신드롬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더우기 노벨문학상 후보작가이자 동시에 베스트셀러작가라는 경천동지할 유니크한 현상인 바에야. 하여 우리는 그를 읽을 수밖에 없다. 그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밝혀야 하는 과제뿐만 아니라 진짜건 혹은 가짜건간에 어째서 그런 기이한 현상이 일어나는지를 밝혀야 하는 또 하나의 과제가 있기 때문이다.
이번 작품은 순례와 회귀라는 구조와 여자와 죽음이란 상징, 그리고 감각적 문체라는 전성기의 하루키표 제작방식을 충실히 따른 작품이다. 그의 제작방식에 시대와 현실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울림을 주는 무엇이 있는 것인지, 아니면 겉보기와는 달리 시대와 현실이 사실 변한 것이 없는 것인지, 우리는 생각해보아야 한다. 그리고 '노르웨이의 숲'부터 착실히 그의 궤적을 따라온 독자라면, 이 질문을 자신에게도 던져보아야 한다. 많은 것이 변했음에도 그에게 여전히 나에게 울림을 주는 무엇이 있는 것인지, 아니면 겉보기와는 달리, 사실 나는 하나도 변한 것이 없는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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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3-08-06 2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소설 파트이신데 인문/ 사회/ 과학/ 예술 파트에 먼 댓글을 달아주셨어요....

2013-08-06 23: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10월, 당신의 추천 도서는?

마쓰모토 세이초는 일본의 추리문학을 세이초 이전과 세이초 이후로 갈라놓은 작가이다. 하위문학, 장르문학이었던 추리소설을 정통문학, 순문학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소위 사회파 추리, 지적 추리로 불리는 새로운 장르의 탄생이다. 세이초를 모르는 독자들을 위해 한두 가지 귀뜸을 하자면, 우선 이 작가는 놀랍게도 아쿠다가와상 수상자이다. 아다시피 아쿠다가와상은 일본 순문학 분야에서 최고의 권위를 자랑한다. 또한 이 작가는 1976년 이후 일본 독서여론조사에서 10년간이나 '좋아하는 작가' 1위를 차지한 국민작가이다. 깊이와 넓이, 재미와 의식을 함께 갖추지 않고서는 국민작가가 될 수 없다. 그리고 이 작품의 출판사는 문학동네이다. 책읽기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대중성과 예술성을 겸비한 작품을 내놓는 이 출판사의 성향을 잘 안다.
그의 작품에는 문학과 예술, 역사와 철학이 나타난다. 하여 지적 추리이다. 그의 작품에는 사회와 현실, 인간성의 심연이 나타난다. 하여 사회파 추리이다. 오늘날의 일본 추리장르를 지배하고 있는 히가시노 게이고와 미야베 미유키는 모두 '세이초의 아이들'이라 불린다. '13계단'을 읽고 후회하지 않았다면 이 소설 역시 그 옆에 서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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