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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모습
미셸 투르니에 지음, 에두아르 부바 사진, 김화영 옮김 / 현대문학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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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얼굴로 표정을 짓고 손짓을 하고 몸짓과 발걸음으로 자신을 표현한다. 모든 것이 다 정면에 나타나 있다. 그렇다면 그 이면은? 뒤쪽은? 등 뒤는? 등은 거짓말을 할 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들의 뒷모습에서 가식과 허세가 제거된 고독하고 낯선 존재의 이면을 만나게 된다.

프랑스의 저명한 노작가 미셸 투르니에가 짧은 단상을 단 이 사진집은 역시 세계적인 사진가로 이름높은 에두아르 부바의 흑백사진 53컷을 담고 있다.
그리고 모든 사진속의 인물들은 모두 정면에서 비껴나 뒷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런 다시 말해 사진을 들여다보는 우리의 시선과 같은 방향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기도 하다. 아무것도 직설적으로 말해주지 않는 그 장면을 지긋이 바라보고 있노라면 이런저런 생각이 머리와 가슴 속에서 침잠을 거듭한다.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은 순간’을 예술로 승화시켰다는 평을 받는 사진작가 부바는 아무것도 꾸며지지 않아서 그래서 그대로 진실할 수밖에 없는 존재의 실체를 일상적인 주변 풍경속에 몸담은 각양각색 인물들의 뒷모습에서 포착해냈다.

그리고 부바가 포착한 이 사각 프레임속의 정경을 보며 투르니에는 담담하고 나직하게 자신의 감상을 끄집어낸다.
이를 테면, 바지와 치맛단을 걷어올리고 밀려오는 파도에 발을 담그고 선 남녀의 뒷모습에서 투르니에가 보는 것은 가난한 연인의 모습이다.
‘수영복의 표면적은 그걸 가진 사람의 재산에 반비례하는 법. 때문에 아주 큰 부자들은 아예 벌거벗고 헤엄친다.’
그러나 이 가난한 연인이 느끼는 즐거움과 정다움은 이 한 때를 영원히 잊지 못할 순간으로 만든다는 것도 그는 안다.

문득 알 수 없는 그리움에 사로잡혀 마음이 방황할 때마다 슬쩍 꺼내 넘기며 마음을 어루만지고 싶어지는 따뜻하고 애닯은 사진 에세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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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cina 2005-11-04 2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만 맘이 뭉클해지네요.
저도 책창고에 보관하러 가져갑니다~
 
미하엘 쾰마이어의 그리스 로마 신화
미하엘 쾰마이어 지음, 김시형 옮김, 이경덕 감수 / 북스캔(대교북스캔)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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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그리스 로마 신화를 다룬 책들은 수도 없이 많다. 그 중에서도 ‘미하엘 쾰마이어의 그리스 로마 신화’는 사뭇 튄다.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읽어본 적이 없는 사람보다는 한번쯤 읽어본 사람에게 더욱 흥미롭게 읽힐 이 책은 독일의 저명한 신화작가 미하엘 쾰마이어에 의해 각색(?)된 그리스 로마 신화이다.

저자는 ‘그리스 신화는 이야기하는 사람이 누가 됐든 이야기될 때마다 그의 영혼에 들어와 새로이 창조되며, 그때에야 비로소 그 사람의 소유가 된다’고 말하며 자신의 소화방식대로 그리스 로마 신화를 재해석하여 들려준다. 원작에 없던 얘기를 뜬금없이 덧붙였다기보다 전해지는 텍스트를 바라보는 시각을 바꾸고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던 신들을 부각시키고 맥락이 약하거나 반복되는 부분은 과감하게 건너뛰는 방식으로 말이다.

거기다 군데군데 저자의 견해와 신화해석이 솜씨있게 덧붙여져 있어 읽는 재미가 더욱 각별하다. ‘토마스 불핀치의 그리스 로마 신화’를 탐독해 본 사람이라면 미하엘 쾰마이어가 구연해주는 이 책에서도 색다른 매력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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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cm 예술
김점선 지음, 그림 / 마음산책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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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책 뒤편에 쓰인 서평에서 소설가 박완서는 화가 김점선을 가리켜 이렇게 말한다. ‘아무도 그 여자를 길들이지 못한다’고. 오십견으로 붓을 들지 못하게 된 50대의 노화가 김점선은 이제 아들이 가르쳐준 컴퓨터로 그림을 그린다.
화가를 예술가가 아니라 그림을 그리는 육체 노동자로 여기는 그녀는 언어 대신 시각만으로 사고하는 것에 대해 고민하며 그림을 그리면서도 끊임없이 더 많이 그리고 싶어할 만큼 만족할 줄 모른다. 또 자신의 그림을 놓고 ‘말같은 것으로 표현하겠다고 덤비지 말라’고 엄포를 놓기도 한다. 이 책은 용감무쌍하고 한없이 자유롭게 일생을 살아온 김점선이 요즘 컴퓨터로 그리기 시작한 10cm짜리 작은 그림들에 자전적 얘기를 풀어낸 에세이집이다.
친구는 무조건 신뢰하여 친구가 유부남 애인의 부인을 죽이러 가자고 해도 따라나서고 진정한 예술가가 되려면 가난한 사람과 결혼하라는 은사의 말을 듣고 한달만에 가난뱅이와 결혼하기도 했던 이 거침없는 여인이 짧게 끊어 말하는 얘기에는 도발적인 힘과 치열한 삶의 흔적이 담겨있다. 어느 장을 넘기더라도 순간순간 김점선이라는 사람의 카리스마가 흘러나온다.
주변 사람들로부터 더러 ‘미친’ 사람 취급을 받았을 정도로 자신의 내면에 충실하게 살아온 이 화가의 삶이 극단적이라고 느껴질 지라도 그가 던지는 질문에 자신있게 답할 수 있는 사람은 과연 몇 명이나 될까.
작가는 이 얄팍하고 짧은 에세이집 전체에 걸쳐 힘차고 굵직한 목소리로 이렇게 묻고 있는 것만 같다. “당신은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가, 그것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온전히 쏟아붓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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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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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많은 문학들이, 영화들이 우리가 믿는 인간성이라는 것이 얼마나 얄팍한 것인지, 얼마나 쉽게 껍데기를 벗고 추악한 본성을 드러낼 수 있는지 고발한다. 
예전에 보았던 '28일 후에'라는 영화에서도 진짜 무섭고 경멸스러운 존재는 좀비처럼 변한 병자들이 아니라 자신의 욕정을 해소하고 종족을 번식시키겠다는 기만적인 논리로 여자들을 겁탈하고 이를 막으려는 동료 등 다른 사람들을 살해하는 군인들이었다.


포르투갈 출신의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자들의 도시'는 그 상상력의 독창성이 놀랍고 인간성 상실의 과정을 매우 치밀하게, 그리고 너무나 설득력있게 묘사하여 누구나 수긍하게 만드는 보편성을 지닌다. 장정본으로 꽤 두꺼운 분량이지만  날밤을 새며 먹어치우듯  읽어 제낄 수 있을 만한 작품이 아닐 수 없다.


소설은 어느날 횡단보도에 차를 정차시키고 있던 한 운전자가 갑자기 눈이 멀면서 시작된다. 정체불명의 '실명' 바이러스가 도시를 휩쓸고 사람들은 공포에 질려 실명인들을 격리 수용한다. 하지만 수용소를 지키던 군인들도 하나둘 실명하고 도시는 완전히 백색의 어둠속에 빠져든다.


결국 눈이 보이는 사람들이 세운 문명은 완전히 통제불능 상태에 빠진다. 전기도 없고 수돗물도 없고 거리는 사람들의 오물로 넘치고 온통 더듬더듬 먹을 것을 찾아 헤매는 벌거벗은 사람들, 먹을 것을 하나라도 더 쟁취하기 위한 전장으로 변한 도시… 이 도시에 과연 희망은 있는 것일까?


특이하게도 이 소설에서는 단 한사람도 고유명사를 부여받지 않는다. 사람들은 오직 색안경을 쓴 여인, 의사, 의사의 아내, 최초로 실명한 남자, 군인, 깡패 등 간접적인 방식으로 지칭된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적당한 거리두기를 하면서 관찰자의 입장을 견지하도록 만드는 요소이기도 하면서, 눈뜨고 있으나 보지 못하는 눈 먼 자들이 지배하는 이 세계 일반에 대한 거대한 은유로 이 소설을 읽히게끔 만드는 장치로 작용한다.


수용소에 감금된 상태에서도 식량과 귀금속과 여성의 성을 힘으로 약탈하고 살인마저 저지르는 일단의 무리, 실명자들을 재빠르게 격리 수용하는 정치인들과 수용소를 감시하는 군인들, 눈이 보이지 않음으로써 순식간에 무질서의 혼돈에 빠져버리는 세상을 보며 우리가 세운 문명의 허망함과 정치권력의 야만성과 인간소외를 생생히 목격하게 된다.


마지막에 제시하는 작가의 낙관적인 희망이 가슴을 쓸어내리는 안도감을 주는 것은 눈 먼 자들의 도시가 너무나 끔찍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연 우리는 눈 뜨고 있는 게 맞는가?
소설의 대미는 작가의 희망이자 경고일 것이다.
- 왜 우리가 눈이 멀게 된 거죠. 모르겠어. 언젠가는 알게 되겠지.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싶어요. 응, 알고 싶어. 나는 우리가 눈이 멀었다가 다시 보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나는 우리가 처음부터 눈이 멀었고, 지금도 눈이 멀었다고 생각해요. 눈은 멀었지만 본다는 건가. 볼 수는 있지만 보지 않는 눈먼 사람들이라는 거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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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빈치 코드 1
댄 브라운 지음, 양선아 옮김, 이창식 번역 감수 / 북스캔(대교북스캔)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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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은폐된 여인 막달라 마리아와 진실의 수호자 레오나르도 다빈치
그 비밀의 문을 여는 암호 「다빈치 코드」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인류의 미술사에 가장 거대한 족적을 남긴 예술가 중 한사람이다. 혹 그의 이름은 모를지라도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그의 걸작 「모나리자」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현대에 이르러 이「모나리자」와 다빈치의 자화상을 컴퓨터로 합성해 보았더니 놀라울만치 흡사한 얼굴 구조임이 밝혀졌다. 이 때문에 혹자는 「모나리자」가 다빈치의 여성형(자화상)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밖에도 「모나리자」를 둘러싸고 왈가왈부되는 얘기들은 수없이 많다. 눈썹이 없는 이유, 신비로운 미소의 의미, 인물의 등뒤로 펼쳐진 배경에 대한 해석, 여인의 신분 등등.
불어로 붓꽃은 ‘fleur-de-lis'라고 쓴다. 영어로 풀이하자면 ’리자의 꽃(flower of Lisa)'. 바로 모나리자이며 붓꽃은 기독교 역사상 가장 비밀스러운 단체 중 하나인 시온 수도회의 상징이기도 하다. 한가지 더 덧붙이자면 이집트의 여신 이시스는 한때 ‘리자’라고 불리기도 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명화 모나리자와 시온 수도회, 거기다 이집트의 여신이라…뭔가 무한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데 중요한 실마리가 될 것 같지 않은가.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남긴 또 하나의 걸작 「최후의 만찬」은 '너희 중의 하나가 나를 팔리라'라고 말하는 예수의 폭탄선언에 우왕좌왕하며 배신자가 누구인지 밝혀내려는 12사도의 모습이 치밀한 구도와 다양한 동작으로 묘사된 드라마틱한 명화이다. 이 그림에서 예수의 오른쪽에 앉아있는 사람은 사도 요한이고 그 바로 옆에 있는 인물은 베드로라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놀라고 당황하고 있는 다른 사도들에 비해 그 자태가 매우 고요할 뿐만 아니라 유난히 여성스럽고 아름답게 묘사돼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요한의 어깨를 짚고 일어나려는 베드로의 손은 어쩐지 칼날처럼 날카롭게 요한의 목을 향해 세워져 있어 위협적으로 보인다.
이런 가정은 어떨까. 만약 사도 요한이라고 알고 있던 이 사람이 실은 막달라 마리아라면?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의 13사도 중 하나이자 수제자였다면? 실은 왕족의 후예로 고귀한 신분의 여성이었던 막달라 마리아가 인간의 아들 예수와 결혼한 그의 부인이자 예수가 자신의 사후 교회의 반석으로 삼고자 했던 핵심 인물이라면?
세상의 호사가뿐만 아니라 학문적으로 기독교를 연구해온 사람들 중에도 신의 아들 예수의 신성이 땅에 떨어지고 여성의 손에 교회의 권한이 옮아가는 것을 두려워한 로마 카톨릭이 예수의 가계(家系)를 은폐하고 막달라 마리아의 위상을 계획적으로 실추시켜온 것이라고 믿는 이들이 있다. 또 고귀한 예수의 혈통을 수천년간 비밀리에 지키면서 막달라 마리아에 얽힌 비의를 수호하며 오늘날까지 그 전통을 이어오고 있는 단체가 역사적으로 실재하는 시온 수도회가 아닐까 추정하기도 한다. 보티첼리, 아이작 뉴턴, 빅토르 위고, 장 콕토 등을 비롯해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이 단체의 수장이었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수많은 예술작품들 속에 마치 암호처럼 흩어져 있는 신비롭고 모호한 상징들이 바로 교회의 박해를 피해 은밀히 전해 내려온 막달라 마리아와 성배의 비밀을 표시하고 있는 게 아닐까 주목하고 있다.
허무맹랑한 이야기 같을지 모르지만 막달라 마리아와 예수의 가계에 대한 얘기는 아주 오래 전부터 허구와 상상, 진실의 경계를 오가며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려왔다. 성배가 구체적 물체가 아니라 무한한 지식의 상징이거나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의 피를 담은 잔이 아니라 예수의 핏줄, 즉 그 후손을 가리킨다고 믿는 사람들도 많다. 5~8세기 경 프랑스(프랑크 왕국)의 메로빙거 왕조가 예수의 직계라는 설도 있다. 기독교적 상징으로 가득찬 영화 「매트릭스」에서 매트릭스내 최고 권력자로 등장하는 메로빙지언(Merovingian ; 메로빙거가의 사람)이란 인물도 이 같은 속설에 대한 반영이었을 것이다.
물론 이런 주장들은 현존하는 카톨릭과 기독교의 권위 아래서 어리석은 이단이거나 한낱 허황된 망상으로 치부되고 있기는 하지만 무엇이 진실이건 간에 사람들의 상상력을 한껏 북돋워주는 흥미로운 가설임에는 분명하다. 이런 흥미로움에 제대로 불을 붙이는 치밀하고 논리적인 소설 한편이 등장했다.
영화「패션 오브 크리이스트(Passion of Christ)」가 개봉하기도 전에 일부 기독교와 유대교인들이 불같이 들고 일어나 예수와 유대인들에 대한 모독이라며 영화 상영 금지를 주장하는 등 한동안 기독교계가 떠들썩했었다. 하지만 엄청난 논란에도 불구하고-혹은 그 논란의 여파로-이 영화는 전세계 수천만명의 사람들을 극장으로 끌어모으며 흥행돌풍을 일으켰다. 영화에 이어 최근에는 한 권의 책이 또다시 기독교 안팎에서 관심의 대상으로 떠오르고 있다.
논란의 진원지는 댄 브라운(Dan Brown)이 쓴 소설 「다빈치 코드(The Da Vinci Code)」. 작년 초 미국에서 출간된 이래 8백만부 이상 팔리며 순식간에 베스트셀러 대열에 들어섰고 전세계 40여개국에서 번역 출판되었으며 올 여름 한국에도 상륙해 외국소설로는 드물게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를 조짐을 보이고 있다.
재미있는 건 이 책이 발간된 지 일년 만에 이 책의 내용을 비판하거나 오류를 지적하는 서적 십여권이 출판됐거나 발간을 앞두고 있다는 사실이다. 타임(Time)이나 뉴스위크(Newsweek), ABC TV 등 미국 유수의 언론사들이 이 책에 대한 커버스토리나 특집프로를 다루기도 했다.
「다빈치 코드」에 이렇게 큰 관심이 쏠리는 것은 이 책이 2천년에 걸쳐 항간에 떠돌며 전해내려온 기독교의 야사(?)와 보수적 신자 및 교황청에 대한 음모론을 다루고 있고 이 책을 읽은 독자들 중에 책의 내용 일부를 사실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다빈치 코드」의 내용은 그럴 듯 하다. 책을 한장한장 넘기다보면 수많은 자료 조사와 역사적 고증 및 현장답사를 거쳤을 것이 분명한 작가의 노력이 고스란히 눈에 보인다.
「다빈치 코드」는 「장미의 이름」과 흡사한 구조를 띠고 있다. 「장미의 이름」은 중세 수도원에서 발생한 수도사 살인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숨겨졌던 종교적 비의와 음모가 서서히 드러나는 일종의 추리 소설이다. 「다빈치 코드」 또한 루브르 박물관에서 기괴하게 살해당한 박물관장의 죽음을 서막으로 수천년간 보수적인 카톨릭 교단의 눈을 피해 명맥을 유지하며 예술작품을 통해 카톨릭의 비이성적 마녀재판, 이교도 공격, 막달라 마리아 이래 지속돼 온 여성에 대한 불평등 등을 비판해온 비밀단체와 그들이 죽음으로 수호한 예수의 진실이 무엇인지 파헤쳐나가는 지적인 추리 소설이다. 성당기사단이나 장미 십자회, 시온 수도회, 오푸스 데이 등 기독교 관련 단체에 얽힌 갖가지 음모론을 비롯해 피보나치 수열, PHI 숫자, 아나그램, 타로카드의 그림, 서양 중세 예술사 등 서구사회를 관통하는 몇가지 과학적, 문화적 배경을 조금이라도 접해본 사람은 이 책의 내용에 더욱 쉽게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설사 그런 배경지식이 전혀 없더라도 「다빈치 코드」는 매우 흥미진진하고 긴박감 넘치게 읽힌다.
특히 그 자체가 하나의 예술품인 루브르 박물관에 대한 묘사나 예술 작품들에 대한 독특한 해석, 우리가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명화들에 숨겨진 기묘한 상징들에 대한 설명은 지루할 틈도 없이 독자들을 책으로 빨아들인다. 주인공이 자동차 추격전을 벌이는 파리의 거리와 뒷골목들에 대한 묘사도 현장감이 넘친다.
한편의 영화를 보듯 액션과 논리적 추리를 오가며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소설이다. 앞서 책의 내용을 너무 많이 언급한 감이 없지 않지만 그것은 수많은 조각의 하나일 뿐, 진짜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소설의 마지막 장을 덮고 나면 문득 파리로 달려가고 싶어질 지도 모른다. 혹 루브르 박물관을 다녀온 사람이라면 머리속을 뒤적이며 루브르 박물관에서 눈에 담았던 모든 것들에 얼마나 큰 상징이 담겨있었는지 놀라며 기억을 되새기려 애쓸 지도 모른다.
물론 「다빈치 코드」는 픽션이다. 그러나 고대부터 지금까지 이룩해온 인류의 문명과 소실된 역사의 진실, 심지어 과학의 세계까지도 애초에 인간의 상상력에 기대어 왔음을 누가 부인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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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3-12 21: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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