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한 마디 때문에 아시아 문학선 12
류전윈 지음, 김태성 옮김 / 도서출판 아시아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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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선생은 류전윈의 <말 한 마디 때문에>를 그의 대표작으로 보인다고 했었는데, 지난 달부터 꾸준히 류전윈 작가의 책을 읽은 바에 의하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대 작가 옌롄커가 조금 큰 스케일의 서사를 구사한다면, 류전윈은 상대적으로 골계미가 가득한 소시민들의 삶에 천착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전자도 좋고, 후자도 좋다.

 

이야기는 허난성 옌진 마을에 사는 양바이순[楊百順]의 고난에 찬 삶을 추적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두부장사하는 라오양의 둘째 아들인 양바이순은 어려서 멋지게 함상하던 뤄창리를 동경하며 자랐다. 자식들이 그렇듯, 양바이순 역시 아버지의 두부장사 가업을 이어 받을 생각이 없다. 여전히 중국 전통의 도제 시스템에 따라 자기가 하고 싶지 않지만, 아버지와의 불화 때문에 집을 떠나고 싶어서 마구잡이로 일자리를 잡기에 이른다. 하지만 실(實)보다는 허(虛)를 추구하는 그의 본성 때문일까 이제 막 성인이 된 양바이순에게 돼지 백정일도, 염색공방에서 물긷는 일도, 대나무 쪼개는 일도 무엇 하나 진득하게 하는 법이 없다.

 

아직 어린 그의 품성 탓을 하기에 세상은 모질기 짝이 없다. 있는 그대로의 양바이순의 전력을 들은 이들은 하나 같이 끈기 없는 그를 탓하며 도제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한다. 그런 가운데 아버지 라오양은 아들 가운데 하나를 옌진신학에 진학시켜 현의 관리로 만들기 위한 작업에 착수하는데, 둘째 아들 양바이순 대신 양바이리를 보내기 꼼수를 쓰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이런 사실을 양바이순이 알게 되었을 때 아버지에게 느낄 배신감을 생각해 보라. 그리고 세상에 비밀은 없다고 바로 알게 되지 않던가. 알려지지 않는다면 문학에서 비밀의 존재 또한 필요 없는 서사의 부수적인 요소일 듯.

 

그렇게 형 대신 옌진신학에 진학한 양바이리가 열심히 공부에 전념했더라면 그나마 좋았겠지만, 양바이리는 친구 뉴궈씽과 어울려 시답잖은 말장난 같은 ‘펀콩’에만 열심이다. 황제조차도 자식 교육을 마음대로 할 수 없었더라는 일을 생각해 본다면 아주 이해가 안가는 일도 아닐 것이다. 옌진 현장이 누가 되느냐에 따라 현의 정책이 좌지우지된다는 것처럼, 현장의 스타일에 따라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른 그네들의 기구한 운명에 류전윈 작가는 자신의 골계미와 해학을 잔뜩 부여하기도 한다. 어쨌든 양바이리 역시 형 양바이순의 운명 못지않게 유전을 거듭한다.

 

유가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관혼상제 가운데 두 번째 덕목에 해당하는 자식들의 혼사 편에서도 느닷없이 부유한 집안과 혼담을 맺게 된 첫째 아들 양바이예의 케이스도 주목할 만하다. 잘 나가는 집안 친좌장의 친만칭이 한쪽 귀가 없다는 루머 때문에 혼담이 깨지게 생기자, 어느 집안과도 혼사를 맺겠다고 나섰다가 덜컥 두부장수 라오양의 집안으로 시집을 가게 된 친만칭, 명청시대 소설을 너무 읽어 소설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했다가 낭패를 당한다. 물론 이런 사건도 양바이순이 겪게 되는 후반부의 이야기들에 비하면 약과겠지만 말이다.

 

양바이순은 한 마디로 말해 불운의 아이콘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 같다. 그가 개입된 일들은 하나 같이 어그러질 뿐이다. 그러다 결국 40년 동안 옌진에서 달랑 8명밖에 선교하지 못한 이탈리아 선교사 출신 라오잔에게까지 의탁하게 되지 않았던가. 이름까지 양모세로 바꿔 가면서, 노력해 봤지만 낮에는 죽업사에서 대나무를 쪼개고 밤마다 라오잔 선교사로부터 교리 강의를 듣는 건 정말 곤욕이었던 모양이다. 그러던 차에 원소절 행사에서 염라대왕 역을 멋지게 해내고 현장의 눈에 띄어 채마밭 관리인이 되어 그나마 숙식을 해결하게 되었다가, 만터우 가게 과부 우샹샹의 데릴사위가 되어 안정을 찾는가 싶었지만 오쟁이진 남정네 신세로 전락하게 된다. 아, 만터우 가게 데릴사위가 되면서 우모세로 개명해 또다른 정체성을 얻기도 한다. 그 와중에 자신을 곤경에 처하게 만든 이들을 찾아 백정 시절에 갈고 닦은 실력을 보여주는 중국판 액션 활극의 주인공이 되기도 한다. 집에 가고 싶어도 체면 때문에 다시는 옌진으로 돌아갈 수도 없는 그야말로 막다른 골목에 몰린 양바이순은 예전에 자신의 사부였던 라오왕을 찾아 서부로 길을 나서는 것으로 소설은 대단원을 막을 내린다.

 

<말 한 마디 때문에>에는 정말 수많은 인물들이 부침을 거듭하는데, 특히 류전윈 작가는 양바이순이라는 젊은이의 파란만장하고 기구한 삶을 쥐락펴락하면서 우리네 인생사가 기본적으로 새옹지마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모든 일들이 다 좋을 수만도, 그렇다고 나쁠 수도 없다고 류전윈 작가는 말하고 싶었던 걸까. 이 책 다음으로 내가 읽고 있는 <고향 하늘 아래 노란 꽃> 같은 중국 현대사를 관통하는 거대 서사 대신 지극히 개인적인 서사를 통해 우리와는 다른 중국 사람들의 이야기를 시원한 사이다처럼 뽑아내고 있다. 다름 속의 같음이 있었다고 했던가. 대륙이건 반도건 사람사는 이야기는 다 마찬가지가 아니던가.

 

어려서 함상하는 이를 동경하던 청년은 돼지 백정을 필두로 해서 다양한 직업군을 전전하면서 세상을 배운다. 주변의 친구들이라 믿었던 이들에게 배신을 당하기도 하고, 안정을 찾기 위해 혼인했던 배우자의 불륜에 머릿속에 폭탄이 그야말로 ‘쾅’하고 폭발하기도 하고, 수양딸마저 잃어버린 젊디젊은 싸나이의 좌충우돌 성장기는 그야말로 애틋하다. 하지만 소설을 읽다 보면 그놈의 말 한 마디 때문에 사람들의 삶이 얼마나 고달파지는지 우리는 정확하게 알 수가 있다. 그리고 세파에 흘러가는 대로 살던 청년 양바이순이 뚜렷한 자기주장이 생기고, 어엿한 어른으로 성장하는 것을 목격한다.

 

중국 허난성 옌진이라는 특정한 공간에 이렇게 다양한 이야기들이 숨어 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소설의 후반으로 갈수록 양바이순이라는 캐릭터에 흠뻑 빠져 들어서 가독성이 한층 상승하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마지막으로 선교사 라오잔이 돼지 백정 라오쩡에게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고 있는지 그리고 자신이 누군인지 아느냐는 철학적이고 사변적 질문에 주저하지 않고 명쾌하게 대답하는 장면은 정말 소설의 압권이었다. 언제나 그렇듯 진리는 가까이에 있는 법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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