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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칼의 편지
B. 파스칼 지음, 이환 옮김 / 지훈 / 2005년 7월
평점 :
품절
우리는 핍박을 당하나 찬양하나이다(고린도 전서 4:12) (본문68쪽)
가끔씩은, 동의할 수 없는 신념이나 행동양식을 가진 사람에게 매혹당하는 경우가 있다. 그 신념의 옳고 그름, 나와의 상관성을 떠나 그 인격의 신실함에, 그 행보의 온전함에 하는 수 없이 경의를 표하게 되는 그런 경험은 실로 흔치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물론 그에 대한 무조건적인 경탄과 복종은 위험하다. 그것은 자신의 신념에 대한(그런 게 있다면!) 배신일 수도 있고, 그 과정에서 정체성을 위협받는 일도 있을 수 있는 까닭이다. 그에게서 '배워야 할' 것은 그 신념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숙고하고 견지해나가는 삶의 태도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블레즈 파스칼. 흔히 수학자요 <팡세>의 저자로 알려진 교과서 속의 인물의 편지글과 소품들, 그리고 그의 누이이자 영적 삶의 동반자인 질베르트 페리에가 쓴 파스칼에 대한 기록을 읽으면서 내가 생각한 것은 대략 이러하다.
나는 신을 믿지 않는다. 아니, 보다 엄밀히 말하자면, 신의 존재여부에 대해 숙고해본 일이 없으며, 삶의 어느 순간에서도 신의 손길을 간구해본 일도, 그 '작용하심'에 대해 신경조차 써본 일도 없다고 하는 편이 옳겠다. 그러니, 과학자나 '자연인'으로서의 파스칼이 아닌, '회심한 자' 파스칼, 드높은 영성으로 신을 믿고 찬미하는 자 파스칼의 기도와도 같은 서한들과 논문들을 읽고서 당혹감과 낯선 기분을 느꼈다고 해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진정 궁금해한 것이, 과연 신이 존재하며 신의 섭리가 세상을 움직이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한 인간이 영성을 얻고 또 그것을 유지하기를 어떻게 이토록 간절히 기원할 수 있는가, 또 그 실천적 삶이란 과연 어떠했는가 하는 것이었다 해도 불경이라 나무라는 이 없었으면 좋겠다. 비록 파스칼의 가시허리띠의 고행을 보며 <다빈치 코드>의 오푸스데이를 떠올리고, 데자뷰같은 초자연적인 감각에 대해선 영적 세계보다는 미하엘 엔데 류의 '현실과 병행하는 또다른 층위의 현실계' 따위나, 시게마츠 키요시가 보낸 오딧세이 왜건을 타고 떠나는 과거로의 여행을 생각한다 해도, 파스칼의 생애와 그 신실한 열정에 대한 존경심이 희석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파스칼은 평생 알지못할 질병으로 고통받았는데, 그것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실로 남다르다. 그에 못지않게 신실했던 누이마저 당혹과 감탄 속으로 빠뜨렸던 그의 마음가짐이 잘 나타나 있는 소고가 바로 "병의 선용을 위한 기도"이다. 나 개인적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도, 사실은 동의할 수도 없는 경지이긴 하지만.
그의 기도를 들어보자면:
당신을 찬양합니다, 내 하나님이여. 나를 쇠약하게 하시어 나와 관련된 일체의 것을 파괴하심으로써 나의 유익을 위해 그 무서운 최후의 날을 미리 알려주신 것을 이 생명 다하도록 당신께 감사드립니다.
또 나로 하여금 건강의 즐거움과 세상의 쾌락을 즐길 수 없게 해주신 것을, 그리고 당신의 그 노여움의 날에 악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당신께서 실제로 없애버리실 그 거짓된 우상들을 내 이익을 위해 이렇게 없애버리신 것을 나는 평생토록 당신께 찬양드립니다.
주님. 나에 관하여 당신께서 이루신 이 파괴로써 내가 나 스스로를 심판하게 하시되, 최후의 날에 내 삶과 이 세상 전부를 파괴하심으로써 당신 스스로 나를 심판하지 않게 하소서.
주여. 내가 생을 마칠 때 내 온마음으로 당신의 심판에 응하기 위해 모든 것을 벗어던지고 이 세상에서 떨어져나와 오직 당신의 면전에만 나타날 것이온데, 지금 이 병 가운데서 나 스스로를 마치 죽음 안에 있는 것처럼 생각하여, 내 집착의 모든 대상들을 내던지고 이 세상에서 떨어져나와 당신의 면전에 홀로 남아서 내 마음의 회심을 당신의 자비심에 간구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당신이 심판을 행하시기 위해 내게 실제로 죽음을 보내시기 전에 이제 당신의 자비를 행하시기 위해 죽음과 유사한 것을 보내주신 것에 지극한 위로를 얻게 하소서.(284쪽)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파스칼의 편지에서도 알 수 있듯, '자연'인 인간의 육체의 소멸을 슬퍼하고 두려워하는 것은 그에게 경계해야할 일이었다. 자연적인 쾌락과 즐거움은 우상 숭배로 연결될 수 있는 것이기도 했으므로. 오히려 죽음은 신에 대한 헌신과 성화聖化라는 예비단계를 완성하는 과정이며 제물을 불태워 그 연기를 하늘로 피워올리는, 소멸을 통한 경배의 의식으로 간주된다. 그를 통해 인간은 자연과 오성의 세계를 떠나 하느님의 오른편에 앉는 참되고 영적인 삶의 단계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죽음과 육체적 고통에 대한 인식이 이러하니, 파스칼에게서 자신의 짧고도 고통에 찬 생애에 대한 회한을 찾아보기는 실로 어렵다.
천재 과학자로서의 명성에 값할 오만한 면모는 '회심'전의 편지 몇통에서만 어렴풋이 드러날 뿐이다(1645년 세기에 대법관에게, 그리고 1652년 스웨덴의 크리스티나 여왕에게 자신의 발명품인 계산기를 각각 헌정하면서 쓴 편지들). 가장 '이성적'이어야할 과학논집에서조차도 그는, 명철한 기하학적 논증의 유용함을 논하면서도 그것을 증명할 수도, 증명할 필요조차 없는 신적神的진리와 구분하고 그 하위에 위치시킴으로써 철학과 신학의 영역으로 나아간다. 인간이 자신의 이성에 대해 오만한 태도를 취하고 신이 아닌 자연을 우상화함을 경계하는 것은 오늘날에도 만연해있는 과학지상주의에도 해당될 수 있겠다.
그 연장선상에서 파스칼이 혐오해마지 않는 것은, 인간의 이성에 대한 연속적인 회의, 즉 이성에 의한 이성의 논박이라는 회의론적 사슬(몽테뉴를 가리킴)과, 신의 섭리와 의무를 완수할 내적 능력을 지닌 인간에 대한 지나친 자만심(에픽테토스를 가리킴)이다. 그에 따르면, 인간의 정신(이성)은 자유로울 수 있으나 의지는 신의 영역에 속하므로, 정신끼리의 싸움은 결국 이교도적인 회의론에 지나지 않으며(몽테뉴), 정신과 의지를 둘다 자유로 간주하는 것은 인간의 무능력에 대한 무지와 오만으로 결국 구원에 이르는 길에 놓인 방해물이 되는 것(에픽테토스)이다(211~246쪽. "드 사시씨와의 대화" 참조).
<팡세>를 읽지 않고, 또 그의 '호교론'이라는 것에 대해 알지도 못하면서 파스칼을 논하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겠다. 또 한편으론 그를 통해 몽테뉴를 알고 에픽테토스라는 철학자를 들먹이는 것은 억지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이것은 씌어진 역사를 읽을 때의 위험성과도 관련이 있다. 한 인간의 삶에 한정시키자면 평전을 읽는 일의 함정이라고나 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스칼의 편지>, 그 영성의 기록을 읽는 것은 무척이나 의미있는 일이라 생각한다. 교과서나 철학사의 인물의 육성을 실제로 접하고 공부한다는 의의 외에도, 글머리에서도 말했듯, 짧은 생이나마 신실하고 온전하게 살았던 한 인간을 알 수 있었다는 점에서 말이다. 그가 그토록 열렬히 간구한 신의 질서를 믿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리고 그의 기록들이 다소 지루했음을 고백하더라도, 파스칼은 충분히 존경받을만한 인물이라 감히 말하겠다.
그러니, 수학학원의 간판에서만 그 이름을 들먹이는 인간들, 반성하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