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밝혀졌다
조너선 사프란 포어 지음, 송은주 엮음 / 민음사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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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세의 나이로 빛나는 데뷔작을 탄생시켰다는 조너선 사프란 포어의 <모든 것이 밝혀졌다>의 대강의 스토리를 접하는 순간, 아주 오래 전에 본 영화 <뮤직 박스>가 떠올랐다. 미국의 잘나가는 변호사로 일하고 있는 여성 변호사 제시카 랭이, 나치 전범으로 기소된 아버지의 변호에 나서게 되는 이야기다. 조금도 자신의 아버지가 나치 전범일거라는 생각하지 않는 제시카 랭은 결국 아버지의 무죄를 입증하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결말에서 그녀가 <뮤직 박스>에서 발견한 사진들은 과거의 ‘진실’들을 말해 주고 있었다.

<모든 것이 밝혀졌다>는 특이한 구성으로 되어 있다. 우선 우크라이나의 유대 공동체인 트라킴브로드(혹은 소피오카)라는 작은 슈테틀에서 살다가 나치의 박해를 피해, 자유의 땅 미국으로 이주한 할아버지의 은인인 오거스틴을 찾아 나서는 조너선이 있다(작가의 페르소나이다). 그리고 그의 돕는 조력자로 우크라이나의 한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는 알렉산더 페르초프(알렉스, 하지만 그의 아버지 알렉산더는 언제나 ‘샤프카’라고 부른다)가 있다.

가장 먼저 알렉스가 말하는 조너선과 함께 하는 선대의 은인을 찾아 나선 대장정에 대한 이야기가 있고, 그 다음으로 알렉스의 조너선에 대한 편지글이 있다. 마지막으로 조너선이 쓰고 있는 자신들의 조상들의 이야기를 판타지로 다룬 소설이 있다. 이 세 가지 글들이 뒤섞이면서, 순간 혼란에 빠져 들었다.

하지만 오거스틴을 찾아 나선 알렉스 일행의 이야기가 진행이 되면서 책을 읽는 혼란이 진정되기 시작한다. 알렉스의 아버지 알렉산더는 자칭 맹인이라고 하는 자신의 아버지 알렉산더(3대가 모두 알렉산더라는 이름을 사용한다!)를 운전사로 기용을 하고, ‘공식 암캐’ 새미 데이비스 주니어 주니어까지 낀 기묘한 원정대를 출발시킨다.

이방인에게 적대적인 우크라이나인들의 면모가 곳곳에서 들어나고, 유대인이자 신세계인 미국에서 날아온 조너선은 어디에서도 환영을 받지 못하는 존재다. 게다가 그는 채식주의자로 동행인 알렉산더들에게 구박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은인을 찾는다는 야심찬 프로젝트에 그들은 기꺼이 ‘노역’을 마다하지 않는다. 물론 금전이라는 보상이 뒤따르지만 말이다.

엉터리 영어로 구사되는 알렉스의 편지들은 확실히 재밌다. “막돼 먹은 유대 놈”을 차에 싣고 다니는 거친 입의 알렉산더 할아버지의 막무가내 고함도 어느새 익숙해져 버렸다. 누군가 죽은 게 아닌가 할 정도로 고약한 방귀를 뀌어 대는 새미 데이비스 주니어 주니어도 빼놓을 수 없는 캐릭터다. 이런 포어의 유머들은 우크라이나의 촌마을에서 벌어진 우리가 잘 모르고 있는 우크라이나 버전 홀로코스트에 대비한 완충작용을 하고 있다.

1941년 6월 히틀러는 동쪽의 공산주의자 스탈린과 피할 수 없는 한 판 대결을 벌인다. 히틀러가 이끄는 국가사회주의(나치스)와 공산주의는 서로 같은 하늘 아래 함께 할 수 없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게르만 민족의 생존을 위해 슬라브 족들은 모두 2류 민족으로 노역을 담당해야 했고, 풍요한 우크라이나의 곡창지대와 코카서스의 유전은 나치스 천년제국의 영속을 보전해 주는 요소들이었다. 그렇다면 동유럽의 곳곳에 흩어져 살고 있는 유대인들은? 그들은 열등민족으로 나치스에게 전멸의 대상일 뿐이었다.

히틀러의 바로바로사 작전초기, 무자비한 총살대가 전선의 곳곳을 누비면서 유대인들을 학살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부작용이 발생하면서(병사들의 트라우마 등), 아우슈비츠와 트레블링카와 같은 대규모 가스처형실을 운영하게 된다. 한편 스탈린의 공산지배에 치를 떨던 우크라이나인들은 히틀러의 군대를 해방군으로 맞이했다. 그리고 자발적으로 유대인들을 학살하는데 앞장섰다. 그랬기 때문에 <모든 것이 밝혀졌다>에서 보면, 어느 트라킴브로드의 유대인들은 나치군대보다 이웃 우크라이나인들을 더 두려워한다.

조너선과 알렉스 일행은 바로 이렇게 역사에서 잊혀진 트라킴브로드를 찾아 나선다. 추악한 과거의 일들을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이들은 아예 트라킴브로드에 대한 기억을 소멸시켜 버린다. 대장정 중에, 비로소 모두가 원치 않는 사실을 알게 된 알렉스는 조너선에게 그가 쓰고 있는 소설을 픽션으로 바꾸라는 압력을 가한다. 이 책에서는 조너선의 단편적인 정보 때문에, 과연 그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에 대해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알렉스는 계속해서 조너선을 “주인공”이라고 부르지만 사실상의 주인공은 알렉스와 그의 할아버지 알렉산더다. 반세기가 지나도록, 자신과 가족이 살기 위해 친구들을 배신하고 죽음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던 끔찍한 상황에 대한 후회와 번민에 시달린다. 과거와 화해하고 용서받지 못한 그들에게 미래는 없다.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해 노력하고자 한다면, 우리의 과거를 잘 알고 받아들여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294쪽)라는 트라킴브로드 유대 회당에서의 선언은 이 책을 통해 작가가 말하고 싶은 모든 것의 정수처럼 내리 꽂힌다.

<모든 것이 밝혀졌다>는 2005년 리브 쉐레이버 감독의 연출로 <우크라이나에서 온 편지>라는 제목으로 영화화가 되었다. 무언가를 찾아 나서는, 로드무비를 좋아하는 그네들의 정서에 조너선 사프란 포어의 책처럼 딱 맞아 떨어지는 영화거리도 없었을 것 같다. 반세기가 지나 이제는 가해자가 된 유대인의 홀로코스트 이야기가 그들 자신에게도 공명되고 있는지 순간 궁금해졌다.

*** 역사적 사실에 있어서 한 가지 치명적인 오류가 있는데, 히틀러의 바르바로사 작전 개시일은 1941년 6월 18일 아니라 6월 22일이다. 원문에도 그렇게 되어 있는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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