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읽는 오후 - 시인 최영미, 생의 길목에서 만난 마흔네 편의 시
최영미 지음 / 해냄 / 2017년 8월
평점 :
품절


 

 

지난 주말 최영미 시인에 대한 기사 하나가 온라인을 강타했다. 아주 오래전 군대에 있으면서 시를 읽던 고참이 사온 <서른, 잔치는 끝났다>를 읽고 나는 묘한 감정을 느꼈었지 아마도. 예나 지금이나 시를 읽진 않지만 베스트셀러 시집의 위용은 대단했다. 시를 잘 안 읽는 나도 읽어볼 정도면 말이지. 지난 주말 해프닝은 이제 막 최영미 시인의 <시를 읽는 오후>를 펼치려는 나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었다. 예술만 해서는 먹고 살 수 없는 자본주의 3.0 시대 집 한 채 없는 시인의 비루함(물론 집 없는 사람들이 있는 사람보다 많다는 건 굳이 말할 필요도 없겠지)으로부터 시작해서, 척박한 메세나 시스템의 부재 같은 우리네 실정 등등. 그래도 말미에 쓴 “아무 곳에서나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났다”는 건 너무 나간 느낌이다. 나중에 위트를 이해하지 못하냐고 눙치는 해명은 더더욱 그랬고. 암튼 작가가 자신의 글에서 언급한 도로시 파커가 책에 등장하기에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고, 일단은 반가웠다.

 

역시 작가의 작품을 읽어봐야 그가 어떤 사유를 하면서 사는지 알 수가 있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 무엇이든 원서로 읽는 게 가장 좋다고 생각하지만, 에코마냥 언어능력이 특출하지 못하다 보니 번역서를 주고 보게 된다. 소설도 그렇지만, 시는 정말 번역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정말 느낌이 달라진다는 것을 알게 됐다. 작가가 시인이다 보니 가능한 원문에 가까운 번역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의 글을 통해 시에도 논리가 필요하다는 점을 깨닫게 됐다. 여전히 시에 문외한이다 보니 리듬 따위는 파악하지도 못하겠다. 영어 원문도 고어까지 섞여 있다 보니 쉽다는 예이츠 시의 원문도 건성으로 보게 된다.

 

블랙리스트로 엉망진창이 되어 버린 문화계, 문단에 대한 준엄한 비판도 눈길을 끈다. 대중의 기호에 맞는 시를 발표했다면 지금처럼 집도 없이 서울에 가서 살까, 월세가 서울보다는 상대적으로 싼 고양에 가서 살까하는 고민은 하지 않아도 되지 않았을까? 개인적으로 누구라도 문화예술을 한다는 게 특권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이 원하는 예술을 하면서 궁핍한 삶을 사는 것에 대해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진 않는다. 나도 내가 좋아서 밥벌이의 비루함을 이겨내면서 사무실에 앉아 있는 건 아니니까 말이다. 모름지기 삶에는 그에 맞게 견디어야 하는 것들이 있으니까.

 

밥 딜런이 반해서 자신의 예명을 바꿨다는 딜런 토머스에 대한 글을 읽다가 나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시에 온전한 번역이 가능할까,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다. 시는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어디까지나 소비하는 독자의 온전한 몫으로 남아 있으리라. 이제 다시 노벨문학상 예측의 시절이 성큼 다가왔고, 작년 가수로서는 처음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으면서 세간의 주목을 받았던 밥 딜런의 노래를 탁월하게 현재에 비유한 글을 참 멋졌다. 다만 밥 딜런의 가사에 나오는 대로 “시대가 변하고 있”는데 1920년대 뉴욕의 호텔에서 살다가 영면했다는 도로시 파커의 케이스로 변명하는 작가는 그 시절의 감수성을 가지고 있는지 묻고 싶어졌다.

 

<시를 읽는 오후>를 다 읽고 난 후의 소감은 호(好)라고 표현해야 할 것 같다. 나같이 시에 대한 문외한들에게 주로 영시(英詩)들로 구성된 44편의 주옥같은 시들에 대한 소개는 과분하게 다가왔다. 그리고 이번 스캔들로 부정적인 시선도 조금은 씻겨 나갔다고 해야 할까. 그중에서 그리스 시인 사포나 페르시아 시인 그리고 벵갈 출신 타고르의 시들은 어땠을까 싶었는데, 역시나 영어로 번역된 작품을 다시 우리말로 번역했다. 작년부터 서울신문에 연재된 시들을 고루 엮어서 만들었다는 기사도 찾아 읽었다. 원래 맨 마지막을 장식하는 문호 헤밍웨이의 시 대신 찰스 부카우스키의 시를 사용하려고 했으나 저작권 이슈로 아쉽게도 실리지 않았다고 한다. 그 시는 무엇이었을까? 나에게는 괴짜 소설가로만 인식되어 있는 부카우스키가 또 시도 썼었지 참. 사실 술고래 난봉꾼에 가까운 소설가의 시는 궁금하지 않지만.

 


<3월의 바람과 4월의 비>를 아베 리만이 흥겹게 부른 노래는 유튜브로 직접 찾아서 들어 보기도 했다. 참 좋은 세상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압운을 이용한 두운, 요운 그리고 각운이 주는 리듬감에 대해 감을 잡은 것도 개인적 소득이다. 우리는 아무 생각 없이 읽는 시가 탄생하기 위해서는 그렇게 지난한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도 깨달았다. 어느 인터뷰에서 시인은 이 책을 살인적인 교육 시스템 속에서 허덕이는 청소년들에게 주고 싶다고 했는데, 그네들이 시인이 원하는 대로 시를 감상할 여유가 있을 지 난 궁금하다. 예전에 하바드 스퀘어에서 들렀던 레스토랑 <파이어 앤 아이스(Fire + Ice)가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에서 따온 거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자신의 가게 이름을 시에서 인용해서 명명하는 레스토랑 주인장의 풍류가 멋지다. 역시나 아는 만큼 보이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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